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 하나님의 세계 (반양장) 유진 피터슨의 영성 1
유진 피터슨 지음, 양혜원 외 옮김 / IVP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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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 신학의 대가 유진 피터슨의 글맛을 제대로 보여주는 책이다. 흔히 “영성”하면 왠지 현실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고, 내세에 집중하는 신비주의자를 떠올리기 쉽다. 하지만 저자가 이 책에서 집중하는 영성 훈련과 실천의 장은 바로 현실, 지금 여기의 세상이다.


오랫동안 이원론적 관점이 점유해온 공간을 “청소”하는 것으로 시작한 책은, 창조, 악과 고통, 부활과 구속이라는 기독교세계관의 핵심 틀을 따라가며, 어떻게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갈 수 있는지를 차분하게 설명해 나간다.


여기서 흥미로운 건 목차에도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놀이하시는 그리스도”라는 표현이다. 이 세상은 그분의 놀이터이다. 이 말은 장난이나 농담이라는 의미 보다는, 이 세계 전체가 하나님께서 그분의 모든 것을 쏟아 활동하시는 무대라는 뜻으로 보인다.


아무리 그래도 하나님에 대해서 ‘놀이하신다’는 표현을 쓸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이 부분만 봐도 영성신학의 성격을 조금은 보여주는 게 아닌가 싶다. 그건 딱딱한 교리적 진술들을 쌓아 놓는 것과는 조금 다른, 우리의 고정관념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주권적 행위에 열려 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흔적으로, 하나님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가 그분의 발걸음에 충분히 주의를 기울이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하나님은 자신을 보여주시고 내어주신다. 그리고 그 시작은 이른바 잘 건축되어 있는 예배당 건물 안이 아니라 (교회 사역자가 아니라면) 우리가 일상적으로 좀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장소들, 가정과 사무실과 공장과 거리다.


물론 교회는 이 모든 장소에 존재한다. 교회는 우리가 일상의 영역에서 보이지 않는 신비를 경험할 수 있는 문을 열어주고, 이 과정에서 마주치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공동체를 제공해 주며, 함께 나아갈 길을 비춰주는 진리를 품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교회의 일원으로서 살아가는 공간은 여전히 “세상”이다.





문장마다 저자의 깊은 고민과 통찰이 담겨 있다. 덕분에 책장을 빠르게 넘기기 힘들 정도. 확실히 대가의 문장은 무게감이 다르다. 다만 가끔은 조금 멀리 간다는 느낌도 준다. 특히 성경 본문 연구 부분이 그런데, 책의 전체적인 완성도를 생각했다면 이 부분은 좀 더 줄였어도 좋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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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식 존엄사 - 의사 딸이 동행한 엄마의 죽음
비류잉 지음, 채안나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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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의 현직 의사인 저자가 자신의 어머니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사실 제목에도 이미 언급되어 있고, 비슷한 내용의 책을 한두 권 읽은 것도 아닌지라, 내용상의 새로움은 없었지만, “단식 존엄사”라는 개념을 좀 더 확실히 알 수 있겠다 싶어 집어 들었다.


저자의 어머니는 소뇌실조증이라는 유전적 질환을 갖고 있었다. 우리 몸의 운동능력을 담당하는 소뇌의 기능에 문제가 생긴 것으로, 일반 발병되면 온몸이 점차 굳어가는 증상으로 나타난다고 한다. 가계도 속 적지 않은 인원이 이 질병을 갖고 있었고, 질병을 발현하는 인자는 우성인자로 보였다. 자녀를 낳으면 1/2의 확률로 같은 질병을 갖게 된다니 당사자로서도 꽤나 걱정을 하게 만드는 질병이다.


다행이도 어머니는 늦은 나이에 발병이 되었고, 그 덕분인지 병의 진행 속도도 늦었다. 하지만 결국 고통스러운 결정을 할 시기가 왔고, 어머니는 담담하게 “단식 존엄사”를 선택하기로 했다. 여기에 세 명의 자녀들도 어머니의 뜻을 존중하기로 했고(남편은 이미 몇 년 전 세상을 떠났다).





