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에게 철학을 가르치는 완벽한 방법
앤서니 맥가윈 지음, 최이현 옮김 / 니케북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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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손에 든 철학사 책이다. 그런데 제목이 꽤나 애를 썼다. 개에게 철학을 가르치는 방법 운운하는 내용이 철학사 제목으로 붙을 줄이야. 그만큼 내용을 좀 더 편안하게 전달하고자 하는 노력의 일환이리라. 저자도 무슨무슨 교수 따위가 아니라, 철학과 정치를 공부한(그래도 박사학위까지 취득했다) 글쓰기 강사이자 작가이다. 번역을 거쳤지만, 확실히 교수들이 쓰는 졸린 문장과는 느낌이 다르다.


책은 저자가 자신의 반려견과 함께 산책을 하면서 대화를 주고받는 이야기다. 정말이다. 개와 대화를 한다. 작품 속 개는 실제로 인간처럼 말도 한다. 물론 이 대화가 다른 사람에게는 저자 혼자 떠드는 것처럼 보이는 걸로 묘사된다. 개의 이해력은 그래도 어느 정도 대화가 가능한 수준이니 고등학교 수준 정도는 되지 않을까 싶다(너무 진지하게 여기진 말자).





이야기의 시작은 윤리학이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관한 고민들. 그리고 존재론으로 넘어갔다가 인식론으로 이어진다. 책의 후반은 과학철학에 관한 전반적인 소개, 그리고 마지막에는 생과 사에 관한 쇼펜하우어의 사고를 풀어놓는다. 말 그대로 서양 철학사 전반을 소개하는 셈이다.


대화식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그리고 조금 어려운 개념이 나오면 개의 입을 통해 다시 설명을 요구하고, 저자가 풀어서 설명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읽는 데 조금은 도움이 된다. 물론 이런 책은 어느 정도 사전 정보가 있으면 이해하는 데 훨씬 좋고, 간단한 개념서의 한계 상 깊은 내용까지 설명되지는 않지만, 이 정도의 개념설명이라면 교양 수준으로 알아둘 만하지 않을까 싶다. 고등학생 정도면 어느 정도는 이해도 가능할 듯하고.





문제는 이렇게 한 사람이 다양한 철학의 제 분야를 설명할 때, 어쩔 수 없이 저자의 입장에 치우신 설명을 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저자의 입장은 뭘까? 윤리학에서 저자는 “모든 상황에 완벽한 해답을 주는 윤리학은 존재하지 않으며, 각각의 영역에 맞아 들어가는 윤리학이 있을 뿐”이라는 상황윤리에 가까운 주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애초에 선악이라는 개념이 궁극적으로는 애매하다는 입장이기도 하다).


인식론은 합리주의와 경험주의로 정리되는데, 이 논쟁은 결국 인간이 어떻게 자기 외부의 세계를 인지하고 해석할 수 있는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다양한 주장들이 있지만, 최종적으로 어떻게 이 두 개의 영역이 연결되는지에 대해서는 사실 어느 철학자도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다. 비트겐슈타인으로 넘어가면 아예 그런 건 문제가 아니라고 덮어버리고 자기 할 말만 하는 느낌이기도 하고. 저자도 마찬가지여서 이 부분에서 무슨 묘수를 내지는 못한다.


전반적으로 애매하고 모호한 지점들이 항상 존재한다. 그러면서도 저자가 확신하는 건 신에 대한 믿음이나 관념은 틀렸다는 명제인데, 이 주장을 밀어붙이기 위해 저자가 사용하는 논리는 저자의 선입관에서 너무나 자연스럽게 나오는 것인지 별다른 설명도 없다. 기본적으로 유물론적 관점을 지닌 저자의, 아니 어쩌면 현대 철학이 지닌 한계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부분을 좀 떼어 놓고 보면, 전반적으로 쉽게 잘 쓰인 철학 개론서다. 특히 철학사에 등장하는 다양한 이론들의 한계까지도 적절하게 짚어줌으로써, 좀 더 입체적인 이해를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이 정도만 해도 읽을 만한 책이라 할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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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와 초승달 - 그리스도인과 무슬림의 영성에 관하여
필 파샬 지음, 이숙희 옮김 / 죠이북스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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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무려 50여 년 동안 무슬림들 사이에서 사역해 온 선교사다. 책은 기독교와 이슬람교라는 양대 종교를 아홉 개의 항목에 걸쳐서 서로 비교하고 대조하는 내용이다. 가장 먼저는 두 종교에서 믿는 신을, 그리고 경전, 예배, 고통, 죄, 신비주의, 그리스도와 무함마드, 지옥과 천국, 진리를 위한 추구라는 주제가 이어진다.


