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든 피겨스 - 미국의 우주 경쟁을 승리로 이끈, 천재 흑인 여성 수학자들의 이야기
마고 리 셰털리 지음, 고정아 옮김 / 동아엠앤비 / 2017년 2월
평점 :
절판


 올해 아카데미 영화상 시상식은 트럼프 정책에 대한 분명한 반대의 의사 표시 같았다. 인종 차별에 대한 영화들이 작품상 후보에 올랐으며, 제작과 출연진 전원 흑인으로 이뤄진 영화가 작품상을 받았다. 이건 아카데미 영화상 역사에서 최초이기도 하다. 2008년 서브 프라임 사태를 기점으로 신자유주의식 자본주의에 빨간불이 켜졌다. 그 때부터 시작된 위기의 징후는 점차 현실화 되고 있으며 그럴수록 사람들의 불안 역시 차츰 커지고 있다. 경제가 어렵게 되면 가장 고통 받는 것은 역시 최하층의 사람들이다. 빈곤에 시달리고 제대로 배움의 기회를 갖지 못해 이들은 자신들에게 닥쳐온 상황을 어떻게 하면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을지에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다. 일단 차분히 생각할만한 삶의 여유가 없고, 합리적 성찰을 위한 지식과 경험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당장 몸과 마음으로 다가오는 불편과 불안을 자기 보다 못한 존재에 대한 책임 전가와 분노로 푸는 일이 잦다. 그게 손쉽기 때문이다. 또 그런 일이 수월한 것은 분노가 향하는 이들이 가진 것과 사람들의 숫자에 있어 모두 사회적으로 한없이 열악한 계층이라 자기가 그런 짓을 해도 비난과 해코지를 받을 염려가 덜하기 때문이다. 처음엔 그저 화풀이 대상이었겠지만 그런 것이 차츰 누적되어 가면서 이젠 정말로 그들 때문에 자기가 못살고 힘들다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의 뇌는 확증 편향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증오는 가중되고 그러다 돌이킬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르기도 한다. 우리나라의 박근혜, 영국의 브렉시트, 미국의 트럼프가 대표적이다. 지금 생각하면 어쩌다 이토록 어리석은 선택을 했을까 하고 혀를 자꾸만 차게 되는 일들 모두 가만히 따져 보면 근본적으로 편견과 차별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게을리 한 것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차별과 적대는 자신의 안정과 생존을 위해 날려 보내는 칼날이지만 역사가 분명히 보여주는 교훈은 곧 부머랭으로 돌아와 자신의 삶을 더 큰 위험과 불안으로 내몰리게 만든다는 것이다. 지금의 우리나라, 미국의 모습이 움직일 수 없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타자에 대한 존중과 관용은 약자의 비겁이나 이상주의적 허세가 아니다. 오늘의 불안을 잠재우고 파멸을 막을 수 있는 가장 이성적인 방법이다.



 현재 알프레드 P 슬론 재단 연구원으로 있는 마고 리 셰털리의 '히든 피겨스' 역시 바로 이것을 다시 한 번 깊이 깨닫게 해 준다. 올해 아카데미 영화상 작품상 후보로 올랐던 영화 '히든 피겨스'의 원작이기도 하다. '히든 피겨스'는 과학에서 쓰는 용어로 주로 아직은 파악하지 못한, 그래서 숨겨진 수치를 뜻한다. 그런데 이 '피겨'는 사람을 뜻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숨겨진 사람이라는 의미도 가능하다. 그런데 이 책이 담고 있는 존재들이 정말 그렇다. 이 책은 40년대부터 아폴로 11호가 달착륙을 했던 69년까지 NASA와 그 전신이 되는 NACA에서 일한 흑인 여성 과학자들의 삶을 담고 있는데 그들 모두 미국의 항공 산업과 우주 개발에 있어 혁혁한 공로를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그 존재가 공식적으로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것이다. 이 책은 영화처럼 세 명의 여성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진행되는데, 도로시 본, 메리 잭슨 그리고 캐서린 존슨이 바로 그들이다. 이 책이 나오기 전까지 이들이 누구이며 무슨 일을 했는지 아무도 모르고 있었다. 그만큼 그들은 어둠의 장막 뒤에 가려져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과학자로 일했던 4,50년대는 이중의 차별이 그들을 겹겹이 포위하고 있었으니까. 하나는 여성으로서 받는 차별이요, 다른 하나는 흑인으로 받는 차별이었다. 당시만 해도 과학은 여성들에게 허락되지 않은 영역이었다. 근대 초기 여성들에게 글을 쓰는 일이 허락되지 않았던 것처럼, 이 때에는 여성들이 과학을 한다는 게 허용되지 않았다. 과학은 어디까지나 남성만의 영역이었다, 여성들은 단 한 번도 그 사회에서 과학자로 인정되지도, 대접받지도 못했다. 여성 과학자들은 그저 남성 과학자들의 보조에 불과했다. 이런 부당한 차별은 인종의 경우 더욱 심했다. 여성에 대한 차별은 사실 흑인에 대한 차별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도로시 본이 랭글리의 웨스트 컴퓨팅팀이 되어 처음 출근했을 때, 그녀가 식당에서 마주한 것은 '유색인 컴퓨터'라는 푯말이었다.


