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하고 초라한 - 존재를 배제하는 공간에 대하여
강미현 지음 / 흠영 / 2026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건축사로 일해 온 저자가,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도시, 이곳이 좀 더 친절한 곳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쓴 책이다. 단지 법적인 기준을 맞추는 것으로는 충분히 않다. 얕은 문턱 하나도 휠체어를 탄 장애인에게는 장벽처럼 느껴질 수 있고, 법적 기준을 맞춘 반지하방에서 사람들은 곰팡이와 싸우며 건강을 희생해야 한다.


얼마 전 한 유명한 장애인 유튜버가 KTX에서 내리는 과정에서 이를 도와주던 공익근무요원과 부딪힌 후, 이를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올렸다가 역풍을 맞는 사건이 있었다. 물론 해당 사건에서 그 유튜버는 자신의 분을 못 이겨 과한 대응을 한 것 같다. 하지만 그가 말하려고 했던 것, 그러니까 아주 작은 턱(심지어 그냥 사람의 발이라도)도 어떤 사람에게는 심각한 부상을 입힐 수 있는 위험한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사실 조차 “그저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사실 고통이라는 건 나누어지지 않는다. 심정적인 위로는 할 수 있을지언정, 우리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정확히 우리의 것으로 경험할 수가 없다. 아니, 그에 앞서서 우리의 고통을 정확하게 다른 사람에게 설명하는 것부터가 쉽지 않다. 얼마 전에 뭘 잘못 먹고 식도 쪽에 통증이 생겨서 약국에 간 경험이 있는데, 내가 느끼고 있는 그 통증을 설명할 말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쓰라림도 아니고, 찌르는 것도 아니고, 쎄한 느낌이라는 설명은, 내가 들어도 두루뭉술하기 그지없었다.


고통이라는 게 그런 식이다. 당사자가 아니면 얼마나 큰 고통을 견디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물론 우리는 나 자신 이외의 누군가가 될 수 없다. 때문에 타인의 고통을 알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하다. 일부러 시간을 들이고, 관심을 갖고 지켜보지 않으면, 근본적인 해결은 멀어진다.


저자가 이 책에서 지적하는 수많은 문제들은 그래서 더욱 중요하다. 좁은 고시원에 몸을 구겨 넣고 살 수밖에 없는 청년들, 반지하의 열악한 상황을 견디는 이들, “시설” 속 장애인들, 힘든 노동 사이의 짧은 휴식을 위해 화장실로 들어가야 하는 청소 노동자들, 비닐하우스를 숙소로 제공받는 외국인 노동자들 등등. 누군가 애써 알려주지 않으면 일상 가운데서 좀처럼 마주칠 수 없는 이들의 이야기다.





책에 담긴 글들은 모두 어떤 공간과 건축물이라는 주제와 연관되어 있는데, 저자의 이력을 생각하면 확실히 자신이 하는 일을 (단지 밥벌이로만이 아니라) 좀 더 진지하게 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다만 바로 그 공간과 건축물, 좀 더 쉬운 말로 부동산과 관련된 문제이기에 해결 또한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씁쓸한 예감이 들기도 한다. 전 국민이 부동산 투기에 목을 매고 있는 나라에서, 과연 효율을 포기하고 더불어 사는 삶을 선택할 수 있을까.


2025년을 기준으로 대한민국 가구의 자산의 3/4가 부동산에 묶여 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부동산 가격이 떨어지는 것은 그야말로 전 국민적 공포일 것이다. 어떻게든 거품을 일으켜서 자산을 증식하려고 눈이 벌게져 있는 사람들에게, 장애인 그룹홈이 (대출을 잔뜩 받아 산) 자기 집 근처에 들어오는 일 조차 피켓을 들고 반대하러 나서기에 충분한 일이다.