비슷한 종류의 책들이 반복해서 지적했던 것처럼, 단지 죽음을 피하는 것이 현대 의학의 최고선이 되어버린 상황은 분명 허점이 많은 제도다. 소위 연명치료를 하는 동안 환자는 오히려 말로 표현할 수 없는(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니까) 고통(가장 대표적으로 삽관 자체가)을 겪게 되고, 그 기간 결코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지킬 수 없는 (의식도 또렷하지 않으면, 누군가 영양 공급과 배변을 대신 처리해주어야 하고, 심지어 기계장치의 도움이 없으면 스스로 생존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을 견뎌내야 한다. 또, 흔히들 많이 보는 제세동기는 환자 입장에서는 (피부가 검게 그을릴 정도로) 전기충격기와 다를 바가 없는 고통이다.


환자의 가족이 지불해야 하는 의료비도 적지 않은 부담이다. 집중 치료실에서의 일주일은 적게 잡아 50만 원 이상에서 100만원을 쉽게 넘긴다. 간병인을 둘 경우 비용은 더욱 증가하고, 가족 중 한 명이 전담해 간병을 하는 것도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한편으로 이런 인공적인 수명 연장술은 종교적으로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흔히 종교계는 이른바 “존엄사”에 반대하는 것으로만 생각하기 쉽지만, 인간의 자연적인 수명을 기계장치를 통해 그저 연장하는 행위는 수명에 둔 신의 뜻을 저항하는 행위로 볼 수도 있으니까.





물론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 유일한 답은 아니다. 저자 역시 이런 면을 의식했는지 “자살”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대신, 음식섭취를 중단함으로써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사실 책에는 언급되지 않았지만, 이런 식의 죽음은 고대 로마에서도 자주 있었다. 예를 들면 스키피오를 실각시켰던 공화파 정치인 대(大) 카토는 자신의 몸이 죽음에 가까워졌음을 인식하자 스스로 곡기를 끊어 세상을 떠났다.


어쩌면 이런 결정은 환자에게 죽을 때까지 고통을 가하는 현대의 연명의료(와 이를 유지시키는 법)에 대항하는 유효한 방식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 역시 악용되거나 오용될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그건 사람이 만든 모든 제도가 지니는 숙명이니까.


한편으로 책의 구성이 조금은 난잡하게 느껴진다. 저자는 중간 중간 가족의 이야기, 특히 어머니의 이야기를 에세이처럼 담아내고 있기도 하고, 덕분에 이야기의 호흡은 자주 끊긴다. 책이 존엄사라는 주제를 설명하기 위해 쓰였다기보다, 일종의 가족 문집으로 쓴 것인가 싶을 정도로, 가족에 관한 이야기, 심지어 책 말미에는 저자의 동생이 쓴 어머니에 대한 기억 같은 글도 덧붙여져 있다. 물론 가족적 의미는 있겠지만, 단식 존엄사라는 주제 자체에 집중하려는 독자에게는 크게 와 닿지 않는 내용들이긴 하다.



좋은 삶을 위해서는 죽음에 관한 고민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런 책들은 우리의 삶을 좀 더 큰 맥락 안에서 생각해 보게 만들고, 오히려 현재의 하루하루에 좀 더 집중하도록 도와준다. 비단 이 책이 아니라도, 한 번씩은 읽어 봐야 할 주제가 아닌가 싶다. 그리고 여전히 연명 신화 위에 만들어진 우리나라의 관련 법률도 개정을 위한 좀 더 실제적인 움직임들이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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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9-24 14: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마 한국에서는 안락사는 법적으로 허용하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어머님 친구분중에서도 대장암 수술후(대장 대부분 제거),대변 팩을 밖으로 달고 다니셨는데 그렇게 사는 것이 무슨 의마기 았냐면서 한 두주 스스로 곡기를 끊고 돌아가신 것을 본 기억이 납니다.
아마 안락사가 법적으로 허용이 되어다면 보다 더 편하게 돌아가셨을 텐데 돌아가실때끼지 매우 힘드셨던 것으로 들었습니다.이제 우리 사회도 개인이 스스로 존엄을 지키며서 죽음을 선택 할 수 있도록 사회적으로 논의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고 생각됩니다.
 
