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은 왜 전쟁을 멈추지 못하는가 - 트럼프와 1조 달러 전쟁 기계의 야망
윌리엄 D. 하텅.벤 프리먼 지음, 백우진 옮김 / 부키 / 202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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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시점 지구에서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두 개의 나라는 미국과 러시아다. 그리고 불행하게도 이 두 나라의 현재 최고지도자는 모두 전범이다. 푸틴은 벌써 5년째 지속되고 있는 우크라이나 침략 전쟁을 일으킨 최악의 독재자이고, 트럼프도 그 못지않게 독재적 성격을 드러내면서 한 달 넘게 이어지고 있는 이란 전쟁을 시작한 범인이다.


그런데 사실, 이런 경향은 비단 트럼프가 집권하고 나서 새롭게 시작된 건 아니다. 전임 대통령인 바이든은 무기 판매를 대외 정책의 중심으로 가져왔고, 가자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격을 뒷받침할 무기를 꾸준히 공급했다. 뿐만 아니라 중동에 미군을 꾸준하게 늘려왔다. 심지어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 오바마 역시 가공할 만한 액수의 무기를 팔아치웠고, 이른바 드론 대통령(드론으로 어떤 목표물을 지정해 제거할 지를 결정하는)으로서의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겼다는 증언도 있다.


요컨대 트럼프라는 괴물이 두드러지긴 하지만, 이미 미국은 어느 정당, 어느 인물이 대통령이 되든 전쟁의 광기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나라가 되었다는 말이다. 이 책은 그 주된 원인을 군산복합체(책에서는 “전쟁 기계”라고 표현한다)에서 찾는다. 미국이 군비합중국이 되었다고도 말한다.





오늘날 미국 국방예산의 절반 이상은 군대에 직접 사용되는 대신 민간기업으로 흘러간다. 방산기업의 CEO는 연간 2천 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이는데 반해, 적지 않은 군인 가족들은 푸드뱅크에 의존해 살아가고 있는 이유다. 세금이 이들 방산기업으로 대가 흘러가는 동안, 다른 분야에 대한 정부 지출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뿐만 아니라 전쟁을 위해 개발된 도구들은 자국민 통제에도 사용되고 있는 중이다.


방산기업들의 이런 막대한 수입은 엄청난 규모의 로비를 통해 유지되고 확장된다. 의원 1인당 2명의 로비스트들이 방산기업을 위해 고용되어 활동하고 있는 가운데, 의원 한 명당 27만 5천 달러 이상을 매년 로비자금으로 쓰고 있다. 그들이 정부로부터 받는 세비(와 각종 유지비)가 20만 달러 안팎인 것을 고려하면, 로비를 통해 얻는 돈이 더 많은 셈이다. 당연히 이들은 물주가 시키는 대로 움직이게 된다.


오늘날 방산기업들은 이른바 싱크탱크들에도 막대한 후원금을 보내고, 다양한 대학들과의 연계를 통해 학계의 지지를 이끌어 내고, 영화와 게임 같은 엔터테인먼트업계와도 손을 잡고 좀 더 부드러운 세뇌도 시도하고 있다. 말 그대로 전방위적인 활동이다.





그렇게 미국은 전쟁기계가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이제는 멈출 수가 없게 된 것 같기도 하다. 그동안에도 그래왔고, 앞으로도 미국은 지속적으로 다양한 분쟁에 개입하고, 종종 일으키기도 할 것이다. 어떤 인격자가 대통령이 되든지, 이 구조를 깨뜨리는 건 쉽지 않아 보인다.


책 말미에 저자들은 새로운 평화운동으로 전쟁기계화 된 정부와 싸워야 한다고 말한다. 이 운동의 중심은 참전 용사들, 핵실험장 인근의 피해 주민들, 무기 개발과 생산 과정에서 피해를 입은 사람들, 그리고 국방부가 정부의 재량 예산의 절반 이상을 가져가는 상황에서 정부의 지원과 투자가 절실히 필요한 지역의 주민들이고. 하지만 이게 과연 트럼프를 두 번이나(아니 그 중 적지 않은 수는 세 번이나!) 대통령으로 뽑아주는 나라에서 어느 정도나 힘을 발휘할 수 있을 지는 솔직히 조금은 회의적이다.


