맹자 - 민심을 얻는 왕도정치의 고전 ㅣ 명역고전 시리즈
맹자 지음, 김원중 옮김 / 휴머니스트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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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에는 동양 고전을 두 권 째 손에 든다. 월초에는 논어를, 월말에는 맹자를 읽게 된다. 공자와 맹자, 뭔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느낌을 준다. 주로 짧은 경구들 속 공자는 뭔가 심오하면서도 동네에서 만날 수 있는 아저씨 같은 면모도 가끔 보여주는 친근한 면이 있었다면, 맹자는 입만 열면 요순 시대를 말하면서도 종종 모순되는 행동(요순의, 또는 자기 자신의)을 변명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좀 보인다.


물론 책 전반에 걸쳐서 공자와 맹자가 공통적으로 경험하고 있던 한계가 짙게 드리워있다는 느낌도 준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이상을 국정 운영에 반영해 보고자했던 정치이론가였지만, 그들이 말하는 인, 군자 같은 사상은 춘추시대가 저물어가고 전국시대가 시작되는 마당에 각국의 권력자들의 귀에 들어오지 않는 말들이었다.


그런데 또 그렇다고 해서 맹자가 어디 산골에 틀어박혀 몇 안 되는 제자들하고만 지냈던 서생도 아니었으니, 난세일수록 인재는 더 필요한 법이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맹자같은 사람들 주변에는 또 인재들이 모이는 법이라 수백 명의 종자들을 거느리고 이 나라 저 나라를 다니며 유세를 했다고 하니, 오늘날로 치면 꽤 유명한 인플루언서였다.





군자와, 인에 대한 강조는 공자와 비슷하지만, 요순, 또 우탕과 문무 등 성군으로 일컬어지는 인물들에 대한 지나친 숭배랄까, 윤색이랄까 그런 것도 좀 보인다. 어떻게든 그들을 좋은 사람으로 덧칠하려는 시도. 이쯤 되면 거의 신앙인데, 문제는 누가 공자와 맹자에게 그런 것들을 가르쳐 주었는가가 의외로 불분명하다는 점. 일종의 유학의 신화가 아닌가 싶다.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역성혁명에 대한 옹호인데, 양혜왕 하편을 보면 은나라의 창업군주인 탕이 하나라의 마지막 왕 걸을 쫓아내고 왕이된 것을 가리켜, 신하가 군주를 시해하는 것이 옳으냐는 질문을 받고는, 걸은 인과 의를 해치는 인물이니 군주가 아닌 ‘한 사내’일 뿐이라는 논리로 이를 옹호한다. 왕이 왕 같지 않으면 내쫓아도 상관없다는, 꽤나 충격적인 가르침이다. 유학은 결코 점잖은 체 하는 샌님들의 학문이 아니었다.


흔히 말하는 측은지심도 여기 맹자에 나온다. 맹자는 여기에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과 사양할 줄 아는 것,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아는 것을 더해 사람의 사지처럼 반드시 가져야 하는 무엇이라고 본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이 부끄러움도 모르고, 자신의 그릇이 안 되는데도 사양할 줄을 알지 못하는지, 그저 자리만 준다고 하면 덥석 받아먹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예나 오늘이나 인재를 구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맹자는 신하된 가장 중요한 도리는, 단지 군주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는 것이 아니라, 군주가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간하는 것, 그리고 도무지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는 물러서는 것이라고 보는 듯하다. 트럼프니, 윤석렬이니 하는 무능하고 악한 지도자들 옆에 붙어서, 그저 자신은 시키는 것을 했을 뿐이라는 얼토당토 않는 변명이나 일삼는 한심한 무리들은 맹자의 눈으로 보기에는 신하 실격이다.


이 외에도 군자는 동물이 죽어가는 소리를 듣고서 그 짐승의 고기를 먹지 못한다는 구절에서는 동물에 대한 측은지심도 엿보인다. 다만 채식주의를 하라는 말은 아니다. 고기는 공자님도 사랑했고, 맹자 역시 생선도 곰발바닥(!)도 좋아하는 요리 재료라고 말한다.





“맹자” 역시 다양한 번역과 버전으로 나와 있을 것이다. 이 책의 경우 여러 중요한 주석가들의 의견을 반영해 현대어로 번역을 했지만, 워낙 오래 전 글이다 보니 어느 정도의 해석이 붙어 있었더라면 이해하는 데 좀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맹자의 시대에 자신의 뜻을 온전히 다 펼쳐본 인물이 누가 있을까 싶다. 시대적 한계와 상황의 제한 속에서 작은 뜻을 실현해 보기도 하고, 실패도 하고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터. 그래도 꽤 높은 관직도 경험해 보기도 하고, 개인적인 생명의 위협을 겪었던 공자와는 달리, 나름 큰 위기 없이 평생을 살면서 하고 싶은 말을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후까지 남겼다면, 정치철학자로서의 삶은 꽤 괜찮았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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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근 풍요 도덕
피터 싱어 지음, 정환희 옮김 / 필로소픽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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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동벵골(오늘날의 방글라데시)의 열악한 상황을 알리며 그들을 돕기 위해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고, 그것도 단순히 국가적 원조와 같은 방식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더 많은 기부를 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해 눈길을 끌었던 짧은 기고문(‘기근, 풍요, 도덕’)과 그 이후 쓰인 비슷한 내용의 두 개의 글을 더해 엮은 책이다.


