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사의 위기
한병철 지음, 최지수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23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는 오늘날 우리가 서사의 위기에 빠져있다고 진단한다. 서사의 위기란, 이야기가 사라지고 정보만 남는 현상을 말한다. 그 주요한 이유는 오늘날 세상이 “정보로 과포화”되어 있기 때문이다(16). 엄청나게 많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은 그 모든 이야기의 전체 윤곽을 가늠할 틈이 없이 그저 눈앞의 뉴스에 온통 관심을 빼앗겨 버린다. 서사의 큰 특징인 원격성을 잃어버린 상황에서 우리는 더 이상 일의 전모를 파악할 힘을 잃어버리고 있다.




내가 처음으로 대학에 들어갔을 때 한창 다음(Daum)의 카페가 유행했었다. 하지만 그 유행은 얼마 후 싸이월드 미니홈피로 옮겨갔고, 또 네이버 블로그로 이동했다. 하지만 다시 사람들의 관심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얼마 전 X로 이름을 바꾼)와 같은 매체로 넘어가더니, 이제는 인스타그램이나 틱톡이 대세다. 이 흐름에는 일관된 방향성이 있는데, 바로 “점점 더 짧게”다.


사람들은 더 이상 긴 글을 읽지 않는다. 짧게 요약된 내용, 그나마 글이 아닌 영상, 혹은 해시태그가 포함된 사진 몇 장으로 모든 걸 파악하고 표현하려 한다. 그러나 이런 짧은 정보뭉치로는 무엇도 제대로 표현할 수 없다. 그저 끝없는 자극만 있는 정보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점차 몽롱해진 채로 알고리즘에 예속되고 만다.


그뿐 아니다. 저자는 정보만 남은 사회는 외설적이라고 말한다. “정보는 그것을 감싸는 껍질이 없기 때문에 포르노적”(65)이라는 것이다. 얼마 전 유명한 배우 한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있었다. 마약 혐의를 받고 있었지만, 정작 검사에서는 마약 성분이 나오지 않았던 사건이었다. 하지만 사건을 전후해 경찰은 큰 소리로 해당 배우의 혐의를 떠들어 댔고, 소위 사이버 렉카라고 불리는 저열한 유튜버들은 날마다 온갖 개인적인 사안을 폭로하며 돈을 구걸했다. 정보의 자극성, 그리고 그 자극을 위해 한 사람을 발가벗기고 구경하는 집단적인 관음증, 포르노였다.


조금만 생각하면 이게 잘못된 일이라는 걸 알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정보와 소통에 취해버린 대중은 그럴 의지도, 사고도 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이 또한 서사의 위기가 낳은 결과 중 하나였다.




저자는 “인터넷에는 더 이상 꿈의 새가 살 둥지가 없다”(22)고 말한다. 오늘날 보이는 서사의 위기는 모든 것을 인과율로 환원시키고자 했던 근대의 대 프로젝트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소위 과학주의가 절대적인 도그마로 여겨지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세상에 담긴 이야기에 더 이상 귀를 기울이지 않게 되었다. 신화는 그렇게 부정되고 잊혔다.


문제는 인간이 그렇게만 살 수 없는 존재라는 점이다. 오로지 인과율로만 만들어진 관계에서는 깊은 교류가 일어날 수 없다. 피상적이고 기계적인 관계만 있는 곳에서 우리는 도무지 버틸 수가 없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우울증에 빠지고, 허무함을 토로하는 이유도 어쩌면 여기에 있는 지도 모른다.



책은 서사의 위기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잘 설명해 준다. 하지만 어떻게 우리가 이 위기를 극복해 나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저자의 다른 책들처럼 그리 분명한 조언을 주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미 문제 제기 속에서 어느 정도 대안도 나와 있지 않나 싶다. 우리는 파편적인 정보로 가득한 인터넷 세계에서 나와, 실제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관계를 맺어야 한다. 우리를 고립시키는 주류 문화에 우리는 저항해야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철학으로 저항하다 - 냉소주의의 시대, 저항의 감각을 키우는 철학 수업
다카쿠와 가즈미 지음, 노수경 옮김 / 사계절 / 2023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학부 시절 서양철학사 전반을 몇 학기에 걸쳐 배웠다. 교양철학부터 서양고대, 중세, 근현대 철학에, 사이드로 몇몇 철학과목까지. 보통은 이런 식으로 철학사를 따라가면서 철학을 공부하는 게 일반적이다. 하지만 그건 철학사지, 철학 그 자체는 아니지 않았을까?(물론 단순한 역사만이 아니라 그 철학자들의 주장을 통해 철학적 고민과 탐구가 어떤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인지를 배울 수 있지만)


