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자들 - 개정3판
아브라함 J. 헤셸 지음, 이현주 옮김 / 삼인 / 202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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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적이고 정통적인 유대교 신학자는 보수적 기독교 신학과도 꽤 잘 어울릴 수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하는 책이다. 사실 신학적 자유주의는 개신교회 안에만 있는 건 아니다. 유대교 가운데서도 자유주의적 입장에 속한 학자들이 적지 않다. 그리고 그런 글들은 대개 지루하기 그지없다. 워낙 다양한 흐름이 있긴 하지만, 대체로 개신교 자유주의와 마찬가지로 윤리를 강조하는데, 윤리적이고 도덕적 책임감을 갖고 살자는 데는 동의하지만 그 이야기를 하는데 왜 유대교가 나와야 하는지를 억지로 연결하는 느낌이랄까.(이건 기독교 자유주의도 마찬가지고)


사실 이 책의 저자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에 대해서도 잘은 모른다. 하지만 이 두꺼운 책을 읽어가면서 왠지 그에게서 ‘우리’와 비슷한 향기가 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리처드 마우가 쓴 한 책의 제목과 같은 “톱밥향기”와 비슷한. 오늘날 기준으로는 조금 투박해 보이지만, 훨씬 더 오래된 정통과의 연결, 그리고 한 차원 높은 통찰. 한 가지 큰 차이점이 있다면, 책 어디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 뿐.





1부에서는 간략하게 예언자가 누구인지를 설명하고 아모스, 호세아, 이사야, 미가, 예레미야, 하박국 등으로 이어지는 주요 예언서들의 내용을 분석한다. 다만 주석책과 같은 느낌은 아니고, 그 역사적 정황과 그 안에서 경험했을 예언자들의 특별한 경험과 반응 등이 주가 된다. 말미에는 징벌과 정의라는 예언의 주된 주제를 간략히 고찰한다.


2부에서는 예언서를 좀 더 외곽에서 바라보면서 떠올릴 수 있는 몇 가지 주제들을 세밀하게 분석한다. 그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고, 영감을 받고 예언을 하는 과정은 어떤 모습이었을지(황홀경, 무아지경과는 어떻게 다른지), 자주 등장하는 강한 분노와 징계의 정념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등이 다양하게 설명되어 있다.





주제 하나하나가 흥미로울뿐더러, 주제에 접근하는 방식과 관점도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예언자들에 대한 심리분석이나 정신분석 타령이나 하는 가볍디가벼운 현대주의자들의 글과는 차원이 다르다. 소위 비평적인 주석들에서는 묻거나 잘 다루지 않는 예언자들의 영감에 대한 좀 더 깊은 이해, 그리고 정경적 관점에서 보는 예언자의 사역 등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특별히 2부의 여러 내용들은 따로 영상으로 만들어 보고 싶을 정도.


앞서도 말했듯이, 보수적인 신학을 가지고 있는 개신교인들에게도 구약의 예언서들을 읽어가는 데 좋은 참고서가 될 수 있을 듯하다. 부족한 부분(예를 들면 예수 그리스도적 기준 같은)은 또 다른 책으로 보충하면 될 일이고. 조금 두껍다는 것이 난점이긴 한데, 이런 책은 한 권 끼고 조금씩 간식 허물어 먹듯이 곱씹어 가며 읽으면 좋지 않을까. 얼마나 많은 책을 읽느냐보다 중요한 건, 얼마나 좋은 책을 읽느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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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중 없는 사회 - AI시대, 사회적 위기
한병철 지음, 정창호 옮김 / 간디서원 / 202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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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병철 교수의 책을 읽기 시작한 건 다분히 표지 때문이었다. 동네 도서관에서 우연히 콤팩트하면서도 비비드한 컬러의 표지를 안고 있는 철학책을 발견하고서 흥미가 생겼고, 여느 철학책과 달리 일단 다들 얇아서 좋았다. 뭔가 거창한 체계를 세우기보다는 특정한 주제에 집중하면서 여기저기서 소총(짧은 문장) 사격을 하는 느낌이라 읽기에도 편하다.