책의 주제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두 종교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많은 공통점이 있다는 정도일 것 같다. 특히나 이 ‘공통점’은 실천적인 상황으로 들어갈수록 더욱 선명하게 나타난다(반면 교리적인 차원에서는 좀 더 차이점이 두드러진다). 예컨대 두 종교 안에는 공통적으로 신비주의적 전통이 있고, 이는 정통주의와 긴장관계가 있다.


또 다른 공통점은 살짝 씁쓸한데, 지옥에 대한 두려움이 무슬림을 더욱 영적인 생활을 하도록 이끄는 것은 분명하지만, 대부분의 무슬림들은 미래의 심판을 별로 걱정하지 않으며 불경건한 생활을 지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건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다.





저자는 분명 성경이 하나님의 유일하고, 궁극적이며, 무오한 계시임을 믿고. 무함마드가 참된 선지자였는지를 의심스럽게 본다(262). 또, 이슬람교의 경전인 꾸란에서 이사(예수)를 묘사하는 내용에 많은 왜곡과 편집이 들어갔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저자 자신도 서문에서 인정하듯 이 책의 내용 중 어떤 부분은 “저자가 이슬람교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인다”고(12) 느껴질 만하도록 쓰였다. 저자는 이를 “십자군식 태도보다는 사랑으로 실수를 범하는 편”을 선택하려는 의도로 설명한다.


부분적으로 그런 방향성을 갖게 된 것은, 이 책이 엄밀한 의미의 학문적 접근만을 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자신의 경험을 굉장히 많이 담아내고 있다. 물론 그 경험 가운데는 고집 세고, 교만하고, 좁은 시야를 가진 무슬림들도 있었지만, 반대로 이해심 깊고, 너그러우며, 배려할 줄 아는 친구도 있었다. 자연히 무슬림에 대한 일방적인 매도나 적대심을 보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또, 저자가 인용하고 있는 문헌 가운데는 교리적인 글보다는 다양한 필자들이 쓴 개인적인 신앙기록들도 적지 않게 포함되어 있다. 예컨대 이슬람교로 개종한 사람들의 글을 인용하면서 이슬람교에 대해 설명하는 식인데, 자연히 호의적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자 자신이 기독교인이라는 점도 여기에 한 몫을 했을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우리는 기독교인이기에, 기독교 안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문제들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다. 반면 어디까지나 ‘다른 종교’에 대해서는 그렇게 확신의 어조로 말하거나 쓰는 게 좀 꺼려질 수 있다. 심지어 비슷한 문제가 그 안에 많이 있다고 해도 말이다.





물론 책은 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 무슬림들의 사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내용이다. 하지만 책을 읽는 내내 좀 눈에 잘 안 들어온다는 생각이 자주 들었는데, 가장 주된 이유는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책의 논조가 살짝 오락가락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보통 이런 책의 경우 이슬람교를 새롭게 보자는 취지로 호의적으로만 쓰거나, 반대로 완고한 교리적 정통주의에 입각해 상대를 악마화 하거나 하는 식이지만, 이 책은 그렇지 않다.


무엇보다 이 책이 이슬람교라는 종교를 분석하기보다는, 그 종교를 믿는 무슬림이라는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 보면 어떤 사람들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그가 특정한 민족이니까, 혹은 특정한 종교를 믿고 있으니까 이렇다는 식의 설명은 얼마나 납작한 서술이겠는가. 기독교를 믿는 모든 사람들이 똑같지 않은 것처럼 무슬림 또한 비슷한 상황일 것이다.(그래도 하나의 책을 쓸 때는 좀 더 명확한 게 머리에 잘 들어오긴 한다.)


