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장에서 주례 맡은 어른이 신랑 신부한테 말씀하신다.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항상 함께하며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하지만 그 말씀을 주의 깊게 귀담아 듣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신랑 신부의 부모님들은 어쩌면 당신의 자식들 아파트 전세자금 마련 문제에 골몰하며 앉아있을지 모른다. 사회자는 결혼식 끝날 무렵에 펼쳐질 신랑 신부 골탕 먹이는 프로그램(언제부턴가 이런 이상한 일이 자리 잡았다. 경우에 따라서는 멀쩡한 신랑을 환자로 만든다. 잘못된 이런 프로그램을 어서 바로 잡아야 한다.)을 다시 한 번 점검하느라 마음이 바쁘다. 하객들 중 일부는 신랑 신부 중 누구 인물이 더 났는지 비교하느라 바쁘고 또 다른 일부는 식이 끝나기 전에 어서 식당에 가서 밥을 먹어야 할 텐데 하는 생각에 마음 바쁘다. 하물며 오늘의 주인공들인 신랑 신부까지 먼 신혼여행지로 날라다 줄 비행기를 그리느라 주례사가 영 귓전에 담기지 못할 수도 있다.

 

세월처럼 덧없이 후다닥 지나가는 것도 없다. 오늘의 젊고 예쁜 신랑 신부들이 환갑 넘고 칠순을 바라보는 노년이 되는 것은 잠깐이다. 그렇게 늙었을 때 몸의 여기저기가 병이 나기 시작하면서 병구완에 나서야 할 사람이 바로 곁의 배우자라는 사실을. 오래 전 결혼식장에서 무심히 들었던 주례사의 한 구절이 뜻밖에 금과옥조가 되어 당신의 노후를 지켜줄 줄이야.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항상 함께하며 검은 머리가 파뿌리 될 때까지

 

무심히 들었던 주례사. 그러나 그처럼 무겁고 금빛 나는 말씀도 없을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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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들이 결혼한 지 2년이 돼 간다. 오늘, 빈 아들 방에 제 엄마가 들어가 창문을 열었다가 옆 집 아주머니와 대면했다. 옆 집 주방과  아들  방 창문 사이 거리는 3미터쯤이다.
"아드님이 안 보이는데 어디 갔나요?"
"작년에 장가 갔어요."
"어머 전혀 몰랐네." 
"그냥 친척분들  모시고 조촐하게 식 올리느라 동네 분들한테는 연락을 못 드렸지요. 죄송합니다."
"죄송하긴요. 아드님이 창문을 열었다가 저를 보기만 하면 안녕하세요 하고 늘 인사했는데 창 문이 언제부턴가 닫혀만 있으니 이상했지요. 참 상냥한 아드님이었는데."
그 말을 엿들으며 내 눈앞에 착하게  생긴 우리 아들 웃는 모습이 선하게 떠올랐다. 당사자가 떠나도 기억이 그 빈 자리에  남는다는 생각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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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흘 전 밭에서 뽑은 잡초들을  따로 보관했다. 아무 데나 내다버렸다가는 되살아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잡초들의 생명력은 대단했다. 그런데 오늘 보니 따로 보관했던 그 잡초들이 이제는 1/5 크기로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짙푸렀던 색조차 증발해 버린 게 아닌가!  잘됀 일이긴 하지만 가슴 한켠으로 드는 이 무상감은 또 무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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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그라퍼 강상규님한테서 춘심산촌붓글씨를 받는 순간 무심은 그 멋짐에 반했다. 그 까닭을 이제 분석해봤다.

첫째, 네 글자의 전체모임이 황금비율을 생각나게 할 만큼 편안한 구도였다. 우리는 가로로 놓인 두 눈으로 사물을 보며 그렇기에 가로 방향으로 놓인 직사각형, 정확히는 세로 길이와 가로 길이가 1:1.618 비율로 된 황금비율 형태를 아주 편안하게 여긴다. 참고로 명함, 신용카드, TV 화면 등이 이 황금비율을 따랐다.

