존엄하고 초라한 - 존재를 배제하는 공간에 대하여
강미현 지음 / 흠영 / 202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건축사로 일해 온 저자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 이곳이 좀 더 친절한 곳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쓴 책이다. 단지 법적인 기준을 맞추는 것으로는 충분히 않다. 얕은 문턱 하나도 휠체어를 탄 장애인에게는 장벽처럼 느껴질 수 있고, 법적 기준을 맞춘 반지하방에서 사람들은 곰팡이와 싸우며 건강을 희생해야 한다.


얼마 전 한 유명한 장애인 유튜버가 KTX에서 내리는 과정에서 이를 도와주던 공익근무요원과 부딪힌 후, 이를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올렸다가 역풍을 맞는 사건이 있었다. 물론 해당 사건에서 그 유튜버는 자신의 분을 못 이겨 과한 대응을 한 것 같다. 하지만 그가 말하려고 했던 것, 그러니까 아주 작은 턱(심지어 그냥 사람의 발이라도)도 어떤 사람에게는 심각한 부상을 입힐 수 있는 위험한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사실 조차 “그저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사실 고통이라는 건 나누어지지 않는다. 심정적인 위로는 할 수 있을지언정,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정확히 우리의 것으로 경험할 수가 없다. 아니, 그에 앞서서 우리의 고통을 정확하게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 얼마 전에 뭘 잘못 먹고 식도 쪽에 통증이 생겨서 약국에 간 경험이 있는데, 내가 느끼고 있는 그 통증을 설명할 말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쓰라림도 아니고, 찌르는 것도 아니고, 쎄한 느낌이라는 설명은, 내가 들어도 두루뭉술하기 그지없었다.


고통이라는 게 그런 식이다. 당사자가 아니면 얼마나 큰 고통을 견디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물론 우리는 나 자신 이외의 누군가가 될 수 없다. 때문에 타인의 고통을 알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일부러 시간을 들이고, 관심을 갖고 지켜보지 않으면, 근본적인 해결은 멀어진다.


저자가 이 책에서 지적하는 수많은 문제들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좁은 고시원에 몸을 구겨 넣고 살 수밖에 없는 청년들, 반지하의 열악한 상황을 견디는 이들, “시설” 속 장애인들, 힘든 노동 사이의 짧은 휴식을 위해 화장실로 들어가야 하는 청소 노동자들, 비닐하우스를 숙소로 제공받는 외국인 노동자들 등등. 누군가 애써 알려주지 않으면 일상 가운데서 좀처럼 마주칠 수 없는 이들의 이야기다.





책에 담긴 글들은 모두 어떤 공간과 건축물이라는 주제와 연관되어 있는데, 저자의 이력을 생각하면 확실히 자신이 하는 일을 (단지 밥벌이로만이 아니라) 좀 더 진지하게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다만 바로 그 공간과 건축물, 좀 더 쉬운 말로 부동산과 관련된 문제이기에 해결 또한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씁쓸한 예감이 들기도 한다. 전 국민이 부동산 투기에 목을 매고 있는 나라에서, 과연 효율을 포기하고 더불어 사는 삶을 선택할 수 있을까.


2025년을 기준으로 대한민국 가구의 자산의 3/4가 부동산에 묶여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는 것은 그야말로 전 국민적 공포일 것이다. 어떻게든 거품을 일으켜서 자산을 증식하려고 눈이 벌게져 있는 사람들에게, 장애인 그룹홈이 (대출을 잔뜩 받아 산) 자기 집 근처에 들어오는 일 조차 피켓을 들고 반대하러 나서기에 충분한 일이다.


사실 가장 약한 사람이 살기에 편한 곳은, 모든 사람에게 편한 곳이 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추가적인 비용이 들 수는 있겠지만, 누군가가 겪는 불편함에 귀를 기울이는 사회에서 사는 것만큼 안심되는 일이 또 있을까. 각자도생만큼 비효율적인 삶의 방식도 없다. 우리는 당장 손에 쥔 것을 놓고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예수의 발자취를 따라서 ㅣ CHRISTIAN FOUNDATION 3
피터 워커 지음, 박세혁 옮김 / 도서출판CUP(씨유피)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같은 저자의 또 다른 책 『바울의 발자취를 따라서』를 굉장히 즐겁게 읽었기에, 그보다 먼저 나온 이 책 역시 기대감을 잔뜩 가지고 펼쳐들었다. 비슷한 부분도 있지만, 또 생각했던 것과는 다른 느낌도 있다. 그래서 살짝 아쉽기도 했는데, 이건 책 자체의 문제라기보다는, 연대기적으로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싶었던(그래서 영상으로 만들려고 했던) 내 기대감에 기인한다.


