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죄를 지켜드립니다 - 폭로 ㅣ 위키드위키 테마 앤솔로지 1
정명섭 외 지음 / 위키드위키 / 202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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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로”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네 명의 작가가 쓴 단편소설 모음집이다. 책의 제목은 그 중 첫 번째로 실려 있는, 정명섭의 “폭로 보험”이라는 작품의 부제이기도 하다.


폭로 보험이란, 누군가 내가 과거에 저지른 잘못을 폭로해서 사회적 평판이나 지위, 직업 등에 큰 피해를 입게 되었을 때 보상금을 지급하는 보험 상품이다. 소설은 그런 보험이 일상화된 가까운 미래를 그린다. 소개팅을 할 때도 자신의 “1단계 고백서”를 주고받고, 많은 보험가입자들이 경험하는, 막상 보험금을 요청하면 약관을 들먹이며 거부하는 행태 등등이 날카로운 유머로 제안되는 재미있는 작품.


두 번째 작품인 “살투”는 다양한 미투 파생운동의 괴이한 버전으로, 유명 연예인이 과거 무명 시절 저질렀던 살인 사건이 드러나는 과정을 그린다. 종종 연예인들이 학폭 사건에 얽혀 반 강제 은퇴를 하는 사건이 현실 세계에서도 드물지 않은데, 이를 반영한 느낌이다. 다만 사건의 해결 과정이 치밀하지 못하고 조금 뜬금없이 마무리 되었다는 한계가 명확해 보인다. 단편의 한계일 수도 있겠지만.


“보람어학원”은 대학을 졸업한 한 여성이 몸이 약해 직장을 얻지 못하고 있다가, 주3일만 일하면 된다는 말을 듣고 시작한 어학원 강사를 하며 겪은 이야기가 중심이 된다. 소시오패스 느낌이 다분한 교무부장에게서 보게 된 섬뜩함이 중심 소재다. 가까스로 얻은 직장에서 벌어지는 교사와 아이들에 대한 학대를 보면서, 문제를 제기해야 할지 아니면 참고 넘어가야 할 지를 두고 일어나는 갈등은, 결말부에 가서 폭발한다. 개인적으로 가장 몰입했던 작품.


마지막 작품인 “스승의 날”은 전형적인 스릴러의 형태를 띤다. 교사로 일하고 있는 주인공은 동창회에서 우연히 만난 친구에게서 들은 학창시절의 성적 학대를 통해 애써 잊으려 했던 자신의 경험까지 떠올리게 된다. 그 사건으로 학교 졸업 후 방황하던 친구는 끊임 없이 주인공에게 애정과 원망이 섞인 집착을 하게 되고, 어느 날 그 친구가 두 사람의 공통의 적인 학창시절의 교사와 함께 죽은 채로 발견이 된다. 그리고 익숙한 반전.





한때 폭로는 권력의 치부를 드러내는 용기있는 결단이었으나, 이 시대 폭로는 대중의 오락꺼리에 가까워졌다. 물론 여전히 힘과 돈으로 잘못을 감추는 흑막에 대한 폭로는 박수를 받을 측면이 있긴 하지만, 온갖 SNS에는 과장되고, 때로 허위사실이나 작은 잘못을 과장해 자극적으로 편집해서 퍼뜨리는 악질적인 폭로자들이 넘쳐난다. 멀쩡히 잘 살고 있는 연예인이 죽었다며, 혹은 이혼했다며 낚시질을 한다. 이 모든 건 결국 돈이다.


문제는 이런 사이버 래카들 때문에 진짜 의미 있는 폭로까지 묻히곤 한다는 점이다. 미투운동만 해도 그렇다. 어느 샌가 온갖 짭투들이 넘쳐나면서 이제 실제 피해자들의 목소리에도 사람들은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어쩌면 누군가는 그걸 노린 것일 지도 모르겠다.