이 책의 저자도 비슷한 질문을 던진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철학자들의(그리고 그들에 관한) 이야기는 ‘좁은 의미의 철학’일 뿐이고, 실제 철학은 훨씬 넓은 의미의 활동이라는 것. 이 책에서 저자는 철학을 “개념을 운운하는 것으로 세계에 대한 인식을 갱신하는 지적인 저항”이라고 정의한다. 이건 또 뭔가 싶을 정로 생뚱맞은 표현인데, 또 그 설명을 가만히 들어보면 일리가 있다. 어떤 개념을 일관성 있게 사용하면서 그것을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해 이 세상의 특정한 측면을 설명하는 동시에 그 한계와 문제점을 지적하는 저항적인 활동이 철학이라는 의미다.


이렇게 설명해도 좀 이해가 어려운 건 사실. 그래서 저자는 책의 나머지 부분에서 네 가지 실제 예를 들면서 철학이란 무엇인지를 설명한다. 각각 영화와 사회운동, 소설과 편지라는 다른 장르에서 이 작업을 진행하는데, 크게 어렵지 않은 말을 사용해서 철학이란 무엇인지를 잘 설명해 준다.





그 중 사회운동과 관련된 3장에서는 아누족과 관련된 문제를 다룬다. 일본 열도의 북부에 살았던 북방계열 민족인 아이누족은 남방 계열의 현 일본의 주류 세력에 밀려 오랫동안 억압과 착취를 당해왔다. 이 문제를 공론화한 아이누족 출신의 정치인 가야노 시게루는 ‘주식’이라는 개념을 가지고 이런 사회의 폭력에 저항하는 철학적 투쟁을 감행한다.


아이누족의 주식은 연어였는데, 일본인들이 그들의 영토를 침탈하면서 대량으로 연어를 잡아가기 시작했고, 그렇게 어족자원이 고갈되자 금어기나 어로면허제도 같은 것을 도입해 아이누족이 연어를 잡는 것을 막았다는 것. 문제는 자기들이 일으켜놓고, 선주민들을 제제하는 방식으로 문제를 접근했던 일본 정부에 대해, 가야노는 “주식”이라는 개념을 들고 나와 문제를 새롭게 바라보도록 만드는 동시에 사회에 대한 저항을 했다. 이런 게 철학이라는 거다.


5장의 주인공은 마틴 루터 킹이다. C. S. 루이스와 함께 내가 가장 사랑하는 저자이기도 한 그는, 많이들 알고 있다시피 미국 흑인인권운동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다. 저자는 킹이 쓴 “버밍햄 교도소에서 온 편지”라는 글 속에서 “시간”이라는 개념을 새롭게 정의하고 사회 문제에 대항하는 모습을 발견한다.


당시 미국은 법적으로는 흑인에 대한 차별이 잘못이라는 판결이 내려졌지만, 그것을 시정하는 과정에서 혼란을 방지한다는 명목으로 기한 없는 계도기간을 두는 모순적 상황이었다. 일부 사람들은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흑인에 대한 차별도 결국 해소될 것이라는 낙관적인 전망을 내면서 킹을 비롯한 인권운동가들의 강경한 태도를 꾸짖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킹은 “기다리라”는 말은 결국 인종차별주의를 옹호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며, 차별의 철폐는 바로 지금 시행되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시간’이라는 익숙한 개념을 ‘지금 여기의 시간’이라고 새롭게 정의하면서 사회문제에 저항하는 도구로 사용했던 것이고, 이 역시 저자가 말하는 철학하기의 방법이다.




책의 부제가 “냉소주의의 시대, 저항의 감각을 키우는 철학 수업”이라고 되어 있다. 그만큼 저자는 철학의 특징을 ‘저항’에 두고 있는 것 같다. 늘상 책상에서 어려운 책이나 읽다가 가끔 알아듣기 힘든 말이나 하는 철학자들이 무슨 저항을 한다고?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저항’은 꼭 반정부적 활동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다.


저자가 말하는 저항이란 기존 질서에 대한 무비판적인 수용을 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가 너무나 익숙하게 젖어서 더 이상 이상함을 느끼지 못하게 된 상태에서 벗어나, 익숙했던 것들을 새롭게 보게 만들고, 그 안에서 문제를 발견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표현해 내는 것이 바로 철학이다. 이런 차원에서의 철학이라면 그건 소수의 전문가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이다. 민(民)이 주(主)가 되는 게 민주주의 아니던가.


