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을 듣는 법 - 듣는 형식과 표현하는 언어를 알면 감동이 더욱 커진다 음악의 즐거움 1
오카다 아케오 지음, 홍주영 옮김 / 끌레마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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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언가 모르는 게 있을 때 요새는 쉽게 구글링을 하곤 하지만, 여전히 뭔가 좀 더 진지하게 알고 싶을 땐 책을 찾아 읽는 편이다. 특히나 이번처럼 내가 전혀 모르는 문외의 영역인 경우 더더욱 괜찮은 책을 통해 기초를 닦아야겠단 생각이다. 도서관에서 가서 이 책을 골라 온 이유다. 제목부터가 (수영 할 줄도 모르면서 백과사전을 읽으며 수영에 관해 지식을 쌓은) 딱 나에게 맞아 보였다. “음악을 듣는 법”이라. 이 책을 읽으면 나도 클래식 음악을 좀 알아들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가져왔다.


물론 그런 심미안은 한 번에 생기는 게 아니었다. 책을 다 읽고 난 후에도 당장에 뭔가를 알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우선 책 자체가 시대별로 음악사를 훑어가면서 각각의 특징을 적어두는 식의 백과사전식 접근이 아니라, 음악을 듣는 일이란 무엇인지, 음악에 관해 말하는 건 또 무엇인지 하는 식으로 조금은 철학적인 접근을 하고 있다.


수많은 고전 시대 음악가들이 별다른 설명 없이 등장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헤겔과 아도르노 같은 철학자들도 여기에 거들고 나선다. 아, 책 제목은 왠지 나 같은 사람에게도 친절해 보였으나, 저자는 애초에 그럴 생각이 없었나 보다. 물론 가끔은 역사적 접근과 시대상황 같은 요소들을 언급해서 다행이다 싶었지만, 전반적으로는 최소한 음악에 관심을 갖고 있는 애호가나 관련 분야를 공부하는 사람에게 좀 더 잘 어울릴 듯한 책이다.





저자는 우리가 음악을 듣는 중 음악과 ‘공명’할 때가 있다고 말한다. 소위 말해 감동이라든지, 뭔가 찌릿 하고 와 닿는 일들이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렇게 뭔가 분명 마음을 움직였는데, 그걸 적절한 표현으로 설명하지 못하는 일만큼 답답한 것도 없다. 어떤 이들은 그냥 음악은 느끼면 된다고 나무랄 지도 모르지만, 사실 저자에 따르면 그런 식의 태도 또한 음악에 대한 하나의 사조/경향일 뿐이다.


저자는 음악을 하는 것과 듣는 것, 그리고 말하는 것으로 구분한다. ‘하는 것’은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르거나 하는 음악을 만들어 내는 일에 참여하는 걸 말하고, ‘듣는 것’은 말 그대로 그렇게 만들어진 음악을 감사하는 걸 말한다. 그리고 ‘말하는 것’은 그렇게 들은 음악에 관해 나름의 설명이나 해설, 감상을 하는 일을 말한다.


시대에 따라 이 일들은 서서히 분리되어 왔다. 18세기까지의 많은 곡들은 사람들이 직접 연주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한다. 꼭 잘 사는 집이 아니라도 사람들은 악기 하나쯤은 연주할 수 있었고, 가족끼리 함께 연주하는 시간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브람스 이후의 오케스트라 음악은 너무 비대해져서 더 이상 아마추어들이 간단하게 연주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는 일과 듣는 일이 분리된 것이다.


그렇게 음악이 전문가들의 일이 되어버리면서 보통의 애호가들은 이제 직접 음악을 하는 사람들에게 접근할 길이 적어져버렸다. 자신의 의견을 말할 기회가 없어진 것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일종의 틈새 산업으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해주는 중재자, 즉 비평가들이 등장했다. 다시 한 번 음악에서 말하는 것이 떨어져 나온 이유다. 흥미로운 설명이다.


저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 번 특히 세 번째 요소인 ‘말하는 일’을 보통의 애호가들에게 돌려주고자 하는 것 같다. 클래식 음악의 구조에 관해 간략한 설명을 하고, 음악에 대한 서로 다른 몇 가지 접근 방식을 제안해 주고, 마지막 장에서는 직접 뭔가 악기를 연습해 보고 말해볼 것을 권유도 한다.