여기에 또 한 가지, 한 교수의 책이 갖는 흥미로운 장점이 있는데, 바로 주제가 지극히 현대적이라는 점이다. 오늘 우리가 살면서 보고, 듣는 수많은 현상들이 책에 그대로 옮겨지고, 그 안에서 저자 나름의 통찰을 보여준다. 책은 얇지만 항상 읽어 볼만한 내용들이, 그것도 피부에 와 닿는 주제들로 구성된 따끈따끈한 요리를 제공한다.





이번 책의 주제는 “존중”이다. 대혐오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하고, 시급한 주제다. 우리는 조롱을 칭송하고, 가짜뉴스에 슈퍼챗을 쏟아 붓는 시대를 경험하고 있다. 물론 과거에는 사람들이 모두 점잖고 예의 바르게 살았다는 식의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이제는 그런 무례함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오히려 자신의 능력이나 용기를 보여주는 수단처럼 사용하는 모습들이 너무 자주 보인다는 말이다.


그렇다. 이제 우리 사회에는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들이 너무나 늘었다. 맹자는 인간의 네 가지 선한 마음 중 하나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수오지심)을 꼽았다.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남의 잘못을 미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라고까지 했다. 맹자가 오늘날 인터넷 댓글을 조금만 읽어보면, 여기는 짐승들이 섞여 사는 곳이구나 할 지도 모르겠다.


저자의 시선은 단순히 개인의 책임 영역에만 머물지 않는다. 책에서 먼저 지적하는 건 성과사회라는 구조다. 오늘날 사람들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보다는 무엇을 얼마나 이루었는지에 따라 평가받는다. 좋은 대학을 나왔는지, 돈은 얼마나 벌었는지,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의 지위에 올라갔는지 같은 것들 말이다. 인간이라는 이유만으로 받아야 할 존중이, 경쟁에서 이겨야만 얻을 수 있는 일종의 보상으로 바뀌었다는 것.


영화나 드라마에서 시작된 대사지만, 이제는 정말로 어떤 사람들을 (그가 남들보다 재산이 적고, 학력이 딸리고, 사회적 권력을 소유하지 못했다는 이유로)개, 돼지로 보는 시선을 드러내는 이들까지 나타났다. 심지어 그런 차별에 항의하는 사람에게, 그러게 공부를 열심히 하지 그랬느냐는 식의 핀잔까지 돌아간다. 공부를 잘하는 목적이 다른 사람을 함부로 대해도 되는 자격을 얻는 데 있었던가.


문제는 이런 경쟁에서 모두가 승리할 수는 없다는 점이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누군가는 뒤에 서게 된다. 그런데 그들에게 돌아가는 것이 경제적인 어려움에 더해 사회적인 모욕까지라면, 그 안에 쌓이는 감정이 온전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저자는 이런 소외와 굴욕이 사회의 분열과 공격성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한다. 어쩌면 이 부분은 오늘날 거의 전 세계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극우의 부상과 혐오주의를 설명해 주는 핵심 키워드일 지도 모르겠다.


물론 상처를 받았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할 권리가 생기는 건 아니다. 다만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이상한 개인 하나를 찾아내는 것으로 끝내버리면, 비슷한 일이 왜 반복되는지는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다.





이외에도 소셜미디어에 관한 언급(“소셜 미디어는 방자한 행동을 포상하고, 그런 행동이 오히려 더 많은 이목을 끈다”)이나 존중에 필요한 시간에 대한 지적(“존중도 시간을 요구한다. 그런데 우리는 존중을 위한 시간이 없다.”)도 날카롭다.


그리고 개인적으로 이즈음 우리 사회의 가장 위태로운 폭탄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하는 정체성정치에 관해서도 저자는 날카로운 분석을 보여준다. 저자는 이를 “의견과 정체성을 분리하지 못하는” 것으로 보면서, 특정한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는 것을 자신에 대한 공격으로 받아들이면 결국 토론은 사라지고 맹렬한 싸움만 남는다고 말한다.


후반부의 정중함과 권위에 관한 논의도 생각할 거리를 준다. 저자는 솔직한 감정만을 진짜라고 여기는 태도가 인간관계를 지탱하는 형식들을 무너뜨린다고 지적한다. 기분이 나빠도 인사를 하고, 마음에 들지 않아도 말을 가려서 하는 일이 꼭 가식일까. 오히려 그런 형식이 있기에 우리는 서로의 기분에 매번 휘둘리지 않고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자기감정을 아무렇게나 쏟아내는 것을 솔직함으로 포장하는 사람 곁에 있으면, 그 비용은 대개 주변 사람들이 치르게 된다.


