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80년대를 한 시골 어촌마을에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출현했다. 가축이고 사람이고 닥치는 대로 죽이며 다니지만, 이 마을에 괴물에 대처할 수 있는 사람은 몇 안 된다. 인근에 난 산불을 끄기 위해 대거 동원되어 나간 것. 결국 마을의 파출소정 범석(황정민)과 그를 따르는 순경 성애(정호연), 그리고 범석의 먼 조카 성기(조인성)와 그 친구들이 나설 수밖에...



비주얼.


영상이 꽤 좋다. 50년 전 정말로 어딘가에 있었을 것 같은 가상의 항구 호포항을 리얼하게 그려냈다.(다 세트를 만들었다던가...) 엄청난 파괴력을 지니고 있는 괴물을 쫓는 장면은 이제 헐리우드 영화 못지않은 스릴을 자아낸다. 확실히 기술력은 크게 뒤처지지 않게 된 건가 싶을 정도.


특히 영화 초반 범석을 따라서 괴물을 추적해 나가는 장면은 제법 오래 진행되었는데도 전혀 지루한 감이 없었다. 쉴 새 없이 욕지거리를 내뱉는 건 캐릭터 설정이 좀 과하다 싶긴 했지만, 뭔가 흑막이 있을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끝까지 성실하게 자신의 직무를 수행하려고 애썼던 서장의 모습이, 그 압도적인 상대에 비해 너무나도 약한 시골 경찰의 모습이 잘 그려진다.


추격전 중간에 갑자기 등장해서 유탄발사기까지 날리는 성애의 모습도 굉장한 여전사가 출현하는 건가 싶었다. 조금은 후줄근하면서도 나름 그 시대 상남자의 최신 유행(?)이었을 복장의 성기까지, 각 캐릭터의 비주얼도 당장에 무슨 게임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스타일리쉬하다. 심지어 괴물의 정체가 밝혀지고, 마지막의 그 무지막지한 함선까지도, 사실 영상의 볼거리 측면에서는 근래 본 한국 영화 중 최고가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





장르가?


극의 전반부는 압도적 힘을 지닌 괴물을 추격하는 인간들의 이야기였다. 그러나 막상 괴물들과 마주하게 되면서 이제는 도망치기 바쁜 탈출기로 이야기가 반전된다. 기본적으로는 흥미로운 전환이라고 봤다. 그리고 이 모든 상황들은 쉴 새 없이 욕을 내뱉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만큼 압도적인 ‘괴물’들을 마주한 인간들의 긴장감을 보여준다.


그런데 이 긴장을 어떻게든 조금은 풀어주어야겠다는 압박감(?)이 강했던 건지, 감독은 5분에 한 번씩은 관객을 웃기려고 애쓴다. 보건소장으로 나온 배우 황석정은 아예 개그캐릭터로 넣은 듯한데, 그 압도적이고 특이한 괴물의 사체를 보고도 제대로 놀라거나 최소한의 과학적 추론을 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냥 썰고, 이상하네 하고 사라진다. 아무리 시대 배경이 7, 80년대라고 해도 이 정도 반응이 일반적이었을까?


여기에 배우들이 벌이는 티키타카는 대체로 말장난, 슬랩스틱 코미디,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대사 등으로 이루어진다. 개인적으로는 이런 걸로 시간을 소비할 때마다 지루했다. 마치 영화 “외계+인”을 보는 느낌이랄까. 애초에 이 영화는 코미디가 아니지 않았던가. 같은 차원에서 영화 종반부의 승용차 추격(?) 아니 도주신은 그냥 영화가 개그물로 전락하는 슬픈 시간들이었다.





스토리는...


영화 속 ‘괴물’의 정체가 외계인임이 밝혀지면서, 이야기는 또 다른 방향으로 급격히 흘러간다. 이제까지는 그저 괴물을 쫓는 추격적인 듯했지만, 갑자기 지구에 불시착한 외계인들에게도 뭔가가 있다는 식으로 흘러가기 때문. 그런데 영화가 끝날 때까지 그 외계인들의 ‘사정’이 정확히 무엇인지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다. 만약 후속편을 예정하지 않았다면 영화의 완성도가 떨어진다고 할 수밖에. 그리고 후속편이 있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전편을 마무리하는 게 맞나 싶긴 하다.


