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노 한 스푼, 찬양 한 그릇 - 반주자 없는 교회를 위한 Suno AI 음악 제작 실무서 AI 길라잡이 시리즈 2
이지철 지음 / 세움북스 / 202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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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회의 예배에서 음악은 굉장히 중요한 요소다. 이른바 찬양은 가장 이른 시기의 예배 요소이기도 했고, 오늘날 찬양은 어쩌면 가끔은 설교보다 더 하나님의 말씀을 일상 가운데로 옮겨주는 좋은 도구가 되기도 한다. 다만 찬양 역시 음악이라는 범주 안에 있는 바, 음악적 재능이라든지, 자원이 부족한 경우에는(작은 교회에는) 충분히 그것을 만들고 사용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다.


AI가 발달하게 되면서 적어도 자원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드는 비용이 상당히 낮아졌다. 음악에 대한 깊은 조예가 없더라도, 대충 느낌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결과물을 얻어낼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이 책에서 소개하는 “수노(SUNO)”가 그 중 하나다. 저자는 이 AI의 사용법을 처음부터 차근차근 설명한다.





사실 이미 챗GPT 같은 인공지능 서비스의 사용에 어느 정도 익숙하다면, 이런 종류의 대화형 AI도구들도 그리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수노는 음악을 만드는 데 특화된 서비스고, 작동 방식은 여느 AI 서비스와도 비슷하다. 책에는 프롬프트가 영어로 안내되어 있는데, 리뷰를 쓰기 전에 직접 한 번 제작해 보니 우리말로도 간단한 배경음악 제작이 금세 가능했다. 물론 확실한 결과물을 위해서는 영어로 입력하는 것이 좀 더 명확한 지시가 될 수도 있을 것 같고.


저자는 이 도구가 아직 완벽한 작품을 만들어 내는 수준에는 이르지 못하다고 설명한다. 하지만 AI 서비스의 장점인 개인화된 결과물은, 개별 교회의 사정에 맞춘 찬양을 만들어서 좀 더 효과적인 교육과 공동체 소속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본다. 공감이 가는 내용들이고, 작은 교회들에서도 충분히 시도해 볼만해 보인다.


다만 음악은 음악인지라, 최소한의 지식은 알고 있어야 하고(책의 내용이 대부분 그걸 설명하는 것들이다), 특별히 이 AI서비스에서 알아들을 수 있는 방식으로 내가 가진 생각과 느낌을 표현할 수 있는 일종의 ‘통역능력’이 필수적으로 보인다.(이건 기술로 어느 정도 극복 가능해 보이는데, 아직 그만큼 올라오지는 않은 듯. 곧 올라오겠지만) 이 부분에서 조금 어려움을 느낄 수도 있지만, 앞서 내가 시도해 본 것처럼 우리말(한글)로도 어느 정도 생성물을 만들어 낼 수 있으니 일단 도전하면서 감을 익혀나가는 것이 중요해 보인다.


재미있는 도구를 소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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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서사의 서막 - 혁명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Liberte : 프랑스 혁명사 10부작 1
주명철 지음 / 여문책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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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을 다룬 10권짜리 대작의 시작이다. 책은 학자 특유의 조금은 느릿한(혹은 학문적인 예비적 고찰) 템포로 시작된다. 뭐 이 정도 책을 계획한다면, 혁명이 일어나기 이전의 상황에 대해서도 책 한 권 정도는 써야 할 것 같긴 하지만.


1권에서 다루는 건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의 상황, 이른바 앙시엥레짐(구체제)의 모습이다. 고대 말 프랑크족의 침입으로 시작된 프랑스의 역사는, 샤를마뉴와 그 후계자들 중 한 명을 따라 이어진다. 초기에는 그리 왕권이 강하지 않았지만, 여러 명의 왕들이 노력한 결과 서서히 왕령을 넓혀가고, 권력을 확장할 수 있었다. 책은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차원에서의 구체제에 관해 차근차근 분석한다.


왕실과 왕족들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2부를 지나면, 본격적으로 흔히 삼부회라고 불리는 전국신분회 소집까지의 사건들을 설명한다. 잘 아는 것처럼 그 시기 프랑스는 소수의 성직자와 귀족들이 절대 다수의 평민들을 착취하는 사회 구조를 갖고 있었다. 여기에 평민들의 삶을 어렵게 만드는 경제문제(밀가루 파동)까지 더해지면서 민심은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불타오르게 된다. 역시 먹고 사는 문제는 큰일을 부른다.





역사는 반복되지 않지만, 비슷한 상황에서 비슷한 방향으로 진행되곤 한다. 이미 지난 세기 급속한 성장으로 선진국이 된 서구를 중심으로 극심한 성장률 저하가 일어나고 있고(이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 그 결과 혁명까지는 아니라도 이전 시대라면 결코 선출되지 않을 것 같은 충격적인 지도자들이 여기저기 뽑히고 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트럼프다.


