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하고 싶지 않은 당신에게
타일러 스테이턴 지음, 홍종락 옮김 / 복있는사람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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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들의 삶에 기도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수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직접 경험한 기도의 중요성을 고백해 왔고, 많은 교회의 훈련 프로그램들도 바로 이 기도를 더 익숙하고 잘 하도록 돕기 위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이런 반복되는 강조는 그리스도인에게 기도란 얼마나 익히기 부담스러운지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신앙생활을 얼마나 오래 했느냐와 상관없이, 그리고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아는 것과도 무관하게, 기도는 어렵다. 기도에 관한 책은 그래서 좀 부담스럽게 느껴지면서도 동시에 궁금증을 자아내기도 한다. 어떻게 하면 기도를 그렇게 쉽게 잘 할 수 있을까.


작년 말 갔던 한 모임에서, 일면식도 없었던 어떤 분이 이 책을 추천했다. 얼마 후 구입을 했고, 그분이 왜 이 책을 추천했는지를 살짝은 알 것 같다. 저자는 기도에 관한 깊은 통찰력과 경험을 바탕으로, 기도가 무엇인지,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에 관한 좋은 조언을 해 준다.





저자는 우선 기도에 대한 부담감을 줄이도록 요청한다. 단번에 몇 시간, 몇 날에 걸쳐 기도하는 사람이 될 수는 없다. 우선은 지금 할 수 있는 만큼만, 그것이 하루 1분에 불과하더라도 기도를 하라, 그것이 중요하다. 기도를 할 때 무슨 유려한 말로 하려고 애쓸 필요도 없다.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건, 하나님 앞에 나아가 머무는 일이다. 앞서 말한 1분의 기도 동안 그저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고 난 뒤 잠잠히 하나님을 기다리는 것도 충분한 기도다.


하지만 일단은 이렇게 기도를 시작했다고 해도, 계속 그 자리에만 머무는 것은 무리다. 우리의 기도는 점점 더 풍성해져야 하고, 더 깊은 데로 나아가야 한다. 책 중반은 우리의 기도에 채워져야 할 “내용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경배, 고백, 중보, 청원 등이다.


책 후반부는 기도를 하는 우리에 관한 이야기다. 기도에 관한 신약성경의 동사 시제가 중간태라는 점에서 착안해 기도는 구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가 하는 것이기도 하다는 통찰로 시작해, 침묵과 끈질김으로, 쉼 없이 기도해야 한다고 권면한다.





살짝 아쉬운 것은 각 장의 구성이 논리적으로 긴밀하게 연결된 글들이라기보다는, 그 장의 큰 주제에 관한 이런저런 짧은 글들이 연속적으로 실려 있는 식이라는 점이다. 한두 페이지의 글과 그 다음에 나오는 글 사이에 별 관련이 없으니, 책을 읽어나가면서 흐름이라는 것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짧은 칼럼들을 모은 느낌?)


하지만 그런 구성의 아쉬움을 넘어서는 내용의 충실함이 있다. 좋은 번역자의 도움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문장들도 깊이가 있으면서 분명하게 전달되고, 그 안에 담긴 내용 역시 훌륭한 통찰과 작가로서의 훌륭한 능력을 보여준다.


예컨대 책 초반 저자는 서구 교회와 영적 호기심이 살아 있는 서구 세계 사이의 많은 관계가 끊어졌지만, “기도가 그 둘 사이의 접점”으로 남아 있다고 예리하게 지적한다. 우리의 기도가 “물에 가라앉지 않으려고 미친 듯이 발버둥 치며 가상의 무기력한 신에게 소극적으로 말을 거는 일에 불과”하다는 표현은 생동감이 있고, 현대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멘” 사이에서만 들을 수 있는 (그러나 일상에서는 쓰지 않는) 상투적인 용어들로 가득 찬 기도를 한다고 위트를 섞어 비판하기도 한다. 이 정도의 글솜씨는 읽는 재미를 준다.