이게 SF라면 그에 걸맞은 S, 즉 Science가 필요하다. 뭐 70년대 우리나라의 무기체계로 외계인과 맞설 수 있긴 할까 싶은 생각은 별개로 하더라도, 우주선까지, 그것도 결말부에 나오는 그렇게 거대한 함선까지 만들어 타고 다닐 수 있는 외계인이, 정작 지구에 와서는 압도적인 피지컬만 보여준다는 부분이 꽤나 아쉽다. 그 흔한 무기 하나 없이 맨몸으로 달리고, 물어뜯고, 부딪혀 파괴하는 게 전부인 건가.


이야기가 너무 허접하다. 너무나 잘 만든 비주얼적 부분 때문에 이 부분이 더 크게 느껴지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 뭔가 복잡하게 만들어야 예술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애초에 이건 오락영화에 가깝지 않던가. 그렇다면 좀 익숙하고 흔하더라도 이해가 되고, 설명이 되는 쪽으로 이야기를 이끌고 갔어야 했다. 그렇다면 진부하다는 평가를 받았을지 모르나, 잘만 하면 휴머니즘을 자극해서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평을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쯤 되면 괴작이라고 해야 할지, 졸작이라고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사실 난 신파도 그리 까다롭지 않은 쪽이다. 평론가들이야 그 진부함을, 게으름을 운운할지 모르겠지만, 나 같은 보통의 관객이야 울든 웃든 극에 충분히 빠졌나가 나오면 좋을 뿐이다. 그런데 이렇게 초반에는 몰입하게 만들어 놓고서 점점 의아하게 하더니, 인상을 찌뿌린 채로 영화관을 나오게 하면 어쩌라는 건지...


사실 그러면서도 영화의 상영시간이 꽤나 길다. 두 시간 반이면, 뭐가 됐든 이야기가 제대로 마무리 됐어야 했다. 중간 중간 의미 없는 반복이나 유머를 좀 빼고, 이야기가 개연성을 갖는 결말로 이어지도록 했더라면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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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을 위한 인생독본
이용범 지음 / 생명의말씀사 / 201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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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교회에서 오랜 시간 동안 목회를 한 담임목사가 성도들에게 건네는 인생의 지혜를 담은 책이다. 수십 개의 조언들이 크게 네 개의 장으로 되어 있다. 성실한 청지기가 되라, 함께하는 삶을 추구하라, 향기로운 그리스도인이 되라, 마음의 정원을 가꾸라 라는 제목만 봐도 대략 어떤 내용인지 짐작할 수 있다.


크게 복잡하거나 어려운 내용은 아니다. 다양한 예화와 함께 간단한 교훈을 전달하는 식으로 각 장이 구성되어 있다. 어떻게 보면 설교의 도입부에 넣을 만한 내용처럼 보이기도 한다. 다만 예화의 경우 저자 자신의 새로운 통찰이나 경험이 많이 실렸다기 보다는, 익숙한 느낌의 예화들이 많이 보인다. 다만 그 중 사실과 다른 내용(솔개가 나이를 먹으면 스스로 부리와 발톱을 뽑아낸 후 새로운 삶을 살아간다는 건 조류학자들도 황당해 하는 인터넷 괴담이다)도 보이는 게 아쉬운 부분.


물론 그래도 읽어볼 만한 예화들, 그리고 조언들이 가득하다. 앞서도 말했듯이, 설교에 예화로 쓸 수 있는 소스들도 많이 담겨 있고. 전반적인 논조와 글의 방향성도 건강하고, 전체적으로 쉬운 글인지라, 한 편씩 차분하게 읽어 보면 분명 유익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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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도 복제가 되나요 안전가옥 쇼-트 34
윤혜성 지음 / 안전가옥 / 202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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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아내가 세상을 떠났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은 외할머니와 살겠다며 먼 나라로 떠나버렸다. 하나밖에 없는 동생 말고는 이 사실을 아무도 알지 못하는 상황. 그리고 어느 날 집 앞으로 죽은 아내의 이름으로 발송된 커다란 소포가 하나 도착했다.