살면서 폭로라는 것을 할 기회나 자리가 없다면 참 다행일 것이다. 하지만 다양한 비밀들은 쉴 새 없이 만들어지는 법이고, 때로 그 정도가 심하다면 진지하게 폭로를 고민해 봐야할 지도 모른다. 물론 폭로라는 것에는 위험이 따르기 마련이어서, 자칫 지금 내가 유지하고 있는 것들을 모두 잊어버리게 될 수도 있다.(어쩌면 그 때문에 폭로가 용기있다고 칭송받는 이유일 지도) 그러나 그래서 큰 악을 묻고 넘어간다면, 그게 정말 나에게도 도움이 되는 건지는 알 수 없다. 언젠가 그 거악이 우리를 덮칠 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즐겁게 읽었던 작품이다. 단편에 맞게 선택된 소재와 전개이긴 하지만, “폭로 보험” 같은 건 좀 더 세계관 확장을 해 봐도 괜찮을 것 같고, “보람어학원”은 중장편으로 충분히 갈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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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종교적 우파의 기원과 본질 - 낙태와 동성애 이면에 감춰진 인종차별이라는 불편한 진실
랜달 발머 지음, 노동래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2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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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미국 복음주의의 간략한 역사를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18~19세기에 있었던 두 차례의 대각성운동으로 형성된 미국 복음주의는, 그 운동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들이 가지고 있었던 신학적 특징에 따라 꽤나 강한 실천주의적 성향을 보였다. 회심한 미국의 그리스도인들은 적극적으로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꿔야 할 사명이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저자에 따르면 남북전쟁을 거치면서 이런 성향이 크게 달라졌다. 전쟁 과정에서 일어난 끔찍한 사건들과 많은 사상자들은, 이 세상이 과연 낙원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의심을 품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이 틈새를 치고 들어오는 것이 세대주의적 후천년설이라는 종말론이었다. 예수님의 재림 전 신자들이 하늘로 들려 올라갈 것(휴거)이라는 믿음은, 이 “임시적인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기 위한 노력을 의미 없는 것으로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이는 복음주의자들의 주된 관점을 사회의 연약한 지점을 개선하는 데에서, 개인의 거듭남으로 바꾸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이런 태도는 정치에 대한 관심에서도 물러나게 했다. 사실 미국 복음주의에 속한 기독교인들은 정치적 이슈에 그리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런데 무엇이 그들을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바꾸었을까. 저자는 1960년대와 70년대 복음주의자들이 오늘날 주요 주제 중 하나인 “낙태”에 대해서도 그리 비판적이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오히려 많은 복음주의 지도자들은 그 일에 관한 불가피한 상황을 좀 더 적극적으로 고려했었다. 저자는 이 부분에서 이렇게 말한다. “로 대 웨이드 판결에 대한 복음주의자들의 압도적인 반응은 침묵이었으며, 간혹 그 문제에 관해 의견이 표명되더라도 그런 의견은 모호했다.”


오히려 복음주의자들이 크게 들고 일어나게 한 것은 다른 판결이었다. 1971년 그린 대 코널리 소송에서 컬럼비아 지방법원의 하급심은 인종차별에 관여한 어떤 조직도 정의상 자선기관이 아니며, 그에 따른 면세지위를 인정받지 못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핵심은 ‘세금’이었다는 말이다.


법적으로 인종차별은 금지되었으나 남부의 다양한 주에서는 실제적인 인종차별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중 하나가 밥 존스 대학교 같은 인종 분리학교였다. 미국 종교사에 관해 조금만 살펴도 꼭 나오는 학교인 이곳은 당시 흑인 학생의 입학을 불허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지만 미국 대학교도 다양한 면세혜택을 받는데, 그 이유 중 하나는 대학교가 자선기관이라는 분류에서였다. 일부 흑인 학부들이 인종차별이 이루어지는 기관이 어떻게 자선기관일 수 있느냐며 소송을 제기했고, 결국 그 소송이 받아들여진 것이다.


