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과 고대 근동의 점술 고대 근동 시리즈 15
강승일 지음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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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식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하나의 문화는 그 주변부와 다양한 상호작용을 하기 마련이고, 이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게 된다. 특별히 국가적 문화양식은 그 나라의 힘과도 연관이 되어 있어서, 대체로 강한 나라의 문화가 주변국으로 퍼져나가기 마련이다. 물론 중국의 원나라나 청나라처럼 강한 힘을 지난 이민족 국가가 피정복민인 한족의 문화에 동화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이 경우 비록 정복을 당하긴 했지만 피정복민들의 수와 영역이 월등히 많고 넓었다는 특이점이 영향을 주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즉 여기서 말하는 “강한 나라”란 단순히 군사적인 힘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뜻.


아무튼, 이런 경향은 고대 이스라엘의 문화에도 대체로 적용된다. 이 책에서 다루는 중심 주제인 “점술” 또한 그렇다. 기독교인들은 흔히 고대 이스라엘에서 점술은 엄격히 금지되었다고만 배우지만, 이 책의 저자는 고대 근동(주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가 자세히 다뤄지고, 히타이트와 가나안이 일부 설명된다)의 다양한 점술 사례들을 고고학과 문헌학적으로 살핀 뒤, 이들 인근 문화권의 점술에 관한 관행이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유사하게 발견된다고 지적한다. 흥미로운 내용이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점술이라는 주제로 고대 근동의 역사와 문화를 잘 정리해 냈다는 점이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히타이트와 가나안 지역의 점술 문화를 그 유형별로 나누어 고대 신화나 문학 속 언급들을 잘 분류했다. 여기에 고대 이스라엘의 점술 문화 역시 이런 유형에 따라 분류하고 있다. 책을 읽다보면 이렇게까지 다양한 영향을 받았구나 싶다.


고대 이스라엘의 점술 문화를 추정해 볼 수 있는 자료가 거의 구약성경에 한정된다는 점과 일부 고고학적 발굴이 전부라는 점은 아쉽다. 하지만 저자는 꽤 충실한 연구를 통해서 최소한 고대 이스라엘의 민간 문화 속에서 점술이 퍽 널리 사용되었다는 점을 나름 입증해 낸 것처럼 보인다. 물론 많은 경우 민간의 점술 문화를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지만, 일부 구절들은 지나치게 넓게 해석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또, 고고학적 결과물들을 정리하는 부분은 잘 해냈지만, 그 결과물들을 엮어서 결론을 내는 과정은 평이했다. 문서설에 기초해서 비교적 후대에 신명기적 사가들에 의해 민간의 점술 관행이 억압되었다는 식의 설명은 학계에서는 매우 흔하게 사용되는 추정이긴 하지만, 이런 종류의 추정에는 언제나 그렇듯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선입관 이외의) 별다른 결정적인 근거가 있는 건 아니라서 얼마든지 전혀 다른 방식의 추정도 가능하다.


하지만 어떤 결과물은 그저 흩어진 자료들을 잘 정리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인정을 받을 만한 법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이 그런 결과물 중 하나라고 본다. 당장에 여러번 반복해 읽을 것 은 아니지만, 필요할 때 꼭 다시 찾아보게 될 그런 좋은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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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켄슈타인 청소년 모던 클래식 6
메리 셸리 지음, 박선민 옮김 / 구름서재(다빈치기프트)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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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1년에 나온 고전 문학 작품이다. 여기저기서 관련 내용을 파편적으로 들은 경우는 많았지만, 정작 이렇게 각 잡고 처음부터 읽어본 건 이번이 처음이다. 결정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내용 중 하나는 소설 속 인공적으로 탄생한 괴물의 이름이 프랑켄슈타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인데, 실은 괴물을 만들어 낸 사람의 이름이다.


청소년 도서 기획이다 보니 책의 이해를 돕기 위한 몇 가지 글들이 책 뒤에 붙어 있다. 작가라든지 당시의 시대적 배경에 관한 설명이 간단히 소개되어 있는데, 꽤 도움이 되는 내용들이다. 우선 이 작품에는 18세기 말부터 유럽에 유행했던 낭만주의의 영향으로 이전 시기의 질서와 조화, 균형에 반대되는, 비합리적이고 초자연적인 것들에 대한 추구가 두드러진다. 비슷한 이야기가 고딕소설이라는 장르에서도 나오는데, 이전 시대의 억압된 인간의 비이성적인 측면을 집중적으로 다루는 책이라는 의미다. 뭔가 으스스하고 그로테스크한 이 작품의 분위기를 설명해 주는 키워드들이다.





