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양심의 탄생 - 한 일본인의 삶에 드러난 일본 근현대 영욕의 민중사
오구마 에이지 & 오구마 겐지 지음, 김범수 옮김 / 동아시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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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나치 독일, 이탈리아 왕국과 함께 제2차 세계대전의 추축국 중 하나였던 일제는 결국 패전을 하고 말았다. 이른바 전범국이 된 건데, 동경재판에서 많은 전범들이 사형에 처해지기도 했지만, 일부 핵심 전범들은 법망을 빠져나와 심지어 이후 총리까지 해 먹는다. 얼마 전 암살당한 전 일본 총리 아베 신조의의 외할아버지가 바로 그런 전범 출신 총리였다.


당연히 그 주요 피해당사국 중 하나였던 우리나라에서 이 문제는 쉽게 치유되지 않는 민족적 상처이다. 여전히 친일파라는 말은 모욕적 명칭으로 사용되고, 정치인이 이토 히로부미를 인재로 치하하는 발언을 하거나 “우리 국민의 교양수준이 일본의 발톱의 때보다 못하다”는 식의 표현(솔직히 이건 중2병 느낌의 문장이긴 했다)을 쓰거나 하면 욕을 먹고 국회의원 공천까지 취소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감정이 일본이라는 나라 자체, 혹은 일본 국민 전부에 대한 반감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이 적절할까. 여전히 제대로 된 정부차원에서의 사죄를 할 생각이 없고, 분명 일본 사회 일각에서는 소위 혐한으로 벌어먹고 사는 버러지들이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하지만 그런 심의 혐오로 먹고 사는 잉여들은 어느 나라나 다 있다).


하지만 일본사회 역시 그 안에 다양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존재할 것이다. 그들이 무슨 대단한 사상을 가지고 있거나 투쟁가는 아니라고 해도, 그들이 혐한을 나불대는 것들을 적극적으로 나서서 제지하거나 반대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그걸 이유로 그들을 비난하는 건 과하다. 우리네 수많은 소시민들처럼, 그들 역시 당장 먹고 사는 게 바쁘지 않을까. 정치 선동과 과격한 구호를 외치는 인사들과 엮이는 것 자체가 좀 무섭지는 않을까. 나아가 일본인이라고 해서 언제나 제국주의적 침략을 옹호하는 음흉한 마음을 품고 있을까.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 책은 전쟁 말기 징집되어 만주 지역으로 갔다가 전투 한 번 해 보지 못한 채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수용소에 있다가 돌아온 한 일본의 젊은이(물론 지금은 노인이 되었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는 책이다. 오구마 겐지가 바로 그 주인공.


사실 오구마는 무슨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니고, 역사가들의 주목을 받을 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 그 시절 수많은 가난한 소농의 아들들 중 하나로, 국가의 징집령에 따라 동원되었다가, 그대로 포로수용소에 수용되었다가, 간신히 살아남아 고국으로 돌아온, 하지만 이후에도 수많은 직장을 전전하며 하루하루 생존하기 위해 애써왔던 한 소시민이다.


저자인 오구마 에이지는 바로 그런 오구마 겐지의 아들이다. 현직 대학교수인 아들이 아버지가 경험했던 그 시절의 이야기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아버지의 상세한 구술을 받아 적으며 아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책에는 그런 개인적인 감상은 따로 등장하지 않지만, 그 자체로도 의미 있는 작업이 아니었나 싶다.


흔히 역사적 기록이나 사회학 책 같은 경우는 공식적인 기록 같은 것들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책은 앞서도 말했든 개인의 구술을 중심으로 일부 공식자료들을 덧붙인 구성을 가지고 있다. 생각해 보면 공식 기록에는 등장하지 않는, 진짜 평범한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이런 방식으로밖에 보여줄 수 없는 것 같다. 언론이니 공식역사니 하는 것들에는 언제나 시끄럽고 큼직한 사건들만 나오는 법이니.





책 제목에 “양심”이라는 두 글자가 짙은 붉은 색으로 강조되어 있다. 그렇다고 오구마 겐지가 무슨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사회운동가나 반전운동가였던 것은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전쟁에 끌려갔으니 변변한 기술 하나 제대로 배울 새가 없었고, 포로수용소에서 돌아온 후에도 밥벌이를 위해 십수 번의 직장을 옮겨가며 고군분투해야만 했다. 다행이 전후 복구 붐에 올라타 나름의 사업체도 만들어 말년에는 안정적인 생활을 할 수 있었지만, 그 또한 무슨 대단한 비전을 위해 했다기보다는 그저 먹고살기 위한 한 일에 불과했다.