당연히 소위 말하는 개똥철학 따위는 철학이 아니다. 그건 개념을 일관되게 정의하지도 못하고, 세계에 대한 인식을 바꾸거나 새롭게 만들지도 못하는 잡담 수준의 발화일 뿐이니까. 누구나 철학을 할 수 있다는 말이, 누구나 하는 말이 다 철학이라는 의미는 아니다. 사고하고 효과적으로 말을 하기 위해선 연습과 훈련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이런 철학이 필요할 때, 저자도 지적하듯, 오늘날에는 냉소주의가 좀 더 판을 치는 것 같다. 온갖 혐오와 차별이 난무하면서도, 정작 큰 문제 앞에서는 다들 그저 자기 살 구멍만 찾아 나서느라 제대로 된 비판을 하지 않는다. 진영논리에, 정체성 정치에 빠져서 우리 편을 옹호하는 데에만 힘을 뺀다. 제대로 된 철학 교육이 어린 시절부터 좀 필요하겠다 싶은데, 학벌주의에 매몰된 사회에선 그 또한 쉽지 않을 것 같으니 큰일이다.


작고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입문서로 괜찮은 책.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중력과 은총 채석장 시리즈
시몬 베유 지음, 윤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을 손에 든 동기가 독특하다. 최근에 읽었던 두 권에서 저자의 이름이 언급되었기 때문인데, 하나는 수학철학에 관한 책(참회의 수학)이고, 다른 하나는 중요한 기독교 인물 열전(루미나리스)이었다. 덕분에 시몬 베유라는 인물에게 관심이 생겼고, 책을 검색하던 중 제목이 흥미로운 이게 걸렸다.


프랑스 출생의 유대인이었던 시몬 베유는 흥미로운 이력을 가지고 있었다. 스물두 살에 철학교수자격시험에 합격했지만, 이후 노동운동에 뛰어들어 몇 달 간 공장노동을 하기도 했고, 이후 스페인 내전에 참가하기도 했다. 1938년 조지 허버트의 시를 읽던 중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사로잡는 경험을 하고, 신앙과 관련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로완 윌리엄스에 따르면 그녀가 겨우 서른네 살에 세상을 떠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동료 프랑스인 중 가장 가난한 사람보다 더 먹을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대단한 고집이다. 비슷한 이유로 베유는 자신이 기독교(가톨릭) 세례를 받는다면 기독교인이 아닌 다른 사람들을 배제시키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이유로 끝까지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생전 세 권의 책을 썼고, 나머지는 사후 그녀가 남긴 글들을 모아서 엮은 것이라고 한다. 이 책 역시 시몬 베유가 남긴 여러 단편적인 글들을 모아 엮어 낸 책인 듯하다. 책 제목이 “중력과 은총”이다. 이 무슨 흥미로운 조합일까.


중력과 은총은 이 책에 실려 있는 문장들을 관통하는 중요한 두 개의 주제다. 중력은 물리적인 힘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지만, 인간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무엇, 인간 존재의 한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은총은 반대로 그런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게 해 주는, 신적 차원의 도움, 혹은 경험을 가리킨다.


저자는 당연히 중력에 매인 삶보다 은총을 받는 삶을 우위에 놓는다. 하지만 우리를 땅으로 붙잡아두는 중력의 힘은 너무나 강하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중력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 저자는 자기 힘을 다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욕망만을 따라가지 않는 삶을 강조한다. 그렇게 자기를 비울 때 은총의 자리가 생긴다는 것.





사실 책 전체가 하나의 주제를 중심으로 긴밀하게 짜인 게 아니라, 이곳저곳에서 가져온 짧은 구절들을 모아놓은 식이라, 단편적인 생각밖에 읽을 수가 없다. 또, 이 문장이 반어법인지, 유머인지, 아니면 그저 좀 극단적인 표현인지 파악하려면 눈을 부릅뜨고 글을 읽어야 한다. 콘텍스트 없는 콘텐츠만큼 읽기 어려운 것도 없는데, 물론 편집자가 잘 뽑아 정리해놓긴 했지만 어려운 부분은 어쩔 수 없다.


