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우내 동네 부근의 작은 산을 매일 다녔다. 노년의 건강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운동이었다. 그러면서, ‘살아 있는 움직임이라고는 한 치도 없는 삭막한 겨울 산이라 여겼다. 풀벌레는 물론이고 갖가지 야생화, 산새, 하다못해 흉측한 뱀까지 그 모습을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겨울이 끝나가는 요즈음 내 생각이 잘못이었음을 깨달았다. 사철 푸른 소나무들부터 시작해서 수많은 생물들이 겨울 산에 분명히 살아 있었던 것이다.

뱀들은 분명히 어느 바위 밑 같은 데 모여 겨울잠을 자고 있을 것이며, 산새들은 잠시 다른 따듯한 데로 피신해 있을 것이며, 야생화들 특히 진달래나 철쭉은 꽃들을 피우진 않았지만 가지들마다 살아서 꽃망울을 준비하고 있었다. 오솔길 가의 하찮은 잡초들은 또 어떤가. 자신은 겨울 추위에 흔적도 없이 부스러져 버렸지만 겨울이 닥치기 전인 지난가을에 풀씨들을 사방으로 날려 몇 달 뒤의 새봄을 준비하지 않았나?

지난해 아들을 장가보내면서아비로서 할 일을 마쳤다는 감회가 밀려들던 나 자신이 떠오르는 광경이다.

별나게 추웠던 이번 겨울. 동네 부근의 자그마한 산일지언정 산의 생물들은 하나도 겨울 추위에 죽거나 사라진 게 아니었다. 갖가지 방법으로 겨울을 나고 있었다.

겨울에도 산은 살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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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4월이 되면 우리 동네 공원 담장은 철쭉꽃들이 만발한다. 극성맞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만발한다. 이 겨울에 그 까닭을 깨달았다. 종일 햇볕 잘 드는 남향의 담장이어서----- 겨우내 받은 은총의 기쁨을 봄이 되자 온몸으로 되갚는 광경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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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전화번호가 액정화면에 떠서 얼떨떨한 채로 수신에 응하자 낯선 이가 내 이름을 확인하더니 말했다.

“2018년도 퇴비 배달 건으로 전화 드렸습니다.”

순간 내 눈앞에 파란 싹들이 돋기 시작하는 우리 밭 봄 풍경이 선하게 떠올랐다. 그가 이어서 말했다.

신청하신 퇴비가 백 포대 맞습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왜 3월에 퇴비를 받으신다고 하셨습니까? 대개 2월에 퇴비들을 받거든요.”

예에, 말씀 드리겠습니다. 우리 밭으로 가는 길이 산 밑이라 그늘져서 눈이 다른 데보다 늦게 녹는 편이거든요. 괜히 그런 길에 퇴비 트럭이 들어왔다가는 바퀴가 미끄러지고 난리가 납니다. 그래서.”

잘 알겠습니다. 제가 3월 들어 다시 전화 드리고 찾아가겠습니다. 그러면.”

제가 그 전화 받는 즉시 밭에 가서 기다리겠습니다.”

해마다 농사는 1월말이나 2월 초에 퇴비 배달 운송 담당자가 불쑥 거는 전화로 시작된다. 종다리가 울거나 꽃들이 피거나 하면서 농사가 시작되는 게 아니다. 퇴비 배달 담당자는 해마다 다르다. 농부가 전년도에 면사무소에 들러서, 수많은 퇴비회사 중 선택한 한 퇴비회사에서 시행하는 일이라 그 까닭은 모른다.

3월 어느 날 나는 퇴비를 가득 싣고 우리 밭을 찾아오는 트럭을 맞이할 것이다. 한반도의 위기란 이런 소소한 일상의 붕괴를 뜻하는 게 아닐까? 머지않은 3월 어느 날 퇴비 배달 트럭이 별 일 없이, 무심하게 밭에 나타나는 광경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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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내에 있으면 시내가 안 보인다. 시내를 벗어나자 시내가 보였다

 

‘120일 춘천이란 제목의 무심포토 글이다. 그런데 오늘, ‘담다디로 유명한 가수 이상은의 언젠가는을 듣게 되었다. 노래 초입에서‘120일 춘천글과 같은 뜻의 노랫말이 나오질 않던가.