하지만 전쟁에 참여했다는 기억은 그의 마음에 깊은 자국을 남겼던 것 같다. 전후 그는 꾸준히 전쟁의 책임을 승계하고 있는 자민당에는 단 한 번도 표를 준 적이 없다고 밝히고 있고, 은퇴 후에는 지역사회의 봉사화동, 환경운동에 (본인 스스로의 표현에 따르면) 자리라도 채워주려고 애썼고, 자신의 전쟁 경험을 기회가 되는 대로 알려서 반전의 신념을 전하려고 애썼다.


그리고 그 일환으로 조선인 출신으로 일본군에 징집되었다 마찬가지로 포로까지 되었지만, 일본정부로부터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했던 오웅근씨의 소송에 공동원고로 참여하기로 결심한다. 재판은 대법원까지 3연속 패소였지만, 이런 결심을 한 것 자체만으로도 그에게는 아직 “양심”이 남아있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일제 강점기 일본 정부에 의해 자행된 위안부 문제나 강제징용에 관해 조금의 공식적인 책임도 지지 않는 일본 정부의 태도에 분노하곤 한다. 그런데 책 말미를 보면 일본정부의 이런 태도는 단지 외국인에게만이 아니라 자국민에게도 동일하게 취해지고 있는 입장임을 알 수 있다. “전쟁 피해는 국민이 다 같이 참고 견뎌야 한다”는 희대의 막장 논리로 정부의 공식적 배상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


결국 피해에 대한 배상이나 보상이 아니라 너무 시끄러우니 입을 좀 다물게 하겠다는 의도로 위로금(그것도 정부 공식 예산보다는 민간 차원의 “자발적” 후원금을 바탕으로 한)을 지급하는 것이 일본 정부의 단골 대처방식이다. 이게 일본 국민들에게야 정부 사정을 이해해 줄 것을 요구할 수도 있는 문제겠지만, 우리 같은 외국인에게는 잘 통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 돈 보다 사과가 우선이라는 요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한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전범국, 가해국의 국민이라면 조금 더 적극적으로 자국 정부의 잘못된 결정에 대해 반대하며 변화를 이끌어내야 한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당장의 먹고사는 문제가 절박한 수많은 소시민들 중에서 누가, 얼마나 이런 일에 온 힘을 다해 참여할 수 있을까.


적어도 이 책의 주인공처럼 자국의 전쟁범죄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자신이 살고 있는 그곳에서부터 조금이라도 애쓰기 시작한다면, 그 또한 양심적 삶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정작 전쟁의 최종적인 책임이 이들에게 잇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책 제목을 “일본 양심의 탄생”이라고 붙은 건 좋은 선택이지 않았나 싶다.


비단 일본에만 이런 양심이 필요한 건 아니다. 당장 우리 안에도 이런 양심들이 필요한 자리가 얼마나 많은가. 베트남전에 참여해 한국군이 저지른 학살과 만행에 대해서도, 여전히 상처가 아물지 않은 4.3사건, 보도연맹사건 같은 사상에 근거한 민간인 학살들, 심지어 며칠 전에도 대통령의 비서관의 주둥이를 통해 폄훼된 5.18 같은 데서 더 많은 가해자측에 섰던 이들의 양심이 필요하다. 기억은 잊히기 마련이고, 기억하지 못하면 힘 있는 이들이 멋대로 우리의 기억을 조작하려 들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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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인들의 눈으로 본 예수 - 주님을 사랑한 첫 여성 제자들 이야기
레베카 맥클러플린 지음, 김은홍 옮김 / 죠이북스(죠이선교회)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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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여성도 장로가 될 수 있어야 한다는 내용의 유튜브 영상을 업로드 한 적이 있다. 꽤 보수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부정적인 댓글이 몇 개 기억에 남는데, 그 중 가장 인상적인 것은 나더러 “성경을 바꾸려는 사탄의 하수인”이라며, 성경에 분명 장로는 “남편”이어야 한다고 써 있으니 여성은 장로도, 목사도(이 말은 하지도 않았지만, 논리적인 귀결이기는 했다) 될 수 없다고 홀로 선언하는 댓글이었다(지금은 삭제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성경의 내용에 주의를 기울이고, 그에 충실한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자체는 칭찬받을 만한 일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문화적 배경 아래 쓰이고, 특히 우리의 경우 (상징적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번역의 번역 과정을 거친 후에야 성경을 손에 들 수 있는 상황에서, 그 자구 하나에 비정상적인 집착을 보이는 건 조금은 우스운 일이다. 그건 성경을 귀중하게 보는 태도가 아니라 우상시 하는 모습일 뿐이고,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말씀보다 수천 년 전 성경이 쓰였던 당대의 문화에 집착하는 복고주의일 뿐이다(물론 이 둘을 가리는 게 때로 어렵기도 하다).


