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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 인 골드
사이먼 커티스 감독, 헬렌 미렌 외 출연 / 나연미디어 / 2015년 9월
평점 :
절판
일제가 아시아 지역에서 만행을 저지르고 있던 20세기 초중반, 유럽에서는 나치에 의한 각종 악행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구역질나는 행위는 홀로코스트였다. 무려 6백 만 명의 유대인들을 학살한 이 반인륜적 사건은 인류역사의 가장 치욕스러운 한 장이라고 할만 했다.
이 영화의 배경은 20세기 후반이지만, 영화의 주인공 마리아(헬렌 미렌)를 따라 60여 년 전 나치 점령 하의 오스트리아로 들어가게 된다. 사업에 성공해 오스트리아에 성공적으로 정착한 마리아의 가족들은 유대인이었다. 나치는 처음에는 유대인들에게 모욕을 주었고, 그들의 재산을 빼앗고, 나중에는 우리가 잘 아는 그 일을 일으켰다. 이 과정에서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던 많은 미술품들도 강탈당했는데, 우리의 주인공 마리아의 숙모를 그린 클림트의 유명한 작품(“우먼 인 골드”)도 그렇게 빼앗기고 만다.
영화는 남편과 함께 간신히 미국으로 도망칠 수 있었던 마리아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자신의 삼촌이 유산으로 남겨 준 그림들을 되찾기 위해 오스트리아 정부와의 법정 소송에 나서는 이야기다. 무력을 동원한 병합과 그로 인한 피해에 대한 배상이라는 측면에서, 일제에 대한 강제징용, 위안부 배상 이슈를 떠올리게도 한다.
영화를 보며 눈에 들어오는 요소 중 하나는, 나치 점령기 오스트리아에서 유대인들에 대한 조직적인 약탈과 공격이 가능했던 이유 중 하나가 오스트리아인들의 적극적인 협조에 있었다는 점이다. 유대인들에 대한 실제적인 조롱과 린치를 담당한 건 어제까지 이웃으로 살던 오스트리아인들이고, 미국으로의 도피 과정에서 마리아 부부를 적극적으로 신고하고 고발했던 것도 오스트리아인들이었다.(물론 아무 말 없이 그들이 간 곳과 반대쪽을 가리킨 오스트리아인도 있었지만)
폴 존슨의 책에 따르면, 실제로 오스트리아인들은 유대인 학살을 지휘한 지휘관들이기도 했다. 유고슬라비아의 전범 5천 여 명 중 절반이 오스트리아인이었고, 나치 소속의 유대인 말살부대의 1/3이 오스트리아인이었으며, 유대인 학살이 이루어진 수용소 6개 중 4곳이 오스트리아인들에 의해 운영되었고, 희생된 6백 만 명 중 절반이 오스트리아인들에 의해 살해되었다. 영화 속 얄미운 이미지들이 꼭 허구의 이야기만은 아니었던 거다.(아니 실제는 훨씬 더 잔인했을 수도)
이런 전력을 가지고 있던 오스트리아인들인지라, 역사 바로잡기의 일환으로 과거 빼앗긴 예술품들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겠다는 프로그램을 시작한 것은 박수를 받을 만했다. 그러나 영화 속에 그려진 것처럼, 그 프로그램은 다분히 형식적인 요식행위였고, 실제로 자신의 피해를 증명하고 예술품들을 돌려받는 일은 매우 어려웠다. 하물며 그게 ‘오스트리아의 모나리자’라고 불리는 유명한 작품이라면...
우리나라도 일제 강점기 많은 문화재들이 불법적으로 일본으로 반출되었다. 여전히 태반은 돌려받지 못하고 있고, 당연히 일본 정부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있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더 시점을 뒤로 돌리면, 조선 말 미국이니 영국이니 프랑스니 하는 나라들이 강탈해 간 문화재들도 적지 않다. 영화 속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문제의 해결도 결국 사람에서 시작했다. 변호사로서의 개인적 성공을 뒤로하고 승리할 확률이 낮은 문화재 환수 소송에 나섰던 쉔베르크(라이언 레이놀즈), 그리고 나치 활동을 한 아버지에 대한 참회의 마음으로, 랜드와 마리아를 도와주었던 기자 체르닌(다니엘 브륄)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무 연고도 없는 오스트리아에서의 일처리는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사람에게 한 없이 실망하게 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사람들에 대한 신뢰를 거둘 필요까지는 없다. 사람은 집단으로만 규정되는 게 아니고, 개인으로서의 독특성과 독립성도 있으니까. 어떤 조직이나 지역, 성별, 민족에 속해 있다고 해서, 그를 함부로 규정지으려고 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최악의 상황에서도 우리는 종종 희망을 발견하기도 한다.
이런 저런 생각을 많이 하게 만드는 영화. 잔잔하지만 한 번 볼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