 

젊은 날엔 젊음을 모르고

사랑할 땐 사랑이 보이지 않았네.

하지만 이제 뒤돌아보니

우리 젊고 서로 사랑을 했구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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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 동네에‘iaan’아파트가 있다. 내 짧은 영어 수준으로는 iaan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다. 분명 발음은 이안으로 하고들 있는데 말이다.

그러다 요즈음 깨달았다. 우리 동네에 있는 백화점 이름이‘e mart'고 친구가 사는 아파트 이름은 ’e 편한 아파트라는 사실을 봤을 때 ’iaan 아파트’i'란 우리말 지시관형사 를 연상시키는 효과를 노린 게 아닌가!

지시관형사는 가까이 있는 대상을 수식한다. 예를 들어 이 집’ ‘이 물건’‘이 거리’‘ 이 사람등이 그것인데 저 집’ ‘저 물건’ ‘저 거리’‘저 사람이란 표현과 비교해 본다면 상대적으로 가깝고 나아가 친근감까지 준다는 걸 알 수 있다.

는 영어로‘this'에 해당될 텐데 너무 친근감을 주는 바람에 논란이 되기도 한다. 오래 전 일이다. 미국의 부시 대통령이 우리나라 김대중 대통령을 맞아 정상회담 중에‘this man’이라 지칭하여 논란이 된 적도 있다. 아무리 우방국 사이라 해도 격을 갖춰야 할 회담에서 사석에서나 쓸이 사람이라 부른 것은 실례가 아니냐는 비판이다. 대북 정책에 있어서 강경한 정책을 준비하던 부시에게 김 대통령의 햇볕정책이 못마땅하게 여겨져 발생한 일화가 아니었을까.

저 마트가 아니라 ’e mart‘라 함으로써 손님이 들를 마트가 바로 여기 있다고 가리키는 친근감이 확연하다. ’저 편한 세상이라 하면 남의 세상 같지만 ’e 편한 세상이라니까 가까운 것은 물론 감탄하는 느낌마저 보탰다. 그런데 ’iaan'은 뭐라 풀이해야 할까?

 

지시관형사를 직감한 것은 무심의 자유이지만 정작 관계 회사들의 설명은 다를 것 같았다. 본격적으로 관련 회사들 사이트를 찾아 ‘e'’i'를 브랜드 앞에 붙인 취지를 살펴봤다. ’e mart'의 경우에는 찾기가 어려웠고 다행히‘e 편한 세상‘iaan 아파트는 찾을 수 있었다.

“e 편한 세상의 e는 고객님이 누리실 편한 세상의 경험(experience)을 의미합니다.”

“iaan은 모든 가치가 이 안(내부)에 있다는 주거 철학을 담은 브랜드입니다.”

나는 ‘iaan’아파트의 ‘iaan’에 대해 특별한 해석을 덧붙이고 싶다. ‘마음의 다른 표현이라고. 단종에게 사약을 전하고 한양으로 돌아가던 금부도사 왕방연이지어 부른 시조에도 이이 등장한다.

 

천만 리 머나먼 길에 고운 님 여희옵고,

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아이다,

저 물도 내 같아야 울어 밤길 예놋다.‘

 

그렇다. ‘iaan 아파트내 마음의 아파트라 설명하는 건 어떨까? 더 멋지지 않나?

 

그런데 내가 국어선생을 오래한 때문인지 왜 한글를 쓰지 않고 굳이 ‘i'’e'를 써야 했는지, 그 점은 유감이다. 영어 알파벳을 써야 좀 더 있어 보일 것 같아서였을까? 글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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