 딱 그 대부분의 집단은 습관에 따라 앉았지만, 웨스트 컴퓨터들은 지시에 따라 앉았다. 식당 뒤쪽의 한 테이블에 흰색 종이 표시판이 있었다. 거기 깨끗하게 새겨진 검은 글자 '유색인 컴퓨터'는 식당의 위계를 분명히 알려 주었다. 그것은 웨스트 에이리어 식당의 유일한 표시판이었다. 다른 집단은 이런 좌석 지정을 받지 않았다. 청소부, 인부, 식당 일꾼은 그 식당에서 식사하지 않았다. 웨스트 컴퓨팅의 여자들은 연구소의 유일한 흑인 전문가 집단이었다. 딱히 배제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통합되지도 않았다.(p. 73)


 그녀들은 화장실도 따로 써야 했다. 메리 잭슨은 처음 랭글리에 갔을 때, 자기 같은 흑인들은 따로 유색인 화장실을 써야 한다는 것을 알고 경악한다. 화장실을 애타게 찾고 있는 그녀에게 백인 여성들은 경멸과 조소만 보내왔다. 인종은 같은 여성끼리도 서로 갈라 놓았다. 인종 차별은 당시 다른 차별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었다. 다른 것들은 용납될 수 있어도 인종에 대한 것은 용납되기 어려웠다. 이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토드 헤인즈 감독의 영화 '파 프롬 헤븐'이다. 