이는 그런 학교에 한 기부 역시 세금 공제를 받을 수 없게 되면서 기부금액까지 줄어드는 효과가 있었으니 이중의 타격이었다. 당장 면세 지위를 박탈당하며 경제적인 손실을 입게 된 근본주의적 학교들은 대대적으로 들고 일어나는 계기가 되었다. 미국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정부기관인 국세청이 나서자 적당한 눈속임은 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여기에서 비로소 (낙태 문제에 관해서는 침묵하던) 기독교 보수가 정치와 손을 잡기 시작했다는 것.





꽤 흥미로운 해석이다. 그동안 낙태나 동성애 문제를 가장 중요한 이슈로 들고 나오던 종교 우파가 실은 인종차별 조치를 개선하지 않은 대가로 받게 된 면제혜택 박탈이라는 벌칙에 반발해서 대대적으로 일어난 것이라는 주장은, 그들의 도덕적 입지(라는 게 있다면)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는 내용이다.


다만 저자의 주장은 조금 세심하게 살필 필요가 있는데, 제시된 내용은 미국의 종교 우파가 애초에 낙태에 별 관심이 없었음을 보여주기에는 근거가 충분하지 않아 보인다. 일부 지도자들이나 교단 등에서 발표한 입장과는 별개로, 실제로 초기에 낙태 문제를 가지고 세력 결집을 시도했던 사람들도 있었다는 내용이 책에도 보인다.


실상은 낙태를 비롯한 전통적인 보수적 이슈들이 회자되긴 했으나, 그것이 본격적으로 정치운동화 하지는 못하다가, 인종차별과 관련된 면세혜택으로 학교 이사장 등의 영향력과 재물을 가진 이들이 나서면서 이 운동이 세를 크게 늘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아닐까. 물론 어느 쪽이든, 인종차별을 정당화했던 흑역사는 회개해 할 죄이겠지만.





저자는 트럼프의 당선을 미국 기독교 우파의 원죄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결과로 설명하기도 한다. 애초에 인종차별과 결부되어 정치세력화가 된 그들이니, 인종차별주의자가 대통령이 되는 것 또한 찬성할 수밖에 없지 않았겠느냐는 설명이다. 개인적으로는 비슷한 예로 20여 년 전 이명박의 당선을 한국의 기독교 우파 세력의 양심 파산의 결정적인 사건이었다고 본다.


당시 내가 속한 보수적인 개신교 교단 신문에서 전국의 목사와 장로들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 여론 조사에서, 차기 대통령의 가장 중요한 항목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 도덕성과 윤리의식 대신에, 경제를 살릴 수 있는 능력을 더 우위에 꼽는 결과가 나왔다. 목사와 장로들이 도덕적이지 않고, 비윤리적인 인물이라도 돈만 더 벌게 해 주면 대통령의 자질이 있다고 대답한 것이다. 그렇게 2000년대 중반, “긍정의 힘” 물결과 함께 대한민국의 보수 기독교계는 물신주의에 무릎을 꿇었고, 이는 오늘날까지도 거의 그대로 이어지는 상황이다.


우리는 이 상황을 어떻게 바꿔 나갈 수 있을까? 이 작은 책에는 그런 대안까지 차근차근 설명되지는 않는다. 사실 이 문제를 누가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지, 아니 해결이 되기는 할 지 부터가 좀 회의적인 문제이긴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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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방치하지 않습니다
사라 윌슨 지음, 엄자현 옮김 / 나무의철학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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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조울증과 극심한 불안증세, 그리고 하시모토병이라는 자가면역 질환까지.. 듣기만 해도 쉽지 않은 삶을 살았겠다 싶은 작가의 책이다. 젊은 시절에는 <코스모폴리탄>이라는 유명한 패션잡지회사에서 일하기도 했지만, 결국 뛰쳐나왔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자신의 심리증상을 완화/혹은 치료하기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에도 참여한다.