사실 가장 약한 사람이 살기에 편한 곳은, 모든 사람에게 편한 곳이 될 가능성이 높다. 물론 추가적인 비용이 들 수는 있겠지만, 누군가가 겪는 불편함에 귀를 기울이는 사회에서 사는 것만큼 안심되는 일이 또 있을까. 각자도생만큼 비효율적인 삶의 방식도 없다. 우리는 당장 손에 쥔 것을 놓고 함께 살아갈 수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 우리가 놓치는 민주주의 위기 신호
스티븐 레비츠키.대니얼 지블랫 지음, 박세연 옮김 / 어크로스 / 2018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책을 다 읽고 리뷰를 쓰려고 보니, 두 공저자는 좀 더 최근작인 “어떻게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가”에서 만났던 이들이다. 책에서 극단적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고 있는 미국의 현실의 원인을 “헌법”에서 찾았던 저자들이었다.


그 전작에 해당하는 이 책에서는 제목처럼 민주주의가 무너지는 현재 상황을 묘사하면서 그 원인을 정당에서 찾는다. 조금은 흥미로운 지적. 우리말 제목의 “무너짐”은 영어 원제(How Democracies Die)로 들어가면 좀 더 강한 어감이다. Collapse가 아니라 Die다. 그만큼 현 상황을 위기로 보고 있다는 의미일까.





책 초반 역사 속 다양한 민주주의 붕괴 사례들을 살펴보면서 그 가운데 흥미로운 공통점을 발견한다. 과거 민주주의는 파시즘이나 공산주의, 군부의 독재 같은 노골적인 방식으로 무너졌지만, 냉전이 끝난 후의 양상은 좀 달라졌다. 저자들은 “냉전이 끝나고 민주주의의 붕괴는 대부분 군인이 아니라 선출된 지도자의 손에서 이뤄졌다”고 말한다. 즉 오늘날 민주주의는 “투표장”에서 무너지고 있다는 것.


저자들에 따르면 이런 경우 쿠데타나 게엄령 선포, 혹은 헌정 질서의 중단과 같은 “경계를 넘어서는” 명백한 순간이 없기 때문에 사회의 비상벨이 울리지 않는다. 화재가 일어났는데 경보기가 울리지 않는다면 오히려 더 위험하다. 독재를 비판하는 사람들은 과장이나 거짓말을 한다는 오해를 받는데, 예컨대 지난 윤석렬의 친위쿠테타 시도 이전에 여러 야당 의원들이 계엄과 관련된 의혹을 제기했을 때, 여당은 물론 언론으로부터도 뭇매를 맞았던 예가 있다.


그러면 어떻게 이런 상황을 방지할 수 있을까? 민주주의의 원리 가운데서 저자들은 ‘정당’을 일종의 ‘문지기’라고 부른다. 미국의 민주주의 설계자들은 처음에는 선거인단 제도를 통해서 포퓰리스트, 혹은 선동가들이 권력을 잡지 못하도록 방지하려고 했다고 한다. 국민들이 투표를 하긴 하지만 그 결과값으로 직접 대통령을 선출하는 게 아니라, 각 주의 명망가들로 이루어진 대의원들이 모여 (실제 투표 결과와 상관없이!) 대통령이 될 만한 사람을 선택하는 제도였다는 것.


그러나 이런 제도는 오래 가지 못했는데, 우선은 선거인단이 투표가 끝난 후에, 그러니까 후보자가 결정된 다음에야 활동을 시작했고, 각 주에서 정당 지지자들을 선거인단으로 선정하기 시작하면서부터였다. 그러면서 중요해진 것이 앞서 말했던 ‘정당’이다. 정당은 무자격자들, 독재의 기미가 있는 이들을 걸러서 정치무대에 오르지 못하도록 막아야 했다. 그러나 문제는 어느 순간 정당이 그 역할을 내팽개쳤다는 것.


트럼프는 그 부작용 중 하나이지 최종적인 결과물이나 결정적인 시작이 아니다. 저자들은 이미 80년대 뉴트 깅리치로 대표되는 전투적 정치인들이, 상대 정당을 정치적 파트너가 아닌 무찔러야 할 적으로 규정하면서부터 문제가 심각해지기 시작했다고 말한다. “불법만 아니면 뭐든 괜찮다”는 태도는 정치를 전쟁의 장으로 만들었고, 이는 클린턴, 부시, 오바마 정부를 지나면서 점점 강화되었다. 어떻게 보면 트럼프라는 괴상한 독재자의 등장은 당연한 결과일 지도 모른다.





