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1 - 7부 마스터스 오브 로마 7
콜린 매컬로 지음, 강선재 외 옮김 / 교유서가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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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사르를 암살한 자칭 “해방자들”을 궤멸시킨 후, 카이사르의 후계자 자지를 두고 벌어진 옥타비아누스와 안토니우스 사이의 싸움은 간신히 두 번째 “삼두정치”라는 형태로 봉합되었다. 제국의 서방은 옥타비아누스가, 동방은 안토니우스가 나누어 지배하는 식이었다. 사실 이 선택부터가 안토니우스의 정치적 감각의 부족을 잘 드러내는 부분이다. 분명 동방이 서방보다 재정적으로 더 큰 도움이 되겠지만, 그는 서방에 포함되어 있는 “로마시”의 중요성을 간과했다.


마스터스 오브 로마 시리즈의 마지막 일곱 번째 시리즈인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는 동방과 서방으로 나뉜 두 사람의 행적을 따라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먼저는 안토니우스가, 다음으로는 옥타비아누스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를 설명하고, 마지막에는 두 사람이 다시 만나는 이야기가 나온다.


시리즈 제목도 그렇고, 책 표지는 안토니우스로 추정되는 로마식 복장의 남성과 (클레오파트라로 보이는) 파라오 복장의 여성이 서로 안고 있는 가운데, 그들을 거대한 뱀이 둘러싼 일러스트가 큼직하게 박혀 있다. 아마도 뱀은 로마에서 출산을 담당하던 여성들만의 여신이었던 보나 데아의 제단에 산다는 뱀이 아니었을까. 이번 권에서 그 뱀은 옥타비아누스가 유일하게 사랑했던 아내 리비아가 옥타비아누스를 만나기 얼마 전, 제단에 제물을 바치던 리비아 앞에 나타난다.





흔히 그저 근육만 잔뜩 있지만 지력이 따라오지 못하는 힘캐로만 알려져 있는 안토니우스에 관한 입체적인 묘사가 눈에 들어온다. 물론 그에게는 결정적인 순간에 필요한 결단력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고(안 그랬다면 진작 파르티아 원정에 나섰을 게다), 결국 클레오파트라에게 휘둘리다 자멸한다는 역사 기록에 맞춰 여자에게 약한 모습을 보인 것도 사실이지만, 그래도 자신의 그늘 안으로 몰려온 다양한 사람들을 부리며 세력을 유지해 가는 모습은 나름 지도자로서의 면모가 느껴지기도 한다.


사실 여자에게 약한 부분에서는 남의 부인을 강제 이혼시키고 자기 부인으로 삼은, 또 그러기 위해서 거짓 사유로 자기 부인과 이혼까지 했던 옥타비아누스도 뒤지지 않긴 한다. 몇 편 전부터 티베리우스 클라우디우스 네로(세상에! 이후 로마 황제 3인의 이름이 다 모였다)가 종종 등장하고, 그에 대한 평가가 좀 야박하다는 느낌이 있었는데(이 책에서는 “제2의 카도이되 지성이 없는 카토”라는 표현으로 평가한다), 이번 편에서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는 후에 옥타비아누스가 뺏은 리비아의 남편이었고, 옥타비아누스를 옹호하기 위해선 네로를 무능하고 인격에 문제가 있는 인물로 묘사해야 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옥타비아누스가 안토니우스와 달랐던 결정적인 부분은, 대국을 읽어가는 능력이다. 그는 언제나 안토니우스보다 더 멀리까지, 그리고 더 오랜 후까지 보고 있었다. 이 부분은 옥타비아누스가 20년은 더 젊었기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장점이기도 했으나, 그처럼 젊은 나이에(겨우 20대 초반이었다) 그 정도의 정국을 구상할 수 있었다는 건 확실히 천재적인 면모이긴 하다.