날마다 최악을 갱신하고 있는 이 새로운 지도자는 강력한 포퓰리즘 구호로 집권을 했지만, 정작 당선 후에는 지지자들 보다 자기 계좌를 채우는 데 열성적이다.(프랑스혁명 때도 비슷한 사람들이 많았다) 벌써 수 조 원을 챙기는 데 성공했다는 그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어떻게 지지자들을 자극하고 폭력적으로 만들 수 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이 역시 혁명 때도 일어났던 일이다) 어쩌면 우리는 또 다른 혁명의 전조를 보고 있는 것일 지도 모른다. 포퓰리즘 혁명.(좀 더 익숙한 용어로는 극우의 난동)





앙시엥레짐에서 단지 왕의 무능력만 문제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재정지출을 건전화해야 한다는 신하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등 국가 운영에 나름의 책임을 다하려고 하기도 했다.(물론 그 정책이 실패가 결과적으로 밀가루 파동을 일으켰지만) 그리고 여기서 저자는 고등법원의 법관들에 관한 언급을 한참 이어간다.


이들은 이른바 법복귀족이라고도 불리는 문신들로, 왕에 대한 다양한 봉사의 대가로 귀족 신분을 얻게 된 이들이다.(판사의 역할을 함께 맡아서 이런 이름이 붙었다) 오늘날과 달리 법관의 지위는 상속이 가능했고, 그 덕분에 귀족 신분을 대대로 이어갈 수 있었다. 이렇게 보면 왕의 충실한 신하이기만 한 것 같지만, 또 이들은 다양한 수단으로(예를 들면 왕의 결정이 법에 어긋난다는 내용을 담은 상소 등으로) 왕을 압박하고 견제할 수 있었다.(물론 이게 늘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비유하자면 조선 시대 중신들과 국왕의 관계와 비슷했는데, 분명 신하들은 왕이 임명하지만, 왕이라고 해서 신하들의 의견을 그냥 다 무시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국정 운영의 최종 책임자로서 왕의 책임이 가장 크지만, 그 아래서 왕의 실정에 저항하지 않고 특권만 누려온 귀족들의 책임도 적지 않은 것. 대통령이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장관인 내가 뭘 할 수 있었겠느냐는 한심한 이들도 책임을 면할 수 없는 이유다. 임면권자라도 잘못을 지적하지 않으면, 단두대로 향할 수밖에.


시간이 나는 대로 차근차근 한 권씩 손에 들어볼 요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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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로마는 그들을 보았다 - 로마 세계의 눈에 비친 그리스도교 비아 제안들 시리즈
로버트 루이스 윌켄 지음, 양세규 옮김 / 비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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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초기 기독교 시기(2~4세기 정도) 기독교와 그리스도인들에 관해 로마인과 그리스인들이 남긴 언급에 집중한다. 저자가 선별한 이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며, 사상적으로 반대편에 서 있는 인물들이다. 이들이 남긴 기록엔 일차적으로 왜 당대 어떤 이들이 기독교를 멸시하고 평가절하 했는가 하는 반감을 읽게 되겠지만, 또 그 안을 잘 살펴보면, 초기 기독교의 알려지지 않은 새로운 현실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저자의 판단이다.


가장 먼저 나오는 인물은 행정관(총독)이었던 소 플리니우스다. 그는 당시 황제인 트라야누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기독교인들을 언급하는데, 그는 비록 그리스도인들의 예배와 삶에서 특별히 문제될 만한 것을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그들이 정무관의 명령을 거부하고, 공동체의 관습을 따르기를 거절했다는 것을 심각한 문제로 보았다.


플리니우스와 같은 시기에 활동했던 유명한 역사가 타키투스는 기독교를 미신이라고 적었다. 그는 그리스도인들이 인류를 증오한다고 쓰기도 했는데, 이는 그가 기독교를 당대 사회와 종교에 대한 모독으로 여겼음을 보여준다.





기독교에 대한 좀 더 철학적인 공격도 있었다. 여기에는 2세기 후반 의학자/의사로서 잘 알려진 갈레노스가 먼저 나온다. 그는 기독교를 당새 하나의 철학 학파(당시의 철학 학파는 일종의 종교단체와 비슷했다)로서 여기고 있었고, 비록 믿음을 뒷받침하는 지적 기반은 부실했으나 자기 수양과 절제의 삶을 살아가는 집단이라고 평가했다.


오리게노스의 반박문으로 잘 알려진 켈수스는 좀 더 교리적인 차원에서 기독교를 비판했던 인물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내용에 대한 다양한 비판을 했던 그는,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이 종교와 종족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던(그러니까 어떤 지역이나 어떤 민족은 그들의 신을 갖는다는) 관념을 파괴하고 있음을 예리하게 지적하기도 한다.


