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오면서 몇 번 죽을 뻔했다. 그 중 한 번이 영월고등학교에서 근무할 때인 1990년 겨울이다. 88올림픽 해에 운전면허를 따자 바로 차까지 구입했으니 차 운전 2년째 되던 때다. 돌풍처럼 휘몰아친 마이카 붐 탓이다. 돌이켜보면 초보 운전이라 조심 운전을 해야 했는데 그렇지 못했다.

1990년 겨울 그 날 모처럼 가족들을 차에 다 태우고 청령포 쪽으로 운전해 갔다. 춥던 날씨가 이틀간의 화창한 햇살에 많이 누그러진 듯싶었다. 읍내 중심도로로 차를 몰고 나설 때만 해도 도로에 있던 얼음이 모두 녹아 있어서 방심할 만도 했다.

청령포로 가는 도로도 얼음이 다 녹아 있었다. 눈앞의 나지막한 고개를 넘어가느라 편하게 속력을 냈는데 아뿔싸! 고개 너머 도로는 음지였던 탓에 얼음이 녹지 않고 그대로 있던 것이다. 차 사고는 순간이다. 차바퀴들이 접지력을 잃으면서 차가 얼음판 도로를 크게 돌기 시작했다. 빙빙 도는 주변 풍경에 나는 정신이 반쯤 나갔다. 그 때다. 조수석에 앉은 아내가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아아악!”

솔직히, 그 비명을 듣는 순간 나는 속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아이 시끄러워.’

다행히 도로 난간의 나지막한 시멘트 구조물에 차바퀴가 걸리면서 벼랑으로 추락하는 참사를 모면했다. 차는 망가졌지만 가족들은 무사했다. 천운이었다.

 

몇 년 후 춘천의 모 학교로 전근 와서다. 어느 날 동료교사가 여선생들 앞에서 자신의 차 사고 순간을 얘기하는 것을 보았다. 이런 내용이었다.

차가 빗길에 전복되는 순간 내 눈앞에 가족들 얼굴이 하나하나 떠오르더군요.”

모성애가 본능인 여선생들을 감동시킬 의도로 하는 얘기 같았다. 즉각 내가 한 마디 했다.

아니, 나는 그런 순간에 가족들 얼굴이 떠오르기는커녕 옆에 앉은 아내가 지르는 외마디 비명이 시끄럽다는 생각만 들던데.”

여선생들이 내 말에 배꼽을 잡고 웃었다. 글쎄 그 웃음들이 내 말에 동감한 건지, 그냥 재미나 웃은 건지 지금도 알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나는 결코 꾸며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럼 내가 가족 사랑이 남보다 못한 걸까?

절대 그런 것 같지 않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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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새벽 5시를 조금 넘은 시간에 외수형의 추천사를 받았다. 이메일로 받았다. 올 연말 발간예정인 두 번째 단편소설집 ‘K의 고개추천사다. 19727월 어느 날 석사동 허름한 대폿집에서 처음 만났을 때 형 얼굴이 선하게 떠올랐다.

감사합니다고 전화하려다가 참았다. 형이 밤을 새운 뒤 먼동이 트는 새벽녘에야 잠자리에 든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파도처럼 밀려오는 감회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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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 덧없다. 40년 전 무심이 양양고등학교에서 근무할 때 일이다. 분장 업무상 연구과 소속이었는데 연구과장님 고향이 금강산 내() 온정리라 했다. 과 회식 자리에서 무심이 이런 질문을 드렸었다. 한 잔 술에 취기가 올라 그랬다.

과장님 고향이 금강산 온정리라고 제가 알고 있거든요. 저는 한 번도 가보지 못해 궁금한데 정말 금강산이 아름답습니까?”

그러자 과장님이 이렇게 말씀했다.

아무리 경치 좋은 곳이라도 정작 그곳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그걸 잘 모르잖소? 늘 보는 경치이니까. 그런데 내 고향 금강산은 그렇지 않았다니까. 625 동란 중에 부모님과 짐을 꾸려 온정리를 떠나올 때가 가을이었거든. 단풍 들고 낙엽 지고해서 얼마나 주변 경치가 아름다운지글쎄, 총에 맞아 죽은 시신 하나가 개울가에 있는데도 무섭다기보다 주변 아름다운 경치와 어우러져 그 또한 그림의 한 장면처럼 아름답게 보이더라니까? 자네 이런 내 말이 믿어지나? 글쎄 이 이상으로 금강산 경치가 아름답다는 걸 표현 못하겠네그려.”

그러고는 술김에 벌겋게 달아오른 낯으로 휴전선 때문에 가 볼 수 없는 고향 금강산을 눈감고 그리는 모습이었다. 정말 그 정도로 금강산 가을 경치가 아름다울까?

남북 사이의 냉랭한 분위기가 풀려 올가을에는 무심도 금강산에 가 볼 수 있는가 했는데 이미 늦가을이라 틀린 일인 듯싶다. 내년쯤에는 가 볼 수 있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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찔레꽃 2018-11-20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분 말씀만큼 금강산의 아름다움을 절실히 표현한 말도 드물 것 같습니다. 금강산의 가을, 아~ 저도 꼭 한 번 봤으면 좋겠습니다. 무심 선생님과 함께 ^ ^

무심이병욱 2018-11-20 21:06   좋아요 0 | URL
내년 가을에 기회가 되면 연락해서 같이 구경 갑시다

2018-11-20 16: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8-11-20 19: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3층 건물이 분명히 있었다. 전깃불을 휘황찬란하게 켰고 방문객들이 줄을 잇기도 했다. 그런데 보름 만에 다시 찾아갔을 때 그 건물은 신기루처럼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어두운 밤이 대신 그 자리에 있었다.