이 책은 그 과정을 담은 에세이다. 하지만 50여 개의 짧을 글들(마치 블로그에 포스팅했던 것처럼 느껴지는)을 모아놓은 이 책은, 어쩌면 작가의 심리와 생각을 반영하는 것처럼 정신이 없다. 일관된 흐름이나 체계적인 정리에 따라 결론으로 나아간다기 보다는, 그저 좌충우돌, 암중모색을 하던 작가의 발걸음을 따라 이리저리 방황을 하는 느낌이다.


덕분에 책의 내용이 한참 진행되었는데도, 그래서 어떻게 나아졌다는 것인지, 어떤 방법을 따라가면 (독자가) 나아질 수 있다는 것인지 선명한 설명이 보이지 않는다. 물론 이런 반응 역시 지극히 내 개인적인 성향이 반영된 질문이긴 할 테지만, 마치 글에서도 저자의 불안하고 불안정함이 드러나는 느낌.





물론 군데군데 불안이라는 주제에 관한 특별한 통찰이 담긴 문장도 보이긴 한다. 책 초반 작가는 “이제 나는 안전벨트를 매고 있고 내 삶의 속도를 스스로 조절할 줄 안다”고 말한다. 어느 정도 불안을 제어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로 보이는데 다행이다. 책 속의 복잡한 여정 어디에선가가 돌파구를 얻었던 것으로 보인다.


책 내내 불안이 가져오는 문제들을 잔뜩 언급하면서도, 동시에 이 증세가 과거 좀 더 위험한 세상 속에서 큰일을 당하지 않을 수 있는 특별한 자질이었다고, 다만 시대가 너무 빨리 달라졌을 뿐이라는 이야기가 반복된다. 야생의 동물들이나 적의 침입을 경계하는 데에는 조금은 과한 민감함/불안함이 오히려 도움이 된다는 말. 물론 현대의 불안증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의 상황과 정확히 같은지는 모르겠지만.


주변 환경의 모든 것을 강박적으로 점검하고 통제하려는 성향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을 것이다. 화학(약물)요법부터 시작해 요가 같은 전통적인 수양법, 다양한 상담과 인지치료 기법 등등 저자가 시도해 본 다양한 요법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어질어질할 정도다.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어떻게 이렇게 일을 할 수 있는 지부터가 나에겐 기함할 일.


작가의 용감한 도전과 모험에 박수를 보낸다. 그리고 그와 비슷한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도 부디 빛이 보이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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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카이퍼의 세 마리 작은 여우 - 교회 안에 숨어 있는 세 가지 위험한 신앙 ㅣ Abraham Kuyper Series 4
아브라함 카이퍼 지음, 이상웅 옮김 / 다함(도서출판)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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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라함 카이퍼의 숨겨졌던 책! 이라고 하면 조금 과장된 홍보글 같겠지만, 역자의 해제에 따르면 실제로 이 글은 그동안 온라인상의 영역본을 제외하면 한 번도 번역된 적이 없다고 한다.


책 제목에 붙어 있는 “세 마리 여우”란 아가 2장 15절에 나오는, “포도원을 해치는 작은 여우들”에서 따온 것이다. 무슨 큰 소리를 내거나, 엄청난 충격을 주는 건 아니지만, 교회 안에 침투해서 슬그머니 담장을 무너뜨리고 그 힘을 흩어버리는 요소들을 “여우”에 비유했다. 이 글에서 꼽는 세 마리 여우는, 지성주의와 신비주의, 그리고 실천주의다.





지성주의와 신비주의는 상대적으로 그리 어렵지 않다. 지나치게 어려운 지적 문제를 다루는 데만 집중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카이퍼는 “회중은 강단 위의 공증인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사실 관계를 정확하게 기술하는 것이 일인 공증인과 설교자의 역할이 다르다는 것. 신비주의는 그 대척점에 서 있는 태도다. 단순히 감상적인 것을 넘어, 교회(와 성경)를 건너뛰고 바로 성령과 직접 연결될 수 있다는 확신이다.