실제 무슬림들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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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의 위기
한병철 지음, 최지수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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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오늘날 우리가 서사의 위기에 빠져있다고 진단한다. 서사의 위기란, 이야기가 사라지고 정보만 남는 현상을 말한다. 그 주요한 이유는 오늘날 세상이 “정보로 과포화”되어 있기 때문이다(16). 엄청나게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은 그 모든 이야기의 전체 윤곽을 가늠할 틈이 없이 그저 눈앞의 뉴스에 온통 관심을 빼앗겨 버린다. 서사의 큰 특징인 원격성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우리는 더 이상 일의 전모를 파악할 힘을 잃어버리고 있다.




내가 처음으로 대학에 들어갔을 때 한창 다음(Daum)의 카페가 유행했었다. 하지만 그 유행은 얼마 후 싸이월드 미니홈피로 옮겨갔고, 또 네이버 블로그로 이동했다. 하지만 다시 사람들의 관심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얼마 전 X로 이름을 바꾼)와 같은 매체로 넘어가더니, 이제는 인스타그램이나 틱톡이 대세다. 이 흐름에는 일관된 방향성이 있는데, 바로 “점점 더 짧게”다.


사람들은 더 이상 긴 글을 읽지 않는다. 짧게 요약된 내용, 그나마 글이 아닌 영상, 혹은 해시태그가 포함된 사진 몇 장으로 모든 걸 파악하고 표현하려 한다. 그러나 이런 짧은 정보뭉치로는 무엇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그저 끝없는 자극만 있는 정보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점차 몽롱해진 채로 알고리즘에 예속되고 만다.


그뿐 아니다. 저자는 정보만 남은 사회는 외설적이라고 말한다. “정보는 그것을 감싸는 껍질이 없기 때문에 포르노적”(65)이라는 것이다. 얼마 전 유명한 배우 한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있었다. 마약 혐의를 받고 있었지만, 정작 검사에서는 마약 성분이 나오지 않았던 사건이었다. 하지만 사건을 전후해 경찰은 큰 소리로 해당 배우의 혐의를 떠들어 댔고, 소위 사이버 렉카라고 불리는 저열한 유튜버들은 날마다 온갖 개인적인 사안을 폭로하며 돈을 구걸했다. 정보의 자극성, 그리고 그 자극을 위해 한 사람을 발가벗기고 구경하는 집단적인 관음증, 포르노였다.


조금만 생각하면 이게 잘못된 일이라는 걸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정보와 소통에 취해버린 대중은 그럴 의지도, 사고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 또한 서사의 위기가 낳은 결과 중 하나였다.




저자는 “인터넷에는 더 이상 꿈의 새가 살 둥지가 없다”(22)고 말한다. 오늘날 보이는 서사의 위기는 모든 것을 인과율로 환원시키고자 했던 근대의 대 프로젝트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소위 과학주의가 절대적인 도그마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세상에 담긴 이야기에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신화는 그렇게 부정되고 잊혔다.


문제는 인간이 그렇게만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점이다. 오로지 인과율로만 만들어진 관계에서는 깊은 교류가 일어날 수 없다. 피상적이고 기계적인 관계만 있는 곳에서 우리는 도무지 버틸 수가 없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에 빠지고, 허무함을 토로하는 이유도 어쩌면 여기에 있는 지도 모른다.



책은 서사의 위기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잘 설명해 준다.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이 위기를 극복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저자의 다른 책들처럼 그리 분명한 조언을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미 문제 제기 속에서 어느 정도 대안도 나와 있지 않나 싶다. 우리는 파편적인 정보로 가득한 인터넷 세계에서 나와, 실제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관계를 맺어야 한다. 우리를 고립시키는 주류 문화에 우리는 저항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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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으로 저항하다 - 냉소주의의 시대, 저항의 감각을 키우는 철학 수업
다카쿠와 가즈미 지음, 노수경 옮김 / 사계절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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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 시절 서양철학사 전반을 몇 학기에 걸쳐 배웠다. 교양철학부터 서양고대, 중세, 근현대 철학에, 사이드로 몇몇 철학과목까지. 보통은 이런 식으로 철학사를 따라가면서 철학을 공부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그건 철학사지, 철학 그 자체는 아니지 않았을까?(물론 단순한 역사만이 아니라 그 철학자들의 주장을 통해 철학적 고민과 탐구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인지를 배울 수 있지만)


이 책의 저자도 비슷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철학자들의(그리고 그들에 관한) 이야기는 ‘좁은 의미의 철학’일 뿐이고, 실제 철학은 훨씬 넓은 의미의 활동이라는 것. 이 책에서 저자는 철학을 “개념을 운운하는 것으로 세계에 대한 인식을 갱신하는 지적인 저항”이라고 정의한다. 이건 또 뭔가 싶을 정로 생뚱맞은 표현인데, 또 그 설명을 가만히 들어보면 일리가 있다. 어떤 개념을 일관성 있게 사용하면서 그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해 이 세상의 특정한 측면을 설명하는 동시에 그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하는 저항적인 활동이 철학이라는 의미다.