익숙한 풍경들을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게 만드는 책이다. 물론 짧고 단정적인 문장들이 이어지는 만큼, 복잡한 현실을 너무 간명하게 정리해 버리는 건 아닌가 싶은 부분도 있다. 또 앞서의 책들과 마찬가지로 ㅡ래서 이 상황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에 관한 구체적인 방법은 별도로 고민해야 하고.


그래도 무엇이 문제인지를 알아차리게 해 준다는 것만으로 이런 책을 읽을 이유는 충분하다. 더 많은 성과를 내라고, 더 빠르게 반응하라고, 다른 사람에게 밀리지 말라고 재촉하는 사회에서, 잠시 멈춰 상대를 바라보라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필요한 것이니까. 우리에게 정말 시간이 없는 걸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위해 쓸 시간은 아깝다고 여기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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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자 - 민심을 얻는 왕도정치의 고전 ㅣ 명역고전 시리즈
맹자 지음, 김원중 옮김 / 휴머니스트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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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달에는 동양 고전을 두 권 째 손에 든다. 월초에는 논어를, 월말에는 맹자를 읽게 된다. 공자와 맹자, 뭔가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느낌을 준다. 주로 짧은 경구들 속 공자는 뭔가 심오하면서도 동네에서 만날 수 있는 아저씨 같은 면모도 가끔 보여주는 친근한 면이 있었다면, 맹자는 입만 열면 요순 시대를 말하면서도 종종 모순되는 행동(요순의, 또는 자기 자신의)을 변명하는 느낌을 받을 때가 좀 보인다.


물론 책 전반에 걸쳐서 공자와 맹자가 공통적으로 경험하고 있던 한계가 짙게 드리워있다는 느낌도 준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의 이상을 국정 운영에 반영해 보고자했던 정치이론가였지만, 그들이 말하는 인, 군자 같은 사상은 춘추시대가 저물어가고 전국시대가 시작되는 마당에 각국의 권력자들의 귀에 들어오지 않는 말들이었다.


그런데 또 그렇다고 해서 맹자가 어디 산골에 틀어박혀 몇 안 되는 제자들하고만 지냈던 서생도 아니었으니, 난세일수록 인재는 더 필요한 법이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는 맹자같은 사람들 주변에는 또 인재들이 모이는 법이라 수백 명의 종자들을 거느리고 이 나라 저 나라를 다니며 유세를 했다고 하니, 오늘날로 치면 꽤 유명한 인플루언서였다.





군자와, 인에 대한 강조는 공자와 비슷하지만, 요순, 또 우탕과 문무 등 성군으로 일컬어지는 인물들에 대한 지나친 숭배랄까, 윤색이랄까 그런 것도 좀 보인다. 어떻게든 그들을 좋은 사람으로 덧칠하려는 시도. 이쯤 되면 거의 신앙인데, 문제는 누가 공자와 맹자에게 그런 것들을 가르쳐 주었는가가 의외로 불분명하다는 점. 일종의 유학의 신화가 아닌가 싶다.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역성혁명에 대한 옹호인데, 양혜왕 하편을 보면 은나라의 창업군주인 탕이 하나라의 마지막 왕 걸을 쫓아내고 왕이된 것을 가리켜, 신하가 군주를 시해하는 것이 옳으냐는 질문을 받고는, 걸은 인과 의를 해치는 인물이니 군주가 아닌 ‘한 사내’일 뿐이라는 논리로 이를 옹호한다. 왕이 왕 같지 않으면 내쫓아도 상관없다는, 꽤나 충격적인 가르침이다. 유학은 결코 점잖은 체 하는 샌님들의 학문이 아니었다.


흔히 말하는 측은지심도 여기 맹자에 나온다. 맹자는 여기에 부끄러워할 줄 아는 것과 사양할 줄 아는 것,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아는 것을 더해 사람의 사지처럼 반드시 가져야 하는 무엇이라고 본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이 부끄러움도 모르고, 자신의 그릇이 안 되는데도 사양할 줄을 알지 못하는지, 그저 자리만 준다고 하면 덥석 받아먹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예나 오늘이나 인재를 구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맹자는 신하된 가장 중요한 도리는, 단지 군주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돕는 것이 아니라, 군주가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간하는 것, 그리고 도무지 뜻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는 물러서는 것이라고 보는 듯하다. 트럼프니, 윤석렬이니 하는 무능하고 악한 지도자들 옆에 붙어서, 그저 자신은 시키는 것을 했을 뿐이라는 얼토당토 않는 변명이나 일삼는 한심한 무리들은 맹자의 눈으로 보기에는 신하 실격이다.