책을 읽으면서 당연히 우리나라의 정치상황이 오버랩된다. 우리 또한 어디 극우 사이버 래카 채널 같은 데서나 할 말을 공당의 대표와 최고위원이라는 작자들의 입을 통해서 들을 수 있고, 저주와 혐오로 가득한 발언을 아무 양심의 가책 없이 내뱉는 3류 정치인들이 잔뜩 포진해 있다. 정치의 도의와 낭만은 사라진 지 오래고, 이제는 상대를 문자 그대로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는 괴물들이 여의도와 광화문 앞 이곳저곳을 휘젓는다.


여의도 외곽에선 그런 괴물들을 지원하는 극단적 성향의 유튜버들이 더 센 막말을 늘어놓고, 심지어 일부 교회의 목사라는 작자들까지 여기에 올라타 사탄의 노래에 맞춰 음란한 춤을 추는 지경이다. 무지몽매한 신도들은 그런 소경이 인도하는 절벽으로 열심히 함께 두 팔을 벌려 달려가고 있고.


사실 문제가 심각한 건 굳이 이런 책을 읽지 않아도 충분히 느껴진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쉽게도 저자들은 앞서 읽었던 책처럼 마땅한 대안을 보여주지는 못한다. 적어도 미국의 민주당이 공화당이 하는 것처럼 소수자들을 위한 정책을 포기하고 주류 백인들을 위한 정당으로 선회해서는 안 된다고, 좀 더 보편적인 지향점(최저임금 상승, 보편적 기본소득 같은)을 위한 정치를 하다보면 결국 백인들도 그 혜택 안에 포함되니 타개책을 찾을 수 있지 않겠느냐는 조금은 이상적인 주장을 할 뿐이다.(그러나 그렇게 해도 혜택을 받는 저소득, 저학력층 백인들이 민주당 지지로 드라마틱한 선회를 할 것 같지는 않다)


최근 종종 드는 생각인데, 어쩌면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제도의 유통기한이 끝나감을 목격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공산주의라는 사회적 실험이 냉전의 붕괴로 100년 만에 실패로 마쳤다면, 18세기 말 미국의 독립으로 시작된 현대 민주주의라는 사회적 실험 역시 250년 만에 그 효용이 다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린 이제 (어떤 형태로든) 계급사회 위에 군림하는 독재자들의 통치에 익숙해져야 하는 걸지도.(트럼프 강점기의 세계처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귀여워! ㅣ 물결 총서 1
호규현 외 지음 / 인공위성82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제목도 그렇고 책의 판형도 딱 손바닥만 한 것이 귀엽다. 하얀 바탕에 “귀여워”라는 제목만 딱 앉혀 놓은 표지도 담대하지만, 제목의 'ㅇ' 두 개마다 귀여운 얼굴이 들어 있다는 점도 재미있다. 확실히 눈길을 끄는 표지. 도대체 이 책은 무슨 내용일까 궁금해 진다.


책은 “귀여움”이란 무엇인지에 관한 미학적, 역사적, 사회학적 연구를 담고 있다. 귀여운 표지와 달리 꽤 묵직한 방향이다. 여섯 명의 저자들의 글을 담고 있는데, 귀여움이라는 주제는 공통적으로 갖되 각 저자마다 약간의 집중점이 다르다.





물론 여러 저자가 쓴 글이니 만큼, 각 글마다의 수준이나 방향성이 제각각이다. 개인적으로는 귀여움에 관한 미학적 분석을 시도한 첫 번째 글과 역사적 맥락을 추적한 두 번째 글이 가장 인상적이다.


우리가 어떤 것을 귀엽다고 느끼는지에 관한 흥미로운 제안 중 하나가 ‘킨첸슈마’라는 개념이다. 이는 몸에 비해 큰 머리, 통통한 체형과 뺨, 큰 눈 같은 신체적 특징을 가리키는데, 마치 아기를 떠올리게 만드는 외형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보는 사람에게 아이를 보호하고 돌보고자 하는 행동양식을 유발하게 된다는 것.