기독교에 대한 지적 공격으로 가장 유명한 인물은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초에 활동했던 철학자 포르퓌리오스에게서 발견된다. 그는 책에는 이 내용이 꽤 길게 설명되는데, 성경의 해석과 이해에 관한 차이는 그것이 계시라는 점을 생각해 볼 때, 애초에 공격하는 쪽에서도 완벽한 논리적 근거를 가져다 대기는 쉽지 않다. 특별하 포르뤼리오스는 기독교인들이 예수라는 인물을 하나님으로, 유일한 구원의 길로 여기는 부분을 못마땅하게 느꼈던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소개되는 인물은 배교자 황제 율리아누스다. 그는 제국 내에서 어느 정도 공식적으로 인정받고 있던 유대교까지 포용했지만 유독 기독교에 대해서는 박했는데, 기독교가 유대교에서 나왔다는 부분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 것이 기독교에 위협이 되었다는 저자의 설명은 살짝 의아하기도 하다. 사실 이 부분은 그의 개인적인 경험이 좀 더 크게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은데, 학자들은 이런 심리까지는 딱히 신경을 많이 쓰지 않으니까.





책은 처음 3세기 동안 기독교가 꽤 오랜 투쟁을 해야만 했다. 이 투쟁은 자신들의 정당성을 입증하고, 지적 공론장에서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한 투쟁이었다. 또, 저자도 지적하듯이 기독교에 대한 비판이 300년에 걸쳐 끊임없이 나왔다는 사실 자체가, 기독교 사상이 그저 웃고 넘길 만한 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대적자들의 주장을 통해 초기 기독교의 이미지를 재구성해 본다는 시도가 꽤 흥미롭다. 다만 그런 종류(그러니까 누군가를 비판하기 위한 목적으로 쓰인)의 글에서 나타날 수 있는 과장은 어느 정도 염두하고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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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안에서 발견한 참된 자유
팀 켈러 지음, 장호준 옮김 / 복있는사람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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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한 편의 설교문 정도 될까 싶은 얇은 책이다. 저자는 인간의 왜곡된 본성이 기본적으로 공허함을 느끼고 있으며, 이를 채우기 위해 다른 사람과의 비교우위를 찾기 위해 애쓰고 있다고 말한다. 이런 노력의 종착점은 교만이다. 당연히 그것으로는 우리 삶이 본질적으로 채워질 수 없다.


그리고 여기에서 바울의 예가 사용된다. 그는 사람들의 눈도, 심지어 자기 자신의 눈도 의식하지 않았다. 그건 자신이 완전하기 때문이 아니다. 무엇보다 그는 스스로를 죄인의 괴수라고 소개한 인물이지 않던가. 그는 아예 자기 자신에 대해 생각(판단)하지 않기로 한 것이다. 이건 다른 말로 ‘겸손’이라고 할 수 있다.


바울이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던 건,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그에 대한 평가를 끝내셨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그 평가가 우리가 누구인가를 결정한다. 이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게 된다. 그리고 이럴 때 비로소 “복음 안에서의 자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천국과 지옥의 이혼”에서 C. S. 루이스도 비슷한 내용을 강조한다. 책 속에 등장하는 여러 캐릭터들이 끝내 천국으로 향하지 않는 이유는 자기 자신에게 너무 몰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천국의 초입에서 한 영혼은, 살인을 저지른 생전의 자기 부하직원이 천국에 있는 것을 보고는 그가 인도하는 천국에는 가지 않겠다고 외면하기까지 한다. 자기 자신에 대한 기대를 내려놓은 사람만 천국에 이를 수 있다는 말이, 그에게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으로 느껴진 것이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천국에 어울리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는 얼마나 자주 나를(혹은 나만) 신경 쓰고 있는지 모른다. 많은 그리스도인들도 이런 실수에서 좀처럼 벗어나기 힘든데, 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갈등 상황도 결국 여기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우리의 시선을 나에게서 하나님에게로 돌릴 수 있을까? 아쉽게도 책에는 이 부분에 관한 실천적 도움은 그리 보이지 않는다. 저자는 우리가 바르게 깨닫기만 하면(인식론적 전환) 그런 사람이 될 것(존재론적 전환)이라는 기대인 듯하다. 물론 바른 앎은 진리를 따르는 삶에 있어서 참 중요한 일이지만, 결국 구체적인 방법론이 없다면, 극단적으로 그저 무엇을 아는 것으로 어떤 사람이 된 것인 양 착각할 수도 있다.