 50년대의 미국을 배경으로 한 그 영화에서 평범한 가정 주부였던 백인 여성은 정원사로 오게 된 흑인 청년과 사랑에 빠진다. 그녀가 그렇게 사랑에 빠지게 되었던 것은 남편 때문이었는데, 남편이 동성애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주인공이 흑인과 사랑을 나눴다는 게 알려지자.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고백하며 용서를 구하면서 떠났던 남편이 찾아와서 그녀를 비난한다. 어떻게 흑인과 사랑을 나눌 수 있느냐고? 직접 말로 하진 않았지만 그의 표정엔 '그러고도 당신이 사람이야?' 하는 뜻이 담겨 있었다. 당시 동성애자도 사회에서 허용받지 못한 존재였지만, 그런 동성애자들마저 흑인을 허용하지 않았다. 백인에게 있어 흑인과 사랑을 나누는 것은 동물과 사랑을 나누는 수간(獸姦)이나 다를 바 없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회로부터 소외 당하고 있다고 해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포용과 배려의 마음이 더 커지는 것은 아니다. 소외를 당하면 당할수록 낮아지는 자존감과 가중되는 불안감으로 인해 어떻게든 그 불안을 억누르고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오히려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을 자신보다 못한 존재로 규정하고 그들을 배척함으로써 자신의 우월감을 확보하려 들기 때문이다. '히든 피겨스'에서도 그랬다. 여기서 흑인들을 가장 많이 괴롭힌 이들은 비교적 사회적 상층부에 있는 과학자, 지식인들이 아니라 블루 칼라의 하층민 백인이었다. 결국은 별로 다를 것 없는 처지의 사람들이 유독 인종을 가지고 차별하고 적대하는 것은 그것이 가장 손쉽기 때문일 것이다. 인종의 차이는 눈에 바로 보이는 대상이니까 말이다. 결국 차별은 이유가 무엇이든, 우리의 부족한 인내와 그만큼 더 달아오르는 해결에 대한 조급함이 만들어내는 괴물일지도 모른다. 물론 지금의 미국은 그 때와 다르다. 50년대 이후 과학을 비롯하여 흑인의 사회 진출도 많이 늘었다.(도로시 본이 처음 웨스트 컴퓨팅팀으로 갈 때만 해도 대학을 졸업한 흑인 여성 중 오직 2%만이 그런 일을 할 수 있었다. 그것도 단순히 계산만 하는 일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된 계기는 결코 미국 내부의 자성 같은 것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외부의 압력 때문이었다. 바로 냉전 시대, 미국 최대의 적국이었던 소련. 그 소련이 스프투닉 위성을 하늘로 쏘아올리는 데 성공한 것이 미국으로 하여금 흑인들에게 다양한 방면의 사회 진출을 허용할 것을 압박하였던 것이다. 소련의 위성 발사 성공은 미국에게 정말 커다란 충격이었다. 그 때는 아직 2차 대전 당시 나카사키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에 대한 공포가 상당할 때였다. 그런데 적국 소련의 위성이 미국의 하늘을 마음대로 날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그 위성에서 언제든 수소 폭탄이 떨어질 수 있었다. 미국의 대중은 엄청난 공포를 느꼈고 미국 행정부는 그 공포를 달래기 위해 뭔가 해야 했다. 그것이 바로 과학의 발전이었다. 당장 소련처럼 아이 때부터 과학 교육에 전념하도록 만드는 정책이 집행되었다. 하지만 커다란 난관이 있었다. 바로 인종 차별이었다. 이 때는 백인이 갈 수 있는 학교와 흑인이 다닐 수 있는 학교가 나뉘어 있었다. 마을도, 교통편도, 식당도 모두 서로에게 격리되어 있었다. 때문에 쓰지 않아도 좋을 불필요한 비용이 너무 많이 들어갔다. 한 개 지을 운동장을 두 개 지어야 했고, 한 대 운영할 학교 버스를 두 대 운영해야 했으며 교실, 화장실도 마찬가지였다. 이러니 정작 교육에 쓸 재정이 없었다. 그래서 설령 유명한 백인 학교라 할지라도 돈이 없어 보수 하지 못하는 바람에 학교와 교구들은 계속 낡아지고 형편없어졌다. 이런 상황인데도 당시 교육계를 지배하고 있던 백인들은 오로지 흑인들을 자신의 학교에서 몰아내는 것에만 신경쓸 뿐, 교육에 대해선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그런데 소련에서 쏘아올린 스푸트닉이 이 모든 것을 삽시간에 바꿔버린 것이다. 쓰나미처럼 몰려온 공포로 인해 미국 사회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서둘로 흑인들에게 학교를 개방하고 널리 사회 진출을 허용했다. 아폴로 11호의 달 착륙 성공에 혁혁한 공을 세우는 흑인 여성 과학자 캐서린 존슨 역시 이것의 덕을 톡톡히 보았다. 세계에서 가장 대표적인 다인종 국가 미국, 모두들 지금 미국이 가진 저력은 미국에 존재하는 다양한 인종과 이민자 때문이라고 말한다. 쇄국이 아니라 개방이 오늘의 미국을 만든 힘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미국의 역사를 들여다 보면 실상은 통합이 아니라 분리가 더 많이 자행되었다. 그들은 내부에 온갖 격리 영역들을 만들고 위계와 차별을 통해 존속했다. 스푸트닉처럼 외부의 압력으로 거기에 가시적인 변화는 있었지만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저 땅 속을 흐르는 물처럼 드러나지 않게 되었을 뿐이다. 그랬기에 다시 한 번 트럼프 대통령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미국 민중들은 이미 스푸트닉 때 인종 차별이 어떤 부작용을 가져오는지 여실히 경험했다. 소련보다 훨씬 앞서 있었던 미국이었지만 인종 차별 때문에 자신의 역량을 제대로 모으지 못했고 그래서 끝내 머리에 파멸을 가져올 수소 폭탄을 이고 사는 공포를 맛보았다. 그 때, 그들은 얼마나 후회했는가? 그래서 흑인들에게 학교를 개방해도, 사회 진출이 허락되어도 별 말 없이 내버려 두었다. 그랬던 그들이, 예전 그들의 후회를 깡그리 잊고 다시 인종 차별을 획책하는 트럼프를 대통령으로 뽑았다. 외부의 압력으로 인한 변화는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같은 잘못을 반복하게 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는 예가 아닐까 생각된다. 그러므로 진정한 변화는 언제나 자신에게 닥쳐온 문제와 상황들을 그 누구의 판단도 아닌 자신의 힘으로 사유하고 성찰하며 실천하는 것에서 가능하다. 내부로 부터의 자발적 변화만이 남도 살리고 나도 살리는 진정한 구원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이다. 흑인 제임스 톰슨이 '왜 우리를 차별하고 배척하는 미국을 위해 2차 대전에 나가 싸워야 하는가?'에 대해 '피츠버거 커리어'에 보낸 투고문에서 강조했던 '이중의 승리'도 바로 그것이었다.