넷플릭스가 삼켜 버린 기독교
홍광수 지음 / 세움북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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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과 기독교 미학을 공부한 저자가 자신의 전공을 잘 살린 책을 냈다. 제목부터가 시의성이 있고, 검은색과 빨간 색이라는 강렬한 대조(넷플릭스에서 사용하는)도 눈길을 끈다. 사실 제목만 그런 건 아니고, 내용 역시 어느 정도 이즈음 궁금증을 어느 정도 자극하고 풀어주는 부분이 있다.


책은 오늘날 넷플릭스 같은 영상 매체가 만들어 내는 이미지가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기독교, 교회의 이미지가 얼마나 왜곡되고 망가져 있는지 위기감을 불러일으키면서 시작한다. 이 두 번째 부분은 나머지 장들에서 여러 작품들의 주제와 묘사를 분석하는 과정에서도 반복적으로 등장한다.





저자는 넷플릭스에서 유행하고 있는 다양한 작품들 속 세속적 비전들을 분석하는 데 많은 분량을 할애한다. 사실 각각의 작품들을 모두 본 것은 아니라고 해도 가장 흥미가 생길 만한 내용들이다. 다분히 의도적으로 수집한 것들이겠지만, 저자가 모아 놓은 대중문화 속 기독교의 이미지는 처참하다. 그들은 이기적이고, 자기만 알며, 종종 위선적이거나, 도덕적으로도 함량미달이다. 그러면서도 겉으로는 거룩한 척을 해대는 역겨운 모습이라는 것.


뿐만 아니라, 대중매체 속 작품들은 기독교의 메시지를 가져다가 왜곡하거나 전혀 다른 의미를 부여해 본래의 이미지를 망가뜨리기도 한다. 가장 흥미로운 지적 중 하나는, “글리치”라는 드라마 속 외계인을 추종하는 사이비 종교집단에서 자주 사용하는 단어인 “셀라”에 관한 내용. 이 집단은 이 단어를 마치 기성교회에서 아멘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처럼 쓰는데, 저자는 드라마를 보며 이런 장면에 익숙해진 사람이 교회에 왔다가 셀라라는 단어가 사용된 시편을 읽거나 설교를 들을 때 어떤 느낌이 들지를 언급하며, 결국 이런 일들이 모여 교회 용어의 빈곤화를 초래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조금은 극단적이고 과장된 주장이긴 하지만, 어디서 셀라라는 단어를 듣고 와서 전혀 쓰임에 맞지 않는 문맥에 끼워 넣은 작가나 연출자의 판단도 황당하긴 하다. 사실 그들이 참고할 만한 이단, 사이비가 대부분 기독교를 베이스로 하고 있으니 또 아예 엉뚱하기만 한 건 아닐 수도 있겠다 싶고. 다만 진짜 문제는 “셀라”라는 단어의 어설픈 사용이 아니라, 오히려 실제 세계 속에서 그런 식의 오염과 왜곡을 일으키는 이단, 사이비들이 아닐까 싶긴 하다.





책 전반에 걸친 이런 “심각한” 상황들에 관한 작품 분석과 지적이 이어지지만,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부분은 상대적으로 좀 약한 감이 있다. 책의 마지막 장에 집중적으로 나오는데, 어떤 것이 “기독교적인 작품”인가를 판단하는 것이 쉽지 않으며, 일반은총적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에는 동의한다. 하드코어물이나 슬래셔 무비 같은 것들을 기독교인이 보는 것이 의미가 있느냐는 물음도 곱씹어 볼만하다.