확실히 음악은 우리 삶을 좀 더 풍성하게 만들 수 있다고 본다. 다만 내 어린 시절이 그랬듯, 어느 정도 여유 있는 집에서나 어린 시절부터 악기 연주를 배우고 관련 문화를 향유하고 할 수 있다는 게 가장 큰 난점(일찌감치 아버지 사업이 망한 우리 집은 그럴 여유가 없었다). 일단 어린 시절 그런 취향을 갖지 못한 사람은, 나중에도 음악에 관심을 갖기가 쉽지 않으니까. 하지만 뭐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이제라도 관심을 갖고 도전해 볼 마음이 있다면 그렇게 하면 된다.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여전히 클래식 음악에 대해 이러니 저러니 할 엄두는 나지 않는다. 다만 간만에 다시 좀 찾아 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은 든다. 뭘 몰라도 저자의 말처럼 어느 순간 나와 공명하는 지점을 발견하고, 내가 좋아하는 양식을 찾아내고, 그러면서 조금씩 빠져들게 되는 것일 테니 말이다. 다만 이 일에는 이 책 말고 좀 다른 책의 도움이 또 필요할 것 같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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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는 어떻게 과학의 팔을 비트는가 - 기후 낙관론에 맞선 세계적인 환경과학자의 폭로
루이스 지스카 지음, 김보은 옮김 / 한문화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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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제목이 꽤 인상적이다. 정치가 과학의 팔을 비튼다라... 대략 이 책에 정치권력에 의해 과학적 사안들이 어떻게 왜곡되는지가 잔뜩 소개될 것 같은 인상을 주는 제목이지만, 실은 책 내용의 대부분은 이산화탄소가 농업계에 미칠 영향에 관한 과학적 실험과 그에 근거한 전망들이다. 정치 비판보다는 과학 이야기, 그 중에서도 식물학, 농학에 가까운 책이다. 물론 책 후반에 약간 제목에 실린 종류의 비판이 실려 있기도 하다. 그 부분은 뒤에서 다시 언급하기로 하고.



말했듯이 이 책은 이산화탄소에 관한 내용이다. 어느 정도 환경 문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익히 알고 있지만, 이산화탄소는 대표적인 온실가스 중 하나다. 물론 이보다 더 큰 효과를 내는 물질들도 있지만, 그 양에 있어서 이쪽이 압도적이다. 우리가 배출하는 탄소의 대부분이 이산화탄소의 형태니까.


그런데 또 한 편으로 이산화탄소는 식물들이 자라는데 필요한 자원이기도 하다. 식물의 성장률을 높이는 요인에는 높은 온도와 적절한 양분, 그리고 충분한 이산화탄소가 포함된다. 쉽게 말해 이산화탄소 농도가 높아지면 식물이 더 빨리 자란다는 뜻이다.


식물이 빨리 자라는 건 좋은 일이 아닌가 할 수도 있다. 그러면 이산화탄소의 증가가 꼭 나쁜 일만은 아닐 거라는 추측도 가능하고. 실제로 미국 보수 정치계에서는 이런 식의 주장을 하면서 기후위기에 대응하려는 정부의 노력을 중단시키려고 애쓰고 있다고 한다. 당연히 그 뒤에는 화석연료로 돈을 버는 기업들의 막대한 로비가 있고.


책에서 저자는 이산화탄소가 식물의 성장을 빠르게 한다는 요인은 사실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문제는 디테일이다. 저자에 따르면 그 빠른 성장을 하는 식물들 중에는 우리가 애써 기르는 곡물류만이 아니라 잡초도 포함되어 있기에(그리고 이것들이 더 빨리 자라기에, 그 방해를 받아) 전체적인 곡물생산량은 오히려 줄어들 수 있다고 말한다. 제초제를 쓰면 되지 않느냐는 반론이 있겠지만, 높은 이산화탄소 수치는 농약에 대한 잡초의 저항력을 높일 수도 있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빨리 자란 식물이 생산하는 열매에는 몇몇 영양소들이 부족하자는 증거도 있고, 나아가 식물과 연관된 생태계의 좀 더 넓은 범위(곤충의 식생이라든지, 식물을 먹고 사는 동물들이라든지)에도 악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문제를 단편적으로만 생각할 게 아니라는 말이다.




책 말미에서 저자는 과학의 영역에 정치가 부적절하게 개입하는 문제에 대해 언급한다. 우선 저자 자신부터가 25년 가까이 미국 농무부 소속의 과학자로 다양한 연구를 해 왔던 인물이다. 몇 번이나 언급되는 수치인데 1달러를 (연구비로) 투입해 10달러를 벌어들이는 나름 유익한 작업들을 해왔다는 자부심도 있었다.