논지의 핵심은, 우리가 직접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들을 도와야 하는 의무가 덜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누군가를 살리는 데 쓸 수 있는 돈을 사치나 덜 필수적인 것들을 구입하는 데 사용하는 것은 도덕적인 잘못이라는 주장이다.


이를 강조하기 위해 몇 가지 보조적인 논리들도 등장하는데, 누군가를 도와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는 거리와는 상관이 없다던가, 자선이라는 개념은 누군가를 돕는 일을 선택적인 문제로 만든다는 의미에서 폐기되어야 한다는 주장 같은 것들이 있다.(이건 선택이 아니라 무조건 해야 하는 일이다! 라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우리가 가진 자원을 최대한 사용해야 한다는 강한 메시지가 이 짧은 에세이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된다. 그리고 실제로 그 메시지에 반응해서 이런저런 프로젝트를 시작한 사람들도 있었고, 결과적으로(꼭 이 에세이의 결과는 아니겠지만) 상당 부분 세계적인 빈곤을 줄여왔다는 것도 긍정적인 차원이다.


다만 예전부터 이 저자의 글을 읽으며 떠올랐던 의문은 이 정도의 강한 당위를 유물론과 진화론 따위의 얄팍한 철학적 근거 위에 세우는 게 가능한 것인가였다. 우리는 왜 다른 사람을 도와야 할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답은 “그것이 옳으니까(윤리적인 행동이니까, 도덕적인 일이니까)”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여기서 옳음, 도덕, 윤리 같은 개념들은 어디서 오는 걸까?


애초에 진화에서 무슨 ‘목적’을 찾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그래서 일부 유물론자들은 목적론적 윤리학을 주장하는 마이클 센델 같은 학자들을 심하게 깐다.) 하지만 그래서는 가장 초보적인 윤리적 개념에도 이를 수 없기에, ‘그냥 그런 것’이라고 퉁치고 넘어가곤 한다. 이 책의 저자인 피터 싱어 역시 마찬가지(“진화가 우리에게 물려준 도덕적 직관”, 31).


사실 책 전체에 걸쳐 저자는 “왜”라는 질문을 열심히 회피한다(그냥 인식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그에게 인간의 도덕, 윤리의식은 그냥 있는 것이다. 그러니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라. 가진 재산을 낼 수 있는 데까지 내서. 저자는 우리의 생활수준이 우리가 돕고자 하는 사람들의 수준보다 더 떨어지기 전까지 도와야 한다는 강한 주장을 하는데, 그 주장의 현실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건 어쩌면 저자의 전제가 애매한 생각 위에 세워졌기 때문은 아닐까.





물론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 대한 강한 관심, 그리고 적극적인 행동의 독려, 모두 이 시대에 꼭 필요한 것들이다. 책에는 저자의 논리 과정에는 동의하지만 그 결론이 지나치게 과격(?)하다는 비판이 있었다고 말하지만, 내 경우엔 그 결론에는 깊이 공감하지만 논리적 과정이 허술하게 느껴질 뿐이다. 정말로 잔뜩 배웠다는 양반들이 이 정도의 허술한 토대 위에 윤리학을 세우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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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철학 - 고양이와 삶의 의미
존 그레이 지음, 김희연 옮김 / 이학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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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고양이가 들어있었다는 게 이 책을 도서관에서 집어온 결정적인 이유였던 거.. 맞다. 물론 대충 몇 장을 떠들어 보기는 했는데, 의외로 진지한 철학 책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고민 없이 들고 왔다.


책은 고양이의 삶과 인간의 삶을 대조하면서, 인류의 철학사에서 제시되었던 주요 주장들을 고양이의 입장(으로 위장된 저자의 생각이겠지)에서 보면 별 것 아니라는 식의(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도 괜찮다고 읽을 수도 있다) 논평을 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면 책 초반 저자는 인간 삶의 대부분은 행복을 위한 투쟁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고양이들 사이의 행복은 그저 실제적인 위협이 사라지면 기본적으로 유지하는 상태라고 말하면서, 뭘 대단한 걸 자꾸 이루려고 그러느냐, 그냥 지금 큰 위기 없이 살고 있으면 나름 행복한 게 아니겠느냐는 결론으로 이어간다. 사실 책 전반에 걸쳐 이런 식의 주장이 반복된다.