 "유색 미국인들은 더블 V- 이중의 승리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 첫 번째 V-는 외부의 적에 대한 승리이고, 두 번째 V-는 내부의 적에 대한 승리이다. 이 나라에서 추악한 편견을 자행하는 자들은 추축국 군대만큼이나 확실하게 우리의 민주적 정부를 해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p. 64)


 그런 사유와 성찰에 있어,'히든 피겨스'는 꽤 의미 있는 여정을 선사한다. 항공과 로켓 과학이 나오고 실존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전혀 어렵지도 지루하지도 않다. 영화만큼 흥미로우며 페이지 또한 거침없이 넘어간다. 저자 마고 리 셰털리는 이 책을 쓰기 위해 조사하는 데만 5년을 투자했다고 한다. 그 5년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책 자체가 온전히 증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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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 번의 시선 - 합본개정판 모중석 스릴러 클럽 2
할런 코벤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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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잠자리의 날개는 참으로 약하다. 손 끝으로 잡아 조금만 힘주면 바스라진다. 때로 삶은 그런 잠자리 날개와도 같다. 아주 사소한 계기로 평온했던 삶이 송두리째 전복되기도 하는 것이다. 어떤 소설의 제목처럼 참을 수 없는 삶의 가벼움을 그것도 아주 예민하게 느끼는 작가, 그가 바로 할런 코벤이다.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언제나 느닷없는 공격을 당한다. 콧노래를 부르며 모퉁이를 돌았는데 갑자기 강도가 겨눈 총구를 맞이한 것과 유사하다. 예측할 수 없었던 시간과 장소에서 불현듯 들어온 것이기에 블랙홀에 붙잡힌 빛처럼 삶은 사정없이 끌려 들어간다. 그 혹은 그녀들의 삶은 갑자기 암흑이 된다. 이유를 알 수 없기에 더욱 짙어버린 어둠 속에서 몸으로 더듬으며 진실과 구원을 찾아 나가야 한다. 그들에게 진실은 곧 구원이다. 지금 겪고 있는 환란(患亂)의 이유를 찾는 것이 곧 현재의 고통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출구인 것이다. 이것이 할런 코벤이 선사하는 미스터리가 가지는 이채로운 점이다. 그의 미스터리는 다른 것과 다르게 독특한 작용을 한다. 이것은 셜록처럼 풀어야 할 트릭이 아니다. 필립 말로처럼 도덕적으로 무너진 사회의 민낯을 보여주거나 개인의 신념을 타락시키려 유혹하지도 않는다. 할런 코벤의 미스터리는 전혀 부정적인 게 아니다. 설령 주인공이 그로 인해 목숨마저 위험할 정도로 고통 받고 있다고 해도 말이다. 왜냐하면 코벤의 미스터리는 지금 삶이 가짜라는 것을 알려주는 전서구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주인공 네오가 지금까지 진짜라고 믿었던 앤더슨으로써의 삶이 가짜라고 알려주었던 '빨간 약'. 할런 코벤의 미스터리는 바로 그것이다. 한 마디로 영화 '쇼생크 탈출'에서 탈옥을 위해 준비된 숟가락.


 "진짜 삶을 찾게 해 주는 할런 코벤의 빨간 약, 자네도 한 번 먹어볼 텐가?"


 어떻게 그렇게 되는가?