조금 다른 이야기일 수 있으나, 근래의 혼란스러운 국제 정세 가운데서, 우리나라는 무기수출로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여론 역시 거의 전적으로 이런 현실을 환영하는 상황. 그런데 정말로 그래도 되는 걸까? 전 세계에 무기를 파는 것을 기뻐하는 우리는, 전쟁기계화의 첫 걸음을 내딛고 있는 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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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수주의란 무엇인가 - 반프랑스 혁명에서 현대 일본까지
우노 시게키 지음, 류애림 옮김 / 연암서가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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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내가 운영하는 유튜브 채널에, “딱 좌파처럼 생겼다”면서 빈정대는 악플이 달린 적이 있다. 책소개를 하면서 윤석렬의 불법 계엄에 대한 지극히 일반적인 일반적인 비판을 넌시히 돌려 하는 내용이 있었는데, 거기에 긁혔나 보다. 안 그래도 무속정권 추종자들답게 관상으로 세상을 보느냐고 일침을 놓고 차단해 버렸다. 은근 이 정도의 수준인 사람들이 넘치는 곳이 온라인이라는 무대다.


그런데 사실 나는 보수적인 편에 가깝다. 작성된 지 2천 년이 훨씬 넘는 글에 인생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보수적인 게 아니라면 누가 보수적이란 말인가. 문제는 우리나라의 자칭 “보수 정치인”들이 내뱉는 언사가 전혀 보수적이지 못하다는 데 있는 것이고, 그러니 그런 종족에게 미약하나마 내 한 표를 절대로 줄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민주당 계열 정당에 소속된 사람들이 늘 옳은 말, 좋은 말만 한다고 보지도 않는다.)





보수라는 단어가 한국의 정치 상황에서는 너무나 많이 오염되어 있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그런데 이 책을 보니, 그게 우리만의 상황은 아닌가 보다. 저자는 전 세계적으로 이 보수주의라는 것이 그 정확한 함의를 잃고, 막연한 인상에 의존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리고 그 주된 원인은 이른바 진보주의에 있다.


애초에 보수주의는 자생적인 사상이 아니라 진보주의에 반대하는 맥락에서 튀어나온 (의존적) 사상이다. 그런데 최근 이 진보주의가 길을 잃고 태생적으로 추상적이고 모호한 이념 중심의 사상답게, 현실 세계에 긍정적인 변혁을 일으키는데 실패했다. 또한 그런 변화를 강력하게 추진하는 과정에서 잃어버리게 된 것들(그 중에는 좋은 전통도 포함된다)도 많고. 그렇게 진보주의가 사상적으로 약화되자 보수주의 역시 함께 그 성격이 희미해지고 있다는 것이 저자의 분석이다.


사실 보수주의라고 해도 그 형태가 고정되었던 것은 아니다. 저자는 영국의 사상가 에드먼드 버크에게서 시작된 “보수주의”가 시대적 상황에 따라, 반혁명(프랑스혁명), 반사회주의, 반큰정부라는 형태로 그 내용이 끊임없이 변화해 왔음을 역사적 과정에 대한 추적을 통해 보여준다. 이 흐름 속에서 일관되게 남아있는 것은 개인의 자유에 대한 강조다. 그리고 이건 오늘날 미국의 새로운 보수주의 주류가 된 네오콘의 이념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이런 분화와 분석은 역시나 앞에서 말한 진보주의의 몰락과 함께 점차 투명해지고 있는 중이다. 이제는 보수나 진보, 어느 한쪽만 일방적으로 따라가야 한다고 진지하게 주장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상대적으로 가치의 중심점을 어느 쪽에 두는가의 차이만 있을 뿐, 양측 모두 결국 비슷한 것들을 주장하고 있으니까. 결론부에서 저자는, 이런 상황의 변화 속에서 보수주의가 계속 살아남기 위해서는 개방성과 유동성을 아울러 갖춰야 할 것이라고 전망한다.