소설은 액자식 구성으로 되어 있는데, 윌튼이라는 이름의 모험가가 배를 타고 북극을 탐험하러 가는 도중 한 사내를 만나게 되는데 그가 바로 프랑켄슈타인이다. 그는 자신이 어떤 존재를 쫓고 있으며, 그 이유가 되는 과거사를 풀어 놓는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 가운데 그가 괴물로부터 들었다고 하는 괴물의 경험담이 또 실려 있다. 이중의 액자 구성이다.


제네바의 행복한 가정에서 태어난 프랑켄슈타인은 과학에 관심이 많았고,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를 하던 중 생명을 탄생시킬 수 있는 원리를 깨닫게 된다. 그리고 마침내 11월의 어느 밤, 묘시를 뒤져 시체를 파헤치고 동물을 실험한 결과물로 마침내 그만의 생명체를 탄생시키게 된다.

책에는 이 때 프랑켄슈타인의 심리가 이렇게 묘사되어 있는데 “행복하고 우수한 생명체들이 내 손에서 탄생하면 자신의 창조주이자 근원인 나에게로 축복의 입맞춤을 해 주리라고 생각했습니다”라는 구절이다. 애초에 프랑켄슈타인은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의 의미가 무엇인지 별다른 고민을 하지 않고 있었고, 그저 자신에 감상에 빠져 있었을 뿐이었다.


기술이 가져올 수도 있는 부작용에 대한 고민 없이 그저 “할 수 있으니 하는 것일 뿐”이라는 현대의 기술주의적 과학자들의 면모가 언뜻 묻어나는 것 같기도 하다. 예컨대 오늘날의 AI 기술의 무절제한 발전은 어쩌면 또 다른 프랑켄슈타인의 괴물을 만들어 내는 일일 지도 모르지 않은가.





그렇게 무작정 저질러버린 결과는 참혹했다. 생명을 얻은 괴물은 인간보다 우월한 육체적 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지력 또한 인간에 필적했다. 문제는 그 기괴한 외모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쉽게 받아들여질 수 없었고, 몇 차례에 걸려 강경한 거부를 경험한 그는 곧 인간에 대한 원한을 깊이 가지고 사람들을 해치기 시작한다.


결국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의 지인들에게까지 손을 뻗쳤고, 처음에는 동생이, 친구가, 마침내는 아내까지 잃은 후에야 프랑켄슈타인은 괴물과 맞서 싸워 해치워야겠다는 결심을 한다. 여기까지 이르는 과정이 퍽이나 답답한데, 자신이 괴물을 만들어 냈다는 것을 쉽게 알릴 수 없었다지만 억울한 사람들까지 얽혀 들어가는 데도 그저 벌벌 떨면서 점차 우울증에 빠져 들어가는 모습 이외의 어떤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않는다. 마치 누군가 나와서 자기 대신 문제를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심지어 괴물이 결혼식 첫날밤에 사고를 칠 것이라고 친절하게 예고를 해 주었는데요, 프랑켄슈타인은 혼자 마음속으로만 각오를 한 채 아내에게는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고, 심지어 혼자서 방에 들어가도록 만든다. 당연히 괴물은 프랑켄슈타인의 아내 혼자 있는 방에 들어가 그녀를 살해하고 도망친다. 뒤늦게 도착해서 당황하며 울부짖는 모습은 그냥 미련하게 보일 뿐. 물론 200년 전 소설인지라 인물의 행동에 답답한 면은 어느 정도 감안해야겠지만, 이건 좀 지나치지 않나 싶은.


결국 괴물의 유인에 따라 북극 어딘가로 추격하던 프랑켄슈타인은 체력이 약해져 책 초반에 나오는 윌튼 선장의 배에 구조되지만, 자신이 겪은 일을 설명하고는 얼마 못가 세상을 떠나고 만다. 결과적으로 그는 자신이 저지른 일을 아무 것도 수습하지 못한 채, 주변에 엄청난 피해만 입히고는, 혼자만의 좌절과 실의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죽어버린 것이다. 엄청난 민폐 캐릭터라고 할 수 있을 텐데, 사실 생각해 보면 이런 사람들이 어디 한두 명이던가.





인격을 가진 생명체의 창조라는 면에서 성경의 창조 이야기를 떠올리게도 한다. 외로움을 견디다 못해서 자신의 짝이 될 만한 존재를 만들어 달라고 프랑켄슈타인을 찾아온 괴물의 이야기는 성경의 비틀린 베리에이션처럼 보이기도 하고. 하지만 이 부분에서는 별다른 추가적인 전개는 보이지 않는다.