그런데 이들이 하는 연구가 보수 정치인들에게 후원금을 제공하는 기업들의 이과 관련되어 있다는 게 문제다. 예컨대 트럼프는 후원자를 만족시키기 위해 기후위기 관련 예산을 대폭 줄였고, 국제적 노력에서도 탈퇴를 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주장에 반대하는 과학적 연구를 하는 기관들을 억압하기도 했고. 결국 약 50%의 연구자들이 사직을 했다고 하는데, 저자도 그 중 한 명이었다.


책에는 나오지 않지만, 또 하나의 문제는 트럼프가 벌여놓은 난장판이 단지 미국에만 영향을 끼친다는 게 아니라는 점에 있다. 미국이 가진 그 큰 국제적 영향력을 고려해 보면, 그건 거의 전 세계에 (악)영향을 끼친다. 책에는 그게 막대한 돈을 쏟아 부을 수 있는 반(反)환경 기업들의 로비만을 언급하는데, 생각해 보면 결국 그런 광고와 헛소리에 넘어가 공화당에 표를 준 무식한 미국 농부들과 블루칼라 노동자들 탓도 있지 않을까.(물론 미국 민주당이 선이라는 뜻은 아니다.)


책이 거의 끝날 때 즈음에 재미있는 인터뷰가 하나 실려 있다. 한 농부와의 인터뷰였는데, 날씨가 극단적으로 변했느냐는 진행자의 질문에 농수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파종하기 알맞은 날이 줄었고, 폭풍과 홍수가 늘고 있다고. 다시 진행자가 전에 못 보던 잡초나 곤충, 식물병을 본 적이 있냐고 묻자 농부는 물론이라고 대답한다. 그래서 새로운 시설에 돈을 써야 하느냐는 질문에 농부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진행자가 묻는다. 기후변화가 사실인 것 같냐고. 그러자 농부는 대답한다. “그럴리가요. 그건 앨 고어나 하는 말이죠.” 이런 수준의 유권자들이 있는 나라에서 제대로 된 환경정책이 나오긴 바라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물론 이게 어디 미국에만 해당될까. 수년 전 우리나라에서도 자기는 보수정당(그게 한나라당이었는지 새누리당이였는지 기억이 정확치는 않다. 하지만 뭐 그리 차이가 있겠는가. 그 자리에 자민당이나 나치당이 들어가도 별 위화감이 없는 인터뷰였는데)이 나라를 팔아먹어도 꼭 찍을 거라고 했던 한 시장 상인의 인터뷰가 한동안 유명한 짤이 된 적이 있었다. 물론 진짜로 나라를 팔아먹으면 애초에 투표할 권한 따위도 없겠지만, 이런 수준의 무식한 시민들이 서식하는 환경에서 좋은 정치가 나올 수는 없는 법이다.


우리는 거의 일상적으로 정치인들을 깐다. 마치 정치인이 온 나라를 망치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선거철 종종 목격할 수 있듯, 결국 그들은 시민 앞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존재다. 우리의 선택이 그들의 태도를 만든다. 그들의 오만함은 우리가 그들에게 굽실거렸기 때문이고, 그들의 당당함은 우리가 그들의 잘못에 눈을 감고 넘어갔기 때문이다. 범인은 바로 우리다.




과학을 다루다보니 어느 정도 전문적인 내용들, 그래프와 표가 등장한다. 하지만 그런 복잡한 내용은 조금 미뤄두더라도 책을 이해하는 데는 그리 어렵지 않게 쓰였다. 하지만 바로 그런 과학적 실험 데이터가 이 책을 좀 더 가치 있게 만들어주는 부분이니, 너무 금방 넘기지 말고 잠시 머리에 담아두는 게 좋다. 사실 그래야 이 책에서 지적하는 기후위기부정론자들의 이산화탄소 드립을 이길 수 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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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하네스 베르메르 베이식 아트 2.0
노르베르트 슈나이더 지음, 정재곤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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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이나 예술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문외한이지만, 그래도 눈에 들어오는 몇몇 화가들이 있긴 하다. 그 중 한 명이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요하네스 베르메르다. 요하네스는 라틴어식 이름으로, 네덜란드에서 활동하던 그는 아마 얀이라고 불렸을 게다.