이번 권에서는 두 사람의 정면대결까지 이어지지는 않는다. 다만 옥타비아누스의 상황이 퍽 위태로웠고(동쪽에는 안토니우스가, 남쪽에는 폼페이우스의 아들 섹스투스가 시칠리아를 근거지로 삼아 바다를 장악해 곡물수입을 막고 있었고, 히스파니아와 갈리아에서는 소규모 반란까지..) 이를 하나하나 풀어가는 옥타비아누스의 결단이 특별히 인상적이다. 결정적으로 안토니우스와의 평화를 위해 누나인 옥타비아를 그에게 아내로 주기까지..(과거 카이사르가 자신의 딸 율리아를 폼페이우스와 결혼시켰던 것처럼)


국가적 단위의 사건들과 개인적인 판단과 결정들이 쉴 새 없이 서로 얽히며 복잡한 무늬의 태피스트리를 만들어 가는 것이 확실히 이 시리즈의 장점인 것 같다. 캐릭터 하나가 버려지지 않고 있다가, 몇 편이 지난 후 작가가 왜 그 인물을 그러게 묘사했는지그 꿰어맞춰지는 걸 보는 게 퍽 재미있는 포인트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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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 권력, 영광
팀 앨버타 지음, 이은진 옮김 / 비아토르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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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탄에게 시험을 받으신다. 사탄은 예수님에게 세상의 모든 나라들(kingdoms)을 보여준 후, 그 모든 권력(power)과 그 영광(glory)을 주겠다고 유혹했다(KJV 번역 기준). 그리고 또 다른 장면. 마태복음 6장에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문의 마지막 자락에 이런 구절을 덧붙이신다. “나라(kingdom)와 권세(power)와 영광(glory)이 아버지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것들이 사탄이 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만 속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셨던 것이다.


이 책의 제목도 여기서 나왔다. 저자는 오늘날 미국 복음주의라고 칭해지는 보수적 정치관을 공유하는 기독교인 무리가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하나님이 아닌 세상에서 찾고(얻으려고) 있다는 점을 강력하게 고발한다. 미국 복음주의의 문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책 속 한 목회자는 이렇게 대답한다. “너무 많은 이들이 미국을 숭배한다”고.





책은 제목에 따라 크게 3부(나라, 권력, 영광)로 구성되어 있는데, 그 1부인 “나라”에서는 단순히 교회(댈러스제일침례교회, 플러드게이트교회)나 단체(모럴 머조리티) 단위만이 아니라 교단(남침례교)과 신학교(리버티 대학교) 차원에서 벌어지는 과도한 정치 종속(정확히는 트럼프로 상징되는 미국 극우 정파와의 결합)의 문제를 다룬다.


물론 기독교인들이 각자의 판단에 따라 특정한 정당을 지지하거나 정파에 소속되는 것은 가능하다. 문제는 정치가 기독교의 중심 무대로 올라올 때다. 실제로 여기 소개되는 사례들을 보면, 교회 강단에 정치인을 세워 정치발언을 하도록 내버려두고, 이 과정에서 성경은 언급되지 않거나 부정확하게 인용될 뿐이다. 심지어는 성경의 명백한 진술들은 무시되거나, 반대 주장이 환호를 받기도 한다.


당연히 이 과정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희생된다. 정치와 신앙 사이의 긴장 관계를 고수하는 사람들, 희생자와 억눌린 자들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들, 그리고 무엇보다 그들의 주장 속 모순과 허위를 드러내려는 사람들이 그 대상이다. 그들은 교회에서, 학교에서, 교단에서 쫓겨나고, 사람들로부터 폭언과 따돌림을 당했다.


이 모든 것이 “교회” 안에서,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 기독교와 교회를 지키는 일이라고 단단히 착각하고 있다. 여기에는 세속사회가 기독교를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다는 두려움과 불안감이 전제되어 있고, 그 공포를 자극시켜 극단적인 행동으로 나서게 만드는 사기꾼들(목사와 정치인)들이 있다. 저는 이를 이렇게 표현한다. “기독교적 가치를 지키는 첫 번째 단계는 기독교적 가치를 포기하는 것이었다.”





미국 복음주의의 극우화는 자연스럽게 최근 우리나라에서도 온갖 난리를 일으켰던 이상한 목사들의 얼굴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들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었다. 이미 그들의 전범은 미국에서 진작부터 비슷한 일을 하고 있었다. 사실 문제는 앞에 있는 그들만이 아니라, 이런 사태에 대해 내 일이 아니라는 식으로 왜곡된 정적주의에 빠져 있는 수많은 목회자들도 이런 사태에 일조한 셈이다.