놀랍게도 상자 안에는 주인공 수한과 똑같은 모습의 또 하나의 사람이 들어 있었다. 자신을 수한의 복제인간이라고 소개하는 그와 함께 온 쪽지에는 서툰 글씨로 “너도 너 같은 새끼랑 살아봐”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수한의 죽은 아내는 소설 속 가공의 나라인 리벨라우스 출신으로 우리말을 제대로 못 한다는 설정. 와우 이 소설 복제인간을 다루고 있었다.



소설은 나와 똑같은 모양의 복제인간과 함께 살아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하는 꽤 현실적인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다. 소설 속 시대는 가까운 미래로 보이는데, 복제인간을 만드는 행위는 불법으로 여겨지고, 적발될 경우 복제인간은 ‘폐기’된다. 주인공 수한 역시 이를 알고 있었다.

그런데 상황이 좀 더 복잡하다. 수한은 아들의 양육권을 장모와 다투고 있었는데, 안 그래도 낮은 점수(이 시대에는 AI로 적합도 점수를 매긴다)를 가진 상황에 복제인간 같은 불법요소까지 알려지면 더욱 불리해 질 수 있었던 것.


결국 잠정적인 동거를 시작하는데, 수한의 모든 기억을 이식받은 복제인간은 그의 마음을 꿰뚫어 보듯 대화를 이어나갔고, 어느새 수한 역시 경계의 줄을 살짝 놓기까지 한다. 아들과의 만남과 회사 일이 겹치자, 복제인간을 대신 회사에 보내기까지 한다(심지어 자신보다 사람들과의 관계를 더 잘 풀어나간다!).


복제인간이 나를 대신해 회사에 출근하고, 심지어 나보다 일처리도,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도 더 잘 풀어나간다면, 아마 우리 중 십중팔구는 이른바 복제인간으로 ‘자동사냥’을 돌리지 않을까? 그렇게 남은 시간을 더 즐겁고 행복한 일을 하는 데 사용할 거라는 기대를 하면서. 다만 이런 기대는 새로운 게 아니다. 다양한 기계장치들을 도입할 때도 인류는 모든 노동으로부터 해방된 미래를 그렸다. 하지만 결과는 더 많은 일과 더 적은 휴식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아마 AI의 도입도 비슷한 결과를 낳을 것이다. 지금은 자동화니 뭐니 하면서 힘을 덜 들이는 데 도움이 되는 것 같지만, 모두가 그것을 사용하게 된다면, 이제는 기본적으로 습득해야 할 지식의 양과 종류가 늘어날 뿐, 일은 더 많이 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복제인간과의 동거가 꽤 괜찮게 이어지는 듯하던 어느 날, 수한은 복제인간에게 아내의 보험금 관련 은행 업무를 맡겼다가 돌발행동을 벌이고, 갑자기 이야기가 파국으로 치닫는다. 작중 정확하게 묘사되지는 않지만, 복제인간이라는 것도 의식을 갖고 있고, 그 의식은 칩으로 공유되는 기억/지식과 달리 독립적일 수밖에 없다.


그 티핑 포인트 다음부터 복제인간은 수한을 맹렬하게 공격하고 조여 오기 시작한다. 그와 그의 주변 인물들을 위협하고 마침내는 자신이 수한을 대신하고자 한다. 마치 SF 디스토피아물에서 자주 보이는, 기술의 공격으로 위기에 몰린 인류의 상황의 일상 버전이랄까. 그렇게 소설은 점점 인간과 구분되지 않는, 그리고 우리의 통제를 넘어서는 것 같은 과학과 기술에 대한 근원적 공포를 다룬다고 볼 수 있다.