사실 그에 대한 관심의 시작은 그림보다는 종교개혁이라는 특정한 시대와 연관해 그의 그림을 보여주는 책의 한 장면 때문이었다. 그가 활동하던 17세기 유럽은 종교개혁과 그에 이어진 전쟁으로 시끄러웠고, 네덜란드 역시 가톨릭의 본산이었던 스페인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한 독립전쟁과 종교개혁(특히 칼뱅주의)가 연결되면서 이를 도저히 외면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네덜란드는 칼뱅주의에 기초한 정치적·사회적인 개혁에 나섰다. 대표적인 칼뱅주의 신학자이자 목회자였던 카이퍼는 정치인으로 나서 반혁명당을 이끌고 수상에 오르기도 했으니 말이다. 당연히 이런 분위기가 베르메르의 작품에도 어느 정도 반영되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내가 처음 봤던 그림은 유명한 “우유를 따르는 하녀”였는데, 여기엔 소명의식이 배어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 책은 베르메르의 작품들을 큼직한 도판과 함께 몇 가지 주제로 엮어 소개하는 내용이다. 일단 책의 판형 자체가 커서 그림도 크게 볼 수 있다는 점이 좋았는데, 설명도 의외로 많고 자세하다. 마치 미술관에 가서 도슨트의 설명을 듣는 것처럼, 작품 속 다양한 도상들의 의미, 당대에 그런 사물이나 인물의 배치와 동작이 어떤 상징으로 사용되었는지를 들으며 그림을 보다보면 어느새 책의 마지막 페이지에 이른다.


사실 한 예술가의 삶과 작품을 챕터별로, 주제별로 명쾌하게 나눈다는 건 애초에 무리였을 것이다. 그래도 미술사 교수인 저자는 이 작업을 성실하게 해 냈는데, 덕분에 당대의 상황에 대해 조금은 입체적으로 다가갈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저자가 그려내는 모습은 내가 기존에 갖고 있던 이미지와는 조금 다른 네덜란드의 상황이었다.


국가적으로는 엄격한 칼뱅주의식 개혁이 추진되었고, 따라서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금욕적이고 부지런한 삶을 칭송했었다. 하지만 베르메르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많은 인물들의 모습은 그런 사회적 분위기와는 조금 다른 것들을 향한 열망도 있었다는 거. 특히 그의 그림에는 많은 여성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이 가지고 있던 욕망이 은근 또 다양하게 드러나는 점도 재미있다.


잠시 미술관에 다녀온 느낌을 준다. 가끔은 이렇게 머리를 식히는 느낌으로 하는 독서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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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턴의 무정한 세계 - 우리 역사에서 다시 시작하는 과학 공부
정인경 지음 / 이김 / 202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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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도 서문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책 제목부터 설명이 필요한 책이다. “뉴턴의 무정한 세계”라니, 이 무슨 문학적인 표현이란 말인가. 사실 책 자체는 과학사를 훑어가는 과학책이다. 그런데 여기에 이런 제목을 붙인 건, 뭔가 다른 책들과 차별화를 꾀하겠다는 의미였을 것이고, 이건 이 책이 담고 있는 네 개의 파트 소제목에도 반영되어 있다. ‘뉴턴의 무정한 세계’, ‘다윈의 잔인한 표본실’, ‘에디슨의 빛과 그림자’, ‘아인슈타인의 휘어진 시공간’이다.


고전역학을 완성한 뉴턴, 진화론의 다윈, 발명가로 유명한 에디슨, 상대성이론의 아인슈타인까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인물들을 배치해 놓고 각각의 시대를 소개하는 식으로 책의 내용은 진행된다. 그런데 여기에 저자는 각각의 파트에서 다루는 내용과 관련된 20세기 초 한반도의 인물들을 함께 배치하면서, “우리의 눈으로” 과학을 어떻게 볼 것인가를 보여주고자 했다.






각 파트의 시작은 20세기 초 조선의 작가들이 쓴 글의 일부를 배치하는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뉴턴의 시대를 다룬 1부는 이광수의 “무정”의 한 대목으로 시작해, 암울한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해법으로 과학을 통한 “민족 개조”를 주장했던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을 비춘다.


뉴턴에서 정립된 서양과학은 한 마디로 “세계의 수학화”였다. 자연을 양적으로 수량화하고, 이를 수학적 법칙으로 설명한 것이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살아있는 것들 또한 단순히 수량적으로만 표현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고, 이 때문에 저자는 뉴턴에게 “무정한 세계”라는 수식어를 붙였다.


