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우먼 시리즈의 두 번째 영화. 전작에서 전쟁터 한 가운데를 자유롭게 활보하며 멋진 모습을 보여주었던 원더우먼은, 이번에는 시간이 흘러 영화 제목에도 나와 있는 1984년의 거리를 활보하며 사람들을 구하고 있다. 이번 작품의 중심에는 ‘소원을 이루어주는 돌’이 있었고, 감독은 이를 발판으로 삼아 ‘욕망’과 ‘악’의 문제를 다룬다. 영화의 구성은 좀 아쉬운 데가 많지만, 생각하며 볼 수 있는 장면들이 많다.
C. S. 루이스가 쓴 『고통의 문제』를 보면 왜 이 세상에 고통이 여전히 존재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실려 있다. 그에 따르면 그건 비논리적인 질문이다.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일종의 중립적인 공간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중립성’이 어떤 이들에게는 고통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예를 들면 내리막길을 편하게 내려가는 사람이 있다면 그 반대쪽에서는 오르막길을 걷는 사람이 있을 수밖에 없다. 어떤 사람이 길을 가는 데 장애물들이 모두 알아서 비켜난다면, 그 ‘장애물’에 속한 사람은 약속에 늦을 수밖에 없다. 영화 속에서도 그런 장면이 나온다. 스스로 ‘돌’이 되기를 원했던 맥스 로드(페드로 파스칼)가 백악관으로 가는 길을 막는 모든 차들이 비켜나는데, 당연히 그 안에 있던 사람들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곳에 갈 수 없었을 것이다.
때문에 단순히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것을 이루어주는 것으로 이 세상에서 고통을 완전히 없애는 건 불가능하다. 어떤 사람의 소원은 누군가의 고통을 일으킬 테니까. 이 세상은 수많은 사람들의 수많은 삶이 얽혀있고, 누군가가 로또 1등의 기쁨을 얻으려면 적어도 수십 만 명의 꽝이 나올 수밖에 없다. 모든 사람이 내리막길을 걸으며 다닐 수 있는 세상은 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또 한 가지 영화는 ‘탐욕의 문제’를 비중 있게 다룬다. 영화 초반부터 맥스는 더 멋있게 살고 싶은 사람들의 욕망을 건드리는 텔레비전 광고로 등장한다. 그는 ‘당신이 원하는 것을 가지라’고 부추긴다. 무제한의 욕망을 채우는 것이 행복해지는 유일한 길인 것처럼. 사실 오늘날 상업광고들 전부가 주장하는 바로 그 메시지다.
그러나 영화는 모두가 자신이 바라는 것을 가지려고 할 때 어떤 혼란이 일어날지를 묘사한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그런 세상은 (논리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이 부분을 영화는 재미있게 표현해 내는데, 문제의 ‘돌’이 역사상 여러 번 나타났으며(고대 로마제국 말기나 마야제국 등), 그 ‘돌’이 나타난 사회는 공통적으로 곧 멸망해버렸다는(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는) 설명이다.
‘돌’은 사람의 소원을 들어주는 대신, 그에게 소중한 것을 빼앗아 간다. 영화 속 다이애나의 소원은 전편에서 세상을 떠난 스티브를 다시 만나는 것이었지만, 대신 그녀의 힘이 점점 사라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다시 말하지만 즐거움으로만 가득 차 있는 세상은 없다) 멸망을 피하기 위해서는 소원을 취소해야 한다. 그러나 누구도 취소하지 않았고, 결국 이전의 여러 세계는 붕괴하고 말았다. 끝없는 탐욕은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
90년대 말, 이 영화 속 맥스와 같은 메시지로 제법 이름을 알렸던 인물이 있다. 조엘 오스틴, 기독교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도 어쩌면 한 번쯤 이름을 들어봤을 책, 『긍정의 힘』의 작가다. 그는 자신이 바라는 것을 간절히 원하면 얻을 수 있고, 그것이 마치 기독교의 핵심 메시지인 것처럼 사람들을 속였다.
그의 메시지는 사람들 안에 엎드려 숨어 있는 욕망을 밖으로 꺼내게 만들었다. 그렇게 하는 건 이상한 게 아니라 복을 받기 위한 준비단계인 것처럼 여기게 했고, 이런 번영의 복음은 ‘기독교’라는 신앙을 세상과 차이가 없는 것으로 전락시켰다. 그리고 이 영화 속 ‘돌’이 그렇게 했듯, 교회를 허물어뜨렸다.
문제의 해결책은 소원을 취소하는 것뿐이다. 모든 욕망이 채워져야 하는 것은 아니며, 어떤 욕망은 악할 수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돌이켜야 한다. 하지만 그게 어디 쉽던가. 영화를 보면서 문득 나의 가장 큰 소원은 무엇일까, 그것을 얻었다면 포기하고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을까를 생각해 봤지만, 역시 쉽지 않을 것 같다. 때로 이 욕망이라는 건 우리의 자아에 너무나 끈적끈적하게 달라붙어 있어서, 그것을 떼어내는 게 우리 자신을 죽이는 것처럼 느껴진다.
다시 C. S. 루이스의 작품 중 『천국과 지옥의 이혼』이라는 소설이 있다. 지옥, 혹은 연옥에 있던 영혼들이 천국의 입구에 도착해 새로운 운명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설정으로 시작되는데, 흥미롭게도 그들의 절대 다수는 천국에 이르기 위해 자신의 욕망을 포기하기 원하지 않았기에 차라리 원래 자리(지옥, 연옥)로 돌아가기를 원한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으로 봤던 장면은, 어깨에 붉은 도마뱀을 붙이고 온 어떤 영혼이다. 그는 그 육욕을 상징하는 그 붉은 도마뱀을 떼어내야만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수없이 고민한다. 이제까지 자신을 즐겁게 해 주었던 도마뱀을 어떻게 버리고 간단 말인가. 그러나 오랜 주저를 떨치고 마침내 발톱으로 그를 잡아 놓지 않으려는 도마뱀을 떼어 바닥에 던졌을 때, 그 도마뱀은 크고 아름다운 붉은 말로 변해 앞으로의 길을 훨씬 수월하게 나갈 수 있게 해 주었다는 내용이다.
우리가 욕망에 지배되지 않고 그것을 다스릴 수 있을 때, 우리의 삶에서 재미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충만한 기쁨을 누릴 수 있게 될 것이다. 중요한 건 제어되지 않은 무절제한 욕망의 추구가 아니라, 자제다.
꽤나 흥미롭게 봤던, 그리고 시사점이 많았던 작품. 다만 영화의 구성 자체는 조금 진부하고, 개연성이 부족한 부분도 많으며, 편집에서 잘려나갔는지 이야기의 흐름도 좀 어색하다. 물론 여전히 매력적인 원더우먼의 캐릭터는 살아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