무식함이야 죄는 아니지만, 무례함은 분명 회개해야 할 악이다. 나는 그 댓글에서 자기 의에 충만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는 예수님을 비난했던 복음서 속 어떤 이가 떠올랐다. 교회의 직분이란 성별이나 인종이 아니라 그 일을 할 수 있는 은사를 받은 사람이 맡는 게 옳다. 내가 알기론 그게 바울 서신 속 핵심 주장이다.





이런 성경 속 문화적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는 영역 가운데 하나가 여성에 대한 시선, 처우, 지위에 관한 내용이다. 많은 사람들이 지적하듯 여전히 보수적인 기독교계에서는 여성에 대한 교회 내 지위나 역할에 차등을 두고 있다. 더더욱 황당한 건 자신들의 그런 태도가 마치 성경에 의해 지지되는 것인 양 고집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이게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기독교가 전성기를 맞았던 중세 이래로 교회 내 여성의 지위는 결코 높지 않았다. 그럼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틀렸느냐, 그들의 신앙에 문제가 있었느냐는 반문은 강력하다. 그러나 오늘의 우리 또한 판단착오와 오해로 많은 실수를 하듯, 그들 또한 자신들이 속했던 문화적 상황 속에서 성경의 진리를 오해했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나, 남자나 여자나 동등하다는 갈 3:28의 진리가 적어도 교회 안 삶 속에 실현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고 있을 뿐이다.


여기에 최근의 보수적 그리스도인들이 갖는 또 하나의 우려도 공감이 되긴 한다. 소위 여성주의 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신학 전체를 여성의 입장에서 재구성하려는 시도에 대한 두려움과 반발이다. 극단주의적 페미니즘의 발흥으로 사회의 다른 영역에서도 그 폐해를 목격한 사람들이 이쪽 역시 의심의 눈초리로 보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개인적으론 이쪽 역시, 남성 중심의 신학과 마찬가지로 문화적, 시대적 한계에 파묻힌 시도라고 본다. 하지만 일단 여성이라는 말만 나와도 색안경을 끼게 만든 것도 사실이고.





자, 서론이 좀 길었다. 이번에 소개할 책은 여전히 교회의 직분이나 의사결정구조, 지위 등에서 소외되고 있는 교회 내 여성들에 대한 위로, 나아가 복음서 속 여성들의 중요한 역할에 대한 재발견을 담고 있는 책이다. 저자는 예수를 동성애자나 흑인으로, 하나님을 어머니로 묘사하지 않고서, 오로지 복음서 내 기록에 근거해 이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그러니 보수적 기독교인들도 안심하시라).


저자에 따르면 복음서에서 여성들의 증언을 뺀다면 우리는 손에 들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예수의 탄생에 관한 내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것은 마리아의 증언 때문이었고, 그분이 자신을 처음으로 생수의 근원으로 소개하셨던 자리에 함께 있었던 것은(그래서 그 대화의 내용을 우리에게 알려준 증인이었던) 사마리아 여인 한 명 뿐이었다.


사실 이미 복음서에도 열두 사도 뿐 아니라 여러 여성 제자들의 존재가 언급되어 있다. 마리아와 마르다는 유명한 여성 제자였고, 그분과 함께 여행을 다니지는 않았더라도 곳곳에 그분을 따르는 여성제자들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분의 죽음을 가장 가까이서 목격한 것도, 부활의 첫 증인이 된 것도 모두 여성제자들/증인들이었다.


책 제목처럼 이미 복음서는 ‘여인들의 눈으로 본’ 증언이었다는 말이다. 물론 이 말이 오직 여성들이 더 우월하다는 극단적 주장으로 넘어가지 않도록 조심하자(저자는 그런 뉘앙스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오늘날 일부 교회에서 여성의 역할이 지나치게 축소되고 억압되고 있는 상황에서 분명 시사하는 바가 있다고 본다.