둘째, ‘춘심산촌의 낱글자들 모두 울림소리 받침을 갖고 있었다. ‘, ‘, ‘, ‘이 모두 울림소리라 입으로 발음할 때 저절로 리드미컬할 수밖에 없었다.

셋째, ‘춘심산촌에 쓰인 붓글씨들의 살아 있음이다. 네 글자 중 세 글자나 받침이 이되 그 중 하나도 같은 모양의 은 없었다. 첫 글자 이 별나게 크게 쓰여서 전체의 균형을 깨뜨려버릴 것 같았지만 웬걸, 셋째 글자 과 넷째 글자 에서 비록 작지만 잇달아 쓴 들의 중첩으로 무게 균형을 이루었다. 변화를 주되 균형을 잃지 않은 기막힌 배치다. 하긴 도 두 번 쓰였지만 모양이 전혀 닮지 않았는데또한 마찬가지다. 사물의살아있음은 변화로 나타난다.

네 글자에 불과한 춘심산촌이지만 캘리그라피로 쓰인 순간 변화가 주()가 되어 봄기운이 만연한 산촌의 정겨움이 구현됐다.

 

우리 한글은 소리글자. 낱글자로는 그 뜻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이라 썼을 때 무슨 뜻의 인지 알 수 없다. ‘물건을 산인지, ‘나이가 90이 되도록 산인지, ‘동네에 있는 산인지 알 수 없는데 만일 한자로이라 적는다면 그 뜻의 모호함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나는 캘리그라피를 소리글자들이 뜻글자들의 고유영역을 넘보는 작업이라 정의하고 싶다. 캘리그라피 춘심산촌을 보라. 어울리지 않게 크게 쓴 은 마치 봄날의 부푼 마음 같지 않은가. 그 다음의을 보자. 앞 글자의 반밖에 안 되게 작게 썼는데 그만큼 소박한 마음처럼 보인다. 첫 글자 에서 마냥 부푼 마음을 두 번째 글자에서 살그머니 붙잡아 준 게 아닐까. ‘자유를 존중하지만 그렇다고 방종은 금물이라는 경구를 연상케 한다.

특히의 받침의 아래 획이 삐친 모양은 보는 무심을 절로 미소 짓게 만든다. ‘받침들 속에서 유일한이지만 그래도 의 형태를 흉내 내며 전체 조화에 일조하겠다는 마음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아마 영어 알파벳으로도 캘리그라피가 이뤄질 게다. 하지만 초중성을 갖춘 우리 한글에 비해 그 기술이 1/3에 머물지 않을까 싶다. 그러잖아도 한글이 디지털시대를 만나 날개를 얻은 듯 승승장구하는데 이제는 캘리그라피까지 만나면서 날개 하나를 더 달았다는 무심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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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 한 때 스쿠버에 미쳐 지낸 적이 있다.

깊은 물속에서 유영할 때마다 느끼는 것 중 하나가 수면 위로 나타난 작은 암초들이 물속에서는 어마어마하게 큰 바위들이라는 사실이었다. 구체적으로는 밥상 크기만 하게 떠 있는수면 위 작은 바위가 물속에 들어가 보면 집채만 했다.

 

수면 위 암초들은 물에 떠 있는 게 아니었다. 강바닥이나 해저에서 솟아난 엄청난 크기의 바위가 수면 위로 내보이는 극히 작은 일부분이었다. 따라서 섬은 물에 떠 있는 게 아니고 물속 바닥에서부터 솟아나 있는 것이다. 저 먼 동해바다 한가운데 있는 독도가 결코 물에 떠 있는 게 아니라 까마득하게 깊은 해저에서부터 솟아나 있는 바위산의 일부분이라는 사실.


사람이 표면상으로 보이는 작은 행동 하나는 사실 어마어마한 크기의 잠재의식 속에서 표출된 극히 작은 움직임인 것을. 오늘 당신한테 뜻 모를 미소를 지으며 지나친 사람이 있다. 그 사람이 왜 그랬는지 심중을 제대로 헤아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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