또, 그렇게 일찌감치 (뉴턴이 17세기 말에서 18세기에 걸쳐 활동을 했으니, 우리나라로 치면 인조 말에서 영조 초에 이른다. 그 시대 우리의 과학 수준은...) 과학을 통한 발전을 이룬 서양은 과학만이 진리의 근원이라는 과학주의에 빠져들었고, 이를 통해 아직 과학적 지식을 갖지 못한 미개인들을 문명화한다는 명분으로 제국주의적 침탈을 합리화했다. 앞서의 “무정”은 그런 서양의 이데올로기를 그대로 복사한 측면이 있었고, 저자는 이를 비판적으로 본다.


2부 다윈의 이야기는 염상섭의 “표본실의 청개구리”로 시작해, 다윈의 진화론에서 나온 사회진화론과 여기에 근거해 “미개인”을 살아있는 그대로 전시하는 만행까지 저질렀던 서양의 여러 나라들과 일제의 모습이 설명된다. “소설가 구보씨의 하루”의 한 장면으로 시작하는 3부에서는 20세기 초 경성의 일상에서 전기의 중요성을 보여주면서 자연스럽게 에디슨에게로 넘어간다. 분명 과학기술계에 많은 공헌도 한 에디슨이었지만, 저자는 그의 탐욕스러움에서 드러나는 “과학의 가치중립”이라는 신화의 환상을 문제 삼으며, “조선의 과학기술”을 부정하면서 일제가 이식한 수준 이하의 식민지용 과학을 옹호하던 이들을 아울러 비판한다.


아인슈타인을 다룬 4부는 천재 시인 이상과 함께 시작한다. 단순히 시를 잘 써서 ‘천재’라고 불렸다고만 생각했던 이상은, 공부 쪽에도 꽤나 수재에 속해서 조선인들에게 매우 좁은 문만 열어둔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를 (일본인 동기를 제치고) 수석으로 졸업하고, 일제의 건축사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 한동안 일제의 건축과 관련한 일에 종사하던 그는 자신이 하던 일이 조선의 발전과는 상관없음을 깨닫고 깊은 절망에 빠진 채 총독부에서 나와 쇠약해져 가는 몸을 붙잡고 시를 쓰기 시작했던 것.


저자는 이상의 시 속에서 아인슈타인과 양자역학의 향기를 읽어내면서(물론 이상이 이런 이론들을 충분히 이해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일제가 조선을 부흥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식민지 근대화론을 가차 없이 비난한다.






저자는 서양 과학의 발전사(그리고 애써서 탈아시아해 서양의 일원이 되려고 했던 일제의 시도) 속에서, 그 주요 요소들이 20세기 초 조선인들에게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졌는지, 그런 과학 발전이 과연 조선에도 유익을 끼쳤는지를 인문학적으로 파고 들어간다. 흥미로운 접근 방식이다.


과학발전을 이룬 서양을 따라가는 것이 문명화이자 진보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서양인들의 기준에 못 미치는 사람들은 미개인으로 전시되는 것이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던 시대는 무정하고 잔인한 시대였다. 여기에 서양을 직접 접하고 공부하기보다 일제라는 필터를 하나 더 거쳐서 접할 수밖에 없었던 식민지 조선에게 상황은 더욱 왜곡되어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많은 지식인들은 결국 다양한 절망 속으로 빠져들었으니, 서양의 과학이 약속한 유토피아는 적어도 당시 조선에게는 거짓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저자가 말하는 “우리의 과학”이란 뭔지가 좀 불분명하다. 저자는 책 초반 과학과 과학주의를 구분하면서 후자를 좀 비판적으로 보는데, 사실 둘 사이의 정의의 구분보다 어려운 건, 실제로 그래서 과학을 어느 선까지 가져다 댈 것인가 하는 실천적 차원이 아니겠는가. 그리고 이 부분은 의외로 쉽지가 않다.


또, 식민지 조선의 과학이 갖는 울분과 한계를 지적하는 것은 의미가 있지만, 우리의 과학이라는 게 조선인들에게도 수준 높은 과학교육을 시행하는 것과 조선의 발전을 위한 건축을 해야 한다는 정도라면, 그건 과학 차원보다는 식민지 통치방식의 문제점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책 말미의 뉴라이트 진영의 헛소리에 대한 비판은 공감이 가지만.