바울의 발자취와 예수의 발자취의 가장 큰 차이는, 역시 이동한 지역의 범위다. 바울이 지중해 동부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면, 예수님의 경우는 팔레스타인이라는 좁은 지역에서만 활동을 하셨다. 그나마 몇몇 지역은 매우 근접해서(예를 들면 예루살렘과 뱃바게, 베다니, 감람산) 스케일이 큰 이야기를 풀어내기에는 조금 아쉽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이 모든 아쉬움은 이 책을 가지고 영상을 만들어 보려는 내 기대 때문이고, 책 자체의 문제는 아니다. 책은 흥미진진하게 예수님의 공생애 기간, 그분이 방문하셨던 지역을 (대체로 연대순으로) 따라가며 성경 본문의 언급들, 그리고 역사적인 해석과 보충들, 주로 고대의(근대의 기록도 있다) 관련 기록들과, 오늘날의 모습, 나아가 만약 그 지역을 직접 방문한다면 어떤 순서로, 어떤 점에 집중하면서 여행을 하면 좋을 지까지 풀어 놓는다.


말 그대로 이것 한 권이면 끝이다 싶은 정도랄까. 물론 현장에서 직접 사람의 안내를 받는 것보다 더 좋을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 멀리 떨어진 우리가 현지의 상황과 동선을 그려보는 데는 이 책만 한 걸 보지 못한 것 같다. 참고로 비슷한 내용으로 좀 더 신학적 묵상이 짙게 실린 책을 찾는다면 톰 라이트가 쓴, 전에는 『내 주님 걸으신 그 길』이라고 나왔다가 최근에 『톰 라이트의 그리스도의 길』이라는 멋없는 제목으로 다시 나온 책을 보면 (제목과 달리) 좋다.





이 가을, 성경 속 팔레스타인 땅 곳곳을 책으로라도 간접 순례를 해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싶다. 딱 한 가지 본문에 아쉬운 점이 있다면, 더 많은 지도와(특히 팔레스타인 전체 지역 중 지금 다루는 지역이 어디인지를 표시해 두는 게 필요하다) 더 많은 이미지들이다. 물론 20년 전에 나온 책인지라 이 부분에서 제한적일 수밖에 없을 텐데, 지금이라면 AI를 이용해서 좀 더 실감나는 이미지들을 더 넣을 수 있지 않았을까. 뭐 번역을 해서 낸 CUP출판사 쪽에서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겠지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 우리가 놓치는 민주주의 위기 신호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다 읽고 리뷰를 쓰려고 보니, 두 공저자는 좀 더 최근작인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에서 만났던 이들이다. 책에서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고 있는 미국의 현실의 원인을 “헌법”에서 찾았던 저자들이었다.


그 전작에 해당하는 이 책에서는 제목처럼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현재 상황을 묘사하면서 그 원인을 정당에서 찾는다. 조금은 흥미로운 지적. 우리말 제목의 “무너짐”은 영어 원제(How Democracies Die)로 들어가면 좀 더 강한 어감이다. Collapse가 아니라 Die다. 그만큼 현 상황을 위기로 보고 있다는 의미일까.





책 초반 역사 속 다양한 민주주의 붕괴 사례들을 살펴보면서 그 가운데 흥미로운 공통점을 발견한다. 과거 민주주의는 파시즘이나 공산주의, 군부의 독재 같은 노골적인 방식으로 무너졌지만, 냉전이 끝난 후의 양상은 좀 달라졌다. 저자들은 “냉전이 끝나고 민주주의의 붕괴는 대부분 군인이 아니라 선출된 지도자의 손에서 이뤄졌다”고 말한다. 즉 오늘날 민주주의는 “투표장”에서 무너지고 있다는 것.