이런 내용을 보면 우리나라의 소위 보수 정당, 혹은 보수 정치인들은 (그리고 자기들이 무슨 ‘보수의 자존심’이라는 망상에 빠져 있는 일부 지역의 유권자들은) 애초에 보수가 뭔지 1도 모르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인습에 박혀서 온갖 부패하고 무능력한(최소 능력이 검증되지도 않은) 정치인들을 거수기처럼 뽑아 국회로 밀어 넣는 건 공동체에 대한 범죄에 가까워 보인다.


이건 이 책의 저자의 나라이기도 한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저자는 마루야마 마사오라는 학자의 말을 인용하면서 “보수주의 없는 강한 ‘보수’ 세력이라는 역설”이라는 표현을 가지고 온다. 이거야 말로 우리의 보수를 설명하는 촌철살인격 어구다. 보수주의 없는 강한 보수. 


현실적으로 우리의 “보수”란, 정관계에 잡초처럼 퍼져서 온갖 부패와 협잡을 일삼으며 공동체의 양분을 뺏어먹다가, 마침내는 친위쿠데타까지 일으키려다 실패하고 몰락 중인 부패공동체다. 애초에 보수란 무엇인가를 지킨다는 의미이지만, 그들이 말하는 보수에서 그 지킴의 대상은 자신들의(그리고 자신의 지지자들의) 이권일 뿐인 경우가 많다.


저자가 말하는 새로운 보수가 과연 우리나라에도 나올 수 있을까? 그리고 그때가 되면 나도 그쪽에 표를 주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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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자부심 - 상실감, 수치심 그리고 새로운 우파의 탄생
앨리 러셀 혹실드 지음, 이종민 옮김 / 어크로스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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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적으로 극우라는 진영에 속한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늘어나고 있을 뿐 아니라, 점점 과격하게 자신들의 주장을 강요하고 있다. 그리고 그 대표 주자는 역시 미국의 이른바 MAGA족들이다. 진실의 틈바구니에서 발견되는 작은 모호함을 음모론으로 부풀리기를 좋아하는 이들은 마치 광신도처럼 교주의 지시에 따라 우루루 몰려다니며 파괴적인 행동으로 주변을 위협한다. 미국에서는 트럼프가 선거에서 패배하자 부정선거를 주장하는 폭도들이 국회의사당에 난입한 사건이 있었고, 우리나라에서도 비슷한 음모론 추종자들이 내란 우두머리의 구속을 계기로 법원을 습격하는 난동을 벌이기도 했으니 남의 일만은 아니다.


이 책은 어떻게 이 극우적 사고에 물든 집단이 미국의 새로운 주류(트럼프가 두 번이나 대통령에 당선된 걸 보면, 이들 MAGA족은 어엿한 주류가 되었다고 보는 게 맞을 듯하다)가 되었는지 그 연유를 파악해 나가는 책이다. 저자는 KY-5라는 약칭으로 불리는 켄터키주 제5 연방하원선거구를 중심으로, 쇠락한 공업지대에 남아있는 다양한 인물들을 인터뷰하면서 하나의 큰 모자이크를 만들어 간다.





저자가 분석한 핵심적인 요인은 자부심과 수치심이라는, 다분히 감정적인 요소들이었다. 지금은 산업구조의 변화로 퇴락한 광산 지역인 KY-5에는, 한때 석탄산업이 호황이었을 시기에는 좋은 보수를 받으며 가족을 부양하며 자랑스럽게 생활하던 이들이 살고 있었다. 그러나 지역 경제가 쇠퇴하면서 어느새 그들은 ‘가난한 시골에 사는 백인 무지렁이’ 같은 외부의 시선을 받게 되었다. 이것이 그들이 갖고 있는 수치심이다.


