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고 싶지 않은 당신에게
타일러 스테이턴 지음, 홍종락 옮김 / 복있는사람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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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들의 삶에 기도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직접 경험한 기도의 중요성을 고백해 왔고, 많은 교회의 훈련 프로그램들도 바로 이 기도를 더 익숙하고 잘 하도록 돕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반복되는 강조는 그리스도인에게 기도란 얼마나 익히기 부담스러운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신앙생활을 얼마나 오래 했느냐와 상관없이, 그리고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아는 것과도 무관하게, 기도는 어렵다. 기도에 관한 책은 그래서 좀 부담스럽게 느껴지면서도 동시에 궁금증을 자아내기도 한다. 어떻게 하면 기도를 그렇게 쉽게 잘 할 수 있을까.


작년 말 갔던 한 모임에서, 일면식도 없었던 어떤 분이 이 책을 추천했다. 얼마 후 구입을 했고, 그분이 왜 이 책을 추천했는지를 살짝은 알 것 같다. 저자는 기도에 관한 깊은 통찰력과 경험을 바탕으로, 기도가 무엇인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에 관한 좋은 조언을 해 준다.





저자는 우선 기도에 대한 부담감을 줄이도록 요청한다. 단번에 몇 시간, 몇 날에 걸쳐 기도하는 사람이 될 수는 없다. 우선은 지금 할 수 있는 만큼만, 그것이 하루 1분에 불과하더라도 기도를 하라, 그것이 중요하다. 기도를 할 때 무슨 유려한 말로 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건, 하나님 앞에 나아가 머무는 일이다. 앞서 말한 1분의 기도 동안 그저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고 난 뒤 잠잠히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도 충분한 기도다.


하지만 일단은 이렇게 기도를 시작했다고 해도, 계속 그 자리에만 머무는 것은 무리다. 우리의 기도는 점점 더 풍성해져야 하고, 더 깊은 데로 나아가야 한다. 책 중반은 우리의 기도에 채워져야 할 “내용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경배, 고백, 중보, 청원 등이다.


책 후반부는 기도를 하는 우리에 관한 이야기다. 기도에 관한 신약성경의 동사 시제가 중간태라는 점에서 착안해 기도는 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가 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통찰로 시작해, 침묵과 끈질김으로, 쉼 없이 기도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살짝 아쉬운 것은 각 장의 구성이 논리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된 글들이라기보다는, 그 장의 큰 주제에 관한 이런저런 짧은 글들이 연속적으로 실려 있는 식이라는 점이다. 한두 페이지의 글과 그 다음에 나오는 글 사이에 별 관련이 없으니, 책을 읽어나가면서 흐름이라는 것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짧은 칼럼들을 모은 느낌?)


하지만 그런 구성의 아쉬움을 넘어서는 내용의 충실함이 있다. 좋은 번역자의 도움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문장들도 깊이가 있으면서 분명하게 전달되고, 그 안에 담긴 내용 역시 훌륭한 통찰과 작가로서의 훌륭한 능력을 보여준다.


예컨대 책 초반 저자는 서구 교회와 영적 호기심이 살아 있는 서구 세계 사이의 많은 관계가 끊어졌지만, “기도가 그 둘 사이의 접점”으로 남아 있다고 예리하게 지적한다. 우리의 기도가 “물에 가라앉지 않으려고 미친 듯이 발버둥 치며 가상의 무기력한 신에게 소극적으로 말을 거는 일에 불과”하다는 표현은 생동감이 있고,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멘” 사이에서만 들을 수 있는 (그러나 일상에서는 쓰지 않는) 상투적인 용어들로 가득 찬 기도를 한다고 위트를 섞어 비판하기도 한다. 이 정도의 글솜씨는 읽는 재미를 준다.