무엇보다 책은 기도에 관해 다시 한 번 집중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늘 “더 중요한” 일을 하기 위해 미뤄두었던 주제를 다시 우리의 우선순위 상위로 밀어 넣도록 만들어주는 셈이다. 당장 책 제목처럼 기도하고 싶은 마음이 별로 들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어느 정도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 그런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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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를 뛰어넘는 그리스도인 - 차이를 품되 구별되어 세상을 섬기다
팀 켈러.존 이나주 외 지음, 홍종락 옮김 / 두란노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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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대 분열의 시대다. 그건 대통령 탄핵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우리나라만이 아니라 외국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현직 대통령의 친위쿠데타까지 옹호하며 나라를 분열로 몰아가는 우리 정치 갈등의 근원에는 박정희 독재시절 정권 유지를 위해 의도적으로 불러일으킨 지역감정이 깔려 있다면, 외국의 경우 이 외에도 다양한 역사적이고 문화적인 갈등도 사람들을 분열시키는 재료로 사용되기도 한다. 대표적으로 인종과 종교가 있고.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어느 한 쪽을 편들면서 다른 쪽을 비난하는 방식이 전부일까. 아니면 언제나 양측의 중재자 입장에 서서 화해를 시키려는 쪽을 선택해야 할까. 쉽지 않은 문제다. 분명 그리스도인은 대책 없는 양비론을 주장하지 않고, 옳고 그름의 기준이 존재한다는 믿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그 옳고 그름은 단순히 하늘에 속한 일들만이 아니라, 땅에서도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사람들이기도 하다. 이 기도는 단순히 골방에서만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 가운데서 적극적으로 성취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그런 기도이기도 하다.


이 책은 우리 못지않게 극심한 갈등에 시달리고 있는 미국을 배경으로, 이런 분열과 차별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는 열두 명의 그리스도인들의 고백과 그들의 삶에 대한 보고를 담고 있다. 대표 저자로도 실려 있는 팀 켈러는 목회자이지만, 가수와 음악가, 법학 교수나 정신과의사도 포함되어 있다.




우리는 세상에 선을 긋기를 좋아한다. 그것이 선명하고 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저자들이 여기에서 그리는 세상의 이미지는 그것과는 좀 다르다. 신학자인 키르시틴 디디 존슨은 “아주 깊이 뿌리를 내린 나무”라는 상징을 꺼내든다. 깊게 뿌리를 내린 나무는 충분한 물과 양분을 확보해 가지를 넓게 뻗고, 이때 이 가지들은 다른 나무의 가지들과 겹치게 된다는 것. 즉 자신이 속한 전통에 충분히 깊숙이 뿌리박혀 있으면, 다른 뿌리에서 나온 전통과 겹치는 부분들을 발견할 수 있게 되고, 그것들을 공통 분모로 삼아 함께 유익한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이다.


자신을 모험가라고 소개하는 IVF 대표 톰 린은, 대만계 미국인이다. 최초의 유색인종 대표였던 그는 오늘날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고 있는 방향 감각 상실과 낙담은 “가족 캠핑 여행만 떠나본 이들이 진짜 황무지에 도착했을 때 받게 되는 느낌과 비슷할” 것이라고 말한다. 기독교가 우세인 (미국) 문화권 안에 살던 사람들이 사회가 다원화 되면서 경험하는 당혹감을 말한다. 우리의 상황에 맞춰서 조금 바꿔보자면, 교회 안에서만 지내던 사람들이 세상에 나와 경험하는 방향 감각의 혼란과 비슷하달까.


여행을 가서 끊임없이 불평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새로운 곳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들이 자신이 익숙한 상황과 다르다는 점 때문이다. 사실 그런 사람은 그냥 집에만 있는 게 낫다. 괜히 나와서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는 것 보다는. 하지만 젖먹이 어린아이 시절에야 그런 것이 가능하지, 다 큰 성인이 그렇게 한다면 ‘은둔형 외톨이’라고 부르면서 주변의 걱정을 살 수밖에 없다. 젖만 먹는 어린아이가 아니라 단단한 음식을 먹는 성인이 되려면 결국에는 집밖으로 나와야 하고,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관계 맺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책은 여기에 필요한 다양한 태도와 준비자세들, 요령들을 소개해 준다. 한 명의 저자가 내용을 정리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 다양한 저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소개하는 방식으로 진행되기에, 그 내용이 체계적으로 제시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여러 이야기들 속 겹치는 내용들을 포착하는 것은 가능하다. 겸손과 포용, 경청,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하고 뻔한 이야기 아니냐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책 속에 한 작가가 지적하는 것처럼, “우리는 글에 너무 많은 비중”을 두면서, 정의의 추구를 단지 “올바른 해시태그 사용이나 소셜미디어에 의견을 표명하고 분노를 표출하고 도덕성을 과시하는 일과 혼동”할 때가 많다. 정작 중요한 건 진짜 사람들과 만나 함께 일을 하는 것이고, 그 과정에서 우리의 그리스도인됨이, 또 세상에 빛을 비추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이 중 하나라도 실재로 내면화해 실천하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는 해 본 사람만 알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일부 목회자들이(그리고 “자칭” 목회자들이) 자주 엉뚱한 망언을 쏟아내는 이유가 조금 짐작되기도 한다. 그들은 실제 세상 속에서 실제 사람들과 대화를 해 본 적도, 그들 속에서 함께 일해 본 적도 없는 이들이기 때문이다. 자기들만의 안전한 성에 갇혀서 히키코모리가 되어버리니, 온 세상에 음모가 가득하고, 오직 자기와 지지자들만이 마지막까지 남은 생존자라는 괴상한 의식을 갖게 되는 것이다. 부디 세상에 좀 나와야 할 텐데, 그들은 그럴 용기가 없다.