너무 태평스러운 말 아니냐는 반문이 충분히 가능하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철학사 전반에 관한 요약 및 그 비평과 함께 들이미니 책의 수준을 가지고 쉽게 뭐라고 하기에는 또 머뭇거려진다. 하지만 또 하나하나 따져들어 가면 저자의 주장에 대한 반박도 못할 건 아니다.


책에서 저자가 비판하는 건 합리주의적 철학과 인류와 우주의 거대한 목적이나 목표에 대한 사유들이다. 손에 잡히지도 않는 그런 것들을 고민해 봐야 무슨 소용이냐는 식이다. 그렇다고 거대 담론에 대한 강한 부정을 표방하는 포스트모더니즘에 친화적인 것도 아닌데, 그 역시 사실은 대단히 독단적인 전체주의적 철학인 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저자는 세속의 일들로부터 한 발 물러서서 관조하고 평론하는 입장을 취하고자 하고 있는데, 이건 도교 같은 동양의 철학에 약간은 호의적인 데서도 드러나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래서 뭘 원하는 것이냐, 당신이 말하는 것이 실현 가능한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별반 깊은 설명이 없으니, 딱 평론가의 입장에서 본 모두 까기의 느낌 그 이상은 아니다.





그래도 고양이의 삶에 관한 다양한 관찰들과 사유들은 흥미로웠고, 고양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몇몇 문학 작품들 속 철학적 메시지와 철학사 전반에 관한 이해 등등 읽어가는 즐거움을 주기도 했다.


애초에 사람이 고양이처럼 살 수도 없는 법이고, 고양이에게 지나친 의인화를 통한 투영을 하는 심리 자체도 현실에 대한 불편함을 표출하는 한 가지 방식이라는 점에서 저자의 주장을 문자적으로만 읽는 건 무리일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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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에게 철학을 가르치는 완벽한 방법
앤서니 맥가윈 지음, 최이현 옮김 / 니케북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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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손에 든 철학사 책이다. 그런데 제목이 꽤나 애를 썼다. 개에게 철학을 가르치는 방법 운운하는 내용이 철학사 제목으로 붙을 줄이야. 그만큼 내용을 좀 더 편안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리라. 저자도 무슨무슨 교수 따위가 아니라, 철학과 정치를 공부한(그래도 박사학위까지 취득했다) 글쓰기 강사이자 작가이다. 번역을 거쳤지만, 확실히 교수들이 쓰는 졸린 문장과는 느낌이 다르다.


책은 저자가 자신의 반려견과 함께 산책을 하면서 대화를 주고받는 이야기다. 정말이다. 개와 대화를 한다. 작품 속 개는 실제로 인간처럼 말도 한다. 물론 이 대화가 다른 사람에게는 저자 혼자 떠드는 것처럼 보이는 걸로 묘사된다. 개의 이해력은 그래도 어느 정도 대화가 가능한 수준이니 고등학교 수준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너무 진지하게 여기진 말자).





이야기의 시작은 윤리학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관한 고민들. 그리고 존재론으로 넘어갔다가 인식론으로 이어진다. 책의 후반은 과학철학에 관한 전반적인 소개, 그리고 마지막에는 생과 사에 관한 쇼펜하우어의 사고를 풀어놓는다. 말 그대로 서양 철학사 전반을 소개하는 셈이다.


대화식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그리고 조금 어려운 개념이 나오면 개의 입을 통해 다시 설명을 요구하고, 저자가 풀어서 설명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읽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된다. 물론 이런 책은 어느 정도 사전 정보가 있으면 이해하는 데 훨씬 좋고, 간단한 개념서의 한계 상 깊은 내용까지 설명되지는 않지만, 이 정도의 개념설명이라면 교양 수준으로 알아둘 만하지 않을까 싶다. 고등학생 정도면 어느 정도는 이해도 가능할 듯하고.





문제는 이렇게 한 사람이 다양한 철학의 제 분야를 설명할 때, 어쩔 수 없이 저자의 입장에 치우신 설명을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저자의 입장은 뭘까? 윤리학에서 저자는 “모든 상황에 완벽한 해답을 주는 윤리학은 존재하지 않으며, 각각의 영역에 맞아 들어가는 윤리학이 있을 뿐”이라는 상황윤리에 가까운 주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애초에 선악이라는 개념이 궁극적으로는 애매하다는 입장이기도 하다).


인식론은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로 정리되는데, 이 논쟁은 결국 인간이 어떻게 자기 외부의 세계를 인지하고 해석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다양한 주장들이 있지만, 최종적으로 어떻게 이 두 개의 영역이 연결되는지에 대해서는 사실 어느 철학자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비트겐슈타인으로 넘어가면 아예 그런 건 문제가 아니라고 덮어버리고 자기 할 말만 하는 느낌이기도 하고. 저자도 마찬가지여서 이 부분에서 무슨 묘수를 내지는 못한다.