무엇보다 책은 기도에 관해 다시 한 번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늘 “더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 미뤄두었던 주제를 다시 우리의 우선순위 상위로 밀어 넣도록 만들어주는 셈이다. 당장 책 제목처럼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들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 그런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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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리즘, 패러다임, 법 - 규칙은 어떻게 세계를 만드는가
로레인 대스턴 지음, 홍성욱.황정하 옮김 / 까치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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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7년 영국의 과학철학자이자 후에 대법관까지 역임한 프랜시스 베이컨은 새로 재무부 남작에 임명된 존 데넘 경에게 다음과 같은 임무를 지시했다. “그대는 무엇보다도 국왕의 특권을 지켜야 하는데, 국왕의 특권과 법은 서로 다르지 않고 국왕의 특권이 바로 법이고 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며 법에서 가장 우선하는 것이므로, 그대는 대권행위를 지키고 유지함으로써 곧 법을 지키고 유지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하오.”(334) 베이컨의 이 지시는 당시 법에 관한 한 가지 인식을 잘 보여준다. 소위 국왕의 “대권행위”는 법보다 우위에 서 있다는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는 이 17세기의 이상을 21세기에 온몸으로 구현하는 반역자들을 목격했다. 대통령의 불법적인 비상계엄은 통치 행위로서 그것이 헌법과 법률이 정하는 제한사항들을 얼마든 어기더라도 정당하다는 대통령 변호인들과 여당의 궤변, 그리고 자기의 임무는 대통령을 경호하는 것이기에 사법부에서 발부한 영장도 얼마든지 무력을 동원해 거부할 수 있다는 왕조시대 호위무사에게나 걸맞은 의식을 가진 대통령 경호처(라는 시대에 뒤떨어진 기관)의 책임자들.(+ 그 외 온갖 모지리들)


여기서 우리는 법의 지위, 성격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읽어낼 수 있다. 법(조문에 쓰여 있는 글씨의 내용)은 어떤 경우에도 그대로 따라야 하는 것일까, 법은 모든 상황을 충분히 다 고려하고 있는가(또는 그럴 수 있는가), 나아가 이런 법을 포함한 규칙이라는 것은 어떻게 만들어졌고, 또 그 내용은 어떻게 변해왔을까. 이 책은 이런 질문들과 함께 규칙의 역사에 관한 연대기적 연구를 담고 있다.





사실 책 제목 때문에 정작 책의 내용이 무엇인지 한참 헤맸다. 알고리즘과 패러다임, 그리고 법은 규칙이 갖는 서로 다른 양상들을 가리킨다. 예컨대 오늘날 우리는 “규칙”하면, 사람의 개입이 들어설 여지가 별로 없이 그저 기계적으로 따르면 되는 무엇으로 여기곤 한다. 하지만 애초의 규칙은 그런 식으로 형성되지 않았다고 저자는 말한다.


가장 이른 시기 규칙은 어떤 사람이 따라야 할 ‘모델’을 가리켰다. 모든 면에서 그것을 닮을 것을 요구받지만, 대상을 완전히 모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컨대 초기 규칙서 중 하나인 베네딕투스 수도원 규칙서에는 수도사들이 따라야 하는 수십 가지의 규정과 그 이상의 세부사항들이 있다. 그러나 이런 규칙서로도 수도사들의 모든 행동을 규제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때문에 수도원장들에게 굉장히 높은 수준의 재량권이 부여되어 있었다. 그는 상황을 살펴서 규칙서의 예외적 상황들을 분별하고 허용해야만 했다. 그 당시의 규칙이란 규칙서라는 규정만이 아니라 수도원장의 재량까지도 포함하는 것, 일종의 패러다임이었다.


알고리즘이라는 용어도 원래 의미와는 많이 달라졌다. 알 콰리즈미라는 이름의 아랍 수학자의 이름에서 온 이 단어는, 오늘날에는 어떤 작업을 수행하기 위한 명확한 명령어들의 기계적 집합 정도로 여겨지지만, 애초에 이 단어는 그 계산은 물론, 그 계산을 수행하는 인간들을 포함하는 개념이었다. 이건 20세기까지 “컴퓨터”라는 단어가 계산을 하는 저임금 노동자들을 가리켰던 것을 떠올리게도 한다.(영화 “히든 피겨스”를 참고하라. 명작이다.)





저자는 언뜻 기계적이고, 완벽할 것만 같은 “규칙”이라는 것에, 실은 얼마나 많은 예외적 상황과 판단이 개입될 수 있는지를 오랜 역사적 추적을 통해 잘 보여준다. 하나의 규칙이 받아들여지는 과정은 지난한 시행착오와 반발, 그리고 전국가적인 교육과 계몽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현대국가에 법치주의라는 이상을 정착시키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시간과 사람들의 희생이 필요했는지.


