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냉전(冷戰, Cold War).
영화는 냉전의 막바지인 80년대 후반을 배경으로, 소련의 KGB와 미국의 CIA 사이에서 암살자로 활동하게 된 ‘안나’(사샤 루스)를 주인공으로 하는 영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 세가는 둘로 나뉘어 대립하면서 끊임없이 서로를 의심했다.
의심이라는 건 그 의심을 하는 사람을 더 불안하게 만든다. 나 몰래 상대가 무슨 일을 꾸밀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그걸 알아내기 위한 비밀스러운 일을 시도하게 만들고, 양측의 이런 공작들이 엉키면서 서로에 대한 의심과, 불안, 적대감은 점점 더 상승한다.
하지만 상대편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결국 우리 편도 믿을 수 없게 된다. 영화 속에서 반전의 반전이 연속되는 것처럼, 언제 우리 편도 포섭될지 모르니까. 누구도 믿을 수 없는 그 스트레스는 결국 우리를 내부로부터 무너뜨린다. 열전이 무기를 동원해 상대의 신체에 손상을 입혔다면, 냉전은 이런 식으로 사람들의 마음과 영혼을 파괴해 나간다.

색감.
주인공 안나의 위장신분이 프랑스에서 활동하는 소련 출신의 모델이라는 설정도 있어서 그런지, 영화 전반에 걸쳐 색감이 화려하다. 안나는 자신에게 맡겨진 암살임무를 다양한 모습을 수행하는데, 그 때마다 머리의 색깔과 길이는 물론 의상도 매우 다채롭다. 자칫 반복되는 설정으로 지루해질 수 있는 부분을 효과적으로 커버했다. (사실 영화 포스터만 봐도 이 영화의 색감이 짐작된다.)
하지만 시야를 조금 뒤로 빼서 보면, 그렇게 스타일리시하게 표현되고 있는 것은 결국 사람을 죽이는 일이었을 뿐이다. 죽은 이들이 무슨 일을 했는지는 별로 밝혀지지 않고 있으나, 그렇게 아무 데서나 총에 맞아 죽을 만한 사람들이었는가는 의문이 남는다. 심지어 영화 속 인물들 중 누구도 그 일 자체에 대해서 내적 고뇌나 갈등을 보이지 않고 있다.
물론 주인공 안나야 어쩔 수 없이 그 일을 하고 있지만, 영화가 지니고 있는 시선에서는 사람을 죽이는 일이 마치 게임처럼 신나고 멋진 일로 묘사된다. 화려한 모델의 일과 사람을 죽이는 일을 교묘하게 연결시켜놓은 것.

자유.
영화는 한 여성이 처해 있는 위기를 이용해 그녀를 도구화하려는 거대한 세력에 관해 말한다. 자신들의 말을 들으면 언젠가 자유를 줄 것이라고 그들은 말했지만, 안나는 자신에게 일을 맡기는 이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이라는 걸 일찌감치 간파할 정도로 명석했다. 그녀는 스스로 자유를 얻기 위해 계획을 하고, 자신을 이용하는 양 세력에 멋지게 한 방을 먹인다.
안나만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도구로 이용되고 버려진다. 예컨대 자본과 권력은 오늘날 사람을 통제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다. 안나는 자유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동원하며 아등바등 애써야 했는데, 이건 오늘날 우리가 이 통제로부터 벗어나기가 얼마나 힘든지를 떠오르게 한다.
특정한 성별과 인종, 학연과 지연, 동종업계의 카르텔 같은 온갖 장애물까지 우리를 옥죄는 것들은 널려 있다. 이들은 자신들의 힘에 순응하면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거라고 말하겠지만, 그게 거짓이라는 건 인류의 오랜 역사가 증명한다. 자유는 순응이 아니라 잘못된 방식으로 운용되는 힘에 저항함으로써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정신없이 영화의 배경이 되는 시점이 과거로, 현재로 오고가고, 화려한 색감과 빠른 전개로 지루하지 않게 볼 수 있는 액션 영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