책의 저자는 목사였던 아버지의 죽음 후, 자신이 어린 시절을 보냈던 교회에서 일어나는 이상 반응들을 처음에는 그냥 넘기고자 했었다. 교회와 극우정파의 과도한 일체화에 경계를 했던 그에게, 일부 교인들은 사이버불링으로 대응했다. 별 생각 없이, 그저 흥미로운 반응 정도로 여겼던 일들이, 실은 더 큰 위기를 예고하는 경고등이었음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고 후회하는 부분이 등장한다.


최근 한국 교회에서 크게 불거진 문제들을 보면, 어쩌면 이미 그런 경고등 점멸의 단지는 지나가 버린 것 같기도 하다. 폭동을 선동하고, 폭력까지도 동원해 자기의 의사를 관철시키면서도, 시종일관 성경과 하나님을 운운하는 신성모독적 행위를 보면서도, 소속 교단은 제명과 같은 실제적인 조치를 할 생각이 전혀 없고, 틈만 나면 “장자 교단” 운운하며 큰 규모를 경쟁적으로 과시하던 주요 교단들 역시 명확하게 선을 긋지 않고 있다. 실은 내심은 그들에게 (폭력까지는 아니라도 그들이 주장하고 있는 내용에는) 동조하고 있기 따름이리라.


사실 근본적인 문제는 교회가 특정한 정치세력과 손을 잡았다는 자체가 아니다. 진짜 문제는, 그렇게 나라와 권세와 영광을 세속에서 찾으려고 하면서, 자연스럽게 온갖 종류의 부적절한 타협이 정당화되고, 자연히 교회 내 다양한 범죄들도 은폐되고 만다는 점이다. 예수님께서 사탄의 제안을 단호하게 거절하신 가장 큰 이유가 여기 있을 텐데, 오늘날 교회는 이를 깨닫지 못하는 것 같다.





책의 후반부에는 그래도 작은 희망을 찾을 만한 내용이 등장한다. 정치화된 교단과 교회로부터 배척당했던 이들에게 다시 기회가 주어지고 있었다. 2대에 걸쳐 리버티 신학교를 지배했던 팔웰 부자 중 아들은 결국 이사회에서 축출되었고, 남침례교단의 집행위원회에는 교단 내 추문과 문제를 은폐하려던 세력이 선거에서 패했다. 그리고 저자의 아버지가 목회하던 코너스톤의 교회는 기존의 교인들이 대거 떠난 자리에, 정치적인 문제에 좀 더 균형적인 시각을 원하는 새로운 교인들이 들어와 자리를 채웠다.


물론 모든 상황이 이런 식으로 극적인 전환이 이루어지지는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런 소망의 흔적들은 우리에게 용기를 준다. 성경의 마지막 책인 요한계시록은 세상의 권세를 이기는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 그분의 최종적인 승리를 담고 있다. 결국 그리스도인은 이 소망을 붙들고 살아가는 사람들임을 기억한다면, 이런 모습들을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선물이라고 볼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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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브르의 안경 - 곤충이라는 작고 오묘한 세계
성영은 지음 / 홍성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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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브르의 “곤충기”라는 책은 읽어보지는 못했더라도 다들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게다. 사실 나도 딱 그 정도였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 곤충을 관찰한 기록을 책으로 엮었다 정도. 이번에 손에 든 책 제목에 실린 “파브르”가 바로 그 파브르다. 저자는 그의 곤충기에 나오는 다양한 곤충들의 식생 중 일부를 옮기면서 생명의 신비라는 주제에 집중한다.


사실 책을 손에 들기 전에는 그냥 곤충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을 줄 알았다. 물론 곤충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하지만, 저자는 그 사이에 파브르의 자연(과 곤충이라는 생명)에 대해 보여주는 경이라는 태도, 관찰을 통해 진리에 접근하고자 하는 귀납적 연구 방식과 함께, 다 알 수 없는 것에 대해 겸손히 인정할 줄 아는 지적인 겸손, 그리고 그가 가지고 있었던 기독교 신앙(그는 가톨릭 신자였다)에 대해 아울러 덧붙인다.