이렇게 설명해도 좀 이해가 어려운 건 사실. 그래서 저자는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 네 가지 실제 예를 들면서 철학이란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각각 영화와 사회운동, 소설과 편지라는 다른 장르에서 이 작업을 진행하는데, 크게 어렵지 않은 말을 사용해서 철학이란 무엇인지를 잘 설명해 준다.





그 중 사회운동과 관련된 3장에서는 아누족과 관련된 문제를 다룬다. 일본 열도의 북부에 살았던 북방계열 민족인 아이누족은 남방 계열의 현 일본의 주류 세력에 밀려 오랫동안 억압과 착취를 당해왔다. 이 문제를 공론화한 아이누족 출신의 정치인 가야노 시게루는 ‘주식’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이런 사회의 폭력에 저항하는 철학적 투쟁을 감행한다.


아이누족의 주식은 연어였는데, 일본인들이 그들의 영토를 침탈하면서 대량으로 연어를 잡아가기 시작했고, 그렇게 어족자원이 고갈되자 금어기나 어로면허제도 같은 것을 도입해 아이누족이 연어를 잡는 것을 막았다는 것. 문제는 자기들이 일으켜놓고, 선주민들을 제제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접근했던 일본 정부에 대해, 가야노는 “주식”이라는 개념을 들고 나와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도록 만드는 동시에 사회에 대한 저항을 했다. 이런 게 철학이라는 거다.


5장의 주인공은 마틴 루터 킹이다. C. S. 루이스와 함께 내가 가장 사랑하는 저자이기도 한 그는, 많이들 알고 있다시피 미국 흑인인권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다. 저자는 킹이 쓴 “버밍햄 교도소에서 온 편지”라는 글 속에서 “시간”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고 사회 문제에 대항하는 모습을 발견한다.


당시 미국은 법적으로는 흑인에 대한 차별이 잘못이라는 판결이 내려졌지만, 그것을 시정하는 과정에서 혼란을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기한 없는 계도기간을 두는 모순적 상황이었다. 일부 사람들은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흑인에 대한 차별도 결국 해소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내면서 킹을 비롯한 인권운동가들의 강경한 태도를 꾸짖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킹은 “기다리라”는 말은 결국 인종차별주의를 옹호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차별의 철폐는 바로 지금 시행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시간’이라는 익숙한 개념을 ‘지금 여기의 시간’이라고 새롭게 정의하면서 사회문제에 저항하는 도구로 사용했던 것이고, 이 역시 저자가 말하는 철학하기의 방법이다.




책의 부제가 “냉소주의의 시대, 저항의 감각을 키우는 철학 수업”이라고 되어 있다. 그만큼 저자는 철학의 특징을 ‘저항’에 두고 있는 것 같다. 늘상 책상에서 어려운 책이나 읽다가 가끔 알아듣기 힘든 말이나 하는 철학자들이 무슨 저항을 한다고?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저항’은 꼭 반정부적 활동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저자가 말하는 저항이란 기존 질서에 대한 무비판적인 수용을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너무나 익숙하게 젖어서 더 이상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게 된 상태에서 벗어나, 익숙했던 것들을 새롭게 보게 만들고, 그 안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 바로 철학이다. 이런 차원에서의 철학이라면 그건 소수의 전문가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이다. 민(民)이 주(主)가 되는 게 민주주의 아니던가.