이 두 태도가 어떻게 교회에 해를 끼치는지는 굳이 설명이 필요 없을 만큼 자명하다. 전자는 교인들에게서 기운을 빼버리고, 후자는 교인들의 길을 잃게 만든다. 흥미로운 것은 세 번째 여우인 실천주의다. 카이퍼는 여기에 크게 세 가지 구체적인 사례를 들고 있는데, 해외선교, 주일학교, 병자간호가 그것이다.


사실 이 세 가지 모두 교회에서 여전히 중요하게 여기는 것들이고, 어느 것 하나 비판하기가 쉽지 않는 대상들이다. 카이퍼의 비판 지점은 비슷하다. 이 세 가지가 각각 어떤 좋은 열정에서 시작되기는 했으나, 결과적으로 교회와 상관없는 기관과 일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여러 선교단체들은 어느 새 교회와 경쟁하는 기관이 되거나 돈과 명예가 얽히면서 내부 헤게모니를 장악하기 위한 다툼의 소식이 적잖이 들려오기도 한다. 주일학교의 경우 신앙교육을 단지 ‘학교’에서 배우는 무엇으로 만들어 버렸다는 점이 문제로 지적된다. 국민교육이라는 당대의 세속적인 목표에 부합하는, 세속 프로젝트화 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병자 간호는 간호라는 일의 외주화를 초래하게 되어 간호와 죽음이라는 일이 믿음과 사랑이라는 본질적인 가치와 분리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개인적으로는 세 번째 지적인 실천주의, 그 중에서도 병자 간호와 관련된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다. 국민의 3/4이 병원에서 죽어가는 대한민국의 현실에서(미국은 이 비율이 50%가 안 된다고 한다), 그런 죽음이 신자들에게도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는 게 과연 옳을까. 사실 이런 죽음은 지극히 경제적이고 행정적인 논리를 추종하는 것인데, 더 나은 고민을 해 봐야 하지 않을까. 이미 카이퍼의 시대로부터도 150년이나 지났는데 말이다.


결론부에서 카이퍼는 이 세 가지 지적이 그것들을 교회에서 없애자는 말이 아님을 다시 한 번 강조한다. 중요한 건 균형이라는 말이다. 지성도 필요하고, 신비도 필요하다. 실천 역시 결코 없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바른 신앙과 교리 위에서, 그러니까 검증된 시스템 안에서 이루어질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확실히 카이퍼는 보수주의자였다.


사실 여기에서 지적한 것들은 아주 새로운 것도 아니고, 이미 과거 교회사에서 한 번 이상 등장했던 태도로, 그 결과는 이미 역사로 입증된 바 있다. 그 결과를 알고 있다면 다시 오류를 반복하면서 힘을 소진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물론 어지간히 역사를 공부하지 않는 사람들이 대부분인지라, 쉴 새 없이 어제의 실수를 다시 반복하고 있지만.(나 역시도...;)


100년도 훨씬 더 전에 나온 글이지만, 여전히 오늘날 교회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찬찬히 읽으면서 함께 나눠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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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 첫걸음
임민영 지음 / 좋은땅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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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 이름만 들어도 뭔가 어려울 것 같다. 그런데 이런 느낌은 나만의 문제는 아니었나 보다. 많은 사람들이 현대미술의 결과물(“작품”이라는 말을 모두에게 붙이고 싶지는 않다)을 보고 난해함을 느낀다고 한다. 이 책은 나처럼 미술에 별 조예가 없는 사람들에게 현대미술이 무엇인지 간략한 이해를 제공하고, 감상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안내서다.