트럼프를 내세운 MAGA족은 바로 이런 수치심을 자극한다. 그들이 그렇게 된 것은 이민자 때문이고, 흑인들과 성소수자들 문제에만 관심이 있는 민주당의 엘리트 정치인 때문이라는 선동은 생각보다 쉽게 먹혀 들어갔다(민주당의 주류 정치인들이 실제로 정체성 정치에 함몰되어서 시야가 좁아진 것도 사실이긴 했다). 여기에 특유의 “남성다움”을 자랑하는 허세 비슷한 것까지 더해지며, 심지어 나치를 자처하는 머저리들도 나타났다.


그런데 모두가 그런 식의 극단적인 사고를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연히 그게 말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지만, 문제는 그들 역시 트럼프와 같은 ‘자신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주는 강력한 지도자’(물론 실제로 뭔가를 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른바 외부의 나쁜 놈을 패주기 위해서라면, 덜 윤리적이고, 때로 나쁜 짓도 하지만 그래도 우리의 나쁜 놈(트럼프?)이 나서주기를 응원한다는 심리다. 물론 그 배경에도 수치심이 작용하는 것은 같았고.





물론 사람은 이성적인 판단만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감정에 좌우된 결정을 할 때도 의외로 많다. 하지만 이런 면이 민주주의의 최대 약점이기도 한 ‘선거’와 결합되면 종종 파괴적인 결과를 낳기도 한다. 트럼프 같은 인사가 두 번이나 대통령에 당선되는 상황은 민주주의의 자멸, 혹은 근본적인 한계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하다. 후쿠야마 이후로 민주주의가 마치 역사의 최종적인 결론인 것처럼 착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단지 민주주의의 유통기한이 아직 남아있을 뿐이었던 것일 지도 모른다.


수치심이라는 단어로 범주화를 했지만, 결국 문제의 핵심에는 경제가 있었다. 과거의 영광을 되새김질 하면서 현재의 경제적 몰락에 절망하는 이들이 MAGA족의 핵심이었으니까. 전 세계적으로 경제성장률이 둔화되고 있는 이즈음 곳곳에서 극우적 움직임이 더 강하게 나타날 것이 불을 보듯 뻔해 보인다. 위기다.


한 편으로, 이들은 자신들의 수치심을 감춰줄 독재자를 선택했지만, 동시에 자신들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수치심은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온갖 음모론을 만들어 확산시키고, 최소한의 상식조차 없는 막무가내 주장을 (종종 폭력을 동원해 가며) 반복하는 모습을 보면, 도덕과 윤리라는 건(심지어 합리적 판단도) 모든 사람에게 기대할 수 있는 무엇이 아닐 지도 모르겠다는 비관적인 생각도 든다.


책은 미국의 이야기지만, 결국 우리의 이야기와도 연결되는 지점이 분명 있다. 미국은 실패한 이 문제를, 우리는 해결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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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우 유튜브에서 아들을 구출해 왔다 교양 100그램 8
권정민 지음 / 창비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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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극우 유튜브 채널들이 온갖 문제를 일으키는 시대다. (어딘가 극좌 유튜브 같은 것도 분명 있긴 할 텐데, 이쪽은 워낙에 영향력이 미미한 것 같다.) 극단적인 민족주의, 모든 문제를 외부의 적에게 돌리고, 이 과정에서 폭력적인 수단을 동원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게(근데 또 대개 선동하는 놈들은 늘 뒤로 빠지고 얼빠진 추종자들만 앞으로 나서다가 처벌을 받는다) 극우의 특징이다.


최근에는 유튜브라는 도구까지 이들의 손에 쥐어지면서, 더욱 그 극단적인 사상을 퍼뜨리기 쉬워졌다. 그 실제 방법이나 주제도 다양한데, 대놓고 정치적인 이슈를 허위와 음모론을 섞어 퍼뜨리는 계열이 있는가 하면, 사회적인 문제를 설명하면서 교묘하게 논점을 비틀어 왜곡된 선동을 하는 쪽도 있다.