나와 다른 존재를 만나는 것은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인간과 가장 다른 존재인 하나님을 만났던 사람들이 하나 같이 두려워하며 감히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자신의 죄를 고백했던 이유이기도 하다.(오늘날 자신이 하나님을 만났다고 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오히려 하나님을 수하처럼 부리려고 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하는 걸 보면, 어쩌면 그가 만났다고 주장하는 하나님은 실은 하나님 흉내를 내고 있는 다른 게 아니었나 싶은 깊은 의혹이 든다)


정도는 다르지만 다른 사람을 만날 때도 비슷한 감각일 것이다. 물론 개인적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해야 하는 일과 국가적 단위에서 할 수 있는 일 사이의 차이는 존재한다. 교회가 하는 일과 국가가 하는 일도 다르다. 그러나 결국 일을 이루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신뢰하는 사람은 지금 여기서 해야 할 일을 미루거나 포기하지 않을 수 있다.





차이를 뛰어넘는 그리스도인은 차이를 무시하거나 없다고 보지 않는다. 또, 분명 어떤 차이는 우리의 정체성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나 대화의 의지를 꺾지는 않는다. 비록 상대가 우리와 대화하려는 의지가 없을 때라도 말이다. 그리스도인들이 가지는 겸손은 나약함과 다르다. 그건 상대에게 무조건 맞춰주려는 태도가 아니라, 내가 가진 뿌리의 단단함을 신뢰하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관용과도 잇닿아 있다.


기독교인들의 의지나 바람과는 상관없이, 사회는 점점 더 다원적 상황으로 흘러갈 것이다. 물론 일부의 반동적 노력들이 잠시 성과를 거두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순수한 단일적 문화적, 민족적 공동체라는 개념 자체가 인류 역사 가운데 등장한지 얼마 되지 않았다. 애초에 기독교는 다양한 문화들이 섞여 있는 로마제국 안에서 시작되었고, 그 다양한 배경들은 교회를 채색하는 다채로운 색깔의 스테인드글라스처럼 교회를 더 빛나게 만들었다. 유전적 동질성에 대한 집착은 결국 작은 바이러스로 단번에 멸종될 수 있는 위기를 초래하게 된다. 교회는 이 위기를 잘 대처해 나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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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과 고대 근동의 점술 고대 근동 시리즈 15
강승일 지음 / 기독교문서선교회(CLC)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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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식으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다. 하나의 문화는 그 주변부와 다양한 상호작용을 하기 마련이고, 이 과정에서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받게 된다. 특별히 국가적 문화양식은 그 나라의 힘과도 연관이 되어 있어서, 대체로 강한 나라의 문화가 주변국으로 퍼져나가기 마련이다. 물론 중국의 원나라나 청나라처럼 강한 힘을 지난 이민족 국가가 피정복민인 한족의 문화에 동화되는 경우도 있긴 하지만, 이 경우 비록 정복을 당하긴 했지만 피정복민들의 수와 영역이 월등히 많고 넓었다는 특이점이 영향을 주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즉 여기서 말하는 “강한 나라”란 단순히 군사적인 힘만을 말하는 게 아니라는 뜻.


아무튼, 이런 경향은 고대 이스라엘의 문화에도 대체로 적용된다. 이 책에서 다루는 중심 주제인 “점술” 또한 그렇다. 기독교인들은 흔히 고대 이스라엘에서 점술은 엄격히 금지되었다고만 배우지만, 이 책의 저자는 고대 근동(주로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가 자세히 다뤄지고, 히타이트와 가나안이 일부 설명된다)의 다양한 점술 사례들을 고고학과 문헌학적으로 살핀 뒤, 이들 인근 문화권의 점술에 관한 관행이 고대 이스라엘에서도 유사하게 발견된다고 지적한다. 흥미로운 내용이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점술이라는 주제로 고대 근동의 역사와 문화를 잘 정리해 냈다는 점이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히타이트와 가나안 지역의 점술 문화를 그 유형별로 나누어 고대 신화나 문학 속 언급들을 잘 분류했다. 여기에 고대 이스라엘의 점술 문화 역시 이런 유형에 따라 분류하고 있다. 책을 읽다보면 이렇게까지 다양한 영향을 받았구나 싶다.