이 외에도 군자는 동물이 죽어가는 소리를 듣고서 그 짐승의 고기를 먹지 못한다는 구절에서는 동물에 대한 측은지심도 엿보인다. 다만 채식주의를 하라는 말은 아니다. 고기는 공자님도 사랑했고, 맹자 역시 생선도 곰발바닥(!)도 좋아하는 요리 재료라고 말한다.





“맹자” 역시 다양한 번역과 버전으로 나와 있을 것이다. 이 책의 경우 여러 중요한 주석가들의 의견을 반영해 현대어로 번역을 했지만, 워낙 오래 전 글이다 보니 어느 정도의 해석이 붙어 있었더라면 이해하는 데 좀 더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사실 맹자의 시대에 자신의 뜻을 온전히 다 펼쳐본 인물이 누가 있을까 싶다. 시대적 한계와 상황의 제한 속에서 작은 뜻을 실현해 보기도 하고, 실패도 하고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을 터. 그래도 꽤 높은 관직도 경험해 보기도 하고, 개인적인 생명의 위협을 겪었던 공자와는 달리, 나름 큰 위기 없이 평생을 살면서 하고 싶은 말을 이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후까지 남겼다면, 정치철학자로서의 삶은 꽤 괜찮았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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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근 풍요 도덕
피터 싱어 지음, 정환희 옮김 / 필로소픽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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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동벵골(오늘날의 방글라데시)의 열악한 상황을 알리며 그들을 돕기 위해 더 많은 자원을 투입해야 한다고, 그것도 단순히 국가적 원조와 같은 방식에만 의존할 것이 아니라, 개개인이 더 많은 기부를 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해 눈길을 끌었던 짧은 기고문(‘기근, 풍요, 도덕’)과 그 이후 쓰인 비슷한 내용의 두 개의 글을 더해 엮은 책이다.


논지의 핵심은, 우리가 직접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해서 그들을 도와야 하는 의무가 덜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 그리고 누군가를 살리는 데 쓸 수 있는 돈을 사치나 덜 필수적인 것들을 구입하는 데 사용하는 것은 도덕적인 잘못이라는 주장이다.


이를 강조하기 위해 몇 가지 보조적인 논리들도 등장하는데, 누군가를 도와야 한다는 도덕적 의무는 거리와는 상관이 없다던가, 자선이라는 개념은 누군가를 돕는 일을 선택적인 문제로 만든다는 의미에서 폐기되어야 한다는 주장 같은 것들이 있다.(이건 선택이 아니라 무조건 해야 하는 일이다! 라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우리가 가진 자원을 최대한 사용해야 한다는 강한 메시지가 이 짧은 에세이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된다. 그리고 실제로 그 메시지에 반응해서 이런저런 프로젝트를 시작한 사람들도 있었고, 결과적으로(꼭 이 에세이의 결과는 아니겠지만) 상당 부분 세계적인 빈곤을 줄여왔다는 것도 긍정적인 차원이다.


다만 예전부터 이 저자의 글을 읽으며 떠올랐던 의문은 이 정도의 강한 당위를 유물론과 진화론 따위의 얄팍한 철학적 근거 위에 세우는 게 가능한 것인가였다. 우리는 왜 다른 사람을 도와야 할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대답은 “그것이 옳으니까(윤리적인 행동이니까, 도덕적인 일이니까)”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여기서 옳음, 도덕, 윤리 같은 개념들은 어디서 오는 걸까?


애초에 진화에서 무슨 ‘목적’을 찾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다.(그래서 일부 유물론자들은 목적론적 윤리학을 주장하는 마이클 센델 같은 학자들을 심하게 깐다.) 하지만 그래서는 가장 초보적인 윤리적 개념에도 이를 수 없기에, ‘그냥 그런 것’이라고 퉁치고 넘어가곤 한다. 이 책의 저자인 피터 싱어 역시 마찬가지(“진화가 우리에게 물려준 도덕적 직관”, 31).