책은 복음서 속 여성이 등장하는 본문들을 골라, 그 행간의 내용을 좀 더 자세히 풀어가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글의 논리적 전개에 큰 무리가 없고, 결론도 그리 과격하거나 하지 않다(책 제목이 ‘여성의 관점으로 본’이 아닌 것에 주목하자). 하지만 복음서 안에 이렇게 여성들의 증언이 큰 비중을 차지했던가 하는 작은 놀라움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제목에 ‘여인들의 눈으로 본’이라는 수식어구가 붙어있지만, 책은 기본적으로 복음서의 내용을 충실하게 전달하는 데 집중한다. 꼭 여성이라는 주제가 아니라도 복음서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한 목적으로도 충분히 선택할 만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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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홀 문화인류학 4부작 1 : 침묵의 언어 이상의 도서관 46
에드워드 홀 지음, 최효선 옮김 / 한길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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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유튜브 콘텐츠를 촬영하면서 추천받은 책이다. 필리핀 선교사로 10년 넘게 사역하시던 분이었는데, 타문화권에서 일을 하는 게 어디 쉬울까. 우리에겐 당연하게 여겨지는 많은 관행들이, 실은 인류의 보편적인 관습이 아니라 특정한 문화를 공유하고 있는 사람들끼리 통하는 무엇이라는 걸 깨닫지 못하면 결코 이런 일은 제대로 해 낼 수 없다. 이런 면에서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하시니 한 번쯤 읽어 볼만하다.


책 제목인 ‘침묵의 언어’는 비언어적 언어(의사소통 수단)을 가리킨다. 굳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다양한 것으로 우리의 마음을 표현하곤 한다. 가장 직접적으로는 표정으로 말할 수도 있고, 특정한 제스처는 거의 말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앞서도 말했듯, 특정한 지역에서, 특정한 문화와 전통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말을 하지 않아도 자명한 무엇이지만, 그 영역 밖으로 나가면 전혀 다를 수 있다.




대학 시절 교양과목으로 한 학기 동안 수어를 배운 적이 있다. 그 학기를 지나서는 딱히 쓸 데가 마땅히 없기도 해서 더 익히지 않는 바람에 대부분 잊어버렸지만, 여전히 기억이 나는 게 몇 개가 있다. 그 중 하나가 손위 남자 형제를 가리키는 수어였다. 가운데 손가락만 펴고 나머지 손가락은 모두 접은 채로 손바닥을 자신 쪽을 향하게 해서 들어 올리는 거였다. 그렇다. 꽤 많은 나라들에서 욕으로 사용되는 그 제스처와 너무나 비슷하다(그래서 아직까지 기억이 나는 건지도). 당연히 수어를 모르는 사람에게는 좀 당황스러울 수도 있는 동작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우리는 이런 문제에 쉽게 부딪히곤 한다. 흔히 어떤 나라 사람들은 이렇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경우가 있다. 이 나라 사람들은 게으르고, 저 나라 사람들은 탐욕스럽고, 또 다른 나라 사람들은 속을 드러내지 않고 하는 것들. 그런데 알고 보면 이런 편견들은 사실 우리와 다른 그들의 비언어적 의사소통 방식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우리에게 익숙한 문화대로 그 사람들을 평가하고 있는 것.


앞서 말한 선교사님과의 대화에서 인상적이었던 것이 시간에 대한 다른 감각 부분이었다. 우리 달리 도심지를 제외하고는 교통수단이 지프니 말고는 거의 갖춰지지 않은 필리핀의 경우, 정확한 시간에 약속을 잡는 것이 애초에 무리라는 것. 이런 걸 모른 채로 필리핀인들이 약속시간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고 비난하기 시작하면 그 다음 스텝이 제대로 진행될 리 없다. 오해가 쌓이면 결국 의견 충돌로 이어지고 종래에는 갈등으로 치닫게 된다.





책은 이런 다양한 영역들에 대한 실제 사례들과 저자가 정리한 비언어적 언어의 다양한 양상들을 잘 제시하고 있다. 문화 간 차이에 대한 고민이 있다면 한 번쯤 읽어볼 만한 책이다. 물론 이 책이 우리나라에 출판된 것만 해도 2013년이니 벌써 10년 전이고, 원서는 무려 1959년에 나왔으니 그 사이 이 문제에 대해서도 이전보다는 좀 더 나은 이해를 갖게 되지 않았나 싶다.