저자들에 따르면 이런 경우 쿠데타나 게엄령 선포, 혹은 헌정 질서의 중단과 같은 “경계를 넘어서는” 명백한 순간이 없기 때문에 사회의 비상벨이 울리지 않는다. 화재가 일어났는데 경보기가 울리지 않는다면 오히려 더 위험하다. 독재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과장이나 거짓말을 한다는 오해를 받는데, 예컨대 지난 윤석렬의 친위쿠테타 시도 이전에 여러 야당 의원들이 계엄과 관련된 의혹을 제기했을 때, 여당은 물론 언론으로부터도 뭇매를 맞았던 예가 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상황을 방지할 수 있을까? 민주주의의 원리 가운데서 저자들은 ‘정당’을 일종의 ‘문지기’라고 부른다. 미국의 민주주의 설계자들은 처음에는 선거인단 제도를 통해서 포퓰리스트, 혹은 선동가들이 권력을 잡지 못하도록 방지하려고 했다고 한다. 국민들이 투표를 하긴 하지만 그 결과값으로 직접 대통령을 선출하는 게 아니라, 각 주의 명망가들로 이루어진 대의원들이 모여 (실제 투표 결과와 상관없이!) 대통령이 될 만한 사람을 선택하는 제도였다는 것.


그러나 이런 제도는 오래 가지 못했는데, 우선은 선거인단이 투표가 끝난 후에, 그러니까 후보자가 결정된 다음에야 활동을 시작했고, 각 주에서 정당 지지자들을 선거인단으로 선정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러면서 중요해진 것이 앞서 말했던 ‘정당’이다. 정당은 무자격자들, 독재의 기미가 있는 이들을 걸러서 정치무대에 오르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다. 그러나 문제는 어느 순간 정당이 그 역할을 내팽개쳤다는 것.


트럼프는 그 부작용 중 하나이지 최종적인 결과물이나 결정적인 시작이 아니다. 저자들은 이미 80년대 뉴트 깅리치로 대표되는 전투적 정치인들이, 상대 정당을 정치적 파트너가 아닌 무찔러야 할 적으로 규정하면서부터 문제가 심각해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불법만 아니면 뭐든 괜찮다”는 태도는 정치를 전쟁의 장으로 만들었고, 이는 클린턴, 부시, 오바마 정부를 지나면서 점점 강화되었다. 어떻게 보면 트럼프라는 괴상한 독재자의 등장은 당연한 결과일 지도 모른다.





책을 읽으면서 당연히 우리나라의 정치상황이 오버랩된다. 우리 또한 어디 극우 사이버 래카 채널 같은 데서나 할 말을 공당의 대표와 최고위원이라는 작자들의 입을 통해서 들을 수 있고, 저주와 혐오로 가득한 발언을 아무 양심의 가책 없이 내뱉는 3류 정치인들이 잔뜩 포진해 있다. 정치의 도의와 낭만은 사라진 지 오래고, 이제는 상대를 문자 그대로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괴물들이 여의도와 광화문 앞 이곳저곳을 휘젓는다.


여의도 외곽에선 그런 괴물들을 지원하는 극단적 성향의 유튜버들이 더 센 막말을 늘어놓고, 심지어 일부 교회의 목사라는 작자들까지 여기에 올라타 사탄의 노래에 맞춰 음란한 춤을 추는 지경이다. 무지몽매한 신도들은 그런 소경이 인도하는 절벽으로 열심히 함께 두 팔을 벌려 달려가고 있고.


사실 문제가 심각한 건 굳이 이런 책을 읽지 않아도 충분히 느껴진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쉽게도 저자들은 앞서 읽었던 책처럼 마땅한 대안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적어도 미국의 민주당이 공화당이 하는 것처럼 소수자들을 위한 정책을 포기하고 주류 백인들을 위한 정당으로 선회해서는 안 된다고, 좀 더 보편적인 지향점(최저임금 상승, 보편적 기본소득 같은)을 위한 정치를 하다보면 결국 백인들도 그 혜택 안에 포함되니 타개책을 찾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조금은 이상적인 주장을 할 뿐이다.(그러나 그렇게 해도 혜택을 받는 저소득, 저학력층 백인들이 민주당 지지로 드라마틱한 선회를 할 것 같지는 않다)