사실 주인공은 굉장히 어려운 상황과 (복제인간이 만든) 불리한 증거들로 둘러싸여 있어 좀처럼 상황을 벗어나기가 어려웠는데, 의외로 매우 인간적인 증언 한 마디로 모든 의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증언의 핵심에는 ‘상처’가 있었다. 상처는 삶 속에서 무수히 만나는 장애물들과의 접촉의 결과다. 우리는 종종 아무런 상처 없이 살아가기를 바라지만 어쩌면 그런 상처가 우리를 우리답게 만드는 핵심요소인지도 모른다.



이 외에도 생의 의지를 불태우는 복제인간의 존재, 복제인간의 “폐기”에 관한 윤리적 문제 같은 좀 더 생각해 볼만한 거리들이 있지만, 작품의 볼륨 상 그리 중요하게 다뤄지지는 않는다. 덕분에 주인공의 심리를 따라가면서 명확한 진행을 얻긴 했지만. 기대했던, 아니 예상했던 것보다 재미있어서 금세 다 읽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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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그 진리를 죽였는가?
레슬리 뉴비긴 지음, 홍병룡 옮김 / IVP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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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우 100여 쪽밖에 안 되는 (판형도 작은) 이 책에 담긴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저자가 이 책에서 다루는 문제는 권위에 관한 것이다. 다른 말로는 진리라고 표현할 수도 있겠다.


기독교 시대가 된 이후 약 1천 년 동안 서양에서는 하나님의 말씀(계시)를 진리의 원천으로 삼아왔다. 그러나 근대성은 그런 권위를 무너뜨렸다. 그들은 자신들의 이성을 중심으로 무엇이 확실한 것인지를 판단하려고 했다. 이성이 권위의 근원이 된 것이다.


그러자 기독교 일각에서도 이런 변화를 수용하려는 태도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른바 자유주의 신학이 그것이다. 저자는 이런 변화가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단언한다. “구세주의 권위를 입증할 만한 근거를 다른 곳에서 찾는 일은 그 구속 행위를 거부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진리를 전달하는 도구로서 공동체를 만드시고, 가르치셨으며, 그 공동체가 성령의 인도를 따르도록 하셨다. 저자는 오늘날 교회가 진리를 주장하기 위한 방식도 이러해야 한다고 말한다. 진리는 증언으로서, 선포로서, 그 이야기 속에서 살아감으로써 제시되어야 한다. 저자는 아예 ‘객관적 진리’의 개념을 버려야 한다고까지 말한다. 진리는 사물을 탐구하듯이 얻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인격적 헌신이 필요한 관계적 성격을 지니는 것이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C. S. 루이스 다음으로 믿고 보는 저자가 레슬리 뉴비긴이다. 신학적 깊이도 깊이려니와 보수적이면서도 현 시대에 대한 깊은 통찰에 감탄을 하게 된다. 여기에 좋은 번역자들을 만났기 때문인지, 전달하고자 하는 개념을 분명하게 설명하는 면도 좋았고.


뉴비긴은 매우 당당하게 기독교 진리를 선포한다. 그러나 그 선포의 방식은 전혀 무례하지 않다. 복음을 살아 내는 방식이어야 하고, 상대를 논리로 굴복시키거나(전형적인 이성 중심의 근대적 진리관에서 나오는 태도다), 힘으로 관철시키는 방식이 아니다. 이건 그가 40여 년 동안 인도에서 선교사로 활동하면서 깊이 배어든 태도가 아닌가 싶다.(물론 이런 관점이 단지 기독교를 윤리종교화 하려는 자유주의자들의 시도와 혼동되어서는 곤란하다.)





제목을 흥미롭게 뽑았다. 원서의 제목은 "Truth and Authority in Modernity"으로, 직역하면 “모더니티에서의 진리와 권위” 정도가 될 텐데, 이쪽이 책의 내용을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내 주기는 하지만, 왠지 맛이 좀 덜하다. 번역서의 구판의 경우 “포스트 모던 시대의 진리”라고 번역했다는데 이건 좀 부정확한 느낌이다. 책에서 지적하는 이성을 진리의 기초로 두는 관점은 포스트모던 보다는 앞선 시대의 특징이니까.