고대 이스라엘의 점술 문화를 추정해 볼 수 있는 자료가 거의 구약성경에 한정된다는 점과 일부 고고학적 발굴이 전부라는 점은 아쉽다. 하지만 저자는 꽤 충실한 연구를 통해서 최소한 고대 이스라엘의 민간 문화 속에서 점술이 퍽 널리 사용되었다는 점을 나름 입증해 낸 것처럼 보인다. 물론 많은 경우 민간의 점술 문화를 직설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지만, 일부 구절들은 지나치게 넓게 해석한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또, 고고학적 결과물들을 정리하는 부분은 잘 해냈지만, 그 결과물들을 엮어서 결론을 내는 과정은 평이했다. 문서설에 기초해서 비교적 후대에 신명기적 사가들에 의해 민간의 점술 관행이 억압되었다는 식의 설명은 학계에서는 매우 흔하게 사용되는 추정이긴 하지만, 이런 종류의 추정에는 언제나 그렇듯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의 선입관 이외의) 별다른 결정적인 근거가 있는 건 아니라서 얼마든지 전혀 다른 방식의 추정도 가능하다.


하지만 어떤 결과물은 그저 흩어진 자료들을 잘 정리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인정을 받을 만한 법이다. 개인적으로 이 책이 그런 결과물 중 하나라고 본다. 당장에 여러번 반복해 읽을 것 은 아니지만, 필요할 때 꼭 다시 찾아보게 될 그런 좋은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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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성경을 찾아줘 믿음 첫 단추 2
정석원 지음 / 홍성사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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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인 “기독교 세계관이 필요해”에서 청소년과 초심자를 대상으로 기독교 세계관이 무엇인지를 쉽게 소개했던 저자가, 이번에는 같은 독자들을 위해 성경의 전반적인 개론을 가능한 쉽게 풀어놓은 책을 내놓았다. 일종의 성경 개론이라고 할 수 있지만, 학문적이라기보다는 실용적인 목적이 좀 더 강한 그런 책이다.


1부와 2부에서는 성경에 관한 큰 그림을 그려주고, 3부에서는 구약을, 4부에서는 신약의 흐름을 잡아준다. 마지막 5부에서는 성경을 읽어야 하는 필요성과 이를 위해 도움이 될 만한 몇 가지 팁을 제시한다. 전체적인 구성은 짜임새가 있다.





사실 책의 내용 자체는 기본적인 것들이라 특별히 새로운 부분은 없었지만, 그 풀이 방식이 재미있다. 특히 구약과 신약을 지하철 노선도처럼 배열해서 이미지화 한 부분은 기발했다. 그리고 이와 관련해 신약을 다이어그램으로 설명하는 부분에서 “공관복음서를 일반 열차라고 하면, 요한복음은 테마 열차”라고 설명한 부분은 탁월했다.


각 장의 말미에 성경에 관한 질문들이 하나씩 덧붙여 있고 이에 대한 저자의 간략한 대답들이 나오는데, 본문의 내용과 직접 연결되지 않는다는 점은 (구성상) 살짝 아쉽지만, 전편과 마찬가지로 보수적 신학 아래 나름 충실한 대답들을 담고 있다.


성경이라는, 적지 않은 분량의 책을 고작 몇 개의 장들에 다 담아내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때문에 저자는 몇 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각각 다섯 개) 구약과 신약을 요약하는데, 뭐 초심자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우선은 이 정도의 요약으로 시작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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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한 요더의 정치학 - 존 하워드 요더의 성폭력과 교회의 대응
김성한 지음 / IVP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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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 첫 책을 좀 우울하고 슬픈 책으로 시작한다. 이 책은 존 하워드 요더라는 인물의 성범죄와 이를 공식적으로 올바로 처리하지 못했던 한 교단에 관한 이야기다. 개인적으로 요더가 쓴 책을 직접 읽어본 적은 없지만, 유명한 기독교 윤리학자인 스탠리 하우어워스의 자서전(“한나의 아이”)에서 그가 요더로부터 얼마나 큰 영향을 받았는지를 받고 요더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었다.