책의 성격이 독특하다. 확실히 기본적으로 철학책이지만, 신학책처럼 보이기도 한다. 시몬 베유의 사유에는 기독교 신학의 요소와 철학이 굳이 분리되지 않았던 것 같다. 중세의 학자들을 떠올리게 만드는 부분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베유의 신학적 사유나 통찰에 그리 매력을 느꼈던 것은 아니다. 신비주의적 글들에 내가 별 관심이 없기도 하고, (책의 주제는 정반대의 주장을 담고 있으면서도) 글 전반에서 여전히 신비를 합리적으로 설명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근대성의 얄팍한 자국이 느껴지기도 해서다.


조금은 독특한 느낌의 철학책이다. 저자의 기독교 신학의 탁월성 보다는, 기독교 신앙을 바탕으로 자신의 주된 작업인 철학을 해 나가는 과정이 흥미로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사물의 소멸 - 우리는 오늘 어떤 세계에 살고 있나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전대호 옮김 / 김영사 / 2022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독일에서 활동하는 한국인 철학자 한병철의 책이다. 그다지 철학에 조예가 없는 나지만, 그래도 벌써 이 저자의 책을 몇 권쯤 읽어본 것 같다. 고전 철학자들처럼 뭔가 거대한 체계를 쌓거나 하지는 않지만, 현대인들이 익숙하게 마주하는 현상들을 철학적 언어로 설명하고 풀어내는 데 꽤 능력이 있는 저자다.


이번 책에서는 “디지털화”라는 주제를 다룬다. 기술발전이 계속되면서 우리 삶의 많은 부분이 디지털화되고 있다. 여기에 최근 몇 년 동안 전 세계를 덮친 코로나19 팬데믹는 이런 경향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이제는 좀 극단적으로 말하면 사람과 사람이 직접 대면하지 않아도 거의 모든 일상적인 일들을 다 할 수 있는 시대다.





이런 기술과 시대상의 변화는 우리 삶에 어떤 변화를 초래했을까? 저자는 디지털화가 세계를 탈사물화하고 탈신체화한다고 말한다. 모든 것이 0과 1의 숫자로 변환 가능한 시대에 더 이상 사물은 애초에 그것이 가지고 있었던 본래적 ‘가치’보다는 디지털 세계에서의 ‘쓰임’이 중요하게 여겨지게 되었다.


한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해 보면 이렇다. 사진이라는 게 있다. 그것이 처음 나왔을 때는 인간의 영혼을 사로잡는 기계로 여겨질 정도로 신기한 물건이었다. 오래되어 빛바랜 사진은 그것이 처음 인화되었을 때와는 다른 또 다른 감상과 정취를 느끼게 만들어주는 사물이기도 하다. 사진작가들은 단순히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복사해 옮기는 것을 넘어서 그 안에 있는 무엇을 보여주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날의 사진들, 주로 휴대폰으로 찍은 셀피들은 어떤가? 한 자리에서 수십, 수백 장씩 찍은 사진들은 단지 그 순간만을 위해 소비된다. 휴대폰 사진첩에 수천 장의 사진이 저장되어 있다고 해서, 어디 그걸 다시 되돌아보는 사람이 있던가? 그건 더 이상 사진이라는 하나의 독립된 사물이 아니라 그저 정보의 덩어리에 불과하게 되어버린다.





극단적으로 말해서 현대인들은 사물을 오직 스마트폰을 통해서 경험한다. 스마트폰을 건드리고 쓰다듬는 동작은 거의 예배와 맞먹는 몸짓(35)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스마트폰을 통해 경험된 세계는 실제 세계와는 다르다. 그것을 통해서 우리가 경험하는 건 실제의 사물이나 대상이 아니라, 오직 내가 원하는 것으로서의 사물(즉 나의 기호, 나 자신)일 뿐이다. 저자는 그래서 스마트폰이 “자폐적 대상들”과 비슷하다고도 말한다(46).


오늘날 사람들은 관계 역시 디지털로 이어가지만, 이런 방식은 결국 관계를 저해한다고 저자는 경고한다(84). 우리는 서로 접속해 있을 뿐, 실제로 만남을 갖지는 못한다. 한 때 온라인 소개팅이 유행이라는 말도 있었지만, 그런 관계는 관계라고 부를 수 없는 마주침에 불과하다. 디지털을 이용한 접속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강한 결속, 특히 서로를 향한 충성의 마음에 기반한 단단한 관계와는 전혀 다르다.


어쩌면 요새 일종의 밈처럼 떠도는 MZ세대의 극도의 이기주의적 성향은 이런 디지털 문화의 최종적 결말의 한 부분일지도 모르겠다. 언제든 상대방을 차단할 수 있는 디지털 세계에 익숙한 이들에게, 이어폰을 끼고 사무실에서 일하거나, 내 스케쥴에 따라 관계를 오프할 수 있다는 생각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대답이지 않겠는가.