그런 차원에서 최근 친위 쿠데타를 시도했다가 탄핵 심판을 받고 있는 대통령과 폭동까지 저지르면서 그런 대통령을 지키겠다고 나서는 반란 옹위세력들의 움직임은 굉장히 우려스럽다. 우리는 법치주의가 꽤나 안정적이라고 착각하지만, 그건 그 사회 구성원들 대다수가 그 체제에 대한 신뢰를 유지하고 있을 때만 작동할 수 있는 섬세한 체제다. 대통령부터 나서서 사법부의 영장조차 거부하는 식으로 법을 무시하고, 나아가 메뚜기 같은 폭도들이 날뛰기 시작하면 그 안정적이라고 느껴지던 체제도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지난 20세기 세계 곳곳에서 비슷한 일들은 수도 없이 일어나곤 했다.


우리는 때로 상식에 맞지 않은 판결을 내리는 판사들을 보면서, 차라리 판사들을 AI로 바꾸는 게 낫겠다는 식의 말을 할 때가 있다. 판결을 온전히 기계적 결정의 영역으로, 그러니까 알고리즘으로 치환하고 싶다는 의미다. 하지만 애초에 그런 것은 불가능하고, 또 바람직하지도 않다. 법과 규정은 그런 식으로 구성되거나 작동되는 게 아니니까.


뭐든 깊이 들어가 보면 애매하고 모호한 영역이 잔뜩 나타난다. 그건 물리학에서 양자라는 별종을 만났을 때와 비슷한 과정인 것 같다. 덕분에 책을 읽어나가는 게 쉽지는 않다. 특히나 제목 탓(?)도 좀 있는 것 같은데, 제목만 보고서는 이 책이 어떤 내용을 담고 있는지 짐작도 안 갈 뿐더러, 책의 구성 자체도 각 장의 내용은 이해가 되는데 장별로 어떤 연계를 지니고 있는지가 눈에 잘 안 들어온다. 다 읽고 나면 이게 규칙의 역사에 관한, 하지만 크게 보면 연대기적 구조를 가지고 있는, 일종의 장별 옴니버스식 구성이라는 걸 알게 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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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버포스 믿음의 글들 395
윤영휘 지음 / 홍성사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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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12월 3일 이후 대한민국의 정치와 사회, 문화 전반에는 엄청난 혼란이 시작되었다. 평생 책임이라는 걸 제대로 져본 적 없는 덜 떨어진 정치 지도자가 시도한 친위 쿠데타는 곧 헌법(의 규정에 따라 계엄해제 요구안을 통과시킨 야당 주도의 국회)의 요구에 따라 진압되었지만, 거의 두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아직 문제는 완전히 해결되지 않았다. 탄핵된 대통령은 여전히 자신의 무고함을 주장하기 위한 궤변을 남발하고 있고, 심지어 국회의 1/3을 차지하고 있는 여당마저 쿠데타를 옹호하며 온갖 뻘소리의 저급한 수준을 날마다 갱신하고 있다.


그리고 이 맘 때면 늘 등장하는 양비론자들은 대통령과 여당은 물론 야당도 공동 책임이 있다는 식의 물타기를 시전하는데, 자칭 중립을 가장하는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은 그냥 내란수괴와 그 옹호세력의 책임을 은근슬쩍 희석시키려는 교묘한 정치적 선동에 불과하다. 문제는 이 런 식의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는 모두까기 평론들이 남발되면서 자연히 정치라는 영역 자체에 대한 회의감, 불신, 적대감이 우리들의 마음속에 스며들고 있다는 점이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인 우리에게 정치란 그렇게 그냥 버리면 그만인 영역에 불과할까? 물론 그렇지 않다. 우리가 살아가는 수많은 영역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의 영역도 늘 우리의 뜻대로만 흘러가지 않기도 하고, 때로 흑과 백의 경계가 모호한 그런 문제들도 있다. 합의라는 기초 위에 진행되는 민주적 정치구조 안에서는 혼자만의 돌출행동으로 무언가를 해내는 건 거의 불가능하기에, 다른 사람들의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한 양보는 상시적으로 요구된다.


이 모든 특징들이 우리가 정치라는 영역을 이해하는(수용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때문에 너무나도 쉽게 사람들은 극단적인 입장에 줄을 서곤 한다. 선명해 보이고, 무엇보다 과격한 수단을 사용해서라도 목적한 바를 이뤄주겠다는 달콤한 폭력의 맛에 취하는 거다. 과연 정치는 구원을 받을 수 있을까?