그랬던 요더가, 실은 수십 년 동안 매우 많은 여성들을 대상으로 집요하게 성범죄를 저지른 범죄자였고, 그가 속한 재세례파 교단(메노나이트)에서 이를 적절하게 처리하는 데 실패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하우어워스와 마찬가지로 요더 역시 기독교 윤리학자였고, 그것도 평화신학의 거두이자 재세례파 교단을 대표하는 학자였다는 것이 이 사건의 기이함을 더욱 부각시켰다.





사실 요더의 성범죄는 그가 교수로 있던 대학에서부터 문제로 지적되었지만, 당시 총장과 교단은 이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했다. 최종적으로 약 4년 동안의 징계절차가 있었지만, 그 기간이 지나면서 교단은 요더가 가진 지적 은사를 적극 활용할 것을 주문하기까지 했다. 4년 동안 이어졌던 목회직 중단은 애초에 요더가 목회를 수행하지 않았음을 생각할 때 의미가 없는 조치였고, 무엇보다 이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회복을 위한 적절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았다는 점이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된다.


상황이 바뀐 것은 요더가 세상을 떠난 후였다. 그가 재직했던 대학에 사라 웽어 쉥크라는 여성 총장이 부임했고, 그녀는 이전의 총장들과 다르게 이 학교와 전혀 인연이 없었던 외부자였다. 사건을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위치였다는 것. 결국 그녀는 요더의 문제를 공식적으로 드러내는 데 성공했고, 수많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담아 학교와 교단의 공식적인 사과와 회복을 위한 조치를 추동하게 된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이전 조직과 사건에 관한 이해관계가 없는 외부인들을 중심으로 대책위를 꾸려야 하고, 특히 성범죄 같은 문제들에서는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좀 더 존중받을 수 있는 분위기(예컨대 사라 같은 여성이 중심이 된 대책조직 같은)를 만들어야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물론 이때 피해자 중심성이라는 것은 단순히 일방적인 주장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데, 우리나라의 최근 몇몇 예들에서 알 수 있듯 여성이라고 해서 모두 정직한 건 아니기 때문이다.(사실 성범죄와 관련해서 이 부분이 참 어렵다)





요더는 국제적인 명성을 얻고 있는 학자였다. 그렇기에 그가 저지른 범죄를 적절하게 처리하는 데는 그토록 오랜 시간이 걸렸다. 세상은 변했고, 인터넷이 발달하면서 이전처럼 정보를 숨기고 감추는 것이 쉽지만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예를 보면 요더처럼 큰 명성이 없더라도, 그리고 세상이 아무리 변했어도 일단 얼굴에 철판을 깔고 당당히 나가면 무슨 수를 써도 처리가 쉽지는 않겠다는 생각도 든다.


지난 해 한 대형 교단 총회장이 불륜으로 담임목사자리에서 사임하면서 수 억 원 대의 전별금을 당당히 요구하고, 교회에서는 그를 내보내기 위해 이 요구를 수용하기로 결정하기도 했다. 또 책에도 언급되었던 삼일교회 전병욱 목사의 성범죄는 아예 교단 차원에서 별다른 처벌을 하는 걸 포기하기도 했으니, 비슷한 사건을 저지르는 범죄자들에게 퍽 용기를 불어넣어 줄 만한 상황이다.


분명 요더가 남긴 저작들과 그가 저지른 범죄 행위를 따로 떼어서 놓고 볼 수는 없다. 나쁜 사람이 좋은 신학자가 될 수 있느냐는 질문은 너무나 타당하다. 책에서 저자는 초보적이나마 요더가 그의 신학적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을 저질렀는가가 아니라, 그의 신학이 가진 문제점 때문에 그런 일을 저질렀을 지도 모른다는 주장을 소개한다. 이는 재세례파 전통에 서 있는 교회들이 가지고 있는 근본적인 신학적 문제일 수도 있는 지점인데, 그들은 너무 빨리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에 완전히 순종할 수 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착각했다.


비슷한 차원에서 한국 교회의 많은 주요 리더들이 여전히 많은 윤리적 문제들을 일으키고 있고, 그마저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상황 또한, 뭔가 개별적인 일탈로만 볼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잘못된 신학을 갖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진지하게 고민해 봐야 하지 않나 싶다. 씁쓸한 이야기지만, 이젠 너무 확연해서 피할 수 없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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