정신영의 두 번째 글에서는 이 개념의 역사적 근원과 발전 과정을 추적해 간다. 귀여움 담론의 진원지는 일본인데, 70년대부터 대중문화 속 아이돌 가수나 만화 주인공들에게 특유의 귀엽고 순진하며 사랑스러움을 표방하는 존재들이 범람했다. “가와이이”라는 표현은 이들에 대한 찬사이자 감탄사일 뿐 아니라 서로에 대한 인사가 되었다.


그런데 저자는 여기서 또 다른 흥미로운 포인트를 읽어낸다. 가와이이라는 개념에는 상대가 명백한 약자라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것. 1988년 중병을 앓던 일왕 히로히토에 관한 보도가 나오자 이부 10대 소녀들이 그를 ‘가와이이 할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했다는 데서 이 점이 잘 드러난다. 타자를 귀여워할 수 있는 필수조건은 이쪽의 현저한 힘의 우위가 전제되었다는 것.


그러면서 일본 사회에서 이 개념이 유행하게 된 것은, 앞서 첫 번째 글의 내용과 연결된다. 생물학적 기준에서 귀여움은 더 힘 센 존재로부터 부호를 받기 위한 절심함의 표출인데, 패전 후 일본은 그런 미숙함의 표출을 통해 절대 강자인 승전국 미국 앞에서 자진해 약자로 포지셔닝을 했다는 것. 역사적 맥락의 해석으로는 흥미로운데, 과연 정말로 일본인 개개인들이 그런 이유로 귀여움에 빠져들었을까 하는 의심은 든다.





귀여움을 여성주의(3장)나 퀴어적 관점(5장)과 연결해서 설명하려고 하는 다른 글들은 조금은 억지스럽다는 느낌을 준다. 특유의 목적의식이 지나치게 앞서서 주변의 주제들을 줄 세우는 모습. 귀여움을 장애라는 관점에서 접근하는 6장은 내용과는 별개로 귀여움과의 연관성이 조금은 약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전 세계 수 억 명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귀여워하는 동물이 있다. 바로 고양이다. 하루에도 시시때때로 추천되는 짧은 고양이 영상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시간을 써버릴 때가 많다. 이건 무해한 취미가 아닌가 하며 애써 변명하지만, 아무튼 내 시간을 잡아먹는 건 사실이다.(또 각종 고양이 굿즈에 들어간 돈을 생각하면...)


우리가 무엇인가를 귀여워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무슨 이유인지 한 번쯤 고민해 보는 것도 재미있는 작업이다. 이런 게 인문학의 매력.


댓글(0)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브레이크넥 - 변호사의 나라 미국과 엔지니어의 나라 중국은 어떻게 미래를 설계하는가
댄 왕 지음, 우진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2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때는 군사력을 두고 대립을 해왔다. 그리고 어느 순간 경제전쟁을 벌이고 있다. 미국과 중국 이야기다. 생각해 보면 중국이 미국과 맞서는 수준으로 올라왔다는 건 기대하기 어려운 빠른 발전이었다. 미국이 두 차레의 세계대전에 참여하면서 엄청난 경제성장을 거두었을 무렵, 중국은 국공 내전과 항일전쟁으로 전 국토가 황폐화되었었다. 게다가 최종적인 승리자였던 마오쩌둥의 잇따른 자살골로 중국 경제는 그대로 추락하는 듯했다.


하지만 오늘날 중국은 어느덧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빠른 발전을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르며 찬탄하지만, 중국의 발전 또한 그 못지않은 놀라운 속도다. 물론 여기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을 텐데, 이 책의 저자는 그 중 중국의 지도층이 ‘공학자들’로 구성되어 왔다는 점에 주목한다.


흥미롭게도 중국의 지도부는 거의 전원이 공학자들이다. 중국 경제 발전의 기점이 되었던 덩샤오핑은 8, 90년대 공학자와 기술자들을 정부의 최고위층에 대거 입성시켰다. 그 결과 2002년에는 중국 공산당 최고 의결기관인 중앙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9명 전원이 공대 출신일 정도였다. 후진타오 전 주석은 칭화대 공대를 졸업하고, 10년 간 수력발전소 건설 현장에서 일했다. 다른 지도급 인물들도 다양한 기술대나 공대를 졸업하고 실제 공장 등의 현장에서 근무한 이력이 있다. 현 주석인 시진핑 역시 칭화대에서 화학공학을 전공했다.