모델하우스는 도시의 환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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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화백의 동네 그림에는 어김없이 달이 떠 있다. ‘효자동 1988-1’그림에도 달이 떠 있는데 하필 그믐달이다. 초승달과 그믐달은 그 성격이 반대다. 서구에서는 초승달을 new moon, 그믐달을 old moon이라 한다. 즉 그믐달은 낡은 이미지의 달이다. 서 화백의 동네 그림에 그믐달이 떠 있는 것은 그 동네가 낡고 오래된 주택가임을 간접적으로 나타내는 게 아닐까?

그믐달은 새벽에 떠서 아침이 밝아오는 순간 사라지는 달이다. 따라서 이 그림의 시간적 배경을 자정 넘은 새벽녘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하긴 어디서  한 잔 걸친 취객 둘이 비틀거리며 2차 할 숙소를 찾고 있어서 자정은 훨씬 넘었다. 동네 모든 집들이 불 끄고 닫은 광경이며, 하물며 밤늦도록 여는 구멍가게조차 문을 닫았으니 새벽이거나 새벽이 돼가는 시간이다.

새벽은 어두운 밤과 훤하게 밝아오는 아침의 중간지대다. 그렇기에 그림의 주조(主調)를 어둡지도 밝지도 않은 푸른색으로 한 게 아닐까? 또한 푸른색은 수많은 유채색 중 가장 조용한 느낌의 색이므로 새벽시간을 나타내기 적합하다.  사실 푸른색은 슬픈 정서의 뜻일 때가 잦다. 예로써 팝송 ‘LOVE IS BLUE'의 우리 말 번역이 ‘우울한 사랑’이다. 서 화백의 그림 속 동네는 슬픈 정서가 보인다. 보통 ’서민들의 애환(哀歡)’이란 말이 쓰일 때가 많은데 이 그림에서는 서민들의 애(:슬플 애) 쪽에 무게가 실려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보는 다른 이유를 대려한다.

 

그림 제목의 ‘1988’이 무얼 뜻하겠는가. 88 서울 올림픽이 치러진 해를 뜻한다. 서울에서는 국제적 행사 올림픽을 치르느라 떠들썩하지만 그와는 무관하게 먹고 살기 바쁜 지방 어느 도시 어느 동네의 풍경을, 이 그림은 대변한다. 당시 TV에서 올림픽 주요 경기장면들을 밤새 반복해 방영했지만 이 그림 속 동네에서는 어느 한 집도 시청하지 않는다. 전등 끄고서 잠잘 뿐이다.      

그림의 계절은 가을이다. 88서울 올림픽이 치러진 계절이 가을이었기 때문이다. 다른 증거도 댈 수 있다. 그림 왼쪽 하단에 있는 ‘고추 말리는 광주리’가 그것이다. 고추 농사를 지은 이가 화창한 가을 햇볕에 태양초를 만든다고 고추를 광주리에 담아 주름진 슬레이트 지붕 위에 올려놓고는, 밤이 됐는데도 그 사실을 깜빡 잊은 것이다. 이런 장난스런 에피소드가 바로 서 화백의 ‘숨바꼭질’이라고 나는 규정한다. 숨바꼭질은 우리가 가만히 숨죽이고 찾을 때 가능한 짓이다. 우리는 서 화백의 그림에서 숨바꼭질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집 주인이 해가 진 것을 깜빡 잊고 슬레이트 지붕에 방치한‘고추 말리는 광주리’. 그의 숨바꼭질은 결국은 휴머니즘의 한 모습이다. 서민 냄새가 물씬 나기 때문에.

가만 있자. 그의 숨바꼭질 중 가장 거대한 숨바꼭질을 놓칠 뻔했다. 그림 속 풍경 전체가 기울어져 있음을 하마터면 놓칠 뻔했다! 반듯하게 서 있어야 할 전봇대까지 기울어 있는 밤 풍경. 이는 취객들의 비틀거리는 모습에 답이 있다. 사람이 술에 취하자 눈앞의 풍경까지 술 취한 듯 비틀거리는 모습인 거다. 문자를 쓴다면 유심론(唯心論)적 풍경이다.

 

서 화백의 숨바꼭질이 더 있다. 물론 우리가 숨죽이고서 가만히 찾아야 한다.  하늘에 뜬 그믐달과 거리가 가장 가까운 데 있는 기와지붕, 그 중에서도 추녀마루에 살짝 달빛을 칠해 놓았다. 이 또한 숨바꼭질이다. 달빛은 세상 만물에 골고루 비친다는 사실을 일부러 왜곡했다. 문 닫은 가게 앞의 이동식널빤지마루며, 지대 높은 곳을 위해 마련된 시멘트 층계 골목길, 단층 슬래브 건물의 옥상에 만들어놓은 옥탑방 또한 그의 숨바꼭질 장치다.  

서현종 화백의 ‘효자동 1988-1

88올림픽조차 관심거리가 되지 못하는, 가난한 동네의 자정 넘은 새벽을 그렸다. 하지만 곳곳에 숨바꼭질하듯 마련된 회화적(繪畵的)인 장치 덕에 결코 서러움 속에서만 지내는 모습이 아니다. ()를 환()으로 전환시킬 여력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그림의 새벽이 다하고 어떤 모습의 아침이 올지 당신 눈앞에 그려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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