이미 당시에도 미국 정부는 이런 문제를 두고 본격적인 연구를 진행했다니 확실히 다르긴 다르구나 싶다. 우리나라는 불과 1년 후 4.19 혁명이 일어날 정도로 이승만 정부의 극심한 정치 부패가 나라를 망치고 있는 중이었다. 이런 기초적인 인문학 연구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다는 게 미국이라는 나라의 힘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단순한 사례들의 나열을 넘어, 저자 나름대로 이런 다양한 영역들의 정리를 통한 체계화까지 시도하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이 책보다 좀 더 세련된 책들도 분명 있겠지만, 역시 근본을 손에 드는 게 주는 맛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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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덕원 교수의 예배 꿀팁 궁금해 시리즈 3
안덕원 지음 / 홍성사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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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모양은 홍성사답지 않게(?) 작고 아담하게 만들어졌다. 개인적으로는 홍성사는 C. S. 루이스로 만나기 시작한 출판사였던지라, 한 권 한 권 양장본으로 내던 기억이 강하게 박혀 있어서다.(물론 요새는 루이스 책도 다 무선제본으로 표지를 갈아 다시 내고 있긴 하지만, 루이스 책 정도는, 음, 양장본으로 좀 튼튼하게...) 파스텔 컬러에 제목만 굵은 검은색 글씨로 큼지막하게 박아넣은 것이 요새 감성이긴 하다.


다만 일단 책장을 펴면 좀 놀라게 되는데, 글씨가 너무 작다. 그리고 너무 많다. 판형을 유지하면서 너무 두껍지 않게 내용을 담으려다 보니 그렇게 된건가 싶은데, 이 정도면 나이가 좀 있는 분들은 책을 펴기가 힘들 것 같긴 하다. 물론 애초에 내용 자체가 좀 더 젊은 세대를 겨냥한 것 같긴 하지만.




책은 예배와 관련된 다양한 내용들을 질문에 답하는 형식으로 구성해 두었다. 모두 마흔 개의 질문이 담겨 있는데, 1부는 예배라는 큰 그림을 그려주는 내용이고, 2부는 예배의 각 순서에 관한 질문, 3부는 교회력과 절기, 4부는 성례(성찬, 세례), 마지막 5부는 예배의 좀 다른 모습을 모색해 보는(특히 온라인 예배를 중심으로) 내용이 담겨 있다.


전반적으로 틀 자체는 짜임새가 있다 싶은데, 내용을 서술하는 방식이 좀 딱딱하다. 첫 몇 개 장만 봐도 아, 교수님이 딱 교수님처럼 썼구나 싶은 생각이 물씬 든다. 뭐 억지 유머를 넣을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이렇게 딱딱하면 애초에 목적했던 젊은 세대가 쉽게 접할 수 있을까 싶긴 하다. 예배학 전공자가 강의하는 느낌이다. 그것도 넣고 싶은 많은 내용을 줄이려다 보니 연결이 좀 매끄럽지 못한 부분도 자주 보인다.


하지만 내용 자체는 관련 주제에 대한 여러 정보들을 균형 있게 정리해 두고 있어서, 참고서로서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특히 다양한 교파의 입장을 두루 살피면서, 교파나 교단의 입장을 충분히 존중하면서도 역사적 교회의 전통도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입장이 꽤 잘 와 닿는다. 오로지 지금 나의 신앙생활만이 전부인 양 착각하는 근시안적인 신앙행태에서 벗어나려면 역시 역사를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




나온 지 얼마 안 된 책이다 보니 최근 새롭게 부각되고 있는 온라인 예배(심지어 온라인 성찬도?) 같은 주제에 대한 고민도 보여 반갑다. 종합하자면 일종의 대안적 예배 형태로 인정할 수 있지 않겠느냐, 하지만 좀 더 바람직하게는 함께 모이는 게 좋겠다 정도인데, 나도 이 입장에 동의한다. 다만 팬데믹 상황에서도 반드시 모여서 바이러스를 퍼뜨리는 예배를 해야만 믿음이 있는 거라고 생각하는 꼰대정신이 생생하게 살아있는 나라에서 아직 이 부분에 대한 고민은 충분히 성숙되지 못한 것 같다.