국가 운영의 핵심에 위치한 사람들이 모두 공학자라는 것은 자연히 국가 운영에도 그에 따른 스타일이 묻어나오기 마련이다. 사실 한 나라의 경제발전은 시장경제가 아니라 이른바 “개발 독재”에서 출발한다는 건 역사적으로 이미 거의 증명된 사실이다. 중국의 공학 전공 지도자들은 마치 도시 경영 시뮬레이션 게임을 하듯, 거침없이 설계하고, 건설한다. 그 결과가 미국의 2배에 이르는 고속도로와 일본의 20배에 달하는 고속철도, 전 세계 다른 모든 국가를 합친 것과 맞먹는 규모의 태양광, 풍력발전 설비, 그리고 전 세계 제품의 거의 절반을 생산할 수 있는 생산력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민주적인 합의 같은 것은 그리 고려 대상이 아니었고, 수많은 민중들이 희생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지난 팬데믹 사태 당시의 제로 코로나 정책이었다. 심지어 한 도시(라고 하지만 우리 도시를 생각하면 안 된다. 최소 천 만 명 이상이 거주하는 커다란 지역이다) 전체를 봉쇄하는 명령을 내리기도 한다. 또 다른 사례로는 ‘한 자녀 갖기 운동’이 있다. 운동이라고는 하지만 강제 불임수술 같은 인권유린적인 조치까지 있었다. 이 정도의 대규모의 사회적 실험은 공학자 마인드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는 것.


반면 미국은 법률가 중심의 국가가 되어버렸다. 소송의 나라라고 불리는 미국이기도 한 만큼, 모든 것을 법정으로 끌고 가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이 과정에서 대규모 사업은 끊임없는 소송전으로 기약 없이 지체되고, 나중에는 아예 그런 사업을 할 엄두도 내지 못하게 만든다. 대규모 공장들도 사라져버렸고, 트럼프가 갖은 협박과 위협을 하며 동맹국들을 쥐어짜더라도, 미국 사회의 분위기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는 한, 이런 상황은 쉽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저자는 오늘날 미국이 절차적 정당성애 매여서 진취적 기상을 잃어버렸다고 진단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미국에 희망이 없는 건 아닌데, 미국 역시 공학의 전통과 유산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 최초의 마천루도,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긴 현수교도, 복잡한 지하철 노선과 대륙을 횡단하는 철도도 모두 미국에 있었다. 물론 이미 법조인들에게 지배되고 있는 미국 정계가 쉽게 달라질 것 같지는 않지만.





저자는 미국과 중국 모두 자신들의 약점에 발목이 잡혔다고 말한다. 공학 중심의 나라는 통제와 간섭에 대한 집착으로 사회의 창의성을 억누를 수 있다. 체제를 비판하는 농담을 허용하지 않는 나라에서 훌륭한 문화적 결과물이 나오기는 쉽지 않다. 법률가 중심의 나라 역시 마찬가지다. 과정의 정당성에 집착하면서 반대를 위한 반대만 남발하는 지리한 정치적 갈등이 사회의 발전을 지체시키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는 어느 위치에 서 있을까? 민주화 이후 대통령들만 보면, 철학(김영삼), 경영학(김대중, 이명박), 법학(노무현, 문재인, 윤석열, 이재명) 등 인문계열, 특히 그 중에서도 법학이 주가 되고 있고, 전자공학(박근혜)을 전공한 경우가 한 명 있다. 국회의원 300명 가운데 법학 전공자나 법조인 출신이 66명으로 20%가 약간 넘는다. 이렇게 보면 우리나라는 확실히 미국 모델을 따라가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어느 쪽 하나가 절대적인 정답은 아니다. 경제발전과 사회적 통합은 함께 가야 할 목표들이다. 문제는 국가운영의 중요한 직책을 맡게 된 이들이 자기 관점에서 벗어나는 발상을 할 수 있느냐 일 텐데, 이게 쉽지는 않아 보인다. 진보계열에서는 ‘당위’에 지나치게 집착하며 현실을 도외시하는 경우가 자주 보이고, 보수계열에서는 고인 물에서 나는 썩은 내를 좀처럼 해결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세계 경제가 출렁이는 시대다. 단순이 이념과 관성에 충실하게 살다간 우리부터 얻어맞고 몰락할 지도 모른다. 틀에 갇히지 않으면서도, 장기적인 상황과 단기적인 대처 사이에서 현명한 결론을 찾아갈 수 있는 정치 지도자들이 우리에겐 있을까. 이건 단지 대통령 한 명을 잘 뽑는다고 되는 게 아니다. 쉽진 않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
 