요컨대 단순히 파브르의 곤충기를 요약해 놓은 게 아니라, 제목처럼 파브르의 관점(안경)을 또한 설명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여기에 저자의 기독교 신앙도 함께 배어든다. 과학자로서의 정체성과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 사이에서 나름의 안정된 지점을 찾은 것으로 보인다.





책의 전반적인 문체가 친절하다. 단순히 경어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이야기를 풀어놓는 방식이라든지, 사이사이 저자의 의견을 제시하는 모양이 꽤 부드럽다. 마치 학창시절 교실에서 선생님에게 배우고 있는 느낌이랄까.


책에 담긴 전반적인 내용은 곤충의 경우 저학년부터 중고등학생까지 재미있기 읽을 수 있을 것 같고, 앞서 언급한 파브르의 관점이라든지, 저자가 설명하는 기독교와 과학 사이의 관계 같은 부분은 청소년들과도 교회나 가정에서 이야기 주제로 삼아 읽고 대화를 해 봐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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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4-18 18: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실제 파브르 곤충기는 저자의 고향인 프랑스에서는 그다지 유명하지 않다고 합니다.왜냐하면 전문적인 곤충학자도 아니고 교사생활을 하면서 몇십년에 걸쳐 관찰한 곤충에 대한 연구중 상당수가 현대에선 큰 학문적 평가를 못 받고 있는데 대표적인 것이 신종 말벌이라고 자신의 부인과 자녀의 이르믈 딴 벌들이 실은 이미 기존에 있었던 종이라는 것 등이죠.
실제 파브르의 곤충기는 일본과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데 그 이유는 일본에서 히트를 치고 그 이후 그 중역본이 한국에서 인기를 끌었기 때문입니다.하지만 파브르 곤충기는 저자가 80대 노년에 완성한 책으로 뛰어난 스토리텔러로서의 저자의 능력을 잘 보여주는 책이라고 할 수 있지요.

노란가방 2025-04-18 19:13   좋아요 0 | URL
카스피님은 곤충기를 읽어 보셨나요?
저는 아직 읽어보지 않아서, 한 권쯤 읽어볼까(어린이용 편집 말고) 생각해 보았네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 1974-75년 일제전범기업 연쇄폭파사건
마쓰시타 류이치 지음, 송태욱 옮김 / 힐데와소피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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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70년대는 전 세계적으로 혁명의 시기였다. 익히 알려진 프랑스의 68혁명이 그 중 하나이고, 미국에서는 히피들의 반전운동의 기세가 강렬했다. 4.19 혁명으로 60년대의 문을 열었던 우리나라에서는 곧 박정희의 장기독재 아래 들어가지만 독재자의 암살로 70년대의 마지막 해를 장식했다.


바로 그 시대 일본에서도 한창 투쟁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다. 일본 적국파의 아사마 산장 사건은 유명하고, 전공투라고 불리는 전국적인 학생운동도 연일 이어졌다. 이들 운동은 제2차 세계대전을 전후로 아시아 여러 지역에서 일제가 벌인 만행에 대한 분노와 희생자들에 대한 강한 연대의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일본인이지만 일본의 잘못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모습은, 이후 수십 년 동안 이어지고 있는 자민당 장기집권 아래서도 제대로 된 항의나 반발 없이 굴종하는 모습으로 살고 있는 오늘날의 일본인들과는 사뭇 달랐다.





이 책은 전공투가 소멸되고 그 파생조직 중 하나였던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라는 무시무시한 이름의 단체와 그 구성원들의 이야기를 옮긴 책이다. 면밀한 조사를 통해 재구성한 일종의 르포르타주 성격의 글이다. 사실 무시무시한 느낌을 주는 이름과는 달리 조직원은 겨우 네 명에 불과했고, 그마저 자신들이 이 이름의 투쟁을 독점할 수는 없다면서 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기를 기다리며 “늑대”라는 이름의 활동조직명을 따로 취한 이들이다.(후에 “대지의 엄니”와 “전갈”이라는 또 다른 자발적 조직들이 같은 이름으로 활동을 했다.)