새해 홍성사에서 처음으로 낸 이 책은 제목에 실려 있는 유명한 영국의 한 정치인의 생애를 정리한 전기다. 18세기 후반 시작된 노예무역폐지 운동의 기수였던 윌리엄 윌버포스의 이야기다. 부유한 상인 가문에서 태어나 남부럽지 않게 살던 그는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인생의 항로를 결정적으로 수정하기로 마음먹는다.


결국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 기관인 의회에서 일하기로 결심한 그는 하원의원에 출마해 당선되어 의원직을 시작한다. 그의 의원직 수행 방식은 매우 독특했는데, 휘그당과 토리당이 맞서는 의회 구도 가운데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독립파로서 직무를 수행했고, 심지어 대학 동기이자 절친인 피트가 수상이 되었을 시절에도 내각에 들어가지 않은 채 때로는 정부를 견제하기도 하고, 필요한 경우 협력하는 방식으로 정치를 했다.


윌버포스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업적인 노예무역금지법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그의 주도로 제출한 열한 번의 법안이 상원 또는 하원에서 부결되었고, 개인적인 음해와 물리적 공격을 받기도 했다. 그 기간이 거의 20년이었으니, 하나의 선을 이루기 위한 한 사람의 열정에 자연히 경의를 표하게 된다.


그 오랜 시간 동안 수없는 실패를 경험하면서도 윌버포스가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신앙 때문이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겨주신 사명을 따라간다고 여겼기에, 그 과정에서 겪는 방해와 공격을 이겨낼 수 있었다. 그는 단순히 기독교인이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그는 국가의 도덕성을 지키기 위한 노력을 해 왔던 인물이고, 이 과정에서 사용한 수단도 그 이상에 부합하는 방식을 취하려고 애써왔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정치인이 있다면 얼마나 든든할까 싶지만 현실은...


물론 윌버포스가 살았던 시대와 오늘은 분명 다르고, 당시의 정치적 제도나 관행, 의회의 운영 방식 또한 오늘과는 차이가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 시대의 방식을 그대로 가져와야 한다는 건 무리다. 하지만 그가 보여준 참된 정치인의 모습은, 정치에 대한 환멸이 선을 넘을 것 같은 이 즈음 우리나라 정치인들에게 한 권씩 권해주고 싶은 책이다(물론 태반은 읽어보지도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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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의 철학 - 몰입과 성장을 이끄는 스탠퍼드 마지막 인생 수업
빌 버넷.데이브 에번스 지음, 이미숙 옮김 / 갤리온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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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우리 삶에서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 물론 요새는 좀 다른 이야기들도 나오지만, 일은 우리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큰 영향을 끼친다. 그건 단지 돈을 버는 수단일 뿐만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 스스로 정의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것이기도 하다.


물론 이 말이 어떤 직장이 우리에게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은 아니다. 중요한 건 비전이고, 그것을 향해 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다양한 직업을 가질 수 있다. 꼭 어떤 종류의 직업에 목을 맬 필요는 없다는 의미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의 직장이 늘 우리가 원하는 모습은 아니라는 점이다. 들어가기 전에는 어떻게든 합격하기를 바라지만, 정작 입사한 후에는 우리가 기대했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 당황하고, 때로 회의를 느끼다가 결국 그만두는 경우는 적지 않다. 예전과는 다르게 평생직장 같은 개념이 거의 사라진 오늘날 이런 과정은 좀 더 빨리 이루어지기도 하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 과정에서 겪는 문제들이 별 영향이 없다는 의미는 또 아니니까.





이 책은 바로 그런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을 위해 쓰였다. 스탠퍼드 대학의 디자인스쿨에서 했던 강의를 책으로 엮었다. 여기서 말하는 디자인이란 무언가 제품이나 작품을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인생을 디자인한다는, 좀 더 인문학적인 의미를 가진 단어다. 직장을 재디자인 해보자, 이 책의 주제다.