 과거 때문이다. 코벤의 소설에서 주인공이 당하는 곤경은 대부분 과거와 관련이 있다. 그는 과거 사건의 피해자였거나 가해자였다. 상실의 아픔을 억지로 잊었거나 책임을 회피했다. 주인공이 과거에 어떤 행위를 했건 간에 늘 존재하는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사건을 직시하지 않고 회피하려 했다는 것. 그저 잊거나 책임을 피하기 위해 달아났다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고 과거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는 없다. 과거는 아주 솜씨가 좋은 술래다. 어디에 숨든 늘 자신을 찾아낸다. 자신에게 양심이라는 내부고발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 혹은 그녀는 진실이든 책임이든 싸우기 싫어서 도피를 선택했지만 그것은 또 다른 싸움의 시작일 뿐이었다. 바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기억과의 투쟁. 그 기억은 계속 주인공에게 말한다. 지금 네 삶은 가짜라고, 진실과 책임을 외면하는 한 진짜 삶은 너에게 없다고. 하지만 과거와 대면하는 게 고통스런 주인공은 쓴 약을 억지로 삼키는 마음으로 모르쇠 한다. 잠깐이라도 고통을 외면하기 위해 마약을 맞는 사람과 다를 게 없다. 이것은 결코 올바른 삶이 아니다. 이대로라면 악순환만 계속 될 뿐이다. 뭔가가 나타나 고리를 끊어야 한다. 과거와 대면하여 진실을 알고 그 책임을 다할 수 있도록 하여 망각과 회피로 일관된 가짜 삶의 질곡으로부터 건져내야 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일을 하는 것이 미스터리다. 그것은 너구리처럼 굴 속 깊은 곳에서 움츠리고만 있는 자신을 나가서 진짜 삶과 대면하라고 내몰기 위해 피우는 연기와 같다. 연기가 매캐우면 매캐울수록 자아는 조금이라도 더 빨리 진짜 삶과 마주하려고 나가게 될 것이다. 코벤의 미스터리가 이와 같다. 그의 미스터리가 납치와 살인처럼 어둡고 잔혹한 색채를 띠는 이유는 단 하나, 구원을 향한 탈출의 속도를 높이는 데 있는 것이다.


 

2004년에 발표된, '단 한 번의 시선'은 이러한 코벤 미스터리의 결정체와도 같은 작품이다. 제목에서부터 할런 코벤 특유의  '아주 사소한 계기로 절단나는 삶'이 바로 드러나 있다. 주인공은 남편과 두 명의 어린 자녀가 있으며 직업이 화가이나 지금은 알 수 없는 이유로 슬럼프를 겪고 있는 그레이스. 그녀의 삶은 정말 아주 사소한 것 하나 때문에 절단 나 버린다. 그것은 바로 사진 현상소에서 찾아온 가족 사진들 속에 끼어 있던 이상한 사진 한 장(원제 그대로 JUST ONE LOOK!). 분명 자신이 찍은 사진이 아닌데다 아무래도 사진 속 인물 하나가 남편 같아서 남편에게 보여줬더니, 그 날 밤 갑자기 차를 몰고 집을 떠난 남편은 그대로 실종되어 버린다. 그렇게 느닷없이 닥쳐온 곤경 앞에서 지금껏 평온한 삶을 살던 그레이스는 어찌할 바 모르고, 남편 사건은 점점 실종에서 납치라는 게 밝혀진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를 압박해오는 15년 전 그녀의 과거. 그것은 '보스턴 대학살'이라는 이름으로 전 미국을 전율하게 만들었던 사건이었다. 한 록 뮤지선 콘서트 장에서 일어난 그 사건은 누군가 쏜 총 한 방 때문에 수많은 젊은이들이 서로 앞다투어 달아나느라 치이거나 깔려 목숨을 잃었는데, 그레이스는 그 아비규환의 현장에서 목숨을 건진 유일한 생존자였다. 마치 자신의 이름대로 그레이스, 즉 축복을 받은 것처럼.