먼저 현대미술이 과거의 미술들과 어떻게 다른지를 알 필요가 있다. 우선 현대미술은 다양한 미술적 실험들(인상주의, 입체주의, 야수주의 등등)의 결과물이다. 근대의 이런 미술적 실험은 중세미술에 대한 일종의 반발이기도 했는데, 중세까지의 미술의 특징은 작품을 의뢰하거나 후원하는 이들을 만족시키는 데 집중했다.


앞서 언급한 다양한 실험들은 이런 구조에서 벗어나려는 것이었고, 크고 위대한 것에서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으로 주제가 변화하고(인상주의), 보이는 그대로의 구도마저 벗어나며(입체주의), 이전에 사용하지 않았던 강렬한 색체를 도입한다(야수주의). 아마도 그 최종 진화(?) 단계에는 아예 형태를 없애버린 추상미술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모든 것에는 작가의 자기의식의 표현이 중심에 있다. 쉽게 말하면, 그냥 내가 이걸 이런 생각을 담아 만들었고 하고 내 놓으면 그게 곧 미술적 결과물이 된다는 것이다. 이제 그것을 보는 사람들은, 그 자체에서 뭔가 이해하기 보다는, 그것을 만든 작가의 머릿속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제 우리가 감상하는 건 작품이 아니라 작가의 생각이 되어버린 셈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뒤샹이 내어 놓은 소변기다. 1917년 뉴욕의 한 상점에서 구입한 남성용 소변기에 “샘”이라는 이름을 붙여 출품한 것. 많은 사람들은 이를 앞서 언급한 미술 개념의 전환(미술가들이 만들어 낸 결과물에서 미술가의 머릿속을 관람해야 하는)을 상징하는 “작품”으로 여긴다.


다만 여기에서 떠오르는 질문은, 애초에 이 책의 저자가 말한 것처럼 현대미술은 보는 사람이 “스스로 느끼고 즐기는 것”이고, “꼭 작가의 의도대로 읽을 필요가 없다”면, 우리가 굳이 소변기를 “작품”이라며 떠받들 필요도 없지 않냐는 것이다. 애초에 소수의 이너서클의 멤버들이 서로 대단하다고 추켜세우는 동안, 일반인들의 공감을 얻긴 했을까 싶다. 뭔가 있어 보인다는 느낌은, 다분히 그들이 만들어 낸 모습은 아닌지.





며칠 전 제주에 있는 한 미술관에 다녀왔다. 물방울을 트레이드마크로 하는 작가였는데, 신문지 위에 그린 리얼한 물방울이 흥미롭게 보이긴 했다. 다만 그 의미를 파악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고, 그림 옆에 쓰인 해설을 읽지 않으면 그냥 잘 그린 정물화 정도의 느낌이다. 그러면 우리가 보는 건 그림일까, 해설글일까.


작가야 뭐든 만들고 싶은 걸 만들 수 있다. 다만 그걸 보는 사람에게까지 뭔가를 느껴야 한다고 강요만 하지 않으면 된다. 애초에 형태마저 흩어진 결과물에서 모든 사람이 동일한 것을 보는 것 자체가 무리에 가깝지 않을까.


어떤 의미에서 현대미술은 글이 아닌 도구로 쓴 글처럼 느껴진다. 이전의 작가들이 자신의 기술과 생각을 보여주었다면, 현대미술 작가들은 자꾸 설명하고 (가끔은) 가르치려고 하는 느낌이다. 물론 그게 보는 사람의 코드와 맞으면 신이 나겠지만, 미술에 대한 정의부터, 그 가치와 영향력과, 내용까지 온통 자기들끼리만 추켜세운다는 느낌을 주면 점차 일반 대중으로부터 유리되지는 않을까.


아무튼 현대미술에 대한 두려움을 확실히 없애준 책. 간략한 설명이지만, 전체적인 흐름을 잡기에도 좋다. 리뷰는 좀 까칠하게(?) 쓴 듯하지만, 나같은 문외한에게 딱 맞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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