두 명의 저자들은 우리가 직장을 인식하는 방식을 바꾸면 실제적인 변화가 있다고 강조한다. 물론 여기에서 말하는 건 우리 쪽의 생각을 바꿔나가고, 그것이 우리의 행동에 변화를 일으키면서 우리가 처한 상황도 바꿔나갈 수 있다는 내용이지만, 그게 꼭 상황의 변화까지 이를 지는 장담할 수 없다. 하지만 그러면 또 어떤가. 우리는 애초에 수많은 것들이 이미 정해져 있는 세상에서 살고 있지 않던가. 그 가운데서 우리의 생각이 변화될 수 있다면 그 또한 분명 유익한 일일 것이다. 더구나 그게 우리가 하루 중 1/3이상의 시간을 사용하는 영역과 관련되어 있다면.


중요한 건 그 생각의 재구성이 바른 방향을 향하고 있느냐일 것이다. 저자들이 이 책에서 말하는 건, 돈보다는 의미가 더 중요하고, 최고만을 바라는 완벽집착이 아니라 지금 실행 가능한 최고의 선택지를 고르라는 것과, 회사 내에서 바르게 영향력을 쌓고 사용하는 법, 심지어 잘 퇴사하는 법까지, 직장생활을 하면서 두루 사용할 수 있는 좋은 방향의 조언들이다.





중요한 건 심리적인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지나치게 몰입하다 보면 자연히 시야가 좁아지고 잘못된 생각과 선택을 하기 쉽다. 저자들은 우리의 일을 좀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팁을 제안하면서 이 작업을 돕는다. 그렇다고 해서 일을 대충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열정을 쏟을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애초에 이런 책을 읽으려는 노력조차 필요 없을 테니까. 말 그대로 제대로 일을 하기 위해서 필요한 내용들이다.


직장 초년생들에게 권해주면 좋을 듯한 책이다. 물론 그보다 더 오래된 이들에게도 제법 와 닿는 지점이 많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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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를 뛰어넘는 그리스도인 - 차이를 품되 구별되어 세상을 섬기다
팀 켈러.존 이나주 외 지음, 홍종락 옮김 / 두란노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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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대 분열의 시대다. 그건 대통령 탄핵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외국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현직 대통령의 친위쿠데타까지 옹호하며 나라를 분열로 몰아가는 우리 정치 갈등의 근원에는 박정희 독재시절 정권 유지를 위해 의도적으로 불러일으킨 지역감정이 깔려 있다면, 외국의 경우 이 외에도 다양한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갈등도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재료로 사용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인종과 종교가 있고.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어느 한 쪽을 편들면서 다른 쪽을 비난하는 방식이 전부일까. 아니면 언제나 양측의 중재자 입장에 서서 화해를 시키려는 쪽을 선택해야 할까. 쉽지 않은 문제다. 분명 그리스도인은 대책 없는 양비론을 주장하지 않고, 옳고 그름의 기준이 존재한다는 믿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옳고 그름은 단순히 하늘에 속한 일들만이 아니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이 기도는 단순히 골방에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 가운데서 적극적으로 성취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그런 기도이기도 하다.


이 책은 우리 못지않게 극심한 갈등에 시달리고 있는 미국을 배경으로, 이런 분열과 차별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는 열두 명의 그리스도인들의 고백과 그들의 삶에 대한 보고를 담고 있다. 대표 저자로도 실려 있는 팀 켈러는 목회자이지만, 가수와 음악가, 법학 교수나 정신과의사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세상에 선을 긋기를 좋아한다. 그것이 선명하고 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들이 여기에서 그리는 세상의 이미지는 그것과는 좀 다르다. 신학자인 키르시틴 디디 존슨은 “아주 깊이 뿌리를 내린 나무”라는 상징을 꺼내든다. 깊게 뿌리를 내린 나무는 충분한 물과 양분을 확보해 가지를 넓게 뻗고, 이때 이 가지들은 다른 나무의 가지들과 겹치게 된다는 것. 즉 자신이 속한 전통에 충분히 깊숙이 뿌리박혀 있으면, 다른 뿌리에서 나온 전통과 겹치는 부분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되고, 그것들을 공통 분모로 삼아 함께 유익한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자신을 모험가라고 소개하는 IVF 대표 톰 린은, 대만계 미국인이다. 최초의 유색인종 대표였던 그는 오늘날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고 있는 방향 감각 상실과 낙담은 “가족 캠핑 여행만 떠나본 이들이 진짜 황무지에 도착했을 때 받게 되는 느낌과 비슷할” 것이라고 말한다. 기독교가 우세인 (미국) 문화권 안에 살던 사람들이 사회가 다원화 되면서 경험하는 당혹감을 말한다. 우리의 상황에 맞춰서 조금 바꿔보자면, 교회 안에서만 지내던 사람들이 세상에 나와 경험하는 방향 감각의 혼란과 비슷하달까.