제목처럼 예배와 관련된 다양한 팁을 알아본다는 정도로 읽으면 될 것 같다(아주 전문적인 내용까지는 소개되지 않기도 하다). 저자도 자주 말하고 있지만, 예배와 관련해도 다양한 신학 전통이 있기에, 어느 한 쪽이 틀렸다고만 말하기는 쉽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서로 다른 전통에 대해 이해하려는 자세로, 각자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의 길을 걸어간다면 얼마든지 여러 모습의 예배도 받아들일 수 있지 않을까(물론 우선은 자신이 속한 예배 전통의 본질을 충분히 되살려 보는 게 먼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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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로 읽는 독일 프로이센 역사 역사가 흐르는 미술관 5
나카노 교코 지음, 조사연 옮김 / 한경arte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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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빌렸던 책을 반납하러 동네 도서관에 갔다가 슬쩍 데려온 책이다. 책 제목부터 뭔가 흥미진진해 보인다. 명화와 역사, 그리고 프로이센까지. 사실 이런 책은 분류하기가 좀 애매하다. 사실 그림에 관한 책을 한 권 볼까 하고 집었는데, 역사가 붙어있는, 그런데 또 읽다보면 중심은 그림보다는 역사인(그렇다고 그림이 단지 참고 설명용으로만 사용되는 건 아닌) 그런 책이다. 그래도 출판사가 일단 예술 관련 쪽이니 예술 쪽으로 분류를 해야 할까 싶으면서도, 이 시리즈가 대체로 역사를 설명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 복잡하다. 그냥 알라딘 분류법에 따라 미술사, 예술 쪽으로 넣자.




책은 오늘날 독일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프로이센의 역사를 다룬다. 정확히는 프로이센의 호엔촐레른 가문의 역사지만, 책에도 언급되듯 이 이름 자체가 좀 생소하니, 조금이라도 유명한 프로이센이라는 이름을, 그리고 독일이라는 국명까지 붙였다(그런데 결과적으로 “독일 프로이센의 역사”라는 좀 어정쩡한 이름이 되어버렸다). 참고로 이 “프로이센”은 종종 “프러시아”라고 표기되기도 한다. 후자는 영어식 발음, 전자는 독일어식 발음이다.


중세 십자군운동이 사실상 종결된 13세기 즈음,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직속의 독일 기사단(튜튼 기사단)은 성지에서 고국으로 돌아온다. 하지만 이런 위험한 집단을 그냥 놔둘 수는 없는 법. 당시 교회는 기독교를 믿지 않는 유럽의 북동부 지방을 겨냥한 북방십자군 운동을 시작했고, 여기에 이 독일기사단이 나서 땅을 정복했고 아예 자신들이 눌러 앉아버린다. 독일기사단국의 시작이었다.


그로부터 250년이 더 지난 1510년 호엔촐레른 가문의 20대 젊은이가 이 기사단국의 37대 총장으로 선출된다. 물론 선출이라고는 하지만 이미 이전에 모종의 작업이 있었다. 그가 바로 알브레히트 호엔촐레른이다. 그리고 10년 후쯤 그는 독일에서 한창 종교개혁을 진두지휘하던 마르틴 루터와의 만남 후 전격적으로 루터파로 개종을 한다. 애초에 십자군 운동에서 비롯된 기사단은 당연히 가톨릭이었지만, 이에 대한 반발은 별로 없었나 보다. 알브레히트는 기사단국을 해체하고 프로이센 공국을 세워 자신이 첫 공작위에 오른다. 그렇게 프로이센은 호엔촐레른 가문의 세습 영지가 된 것.


그리고 프로이센 공국은 얼마 후 왕국으로 승격할 기회를 얻게 된다. 1701년 스페인의 왕위를 두고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이 벌인 전쟁에서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레오폴트 1세를 돕기로 약속한 대가로 왕국으로의 승격을 허락받은 것. 책은 1대 왕인 프리드리히 1세부터 마지막 9대 빌헬름 2세까지의 역사를 그림과 함께 간략하게 요약 설명해준다.





생각보다 금세 책장이 넘어간다. 애초에 생소한 이름들, 지역들이지만 저자는 적당히 자를 건 자르고, 붙일 건 붙여서 내용을 쉽게 설명해 낸다. 물론 여기에는 이 책의 기획 자체가 그림을 중심으로 역사를 설명하는 식이다보니, 설명할 그림이 있어야 하니까 내용도 여기에 맞춰질 수밖에 없었을 것 같긴 하다.


그래도 좋은 요약 능력을 보여주는 책이다 보니, 일단 시작으로는 이 정도의 책으로 충분하겠다 싶다. 좀 더 상세하고 전문적인 정보는 또 다른 책을 찾아보면 될 일이니까. 결국 프로이센 왕국은 점차 세력을 키워 오늘날 독일을 형성하는 모체가 된다. 근세 독일과 유럽 역사를 이해하기 위해서 이 정도의 상식은 알아두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컬러 도판도 눈을 즐겁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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