 
 
365일 교과 하브루타 - 질문 중심 수업으로 바꾼 지아쌤 10년의 기록
김지아 지음 / 비비투(VIVI2) / 2026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하브루타란 고대 유대인들의 독특한 교육/학습 방식을 말한다. 토라를 공부할 때 교실에 앉은 학습자에게 교수자가 일방적으로 지식을 전달하는 방식이 아니라, 학습자가 짝을 이루어 서로에게 질문하고 대답하는 과정에서 해당 내용을 더 깊게 이해하고, 나아가 종종 굉장히 창의적인 방식의 해석까지 낳는 교육방식이다. 탈무드니 학가다니 하는 유대 고전들은 은근 이런 형태의 교육방식을 권장하는 구성을 갖고 있기도 하다.


애초에 랍비들의 가르침이란, 어느 하나의 전통을 오랫동안 물고빠는 식이 아니라, 수많은 랍비들이 앞선 의견들에 이의를 제기하고, 자신의 새로운 해석을 덧붙이고 하는 거대한 해석사적 전통의 모음이다. 그래서 랍비들 사이의 의견도 꽤 차이가 나는 경우가 있다. 이는 기독교 내 정통주의자들처럼, 우리 선생님의 의견을 절대로 바꾸면 안 된다는 식의 태도와는 큰 차이가 있기도 하다.





그런데 요새는 이게 질문, 창의력 같은 키워드가 주목받으면서 종교적 맥락에서 벗어나 일반적인 학습전술로도 수용되고 있는 것 같다. 사실 교실에서 질문이 사라졌다는 지적은 이미 오래 전 다양한 교육학자들에게서 나왔던 문제제기다. 『페다고지』로 유명한 브라질의 교육학자 파울로 프레이리의 책들을 읽으면서도 자주 들었던 질문이고, 미국에서는 마일스 호튼 같은 인물이 비슷한 질문을 제기하고, 나름의 교육윤동을 진행하기도 했다. 확실히 질문은 교육에서 굉장히 중요한 포인트다.


이 책은 초등학교 교실에서 실제 하브루타 방식의 교육활동을 진행해 온 저자가 자신의 경험을 차근차근 정리해 나눈 책이다. 경험 정리 중심이다 보니, 어쩌면 가장 기본적인 하브루타의 정의와 구체적인 방식에 대한 설명이 생략된 느낌이기도 하다. 물론 본문을 읽다보면 자연스럽게 감을 잡게 되겠지만. 아마도 이 주제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과 오랫동안 대화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그건 설명이 아니라 보여주는 게 최선이라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서두에 간략하게 설명을 넣어두었으면 좋았을 것 같다.


책은 이론보다는 실제에 집중한다. 어떻게 이런 방식의 수업을 시작하게 되었는지, 실제로 진행했을 때 아이들에게서 어떤 반응이 일어나는지, 예상되는 어려움과 그 대처법이라든가, 지역 교사 공동체 안에서 어떻게 이 방식을 연구하는 지 등등. 우선은 초등교사인 독자에게 관심이 갈 만한 내용들이 주가 되지만, 그 사이에서 얻을 수 있는 내용도 분명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비단 교실만이 아니라 교회에서도 질문이 좀 더 늘어나야 한다고 본다. 질문이 없는 교회는 딱딱하게 굳은 돌처럼 돼서 언젠가 깨지고 말 테니까. 적어도 교실에서는 (물론 일부라고 하겠지만) 나름의 고민과 실험이 진작 시작되었다. 교회도 좀 더 분발하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l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