여행을 가서 끊임없이 불평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새로운 곳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자신이 익숙한 상황과 다르다는 점 때문이다. 사실 그런 사람은 그냥 집에만 있는 게 낫다. 괜히 나와서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 보다는. 하지만 젖먹이 어린아이 시절에야 그런 것이 가능하지, 다 큰 성인이 그렇게 한다면 ‘은둔형 외톨이’라고 부르면서 주변의 걱정을 살 수밖에 없다. 젖만 먹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단단한 음식을 먹는 성인이 되려면 결국에는 집밖으로 나와야 하고,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관계 맺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책은 여기에 필요한 다양한 태도와 준비자세들, 요령들을 소개해 준다. 한 명의 저자가 내용을 정리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저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기에, 그 내용이 체계적으로 제시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여러 이야기들 속 겹치는 내용들을 포착하는 것은 가능하다. 겸손과 포용, 경청,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하고 뻔한 이야기 아니냐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책 속에 한 작가가 지적하는 것처럼, “우리는 글에 너무 많은 비중”을 두면서, 정의의 추구를 단지 “올바른 해시태그 사용이나 소셜미디어에 의견을 표명하고 분노를 표출하고 도덕성을 과시하는 일과 혼동”할 때가 많다. 정작 중요한 건 진짜 사람들과 만나 함께 일을 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우리의 그리스도인됨이, 또 세상에 빛을 비추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이 중 하나라도 실재로 내면화해 실천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는 해 본 사람만 알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일부 목회자들이(그리고 “자칭” 목회자들이) 자주 엉뚱한 망언을 쏟아내는 이유가 조금 짐작되기도 한다. 그들은 실제 세상 속에서 실제 사람들과 대화를 해 본 적도, 그들 속에서 함께 일해 본 적도 없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자기들만의 안전한 성에 갇혀서 히키코모리가 되어버리니, 온 세상에 음모가 가득하고, 오직 자기와 지지자들만이 마지막까지 남은 생존자라는 괴상한 의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부디 세상에 좀 나와야 할 텐데, 그들은 그럴 용기가 없다.


나와 다른 존재를 만나는 것은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인간과 가장 다른 존재인 하나님을 만났던 사람들이 하나 같이 두려워하며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했던 이유이기도 하다.(오늘날 자신이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오히려 하나님을 수하처럼 부리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걸 보면, 어쩌면 그가 만났다고 주장하는 하나님은 실은 하나님 흉내를 내고 있는 다른 게 아니었나 싶은 깊은 의혹이 든다)


정도는 다르지만 다른 사람을 만날 때도 비슷한 감각일 것이다. 물론 개인적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해야 하는 일과 국가적 단위에서 할 수 있는 일 사이의 차이는 존재한다. 교회가 하는 일과 국가가 하는 일도 다르다. 그러나 결국 일을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신뢰하는 사람은 지금 여기서 해야 할 일을 미루거나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





차이를 뛰어넘는 그리스도인은 차이를 무시하거나 없다고 보지 않는다. 또, 분명 어떤 차이는 우리의 정체성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대화의 의지를 꺾지는 않는다. 비록 상대가 우리와 대화하려는 의지가 없을 때라도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지는 겸손은 나약함과 다르다. 그건 상대에게 무조건 맞춰주려는 태도가 아니라, 내가 가진 뿌리의 단단함을 신뢰하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관용과도 잇닿아 있다.


기독교인들의 의지나 바람과는 상관없이, 사회는 점점 더 다원적 상황으로 흘러갈 것이다. 물론 일부의 반동적 노력들이 잠시 성과를 거두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순수한 단일적 문화적, 민족적 공동체라는 개념 자체가 인류 역사 가운데 등장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애초에 기독교는 다양한 문화들이 섞여 있는 로마제국 안에서 시작되었고, 그 다양한 배경들은 교회를 채색하는 다채로운 색깔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교회를 더 빛나게 만들었다. 유전적 동질성에 대한 집착은 결국 작은 바이러스로 단번에 멸종될 수 있는 위기를 초래하게 된다. 교회는 이 위기를 잘 대처해 나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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