 하지만 그녀는 사건을 기억하지 못한다. 왜 콘서트 장에 갔으며 어떻게 목숨을 구할 수 있었는지, 그 날의 기억을 모조리 상실한 것이다. 그것은 정말 기억 상실인 것일까? 혹시 그 날의 고통과 죄책감을 애써 잊기 위한 심리적 방어는 아닐까? 남편의 실종과 함께 불시에 나타난 인물인 칼 베스파가 그것을 상기시킨다. 그는 '보스턴 대학살'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잃은 아버지이자 암흑계의 거물. 칼 베스파는 남편의 실종이 15년 전 사건과 관계있을 지 모른다고 생각한다. 한 편, 정체불명의 사진은 그레이스에게 남편에 대한 의혹을 일으킨다. 사진 속 남편을 보고 있는 한 여성의 모습은 남편이 숨긴 과거가 슬쩍 꼬리를 내민 것 같았으며 지금까지 남편의 삶을 잘 안다고 여겼지만 어쩌면 아는 게 하나도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이렇게 사진 한 장은 그레이스가 잘 안다고 여겼던 삶의 모든 것들을 'PAINT IT BLACK' 하면서 진실과 출구를 도저히 찾을 수 없는 무저갱 깊숙이 빠뜨려 버린다.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오는 방법은 그 바닥까지 내려가서 밑바닥에서 다시 발을 차고 올라오는 것이라고 하던가? 그레이스 역시 그렇게 된다. 모든 것을 잃게 된 그 순간, 홀연히 자신이 정말 알았어야 할 진실, 보았어야 할 사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레이스에게 공포와 불안 속에서 좌충우돌했던 무저갱은 한 마디로 통과의례와 같은 것이었다. 그레이스는 이제야 진짜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되었고 비로소 자신의 이름대로 그레이스, 즉 축복을 받은 것이다.


 [사람의 삶이 가진 경계란 이렇게 낮고 연약할지 모른다. 외형의 경계 안에서 움츠린 채로 자기 보호에 급급하기 보다는 오히려 상처를 직시하고 그 진실과 책임을 겸허하게 인정하는 것이 진정으로 자신을 보호할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줄 것이라는 걸 말하는 게 아닐까 생각되는 원서의 표지(너무 확대 해석인 지도^^;).]


 많은 미스터리들은 우리 역시 삶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이런저런 문제들을 다룬다. 할런 코벤의 미스터리가 다른 미스터리들과 다른 점이 있다고 한다면, 다른 미스터리들은 그 문제의 원인을 찾기 위한 탐색의 시선을 바깥 세계로 돌리지만, 코벤의 미스터리는 탐침을 자기 내부로 향하게 한다는 데 있다. 고뇌와 불안을 가져오는 문제가 있을 때, 코벤이 독자들에게 바라는 것은 연어가 되라는 것이다. 바깥 탓을 하려는 것들에게 현혹되지 말고 근원으로 열심히 회귀하는 연어처럼 자기 내부로 거듭해서 깊이 깊이 들어가라고 그는 조언한다. 이는 '단 한 번의 시선'에 나오는, 또 한 명의 가정 주부 샬레인 스웨인이 너무나 잘 보여준다. 그녀는 권태와 우울에 빠져 있었다. 열정적인 사랑으로 하나가 되었던 남편과는 이미 오래전에 몸과 마음 모두 멀어졌고 현재의 늙고 초라한 모습과는 너무나 멀었던 과거 화려한 모습에 대한 미련만 곱씹으며 그러느라 더욱 비대해진 우울 속에서 무의미한 나날만 보내고 있었다. 처음 그녀는 그런 비참과 우울의 나날 속에서 자신을 건져내 줄 무언가를 오직 바깥에서 찾았다. 바로 옆집의 한 남자. 하지만 그것은 결코 구원이 되지 못했고 오히려 남편 목숨만 위험하게 만들 뿐이었다. 그러나 불현듯 그녀가 참여하게 된 미스터리(옆집 남자를 훔쳐보다 그녀가 발견한 미스터리는 그야말로 미스터리하게 진행된다.)는 결국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누구이며,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를 알게 만든다. 그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적극적으로 미스터리 속에 감춰진 진실을 알려고 하고 거기에 따르는 자신의 책임마저 다한 결과였다. 바로 이러한 샬레인 스웨인의 경로가 할런 코벤의 미스터리가 독자에게 주고자 하는 것의 원형이라고 생각된다. 자신을 두렵게 만드는 진실이라 할지라도 외면하지 말고 정직하게 직시하며 책임져야 할 것은 기꺼이 책임지는 태도. 샬레인 스웨인은 바로 그것을 나타내며 결국 소설에서 그럴 수 없는 이들은 모두 파멸했다. 이것은 또한 모든 것의 배후에 있는 범인과 얼마나 정반대의 모습인가? 회피와 무시로만 일관하는 것은 더 큰 비극만 부를 뿐이라는 것을 이 인물만큼 명확하게 보여주는 이가 또 있을까 싶다. 아, 하나 있긴 있구나. 우리나라의 박근혜, 최순실, 김기춘, 우병우 일당. 그들이 구속되면 할런 코벤의 이 소설이나 사식으로 넣어줘야겠다.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 그런 돈조차 쓰기 아까운 존재들이다. 어차피 넣어줘도 안 읽을 것 같다. 그들 중 둘은 드라마만 열심히 본다고 들었던 것 같으니. 여하튼, '단 한 번의 시선'은 독특한 미스터리 세계를 선보이는 할런 코벤의, 그런 미스터리의  결정체라는 점에서 꼭 한 번 만나보시라고 권해드리고 싶다. 미스터리가 내적으로 깊어지면 어떤 형상이 되는지 잘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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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 당신이 살고 싶은 그곳