당연히 소위 말하는 개똥철학 따위는 철학이 아니다. 그건 개념을 일관되게 정의하지도 못하고, 세계에 대한 인식을 바꾸거나 새롭게 만들지도 못하는 잡담 수준의 발화일 뿐이니까. 누구나 철학을 할 수 있다는 말이, 누구나 하는 말이 다 철학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사고하고 효과적으로 말을 하기 위해선 연습과 훈련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이런 철학이 필요할 때, 저자도 지적하듯, 오늘날에는 냉소주의가 좀 더 판을 치는 것 같다. 온갖 혐오와 차별이 난무하면서도, 정작 큰 문제 앞에서는 다들 그저 자기 살 구멍만 찾아 나서느라 제대로 된 비판을 하지 않는다. 진영논리에, 정체성 정치에 빠져서 우리 편을 옹호하는 데에만 힘을 뺀다. 제대로 된 철학 교육이 어린 시절부터 좀 필요하겠다 싶은데, 학벌주의에 매몰된 사회에선 그 또한 쉽지 않을 것 같으니 큰일이다.


작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입문서로 괜찮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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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력과 은총 채석장 시리즈
시몬 베유 지음, 윤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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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손에 든 동기가 독특하다. 최근에 읽었던 두 권에서 저자의 이름이 언급되었기 때문인데, 하나는 수학철학에 관한 책(참회의 수학)이고, 다른 하나는 중요한 기독교 인물 열전(루미나리스)이었다. 덕분에 시몬 베유라는 인물에게 관심이 생겼고, 책을 검색하던 중 제목이 흥미로운 이게 걸렸다.


프랑스 출생의 유대인이었던 시몬 베유는 흥미로운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스물두 살에 철학교수자격시험에 합격했지만, 이후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몇 달 간 공장노동을 하기도 했고, 이후 스페인 내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1938년 조지 허버트의 시를 읽던 중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사로잡는 경험을 하고, 신앙과 관련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로완 윌리엄스에 따르면 그녀가 겨우 서른네 살에 세상을 떠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동료 프랑스인 중 가장 가난한 사람보다 더 먹을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단한 고집이다. 비슷한 이유로 베유는 자신이 기독교(가톨릭) 세례를 받는다면 기독교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배제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이유로 끝까지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생전 세 권의 책을 썼고, 나머지는 사후 그녀가 남긴 글들을 모아서 엮은 것이라고 한다. 이 책 역시 시몬 베유가 남긴 여러 단편적인 글들을 모아 엮어 낸 책인 듯하다. 책 제목이 “중력과 은총”이다. 이 무슨 흥미로운 조합일까.


중력과 은총은 이 책에 실려 있는 문장들을 관통하는 중요한 두 개의 주제다. 중력은 물리적인 힘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인간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무엇, 인간 존재의 한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은총은 반대로 그런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게 해 주는, 신적 차원의 도움, 혹은 경험을 가리킨다.


저자는 당연히 중력에 매인 삶보다 은총을 받는 삶을 우위에 놓는다. 하지만 우리를 땅으로 붙잡아두는 중력의 힘은 너무나 강하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중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저자는 자기 힘을 다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만을 따라가지 않는 삶을 강조한다. 그렇게 자기를 비울 때 은총의 자리가 생긴다는 것.





사실 책 전체가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긴밀하게 짜인 게 아니라, 이곳저곳에서 가져온 짧은 구절들을 모아놓은 식이라, 단편적인 생각밖에 읽을 수가 없다. 또, 이 문장이 반어법인지, 유머인지, 아니면 그저 좀 극단적인 표현인지 파악하려면 눈을 부릅뜨고 글을 읽어야 한다. 콘텍스트 없는 콘텐츠만큼 읽기 어려운 것도 없는데, 물론 편집자가 잘 뽑아 정리해놓긴 했지만 어려운 부분은 어쩔 수 없다.


책의 성격이 독특하다. 확실히 기본적으로 철학책이지만, 신학책처럼 보이기도 한다. 시몬 베유의 사유에는 기독교 신학의 요소와 철학이 굳이 분리되지 않았던 것 같다. 중세의 학자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베유의 신학적 사유나 통찰에 그리 매력을 느꼈던 것은 아니다. 신비주의적 글들에 내가 별 관심이 없기도 하고, (책의 주제는 정반대의 주장을 담고 있으면서도) 글 전반에서 여전히 신비를 합리적으로 설명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근대성의 얄팍한 자국이 느껴지기도 해서다.


조금은 독특한 느낌의 철학책이다. 저자의 기독교 신학의 탁월성 보다는,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자신의 주된 작업인 철학을 해 나가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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