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화.
영화는 1971년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을 배경으로 한다. 당시 속초공항에서 이륙한 여객기가 납치범에 의해 북한으로 끌려가는 일이 발생했고, 이를 막으려던 조종사 중 한 명이 폭발로 세상을 떠나게 된다. 영화 속 하정우가 연기한 태인이 바로 그 죽은 조종사였고, 납치범 역할은 여진구가 맡았다.
다만 영화 속 묘사와 달리, 죽은 조종사는 사건 1년 전에 발생한 항공기 납치 사건 당시 대한민국 공군기 조종사로 출격한 적이 없다고 한다(애초에 출격 자체를 안 했다고). 영화에서는 당시 태인의 선배가 납치된 항공기를 조종하고 있었고, 결국 후에 돌아오지 못했다는 설정을 넣음으로써, 비극의 강도를 높이려고 했던 것 같다.
또 하나, 여진구가 연기한 납치범 용대는 이른바 월북자 가족에 대한 당국의 집요한 괴롭힘으로 인한 분노가 범행의 계기가 된 것으로 묘사되는데, 실제 납치범의 동기는 밝혀진 바가 없다고 한다. 그가 범행 과정에서 사망했기 때문.
희생.
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가치는 역시 희생이다. 희생이란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소중한 것을 포기하는 행위를 말한다. 요새는 가장 인기 없는 덕목 중 하나가 되어버린 것 같긴 하지만(뭐 어디 덕목들 가운데 요새 인기가 있는 게 존재하기는 할까 싶긴 하지만) 모든 것을 주고받기 식으로만 정확히 계산해서는 우리 사회라는 게 애초에 존재가 불가능하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희생은 숫자로 계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친구를 위한 희행 역시 주고받음의 차원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직접 만나 보지도 못한 동료 시민들을 위한 군인들의 희생 역시 쉬운 계산이 아니다. 예수님은 “사람이 친구를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고 하셨다(요 15:13).
오늘날 이 희생이라는 가치는 양면에서의 공격을 받고 있는 것 같다. 한쪽은 도킨스 식의 이기적 유전자론 같은 유사과학의 공격으로, 애초에 이타심이나 희생 같은 건 존재하지 않고, 그저 다 장기적으로는 나와 나의 유전자를 위한 행동일 뿐이라는 식의 냉소주의다. 애써 신을 부정하려는 그 목적이 결국에는 인간을 단지 유전자들의 조합일 뿐이라는 식의 얄팍한 결론을 낳은 것도 문제지만, 애초에 유전자자 ‘자기’, 혹은 ‘자기종족’ 따위의 인식이 있을 거라고 여기는 것이 퍽 천진난만해 보인다.
또 다른 공격은 애초에 희생 따위기 필요 없는 유토피아를 이 세상에 만들고자 하는 공상주의자들이다. 문제는 그 모든 것을 담당할 중앙의 행정기구의 비대화, 그리고 여기에 들어가는 막대한 예산과 집행 과정에서의 비효율성 같은 것들이다. 모든 것을 행정과 예산을 통해 이루고자 하는 이런 식의 사고는, 결국 행정비대화로 스스로 무너지게 만들고 말 것이다. 아울러 사람들의 심성까지도 함께 무너질 수도 있다는 것이 함정.
답은 희생의 가치를 인정해주고, 그에 맞는 명예와 존경, 사회적인 인식의 재고 같은 것들이 아닐까. 자발적으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것을 내어주는 그런 모습은 동기를 너무 파헤치기 전에 우선 칭찬하고 찬사를 보내주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