다만 그런 것들을 거르려면 누군가는 보고 평가를 해야 할 텐데, 이를 위해서 기독교적 비평을 하는 방식을 짧게나마 소개한 부분도 의미가 있다고 본다. 이 짧은 글이 실질적인 도움이 될 것이라는 뜻이 아니라, 방향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그렇다는 의미다.


마지막에는 교회가 실제로 미디어물을 기획하고 만들어보라는 요청도 나오는데, 솔직히 말하면 대형교회, 그것도 미디어 제작에 꽤 집중하는 교회가 아니라면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최근 AI기술의 발전으로 개인도 어느 정도 퀄리티의 영상물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지만, 시간이 또 적지 않게 들고 무엇보다 생계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니까 간단하게 생각할 수는 없는 부분. 저자가 목회하고 있는 교회에서 하나의 모델을 보여주면 어떨까 싶기도 하다.



일단 시의성이 좋다. 그리고 내용도 다양한 작품들이 언급되면서 관심을 끌기에도 적합하고. 여기에 신앙적 고민까지 하는 사람들이라면 적절한 작품 비평을 통해 이 부분도 만족시켜준다. 다만 답답함은 높아지지만 해결책은 마땅히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다는 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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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9-23 0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미더어의 제일 큰 문제는 일부 기독교게긴 하지만 극우로 몰아가고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노란가방 2025-09-23 17:10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 부분도 어느 정도 인정해야겠지요.
 
기독교가 직면한 12가지 질문
레베카 맥클러플린 지음, 이여진 옮김 / 죠이북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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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생활을 하다보면 다양한 질문이 생기기도 하고, 다른 이들로부터 질문을 받기도 한다. 이런 질문은 꼭 직접 받는 게 아니라도, 책이라든지 온라인상의 글을 통해서도 접하게 된다. 그리고 이 경우 꽤 높은 비율로 기독교에 관한 엉뚱한 편견들, 또는 오해들을 품고 있기도 하다.


이 책은 오늘날 기독교가 마주하는 대표적인 (적대적) 질문 12개에 대한 대답을 담고 있다. 여기 나온 질문들은 소위 “신무신론자”라고 불리며 한 때 영향력을 키우던 영국의 궤변가들이 자신의 책에서 자신만만하게 던졌던 것들을 떠올리게 만든다(“만들어진 신”이나 “신은 위대하지 않다” 같은). 종교라는 것은 인간의 삶에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온갖 문제만 일으키는 것이 아니냐는 다분히 편집되고 선별된(우린 이걸 보통 조작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사례들을 가져다 덧붙여 놓은.





사실 이런 식의 답변을 시도한 책은 이미 여러 권이다. 중요한 건 역시 답변의 설득력. 처음부터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이 던진 질문이기에, 응답 역시 그들이 서 있는 땅의 원리로 진행되어야 한다는 제한이 있다. 이른바 변증의 어려운 점은 이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기독교의 원칙이 변용되거나 누그러뜨려질 우려가 있다. 그리고 그런 답변은 의외로 허약한 논리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면 성경의 권위를 믿는 기독교인들은, 성경에 이렇게 나와 있으니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규범적 권위를 갖는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의미가 있다. 그러나 불신자들에게 그런 식의 설득은 영 통하지 않는 논리일 것이다. 결국 그들도 받아들일 수 있는 근거를 어떻게 제시할 것인가가 관건인데, 이 책의 저자가 자주 사용하는 도구는 통계와 좀 더 큰 범주에서 문제를 바라보기, 그리고 상대방이 전제하고 있는 가정의 취약점 뒤흔들기이다. 주고받는 대화, 혹은 논쟁에서 논리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식들이다.