군데군데 눈에 와서 박히는 문장들이 제법 있다. 디지털화가 급속도로 진행되는 현실을 보며 불안을 느끼는 학자의 시선은 공감이 간다. 다만 이게 디지털화를 보는 유일한 시선은 아닐 수 있다는 건 기억해야 할 거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개소리에 대하여
해리 G. 프랭크퍼트 지음, 이윤 옮김 / 필로소픽 / 201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책 제목이 눈길을 끌어 집어 들었다간단하게 읽을 수 있는 에세이인가 싶었지만웬걸 내용은 제목과 다르게(?) 상당히 본격적인 철학적 사고를 담고 있었다비트겐슈타인의 언어분석철학의 영향을 짙게 느껴지는 내용으로말 그대로 개소리(영어로는 bullshit)'가 무엇인지 정의를 내리고그 것이 성립하기 위한 요건어떤 상황에서 그런 발화가 나타나는지 등을 탐구한다.



저자는 오늘날 우리(미국문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 가운데 하나가 개소리가 만연하고 있다는 점이라고 말한다이건 비단 미국만이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특히나 정치인들의 주둥이에서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발생한 개소리는 보통 사람들의 귀를 피곤하게 만든 지 오래다.


그럼 개소리란 무엇일까책에 명확한 정의가 담긴 문장이 등장하지는 않지만정리하자면 허세를 섞어 진상을 꾸며대는 말이다여기엔 그 말이 진실인지 거짓인지는 중요하지 않다.(진실일 수도 거짓일 수도 있다개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그저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아무 말이나 가져다 쓰기 때문이다.


여기서 개소리의 가장 큰 특징이 드러난다개소리는 그것을 만들어 내는 데 별다른 노력이 필요하지 않다최소한 거짓말은 누군가를 속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구성하는 노력이 필요하지만개소리의 경우에는 그냥 생각나는 대로 내뱉으면 그만이다그것이 사실인지 거짓인지는 아예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다이 점에서 우리는 최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개소리 발화자였던 트럼프 전 대통령이나좀 더 좁게는 온갖 말 같지 않은 소리를 내뱉는 몇몇 정치인들혹은 일베류들소위 극우유튜버들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개소리의 본질이 이렇기에그런 개소리에 맞서는 일은 굉장히 높은 난이도의 작업이 되어버린다거짓말을 하는 사람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팩트체크를 하면 그만이지만개소리를 남발하는 사람은 그런 식의 논리적사실적 옳고 그름을 확인하는 작업이 불가능아니 무의미하다그의 말이 갖는 허점을 누가 지적하면그건 내 본의가 아니었다거나일부만을 떼어 오해를 낳았다거나심지어 나는 잘 모르겠다는 식으로 어깨를 으쓱하고 다른 개소리를 내뱉으면 그만이니까.






책 후반에는 개소리를 피할 수 없는 상황에 관한 관찰이 등장한다자신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면서도 말하기를 요구받을 때다이건 최근까지 매일 기자들 앞에서 뭐든 물어보라는 식으로 섰다가결국 아는 게 하나도 없어서 온갖 개소리만 발화하다 최근에는 질문 자체를 통제하는 식으로 형식을 바꾼 어떤 사람을 떠올리게 한다.


책의 가장 마지막 부분에는 오늘날의 이 개소리 확산 현상을 불러온 또 한 가지 사상적 경향을 언급하는데바로 정확성보다 진정성이 더 중요하다는 개소리다이건 어떤 것이 객관적인 실체인지 우리는 완전히 알 수 없다는 회의주의가 퍼지면서 나타난 기괴한 결과물인데그 결과 우린 내가 어떻게 느꼈는지가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보다 중요하게 여겨지는 시대를 살고 있다어디서 많이 들어본 논리구조다좌파나 우파를 가리지 않고 개소리를 남발하는 시대를 사는 건 참 피곤한 일이다.



내 손바닥보다 작은 책이고분량도 본문만 따지면 70페이지가 되지 않는다처음엔 좀 어렵고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전체 내용을 파악하고 다시 읽어나가면 꽤나 흥미로운 내용들로 가득하다그리고 책 본문 뒤에 붙어 있는 옮긴이의 글을 보면 본문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철학책이지만은근 현실세계와 오버랩되는 부분이 많아서 읽는 게 재미있다한 번 도전해 봐도 좋을 듯.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