이 당시 학생운동과 사회운동의 특징은 과격성에 있었다. 자신의 소속을 나타내는 색깔의 하이바를 쓰고 각목을 휘두르는 모습은 전공투를 상징하는 형상이었고,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조직원들이 선택한 방식은 폭탄테러였다. “전선”은 일제의 만행에 대한 깊은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 전범기업들과 전후 경제침탈에 나선 여러 기업들의 사옥에 폭탄을 설치하는 방식으로 충격을 주고자 했다. 저자는 이야기를 재구성하면서 20대의 젊은이들이 왜 그런 방식의 투쟁에 나설 수밖에 없었는지, 그리고 그 투쟁이 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고민한다.


“전선”은 이들이 단순히 일제가 벌인 침탈에만 분노한 것이 아니라, 나아가 당시 저항 대신 일제의 계획과 명령에 복종했던 보통의 일본인들마저 함께 범죄의 당사자로 지목했다는 점에서 독특했다. 나는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이라는 변명은 이들이 보기에 헛소리였다. 당시 시점에서 “일본인”이라는 것만으로도 죄책을 지고 있다는 판단이었다.





그들이 선택한 폭탄 테러라는 방식은 강한 경종을 울리기 위한 수단이었다. 다만 이 과정에서 (그들의 증언에 따르면)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 것은 상정하지 않았던 부작용이었다. 그들은 폭탄을 터뜨리기 전 반드시 사람들을 피신하도록 경고하는 전화를 걸었다. 다만 1974년 미쓰비시 중공업 본사 빌딩에 설치한 최초의 폭탄은, 5분 전 경고 전화에도 불구하고 미처 대피하지 못한 많은 인명이 사사당하는 결과를 낳았고, 이는 조직원들의 마음에 큰 충격을 안겨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보면 비록 폭탄이라는 수단을 사용했지만 젊은이 특유의 단순함과 과몰입, 그러면서도 순진한 면이 있었던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인명피해를 일으킨 행위는 분명 처벌의 대상이 되어야겠지만, 같은 행위라도 우리는 상황과 목적에 따라 조금은 다른 평가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예컨대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 폭탄 투척은 우리에게 “의거”로 남아있고, 사람들은 영화 속에서나마 친일파들을 권총으로 처형하는 모습을 보고 환희를 느끼지 않던가.


그래서 이 책이 좀 더 어려웠다. 일제의 희생자이기도 했던 민족의 후예로서 우리는 “전선”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나중에 밝혀진 일이지만, 그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제가 일으킨 가공할 만한 전쟁범죄의 최종 책임자이자 S급 전범이었던 일본 천황까지도 암살하려는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이봉창 의사의 시도가 정당하다면, 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그리고 희생된 민간인들은 또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도...


폭력은 무조건 나쁘다는 감상주의적 태도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행동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런 태도가 과연 "정의로운가" 묻는다면 그 답 역시 쉽지는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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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4-17 16: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공투 참 오랜만에 들어보내요.6~70년대 과격학생 운동탓에 이후 학생세대가 현실참 여에 소극적이 된거 같습니다

노란가방 2025-04-17 18:22   좋아요 0 | URL
저는 책으로만 흘깃 들어본 개념이었는데,
이 책을 보면서는 이것저것 좀 찾아보면서 읽었더니 그 시대에 대해 조금 더 알게 된 것 같습니다.

저도 말씀하신 것처럼 생각했었는데... 5, 60년 전 일들 때문에 온갖 비리와 무능을 보이는 일당독재 정권에 군소리 한 번 못하고 사회 전반이 반 세기 동안 조용하다는 건 좀 이해가 안 되기도 하더라고요.
 