문제는 이런 영상물들이 점점 낮은 연령대까지, 그것도 깊숙이 퍼져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이른바 일베나 펨코 같은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중학생, 심지어 초등학생들까지도 드글댄다. 그들은 범람하는 혐오 논리를 배우고, 다시 온라인상에서, 또는 끼리끼리 조롱을 복습해 나가고 있다.





이 책은 어느 날 중학생인 아들이 어디선가 듣고 온 극우 사상을 내뱉는 것을 보고 놀란 엄마가, 아들을 그 사상으로부터 끄집어내기 위해 했던 노력을 담았다. 다만 그 엄마는 보통의 평범한 직장인은 아니었고, 교대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였다.


사실 무슨 특별한 기술이나 방법이 있는 건 아니다. 극우적 언사를 내뱉는 아들에게 화를 내기 보다는, 차분히 문제에 대해 함께 고민하고, 질문과 응답으로 이어지는 토론을 하면서 점차 스스로 그것이 잘못된 사상인지를 깨닫게 해야 한다는 내용은 오히려 지극히 정론적이다. 다만 교대 교수가 아닌 보통의 부모들이 어느 정도로 할 수 있을까는 좀 더 고민해 봐야할 부분이고.





책 초반 저자는 이 세상의 문제들이 흑과 백으로 단순하게 나눌 수 없으며, 오히려 그라데이션처럼 너른 회색지대가 있다고 말한다. 다만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서는 어른들이 어느 정도 선을 그어줄 필요가 있다고 보는데, 동시에 이때에도 흑과 백의 영역이 여전히 존재한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극우”와 나머지 사이의 선을 어디다 그어야 할까? 책은 처음부터 이 문제에 대해서는 딱히 정의하지 않고 들어간다. 그냥 다들 알지 않느냐는 느낌이다. 물론 책에서는 저자가 그 선을 긋는다. 그리고 사람에 따라서 그 선에 동의하지 않는 경우도 있을 것 같다.


예컨대 나는 성소수자에 관한 저자의 관점에 일부만 동의한다. 그들을 차별적으로 대우해서는 안 되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스스로를 여성이라고 주장하는 남성이 발기한 상태로 여성 탈의실을 활보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또, 호르몬제를 맞고 있다는 이유로 여전히 남성과 유사한 체형을 가진 선수가 여성 스포츠 대회의 근력이 중요한 부문에 출전해 경기에서 우승하도록 허용하는 것도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하고(다 실제로 미국에서 일어났던 일들이다). 도대체 성을 개인이 결정할 수 있는 정체성이라고 규정할 수 있는 권위를 누가 독단적으로 주장할 수 있단 말인가. 차별의 반대말이 내키는 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일까.



그리고 저자가 어느 정도 순화시켰을지는 모르겠으나, 책에서 저자의 아들이 제기했던 주장들은 유럽에서도 전향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기도 하다. 대표적으로 여성 징병제라든지. 이 구분과 관련해서 저자가 오히려 조금은 나이브한 이해를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어떤 사람의 성별을 그가 요구하는 대로 불러주도록 가르쳐야 한다는 식의, 정체성 정치 이론에 기반한 교육이 과연 극우적 사고와 얼마나 다른 건지는 추가적인 논의도 필요할 것 같다.


다만 이 책의 집필 목적이 이 부분을 명확하게 설명하는 데 있었던 것은 아니니까. 어린 자녀들이 당장의 나쁜 물이 들지 않도록 하기 위한 노력은 어떤 식으로든 필요한 것도 맞고. 결국 이 부분도 우리에겐 좀 더 많은 대화가 필요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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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은 누구의 땅인가?
개리 버지 지음, 이선숙 옮김 / 새물결플러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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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23년 벌어진 팔레스타인 테러조직(이자 정당이기도 한!) 하마스의 이스라엘 민간인 납치/살해 사건으로 시작된 전쟁은 아직도 끝이 나지 않았다. 명백히 해당 전쟁은 하마스의 만행으로 시작된 것이긴 하지만, 그리고 엄청난 피해를 입으면서도 여전히 자신들의 잘못에 대해 사과한 적이 없긴 하지만, 이스라엘측의 반격/보복의 수준은 선을 넘은 것도 사실이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원칙은 흔히 처벌의 상한을 제한하는 것으로 해석되는데, 현대 이스라엘은 눈에는 생명으로, 이에는 가족의 죽음으로 갚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꼴이다.