요컨대 책의 시도 자체는 참신했지만, 저자가 주장하는 바가 선명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각각의 이야기에서 분명 공감이 가는 결론들이 있긴 했는데, 그게 하나로 잘 모아지지는 않았던 느낌. 결론부에 하나의 장을 추가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책의 각 부분의 주제적 짜임새가 좀 더 긴밀하게 연결되었어야 했다. 하지만 각각의 내용들은 교양으로 알아 둘만한 내용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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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 국가를 선언하다 - 식물이 쓴 지구의 생명체를 위한 최초의 권리장전
스테파노 만쿠소 지음, 임희연 옮김, 신혜우 감수 / 더숲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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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이 독특하다. 식물이 국가를 선언하다니, 이젠 어디서 말하고 사고하며, 심지어 조직까지 만들 줄 아는 똑똑한 식물이 태어나기라도 했다는 말인가. 물론 다행히 그런 일이 일어난 건 아니다. 식물이 국가를 선언한다는 말은 일종의 비유적인 표현으로, 식물을 포함한 다양한 생물들이 사는 지구의 생태계 전체를 고려한 새로운 생활 패턴은 어떠해야 하는지를 설명하는 책이다.


사실 책을 읽기 전에는 일각에서 주장하는 “동물권” 운운하는 식의 과도한 감상주의가 담겨 있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도 살짝 들었다. 동물에 대한 학대를 줄이자는 주장에는 공감하지만, 인권에 대한 정의도 제대로 힘든 마당에 동물의 정치적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은 지나쳐 보이는 게 사실. 하지만 이 책의 경우 “식물(의 정치적)권(리)” 같은 걸 말하는 건 아니다.



저자가 지적하는 건 결국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는 인간들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그 개체수로만 보면 식물 쪽이 훨씬 더 많다. 또, 지구의 환경을 지금처럼 유지하는 데에도 식물이 가장 큰 공헌을 하기도 한다. 태양으로부터 오는 에너지를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바꾸는 것은 오롯이 식물이 하는 일이니까. 하지만 우린 지구의 운명을 결정하는 데 그런 식물은 별로 고려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또, 책은 환경을 파괴하는 다양한 행위들에 대한 경계를 담고 있다. 그리고 동물적 방식보다 식물적 방식(예컨대 비중앙집중적인 네트워크 형태, 지속 가능한 자원의 소비 등)이 생태에 좀 더 적합하다는 내용도 보이고. 이런 내용을 읽다 보면 옳지, 옳지 하는 생각이 들긴 하는데, 그래서 현대인들이 과연 현재의 편리함을 포기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하고, 그래서 식물적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면 모두가 정말 행복해 질까 하는 의심도 든다.





식물에 관한 책이지만 생각보다 다양한 영역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개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오히려 천문학과 관련된 내용이었는데, 우주에 지적 생명체가 존재할 가능성을 묻는 “페르미의 질문”에서 저자는 우주에 생명체가 흔할 것이라는 생각은 우리 행성을 과소평가한 것이라고 대답한다. 지구가 이토록 멋진 환경을 갖고 있기에, 이 정도는 어디든 가능할 거라고 지레짐작하는 것일 뿐이라는 지적.


언제부턴가 지구에서 쓸 만한 게 다 사라지면, 혹은 지구가 살기 힘들 정도로 망가지면, 지구 밖 다른 행성을 찾아 이주를 하면 될 거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는 것 같다. 생각해 보면 굉장히 편한 기대다. 여기에 필요한 기술적 문제도 문제지만, 인류가 그렇게 지구를 가볍게 떠날 수 있을까. 이곳을 망쳐놓은 것도 인간인데, 그걸 교정할 생각을 못하고 또 다른 곳으로 간다면 그곳 또한 망가지기만 하지는 않을까.(전 우주적인 민폐족이 될지도...)



사실 이 책의 특징은 책의 구성 형태다. 책 제목이 국가를 선포한다는 내용이고, 내용은 여기에 맞는 일종의 헌법과 비슷한 권리장전을 선언한다는 식으로 꾸며져 있다. 1조는 “지구는 생명체의 공동주택으로 모든 생물이 그 주권을 가진다”라는 내용이고, 나머지도 비슷한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조문은 책의 각 장의 내용으로 이어지는 식.


자연과 환경보호 등을 다룬 책 치고는 수월하게 읽힌다. 나름의 위트도(이 책의 구성 형태 자체가 그렇다) 담아내려고 하고 있고. 다만 수준 높은 위트는 그걸 알아듣는 사람에게 필요한 걸 텐데 얼마나 (특히나 여기 나온 이야기들을 들어야 할 사람들 중에서) 알아들을까 싶은.(아.. 사람이 점점 비관적이 되어 간다. 하지만 환경 문제에 대해선 그럴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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