여튼 그래서 개정 번역판의 한글 제목은 궁금증을 자아내게 만든다. 누가 ‘그 진리’를 죽였을까. 일차적으로는 근대의 합리주의적 전통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또 다른 범인은 그런 현대성에 굴복해 복음의 진리를 망가뜨린 이들일 것이다. 아쉽지만, 여전히 그런 이들의 영향력이 생각보다 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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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기원, 단일하든 다채롭든 - 상상과 과학의 경계에서 찾아가는 한민족의 흔적 내 인생에 지혜를 더하는 시간, 인생명강 시리즈 10
강인욱 지음 / 21세기북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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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부터 우리는 단일민족이라는 주장을 교과서로 배웠다.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라는 지형적 특성도 있고, 아무튼 생긴 것들이 다들 비슷해 보이는 사람들로 구성된 나라다 보니 그 설명이 그럼직해 보이기도 했다. 문제는 이런 생각들이 지나치게 강해지면 자연히 ‘우리’와 다른 ‘외부인’에 대한 적대감과 경계심도 높아진다는 것. 물론 정치적 부추김의 영향이 다분하긴 하지만, 혐중, 혐일 정서도 이런 의식이 낳은 부작용이다.


우리는 과연 단일민족인가? 유라시아와 고조선 시대를 집중적으로 연구해 온 고고학자인 저자는 이 질문에 단호하게 아니라고 대답한다. 한반도는 고립된 지역이 아니었다. 저자는 크게 세 갈래로 한반도로의 이주/전래가 있었다고 말한다. 하나는 고조선이 위치했던 요하 유역을 통한 통로고, 두 번째는 북방의 초원에서 들어오는 길이었다. 세 번째는 가장 잘 알려지지 않은 루트로, 러시아 연해주로부터 한반도 동부 해안을 따라 이어지는 환동해 루트다.


저자는 각각의 루트를 상징하는 유물들을 제시한다. 첫 번째 루트의 상징은 비파형 청동검이고, 두 번째 루트는 금관, 세 번째 루트를 보여주는 상징물은 암각화다. 하나같이 다 고고학적 증거들이다. 이른바 원사시대(Protohistory)를 다루다보니, 기록이 많이 남지 않았기에 유물과 유적을 통해 추정해 나갈 수밖에 없다. 확실하지 않다는 건 어쩔 수 없는 한계지만(그래서 같은 유물을 두고서도 꽤나 다양한 해석들이 나오기도 한다), 그래도 최근에 발전한 다양한 과학적 도구들(예를 들면 DNA분석이라든가)을 이용하면 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하니 추후 연구를 기대해 볼 만.





고립은 자랑이 아니다. 그건 상황에 따른 어쩔 수 없는 선택일 수밖에 없고, 대부분의 문명과 사회는 외부와의 교류를 통해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우위에 있는 것을 수출하며 이익을 취한다. 선진문화를 수입하는 건 부끄러워할 일이 아니다. 모든 사람이 빈 땅에서 시작한다면 인류 문명의 발전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나와 내가 속한 공동체를 자랑스러워하는 것이 문제는 아니지만, 그것이 지나치면 역효과가 날 수밖에 없다.


이미 구석기 시대부터 이 땅에는 다양한 그룹이 오고갔다. 민족이라는 개념은 한참 후대에나 발명된 것이고, 이전에는 사실 그런 경계가 명확한 적이 없었다. 우리의 경우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이런 국수주의적 태도가 굳어진 감이 있다. 단일만족이라는 신화는 정치적 구호에 가깝다. 그건 사실을 제대로 반영하지도, 우리에게 진짜 도움이 되지도 않는다.


물론 현실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당장에 넓은 시야로 한반도를 넘어 동아시아, 유라시아의 일원으로서의 자의식을 갖는 게 쉽지는 않을 것이다. 또, 역사공적을 포기하지 않는 중국과 일본과 얽힌 역사를 갖고 있으니 그 또한 문제를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긴 하고. 언젠가 우리 지역 여러 학자들이 공동의 역사 연구를 제대로 진행하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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