복음의 중심 주제에 대한 간명한 설명이 인상적이었던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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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사람이 음모론에 빠졌습니다 - 음모론의 위협으로부터 우리의 관계와 민주주의를 지키는 법
정재철 지음 / 원더박스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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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도 ‘음모론’이라는 말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사회적으로 큰 사건이 일어났을 때, 그 사건에 대한 공식적인 설명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때 사람들은 배후의 무엇을 떠올리게 된다. 음모론 자체는 꼭 정치에 한정되지 않지만, 요새 이 개념이 더 큰 문제처럼 느껴지는 건, 역시나 정치세력과 결합해서 사람들을 선동하며 사회를 극렬한 분열로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음모론에는 보수와 진보, 좌우를 가리지 않는다. 요새는 극우 진영에서 부정선거론을 단골 소재로 우려먹고 있지만, 내 기억에 근래 들어 최초로 이런 주장의 음모론을 주장한 건 김어준이었다. 자비로 영화까지 만들어서 선거조작 의혹을 제기했었고, 비슷한 일은 세월호 사건 때도 반복되었다. 그리고 지금은 앞서 말한 대로 정 반대 진영에서 관련 음모론을 외치고 있다.





책은 음모론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음모론이 생겨나고, 사람들은 왜 그걸 믿는지, 음모론이 일으키는 문제가 무엇인지를 차근차근 살펴나간다. 그리고 아직 얼마 지나지 않은 12.3 계엄 사태를 “음모론이 촉발한 최초의 쿠데타”라고 정의하면서(이건 뉴욕타임스에서 해당 사건을 “알고리즘 중독이 촉발한 세계 최초의 반란”이라고 보도한 것에서 나온 표현인 듯하다) 음모론이 국가를 뒤흔들 수도 있음을 아울러 경고한다.


책의 말미에는 음모론에 빠진 사람들을 어떻게 되돌릴 수 있을까 하는 방법론이 제시되어 있다. 저자는 그들을 설득하려 하지 말고, 공감과 같은 감성적인 접근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공감이란, 그래 네 말이 맞아 하는 식의 우쭈쭈를 하라는 뜻이 아니다. 음모론에 빠진 사람들은 점차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끊어지면서, 그들만의 커뮤니티에 빠져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 힘들어지는데, 그럴 때 그에게 심리적 의지가 될 수 있는 존재가 있어야 음모론에서 나올 수 있는 최소한의 조건이 될 거라는 말.


하지만 책에도 실려 있는 실제 예들을 보면, 그렇게 해도 좀처럼 음모론에서 빠져나오도록 만드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책에 나온 사람들도 벗어났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수준이다) 마치 불법약물처럼, 음모론도 일단 한 번 빠지면 계속해서 금단증상에 시달리며 더 자극적인 음모론을 찾아 나서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그런 차원에서 음모론에 처음부터 발을 내딛지 않을 수 있는 정보 리터러시를 기르기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 책의 마지막 장에는 이 내용이 약간 실려 있는데, 사실 뭔가 뾰족한 수가 있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정도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건강한 몸을 위해서는 매일 골고루 영양소를 섭취하고 적당한 운동을 규칙적으로 해야 한다는 말이 특별하게 느껴지지 않지만 다른 방법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원래 건강하고 건전한 일을 위한 작업은 평범하게 느껴지는 법이다.





며칠 전, 국내 고교 야구 대회에서, 서울의 한 고등학교가 광주 소재의 학교와 시합을 하던 중, 5.18를 조롱하는 것으로 읽힐 수 있는 응원(혐오) 구호를 외친 것이 중계에 잡혀 큰 물의가 일어났다. 해당 학교는 6개월간 대회 출전 금지라는 징계가 내려졌는데 나름 합리적인 처분이었다고 본다. 문제는 그런 종류의 음모론에 기초한 혐오 정서가 진작 어린 아이들 수준으로까지 퍼져 있음이 공개적으로 드러났다는 부분이다.


심지어 어제는 대통령 직속 위원회의 총리급 부위원장이 해당 뉴스를 가리켜 표현의 자유 운운하는 멍청한 소리를 했다가 결국 자진 사퇴 형식으로 경질되는 일도 있었다. 표현의 자유와 양심의 자유는 민주 국가에서 참 중요한 요소지만, 그 자유가 명백히 허위이고 나아가 혐오를 위해 조작된 내용이라면 그것까지 보장해 주어야 한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결국 그런 사회에서 ‘진실’은 그 존재가 무의미해질 것이고, 결국 더 큰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집단에 의한 약육강식의 문화가, 착취와 지배의 분위기가 퍼지게 될 테니 말이다.


오늘도 여전히 음모론에 빠진 적지 않은 무리들이 어딘가에서 자기들이 뭔가 대단한 걸 지키고 있다며 길에 나와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쉽지는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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