여기에 또 한 가지, 저자가 사용하는 어투 또한 공격적이라기보다는 차분한 설명을, 자신의 경험이 묻어나오는 사례들을 함께 제시하면서 좀 더 편안하게 다가온다. 상대의 논리를 파훼해야 한다는 생각에 지나치게 몰입하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강한 어조가 튀어나오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방식은 오히려 말하는 이의 설득력을 떨어뜨리기도 하니 조심해야 할 부분.





전반적으로 훌륭한 답변을 해냈다. 특히 진리의 유일성(3장), 여성 문제(8장), 동성애(0장) 같이 근래에 좀 더 예민하게 다뤄지는 주제들에 대해서도 안정적인 대답을 하고 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런 주제에 관해서 말하면서 기독교의 전통을 완화시키고, 현 시대의 입맛에 맞는 새로운 관점을 도입하는 것이 답인 것처럼 쓸 때가 많지만, 이 책의 저자의 경우 그런 꼼수를 쓰지 않고서 잘 변론을 해 낸다.


다만 저자가 아무리 훌륭하게 변호를 해 냈다고 하더라도, 정작 실제로 신앙생활을 하는 수많은 기독교인들이 책에 나온 도발적 질문들에 대해 바른 “삶”으로 응답해내지 못한다면 기독교를 향한 차가운 시선은 쉽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착한 행실”(마 5:16)을 강조하셨던 이유를 아울러 생각해 봐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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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했다! FAILED IT!
에릭 케셀스 지음, 구현경 옮김 / 글린트(piknic)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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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직장으로 보이는 “커뮤니케이션 에이젼시”가 정확하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광고대행사가 아닌가 싶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무엇인지에 가장 큰 관심을 두고 있는 집단 말이다.


책은 어떻게 하면 세상을 좀 더 크리에이티브하게, 즉 창의적으로 볼 수 있을까라는 주제 아래 저자의 다양한 조언을 담고 있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많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말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실패를 해봤고, 실패를 하고 있고, 실패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 실패 가운데서 뭔가 특별한 것을 찾아볼 수 있다면 대 반전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책에는 다양한 사진들, 이미지들이 컬러 도판으로 잔뜩 실려 있다. 사진을 찍다가 손가락이 렌즈를 막아서 엄청나게 큰 분홍색 소시지가 주요 장면을 가리는 사진들은 분명 망친 사진이겠지만, 또 그런 사진들만 모아두면 뭔가 ‘작품 같은’ 냄새가 난다. 그저 잘못 생산된 프레즐이나, 엉터리 설계로 만들어진 쓸모없는(혹은 사용할 수 없는) 건축구조물들, 혹은 그냥 반으로 찢어 버려진 사진들을 잘 조합하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기발한 작품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이런 책의 특성상 말의 양이 길지 않다. 목차에 나와 있는 소제목들만 훑어도 저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려 하는지가 분명히 드러난다. 여기에 함께 실려 있는 사진들을 함께 보면 이해도도 급상승.


물론 여기 나오는 조언이 당연히 모든 상황에서 환영을 받기는 힘들다는 점 또한 기억해야 할 부분. 다분히 저자처럼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승부하는 세계에서, 본격적인 승부에 앞에서 다양한 “실패들”을 감수할 가치가 있다는 말이지, 저자도 자신의 회사가 번번이 외부 경쟁에서 실패만 거듭한다면 쉽게 버티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까 잘 깔려진 판 위에서의 실패라는 말.


다만 그렇다고 저자의 조언이 영 쓸모없는 건 아니다. 우선은 관련 업계에서 일한다면, 또는 확실히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중요한 일이라면 이런저런 조언들을 한 번 적용해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또, 실패해도 괜찮다는 말 자체는 묘한 위로가 되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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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9-16 09: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실패는 사람이면 누구나 겪는 과정이고 이를 통해서 성장하지만 아쉽게도 한국은 한번의 실패로 모든 것을 잃고 회복하지 못하는 시스템이라 모든 이들이 실패하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이 있는것이 아쉬울 따름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