현대에도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작품이긴 하다. 과학의 무절제에 대한 비판으로도,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비판이나 비인간 생명체와의 공존에 관한 사유도 가능하다. 배경 묘사도 좋아서 다양한 장소와 계절이 잘 느껴지기도 한다. 좋은 문학작품이라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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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성경을 찾아줘 믿음 첫 단추 2
정석원 지음 / 홍성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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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인 “기독교 세계관이 필요해”에서 청소년과 초심자를 대상으로 기독교 세계관이 무엇인지를 쉽게 소개했던 저자가, 이번에는 같은 독자들을 위해 성경의 전반적인 개론을 가능한 쉽게 풀어놓은 책을 내놓았다. 일종의 성경 개론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학문적이라기보다는 실용적인 목적이 좀 더 강한 그런 책이다.


1부와 2부에서는 성경에 관한 큰 그림을 그려주고, 3부에서는 구약을, 4부에서는 신약의 흐름을 잡아준다. 마지막 5부에서는 성경을 읽어야 하는 필요성과 이를 위해 도움이 될 만한 몇 가지 팁을 제시한다. 전체적인 구성은 짜임새가 있다.





사실 책의 내용 자체는 기본적인 것들이라 특별히 새로운 부분은 없었지만, 그 풀이 방식이 재미있다. 특히 구약과 신약을 지하철 노선도처럼 배열해서 이미지화 한 부분은 기발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 신약을 다이어그램으로 설명하는 부분에서 “공관복음서를 일반 열차라고 하면, 요한복음은 테마 열차”라고 설명한 부분은 탁월했다.


각 장의 말미에 성경에 관한 질문들이 하나씩 덧붙여 있고 이에 대한 저자의 간략한 대답들이 나오는데, 본문의 내용과 직접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은 (구성상) 살짝 아쉽지만, 전편과 마찬가지로 보수적 신학 아래 나름 충실한 대답들을 담고 있다.


성경이라는, 적지 않은 분량의 책을 고작 몇 개의 장들에 다 담아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때문에 저자는 몇 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각각 다섯 개) 구약과 신약을 요약하는데, 뭐 초심자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우선은 이 정도의 요약으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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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요더의 정치학 - 존 하워드 요더의 성폭력과 교회의 대응
김성한 지음 / IVP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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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 책을 좀 우울하고 슬픈 책으로 시작한다. 이 책은 존 하워드 요더라는 인물의 성범죄와 이를 공식적으로 올바로 처리하지 못했던 한 교단에 관한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요더가 쓴 책을 직접 읽어본 적은 없지만, 유명한 기독교 윤리학자인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자서전(“한나의 아이”)에서 그가 요더로부터 얼마나 큰 영향을 받았는지를 받고 요더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었다.


그랬던 요더가, 실은 수십 년 동안 매우 많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집요하게 성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였고, 그가 속한 재세례파 교단(메노나이트)에서 이를 적절하게 처리하는 데 실패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하우어워스와 마찬가지로 요더 역시 기독교 윤리학자였고, 그것도 평화신학의 거두이자 재세례파 교단을 대표하는 학자였다는 것이 이 사건의 기이함을 더욱 부각시켰다.





사실 요더의 성범죄는 그가 교수로 있던 대학에서부터 문제로 지적되었지만, 당시 총장과 교단은 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최종적으로 약 4년 동안의 징계절차가 있었지만, 그 기간이 지나면서 교단은 요더가 가진 지적 은사를 적극 활용할 것을 주문하기까지 했다. 4년 동안 이어졌던 목회직 중단은 애초에 요더가 목회를 수행하지 않았음을 생각할 때 의미가 없는 조치였고, 무엇보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된다.


상황이 바뀐 것은 요더가 세상을 떠난 후였다. 그가 재직했던 대학에 사라 웽어 쉥크라는 여성 총장이 부임했고, 그녀는 이전의 총장들과 다르게 이 학교와 전혀 인연이 없었던 외부자였다. 사건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위치였다는 것. 결국 그녀는 요더의 문제를 공식적으로 드러내는 데 성공했고, 수많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담아 학교와 교단의 공식적인 사과와 회복을 위한 조치를 추동하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전 조직과 사건에 관한 이해관계가 없는 외부인들을 중심으로 대책위를 꾸려야 하고, 특히 성범죄 같은 문제들에서는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좀 더 존중받을 수 있는 분위기(예컨대 사라 같은 여성이 중심이 된 대책조직 같은)를 만들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이때 피해자 중심성이라는 것은 단순히 일방적인 주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데, 우리나라의 최근 몇몇 예들에서 알 수 있듯 여성이라고 해서 모두 정직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사실 성범죄와 관련해서 이 부분이 참 어렵다)





요더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학자였다. 그렇기에 그가 저지른 범죄를 적절하게 처리하는 데는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세상은 변했고,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이전처럼 정보를 숨기고 감추는 것이 쉽지만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예를 보면 요더처럼 큰 명성이 없더라도, 그리고 세상이 아무리 변했어도 일단 얼굴에 철판을 깔고 당당히 나가면 무슨 수를 써도 처리가 쉽지는 않겠다는 생각도 든다.