전반적으로 애매하고 모호한 지점들이 항상 존재한다. 그러면서도 저자가 확신하는 건 신에 대한 믿음이나 관념은 틀렸다는 명제인데, 이 주장을 밀어붙이기 위해 저자가 사용하는 논리는 저자의 선입관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인지 별다른 설명도 없다. 기본적으로 유물론적 관점을 지닌 저자의, 아니 어쩌면 현대 철학이 지닌 한계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부분을 좀 떼어 놓고 보면, 전반적으로 쉽게 잘 쓰인 철학 개론서다. 특히 철학사에 등장하는 다양한 이론들의 한계까지도 적절하게 짚어줌으로써, 좀 더 입체적인 이해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 정도만 해도 읽을 만한 책이라 할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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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와 초승달 - 그리스도인과 무슬림의 영성에 관하여
필 파샬 지음, 이숙희 옮김 / 죠이북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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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무려 50여 년 동안 무슬림들 사이에서 사역해 온 선교사다. 책은 기독교와 이슬람교라는 양대 종교를 아홉 개의 항목에 걸쳐서 서로 비교하고 대조하는 내용이다. 가장 먼저는 두 종교에서 믿는 신을, 그리고 경전, 예배, 고통, 죄, 신비주의, 그리스도와 무함마드, 지옥과 천국, 진리를 위한 추구라는 주제가 이어진다.


책의 주제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두 종교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많은 공통점이 있다는 정도일 것 같다. 특히나 이 ‘공통점’은 실천적인 상황으로 들어갈수록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반면 교리적인 차원에서는 좀 더 차이점이 두드러진다). 예컨대 두 종교 안에는 공통적으로 신비주의적 전통이 있고, 이는 정통주의와 긴장관계가 있다.


또 다른 공통점은 살짝 씁쓸한데,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무슬림을 더욱 영적인 생활을 하도록 이끄는 것은 분명하지만,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미래의 심판을 별로 걱정하지 않으며 불경건한 생활을 지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건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분명 성경이 하나님의 유일하고, 궁극적이며, 무오한 계시임을 믿고. 무함마드가 참된 선지자였는지를 의심스럽게 본다(262). 또, 이슬람교의 경전인 꾸란에서 이사(예수)를 묘사하는 내용에 많은 왜곡과 편집이 들어갔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저자 자신도 서문에서 인정하듯 이 책의 내용 중 어떤 부분은 “저자가 이슬람교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다”고(12) 느껴질 만하도록 쓰였다. 저자는 이를 “십자군식 태도보다는 사랑으로 실수를 범하는 편”을 선택하려는 의도로 설명한다.


부분적으로 그런 방향성을 갖게 된 것은, 이 책이 엄밀한 의미의 학문적 접근만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굉장히 많이 담아내고 있다. 물론 그 경험 가운데는 고집 세고, 교만하고, 좁은 시야를 가진 무슬림들도 있었지만, 반대로 이해심 깊고, 너그러우며, 배려할 줄 아는 친구도 있었다. 자연히 무슬림에 대한 일방적인 매도나 적대심을 보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문헌 가운데는 교리적인 글보다는 다양한 필자들이 쓴 개인적인 신앙기록들도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 예컨대 이슬람교로 개종한 사람들의 글을 인용하면서 이슬람교에 대해 설명하는 식인데, 자연히 호의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자 자신이 기독교인이라는 점도 여기에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우리는 기독교인이기에, 기독교 안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 반면 어디까지나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그렇게 확신의 어조로 말하거나 쓰는 게 좀 꺼려질 수 있다. 심지어 비슷한 문제가 그 안에 많이 있다고 해도 말이다.





물론 책은 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 무슬림들의 사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좀 눈에 잘 안 들어온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는데, 가장 주된 이유는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책의 논조가 살짝 오락가락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보통 이런 책의 경우 이슬람교를 새롭게 보자는 취지로 호의적으로만 쓰거나, 반대로 완고한 교리적 정통주의에 입각해 상대를 악마화 하거나 하는 식이지만, 이 책은 그렇지 않다.


무엇보다 이 책이 이슬람교라는 종교를 분석하기보다는, 그 종교를 믿는 무슬림이라는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어떤 사람들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그가 특정한 민족이니까, 혹은 특정한 종교를 믿고 있으니까 이렇다는 식의 설명은 얼마나 납작한 서술이겠는가. 기독교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똑같지 않은 것처럼 무슬림 또한 비슷한 상황일 것이다.(그래도 하나의 책을 쓸 때는 좀 더 명확한 게 머리에 잘 들어오긴 한다.)


실제 무슬림들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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