홀로코스트의 공모 - 나치 독일의 교회들과 대학들 신의 생명사 시리즈 1
로버트 에릭슨 지음, 김준우 옮김 / 한국기독교연구소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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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가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에서 나치와 그 부역자들은 유럽 전역에서 무려 6백 만 명의 유대인들을 학살했다.(이 외에도 5백 만명 이상의 희생자들이 더 있었다. 전쟁 중 사망자 이외에도) 이른바 “홀로코스트”다. 가히 인류가 행한 가장 잔혹한 범죄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그런 홀로코스트에 단지 나치와 정신 나간 추종자들뿐만 아니라, 고생해 보이는 교회와 대학의 구성원들도 적극적으로 가담했음을 보여주는 다양한 자료들을 수집해 모았다. 저자에 따르면 당시 목사들과 교수들은 “자신들의 입장이 경멸받을 수 있다는 점을 결코 상상하지 못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금 매우 중요하고, 옳은 일에 가담하고 있다고 생각했고, 적극적으로 나치의 이상에 동조하거나 찬동을 했다.


개인적으로는 교회의 다수가 여기에 동조했다는 점이 안타깝다. 최근의 우리나라 정국에도 빗대 볼 수 있는 부분인데, 군대를 동원해 국회를 겁박하고, 최종적으로 국민에게 총칼을 겨눈 쿠데타의 우두머리인 대통령의 탄핵을 막고 오히려 내란을 옹호하던 이들 가운데 기독교인들이, 목사들이 잔뜩 끼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 대다수는 중국인에 대한 격렬한 혐오감정을 감추지 않았는데, 이는 유대인에 대한 격렬한 악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나치와 그 부역자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만약 그들에게 나치와 같은 힘이 있고, 중국이 작은 나라였다면 실제로 행동으로도 옮겼을지 모른다).





다만 이 과정에서 교회 내 나치 반대세력의 활동과 노력을 지나치게 축소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느낌도 준다. 대표적으로 본회퍼 같은 인물인데, 저자는 여러 차례에 걸쳐 본회퍼나 고백교회의 활동범위와 영향력이 좁았음을 이유로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으로 치부해 버리려고 한다. 여기에는 단순히 정량적인 기준만을 사용하겠다는(혹은 중요하다는) 편견이 개입되어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든다. 네가 뭘 해봤자 현실을 바꿀 수 없으니 노력 따위 의미 없다는 식의 사고가 옳을까?


그리고 이 정도의 책을 내면서 교회나 대학 당국의 나치 부역행위에 관한 증거 수집이, 단순히 연설문이라든지, 입장문 같은 ‘말’이 주가 되고 있다는 점도 지적해 볼만하다. 물론 이들의 주요 도구가 ‘말’이긴 하지만, 그리고 선전선동 역시 분명한 잘못이긴 했지만, 책을 끝까지 읽어도 그들이 직접 홀로코스트에 개입했다는 내용은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들이 나치 당국에 적극적인 협조를 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이지만.





저자가 교회를 비판하는 지점 중 하나는 히틀러와 나치가 본색을 드러내기 이전, 그러니까 초기에 교회의 저항이 단지 교회의 자유(종교활동의 자유)에 국한된 것이었다는 내용이다. 그런데 이런 비판은 좀 애매한 것이, 그렇다면 교회와 (아직 실현되기 이전의) 정권의 정치행위에 더 적극적으로 개입했어야 했다는 말일까? 그건 정교분리의 원칙에 어긋난다며 비판할 여지가 있지 않을까? 사실 정책이라는 건 모두를 만족시키기 어렵고, (이번 친위쿠데타 사건처럼) 그 정도가 과도할 때가 아니면 교회는 정치와 거리를 어느 정도 두는 게 적절하지 않을까.


책의 마지막 두 장에는 히틀러와 나치가 몰락한 뒤, 급히 그들과의 관계를 청산하려고 했던 교회와 대학 당국의 행태에 관한 비판을 담고 있다. 때로 그들은 나치활동에 꽤나 깊숙이 개입했던 이들마저 구해내려는 시도를 했고, 이 과정에서 명백한 거짓이 동원되기도 했다. 끝까지 부끄러운 모습이다. 그래도 이즈음 우리네 비슷한 이들은 이 와중에도 자신들의 행적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도리어 목소리를 높이고 있으니 그보다는 낫다고 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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