최근 종종 드는 생각인데, 어쩌면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제도의 유통기한이 끝나감을 목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공산주의라는 사회적 실험이 냉전의 붕괴로 100년 만에 실패로 마쳤다면, 18세기 말 미국의 독립으로 시작된 현대 민주주의라는 사회적 실험 역시 250년 만에 그 효용이 다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린 이제 (어떤 형태로든) 계급사회 위에 군림하는 독재자들의 통치에 익숙해져야 하는 걸지도.(트럼프 강점기의 세계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이주민 선교 현장 리포트 - 시대적 소명에 응답한 사람들의 이야기
김영애 지음 / 샘솟는기쁨 / 2026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여기 미국에서 목회학 박사학위까지 받고 선교를 준비하던 여성이 있다. 우연히 남양주의 공장 지대에서 일하는 이주 노동자들을 만나게 되면서 그녀가 갖고 있던 계획은 완전히 재설정되었다. 1998년 시작된 국내 이주 노동자들을 위한 선교활동은 2026년까지 이어진다. 이 책은 그 역사의 여러 장면들을 따뜻하게 비춰준다.


책에 나오는 “암미선교회”는 우리나라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 세워진 선교회다. 보통 선교라고 하면 외국에 나가서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만을 생각하기 쉬운데, 사실 우리나라에만도 260만 명 이상의 외국인들이 살고 있다. 그들을 대상으로 한 사역 역시 선교라고 부르기에 전혀 이상하지 않다.


암미선교회의 ‘암미’는 히브리어로 ‘내 백성’이라는 의미다. 우리는 그들을 ‘외부인’으로 생각하지만, 하나님에게는 모두 “내 백성”임이 분명하다. 우리나라에 살아가는 외국인들이 경상북도 인구보다 많은 상황에서, 언제까지 그들을 외부인으로만 볼 것인지 고민이 필요한 시점인 듯하다.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는데, 첫 번째 부분은 저자인 김영애 선교사가 쓴 부분으로, 지난 30여 년 가까운 시간 동안 일어났던 다양한 경험들, 은혜의 사건들, 눈물과 기쁨이 어우러진 다양한 에피소드를 짧은 에세이 형식으로 썼다.


두 번째 부분은 선교회와 관련된 여러 사람들이 쓴 부분이다. 함께 신앙생활을 하다가 지금은 고국으로 돌아간 지체들의 편지도 있고, 이 사역에 동참했던 여러 사역자와 봉사자들의 간증도 보인다.


마지막 부분(3부와 4부)은 이주민 선교와 관련된 뉴스레터와 기고문들로 구성되어 있다. 앞서의 글들이 생생함이 강조된 것들이라면, 이 세 번째 부분에 속한 글들은 조금은 전문적인 분석과 대안 제시가 담겨 있다.





우리와 함께 있지만, 우리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이들을 향한 우리의 시야를 넓혀주는 책이다. 잔잔한 사역의 결과물들을 읽다보면, 여전히 훌륭한 사역자들, 사역들, 봉사자들이 많구나, 그리고 복음의 능력이라는 것이 살아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어렵지 않은 내용이니 한 번쯤 시간을 내서 읽어 볼만하다. 직접 해외에 나가는 것 못지 않게, 선교라는 분야에서 교회가 할 수 있는 중요한 사역이 여기에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아시리아 제국의 역사 - 국내 최초 출간! 페르시아와 로마보다 먼저 세계 제국의 시스템을 설계한 최초의 제국 ㅣ 더숲히스토리
야마다 시게오 지음, 박재영 옮김, 이희철 감수 / 더숲 / 202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더숲출판사에서 내는 역사 시리즈의 최신간이다. 개인적으로 이 시리즈가 참 좋다. 지금까지 다섯 권이 나왔는데(아직 읽지 않은 네 번째 책도 곧 읽을 예정), 바빌론과 비잔티움(동로마제국), 히타이트와 무굴, 아시리아까지 고대 제국들의 역사를 차근차근 풀어낸다. 역사를 좋아하는 나 같은 독자에게는 그야말로 꿀맛인 책들이다.


흥미로운 건 이 책까지 일본인 저자가 벌써 두 명이라는 점. 인문 역사 분야의 오랜 연구 전통이 있기 때문일까. 언젠가 우리나라 저자도 이런 책에 이름을 올릴 수 있을는지 모르겠다.