그리고 사실 여기에는 좀 더 복잡한 문제가 깔려있는데, 현대 이스라엘의 건국과정에서 불거졌던 여러 사고와 사건들이 그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던 팔레스타인은 패전한 오스만 제국이 해체되면서 영국의 몫으로 떨어진다. 그러나 약 30여 년 후 벌어진 두 번째 세계대전의 과정에서 힘이 빠진 영국은 이 지역에서의 영향력을 잃었고 그 과정에서 유럽 곳곳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오랜 조상의 땅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여기에는 추축국인 나치 독일이 벌인 만행이 큰 영향을 끼쳤다. 사실 그 사건은 비단 독일인들만이 저지른 범죄가 아니었고, 거의 유럽 전역에서 벌어지던 반유대주의가 악마의 탈을 쓰고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것뿐이었다. 이에 도덕적 부채감을 가진 유럽의 열강들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조상의 땅에 나라를 세우겠다는 주장을 반쯤은 포기한 채로 두고 보았다.


그런데 문제는 유대인들이 나라를 세우겠다고 주장한 그 땅이 비어있지 않았다는 데 있다. 비록 (오스만, 영국으로 이어지는 오랜 식민지 상태로) 독립국가가 따로 만들어져 있지는 않았으나, 그 땅에서 조상 대대로 살아온 아랍계 주민들은 졸지에 자신들의 땅을 잃어버리게 된 셈이다.(물론 초기에는 기꺼이 돈을 받고 땅을 파는 주민들도 있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스라엘 정부는 점차 영토 확보를 위한 강경한 정책들을 펴기 시작했고, 그 가운데는 오늘날 하마스가 저질렀던 잔혹한 테러 못지않은, 때로는 그보다 더 큰 규모와 잔혹성을 띤 작전들(테러들)도 부지기수로 일어났다. 그게 이스라엘이 건국된 이후 지금까지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일들이니, 하마스 측의 항변도 영 근거가 없는 건 아니다.





책은 현대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인들에게 저질렀던 수많은 파괴행위들에 관한 내용이 쉴 새 없이 등장한다. 이게 장과 부의 구분 없이 계속 반복되니 책의 구성 면에 있어서는 좀 아쉽다는 느낌이 드는데, 어쩌면 또 그 만큼 이스라엘 측의 만행이 정신없이 이루어졌다는 의미이기도 할 거다.


하지만 책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만행을 고발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문제와 관련된 신학적 검토와 현실적인 대안들, 그리고 현실적이면서 좀 더 평화적인 해결책의 모색까지, 이 주제와 관련된 다양한 내용들을 담아내려고 애섰다.


그 중에서도 역시 가장 인상적인 내용 중 하나는 특정한 (왜곡된) 신학을 바탕으로 현대 이스라엘의 만행을 옹호하는 일부 기독교계 인사들이다. 여기에는 최근까지도 극우 행보로 유명한 여러 인사들의 이름이 그대로 올라와 있다.(하나같이 온갖 스캔들로 물의를 일으켰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팔레스타인은 하나님이 유대인들에게 주신 땅이라는 (오직 구약의 문자적 인용에 기초한) 신학적 주장은, 그 본문의 배경과 역사적 수용방식, 그리고 신약에서 이 주장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단순한 설명이다. 저자는 이 주장에 담겨 있는 신학적인 비판점이 무엇인지를 설명하는데 곱씹어 볼 만한 부분이다. 이와 관련해서는 저자의 또 다른 책 “예수와 땅의 신학”에서 좀 더 집중적으로 설명되는 듯하다.(찾아 봐야겠다)



조만간 이 책을 가지고 천천히 책읽기 영상 시리즈를 만들어 볼 계획이다. 충분히 이야기 할 만한 내용도 많고, 관점 역시 균형잡혀 있는 괜찮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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