지난 해 한 대형 교단 총회장이 불륜으로 담임목사자리에서 사임하면서 수 억 원 대의 전별금을 당당히 요구하고, 교회에서는 그를 내보내기 위해 이 요구를 수용하기로 결정하기도 했다. 또 책에도 언급되었던 삼일교회 전병욱 목사의 성범죄는 아예 교단 차원에서 별다른 처벌을 하는 걸 포기하기도 했으니, 비슷한 사건을 저지르는 범죄자들에게 퍽 용기를 불어넣어 줄 만한 상황이다.


분명 요더가 남긴 저작들과 그가 저지른 범죄 행위를 따로 떼어서 놓고 볼 수는 없다. 나쁜 사람이 좋은 신학자가 될 수 있느냐는 질문은 너무나 타당하다. 책에서 저자는 초보적이나마 요더가 그의 신학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을 저질렀는가가 아니라, 그의 신학이 가진 문제점 때문에 그런 일을 저질렀을 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소개한다. 이는 재세례파 전통에 서 있는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신학적 문제일 수도 있는 지점인데, 그들은 너무 빨리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순종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착각했다.


비슷한 차원에서 한국 교회의 많은 주요 리더들이 여전히 많은 윤리적 문제들을 일으키고 있고, 그마저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상황 또한, 뭔가 개별적인 일탈로만 볼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잘못된 신학을 갖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하지 않나 싶다. 씁쓸한 이야기지만, 이젠 너무 확연해서 피할 수 없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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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철학 - 고양이와 삶의 의미
존 그레이 지음, 김희연 옮김 / 이학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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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고양이가 들어있었다는 게 이 책을 도서관에서 집어온 결정적인 이유였던 거.. 맞다. 물론 대충 몇 장을 떠들어 보기는 했는데, 의외로 진지한 철학 책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고민 없이 들고 왔다.


책은 고양이의 삶과 인간의 삶을 대조하면서, 인류의 철학사에서 제시되었던 주요 주장들을 고양이의 입장(으로 위장된 저자의 생각이겠지)에서 보면 별 것 아니라는 식의(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도 괜찮다고 읽을 수도 있다) 논평을 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면 책 초반 저자는 인간 삶의 대부분은 행복을 위한 투쟁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고양이들 사이의 행복은 그저 실제적인 위협이 사라지면 기본적으로 유지하는 상태라고 말하면서, 뭘 대단한 걸 자꾸 이루려고 그러느냐, 그냥 지금 큰 위기 없이 살고 있으면 나름 행복한 게 아니겠느냐는 결론으로 이어간다. 사실 책 전반에 걸쳐 이런 식의 주장이 반복된다.





너무 태평스러운 말 아니냐는 반문이 충분히 가능하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철학사 전반에 관한 요약 및 그 비평과 함께 들이미니 책의 수준을 가지고 쉽게 뭐라고 하기에는 또 머뭇거려진다. 하지만 또 하나하나 따져들어 가면 저자의 주장에 대한 반박도 못할 건 아니다.


책에서 저자가 비판하는 건 합리주의적 철학과 인류와 우주의 거대한 목적이나 목표에 대한 사유들이다. 손에 잡히지도 않는 그런 것들을 고민해 봐야 무슨 소용이냐는 식이다. 그렇다고 거대 담론에 대한 강한 부정을 표방하는 포스트모더니즘에 친화적인 것도 아닌데, 그 역시 사실은 대단히 독단적인 전체주의적 철학인 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저자는 세속의 일들로부터 한 발 물러서서 관조하고 평론하는 입장을 취하고자 하고 있는데, 이건 도교 같은 동양의 철학에 약간은 호의적인 데서도 드러나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래서 뭘 원하는 것이냐, 당신이 말하는 것이 실현 가능한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별반 깊은 설명이 없으니, 딱 평론가의 입장에서 본 모두 까기의 느낌 그 이상은 아니다.





그래도 고양이의 삶에 관한 다양한 관찰들과 사유들은 흥미로웠고, 고양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몇몇 문학 작품들 속 철학적 메시지와 철학사 전반에 관한 이해 등등 읽어가는 즐거움을 주기도 했다.


애초에 사람이 고양이처럼 살 수도 없는 법이고, 고양이에게 지나친 의인화를 통한 투영을 하는 심리 자체도 현실에 대한 불편함을 표출하는 한 가지 방식이라는 점에서 저자의 주장을 문자적으로만 읽는 건 무리일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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