사실 책 전체에 걸쳐 저자는 “왜”라는 질문을 열심히 회피한다(그냥 인식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그에게 인간의 도덕, 윤리의식은 그냥 있는 것이다. 그러니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라. 가진 재산을 낼 수 있는 데까지 내서. 저자는 우리의 생활수준이 우리가 돕고자 하는 사람들의 수준보다 더 떨어지기 전까지 도와야 한다는 강한 주장을 하는데, 그 주장의 현실성이 현저히 떨어지는 건 어쩌면 저자의 전제가 애매한 생각 위에 세워졌기 때문은 아닐까.





물론 가난하고 도움이 필요한 이들에 대한 강한 관심, 그리고 적극적인 행동의 독려, 모두 이 시대에 꼭 필요한 것들이다. 책에는 저자의 논리 과정에는 동의하지만 그 결론이 지나치게 과격(?)하다는 비판이 있었다고 말하지만, 내 경우엔 그 결론에는 깊이 공감하지만 논리적 과정이 허술하게 느껴질 뿐이다. 정말로 잔뜩 배웠다는 양반들이 이 정도의 허술한 토대 위에 윤리학을 세우려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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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철학 - 고양이와 삶의 의미
존 그레이 지음, 김희연 옮김 / 이학사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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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에 고양이가 들어있었다는 게 이 책을 도서관에서 집어온 결정적인 이유였던 거.. 맞다. 물론 대충 몇 장을 떠들어 보기는 했는데, 의외로 진지한 철학 책이라는 느낌이 들어서 고민 없이 들고 왔다.


책은 고양이의 삶과 인간의 삶을 대조하면서, 인류의 철학사에서 제시되었던 주요 주장들을 고양이의 입장(으로 위장된 저자의 생각이겠지)에서 보면 별 것 아니라는 식의(다른 방식으로 생각해도 괜찮다고 읽을 수도 있다) 논평을 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예를 들면 책 초반 저자는 인간 삶의 대부분은 행복을 위한 투쟁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고양이들 사이의 행복은 그저 실제적인 위협이 사라지면 기본적으로 유지하는 상태라고 말하면서, 뭘 대단한 걸 자꾸 이루려고 그러느냐, 그냥 지금 큰 위기 없이 살고 있으면 나름 행복한 게 아니겠느냐는 결론으로 이어간다. 사실 책 전반에 걸쳐 이런 식의 주장이 반복된다.





너무 태평스러운 말 아니냐는 반문이 충분히 가능하다. 그런데 이런 주장을 철학사 전반에 관한 요약 및 그 비평과 함께 들이미니 책의 수준을 가지고 쉽게 뭐라고 하기에는 또 머뭇거려진다. 하지만 또 하나하나 따져들어 가면 저자의 주장에 대한 반박도 못할 건 아니다.


책에서 저자가 비판하는 건 합리주의적 철학과 인류와 우주의 거대한 목적이나 목표에 대한 사유들이다. 손에 잡히지도 않는 그런 것들을 고민해 봐야 무슨 소용이냐는 식이다. 그렇다고 거대 담론에 대한 강한 부정을 표방하는 포스트모더니즘에 친화적인 것도 아닌데, 그 역시 사실은 대단히 독단적인 전체주의적 철학인 건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애초에 저자는 세속의 일들로부터 한 발 물러서서 관조하고 평론하는 입장을 취하고자 하고 있는데, 이건 도교 같은 동양의 철학에 약간은 호의적인 데서도 드러나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래서 뭘 원하는 것이냐, 당신이 말하는 것이 실현 가능한 것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별반 깊은 설명이 없으니, 딱 평론가의 입장에서 본 모두 까기의 느낌 그 이상은 아니다.





그래도 고양이의 삶에 관한 다양한 관찰들과 사유들은 흥미로웠고, 고양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몇몇 문학 작품들 속 철학적 메시지와 철학사 전반에 관한 이해 등등 읽어가는 즐거움을 주기도 했다.


애초에 사람이 고양이처럼 살 수도 없는 법이고, 고양이에게 지나친 의인화를 통한 투영을 하는 심리 자체도 현실에 대한 불편함을 표출하는 한 가지 방식이라는 점에서 저자의 주장을 문자적으로만 읽는 건 무리일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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