아시리아는 지금으로부터 4천 년 전 도시국가의 형태로 등장했다. 메소포타미아 상류 지역을 중심으로 아수르, 니너베(니느웨), 아르벨라(이라크 아르빌) 등의 도시들이 초기 중심지다. 우리가 이들에 관한 내용을 알 수 있는 건 역시나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인데, 쐐기문자로 알려진 독특한 문자 체계로 점토판에 눌러 새겨 만든 문서는 종이나 나무와 달리 오랜 시간을 지난 후에도 여전히 남아 있어 해독과정을 거쳐 연구자들에게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아시리아는 시대적 구분에 따라 고 왕국, 중왕국, 신왕국(아시리아 제국) 시대로 나뉘는데, “장막에 거하던 17인의 왕들” 같은 전설의 영역과 맞닿아 있는 족장 시대를 거쳐 중기부터는 본격적으로 영역국가로서 발돋움하게 된다.


그리고 아무래도 기독교인인 우리에게 좀 더 잘 알려진 것은 신 아시리아 왕국, 아시리아 제국 시기다. 이스라엘의 북부 왕국을 멸망시켰던 디글랏 빌레셀(티글라트 필레세르 3세)도, 그 뒤를 잇는 살만에셀(살마네세르 5세), 산헤립(센나케리브), 엣살핫돈(에사르하돗)도 다 이 시기의 왕들이다. 그리고 책에서 저자가 미처 언급하지 못했던 아슈르바니팔도 개역성경에 “오스납발”이라는 이름으로 언급된다.


흔히 아시리아는 전쟁에 미친 나라, 패배한 나라의 포로를 끌고 와 영토 내 곳곳에 강제 이주를 시키고, 배반자에게는 잔혹한 처벌을 마다하지 않았던 야만적 집단처럼 여기는 고정관념이 있다. 하지만 고대에 존재했던 모든 제국은 다 그런 식으로 영토를 늘리고 영향력을 확대했다. 인구가 가장 중요한 국가적 자원인 시대에 강제이주는 일상적이었고, 영토 확장을 위한 전쟁과 반란을 진압한 후의 처벌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경각심을 주기 위한 잔혹한 형벌이 가해졌다.


저자는 아시리아에 나름 효과적인 행정조직도 있었고, (초기이기는 하지만) 대상 무역을 통해 부를 쌓기도 했으며, 무엇보다 다양한 기록들(상당 수는 점술과 관련된 것이지만)이 증명하듯 학문적 전통도 있었음을 강조하려고 시도한다. 물론 그런 부분도 없지는 않았지만, 무엇보다 저자도 인정하듯, 제국 시기의 아시리아는 끝없는 전쟁과 전리품으로 돌아가던 약탈경제에 가까웠고, 그나마 그 결과물도 지배층 위주로만 분배되어 제국에 속한 보통의 백성들에게 왕국의 운명 자체가 그리 중요하지 않게 다가왔었다는 점 또한 기억해야 할 것 같다.


우리가 잘 알지 못하던 고대 아시리아 제국에 관한 좋은 모노그래프. 사실 이보다 더 상세한 내용들은 연구자가 아니면 딱히 필요 없지 않을까.





옥의 티라고 한다면, 감수의 글 부분에서 좀 보인다. 튀르키예에서 공부한 외교관 출신의 감수자는(저자로 쓴 책도 읽어봤다) 아시리아에 대한 기존의 왜곡돤 관점을 이 책이 어떻게 교정했는가 찬사를 보는 과정에서 성경을 언급한다. 이스라엘 북왕국을 아시리아가 멸망시켰기에 성경에는 아시리아에 대한 적개심이 남았고, 결과적으로 아시리아를 마치 괴물처럼 부정적으로만 묘사해, 이것이 서구 문화와 세계관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쳤다는 것.


그러나 아시리아의 잔혹성에 관한 연구는 근대의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잔혹한 처벌 부조에 기인한 바가 훨씬 더 크고, 성경의 아시리아는 강력한 제국이자 “하나님의 심판을 대리하는 존재”(하박국)로 묘사되기도 한다. 물론 멸망 이전에도 이 지역의 위기를 조성하던 아시리아에 대한 부정적인 관점이 존재하긴 했으나(요나), 같은 성경에서 하나님은 그런 아시리아 사람들(니느웨 백성들)을 살리기 위해 선지자와 일종의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그리고 본문에서도 매우 자주 언급되지만, 성경의 기록은 실제 아시리아 역사와 매우 잘 조화가 되고 있으며, 오히려 가공의 인물들을 잔뜩 등장시킨 일부 그리스 작가들에 비해 근대적 발굴 이전에 아시리아에 관한 거의 유일하게 정확한 자료로서 인정받아야 하지 않나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