리아 페이-베르퀴스트·정희진 외 지음|김지선 옮김


* 김지양(플러스 사이즈 모델), 김하나(브랜드라이터), 은하선(섹스칼럼니스트), 이진송(계간홀로》 편집장), 정희진(여성학·평화학 연구자), 최서윤(월간잉여》 편집장), 최은영(소설가) 필자로 참여했다.



더 많이 원한다.
우리는 이 간단한 말을 입 밖에 내기가 참 어렵다. 여자라서, 
더 많이 원하도록 허락받지 못해서. 
음식, 권력, 섹스, 사랑, 시간……. 우리가 이런 것들을 갈구하면 
게걸스럽다느니 이기적이라느니 헤프고 대책 없고 어리석다느니 하는 욕을 먹는다. 
덜 원하고 덜 배고파하는 게 우리한테는 ‘합리적’이란다. 
이렇게 한참 살다 보니 이제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그렇게 말하게 된다. 
여성 혐오가 우리의 상상력까지 짓밟는 지금, 
우리가 어떻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제안할 수 있을까? 
페미니즘이 한창 뜨고 있지만, 아직 우리는 내일 필요할 것을 생각하기는커녕 
당장 위기에서 숨 돌릴 틈도 없다. 
가부장제와 끊임없이 술래잡기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무슨 재주로 그런 큰 꿈을 꾸겠는가? 
지금 당신의 손에 들린 이 책은 바로 이런 의문들을 불쏘시개 삼아 태어났다. 
에세이, 이야기, 시, 시각예술 등을 망라한 작품 64편은 
당신의 페미니즘을 위한 창조적 상상력을 먹여 살릴 양식이다. 
당신이 꿈꾸는 페미니즘에 우리가 불을 지필 수 있으면 좋겠다. 
우리가 다 함께 야심만만하고 자기중심적인 욕심쟁이가 될 수 있으면 좋겠다.


- 《페미니스트 유토피아》 머리말 중에서

《페미니스트 유토피아》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실 서평단을 모집합니다. (5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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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집 인원: 5명

- 모집 기간: 2월 24일 ~ 3월 2일

- 당첨자 발표: 3월 3일 금요일 예정 (휴머니스트 서재 공지)

- 도서 발송: 발표 게시물 비밀댓글로 당첨자 정보 취합 후 일괄 발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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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과 한국의 페미니스트들이 그려보는 유토피아의 모습 궁금하네요.

 알고 보면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가 그랬듯이, 유토피아란 실은 현실 사회의 대차대조표 같은 존재죠.

 상상된 가장 이상적인 사회로 거꾸로 지금 현실 사회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첨예하게 드러내는...

 그런 의미에서 페미니스트들의 유토피아는 남성 중심에 침윤된 현 사회의 적나라한 민낯과 그것을 어떤 방향으로 개선할 것인지 보다 잘 알려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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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발 (일반판)
반디 지음 / 다산책방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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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의 소설이라고 하니 흥미로웠다. 옛날도 아니고, 90년대의 북한 실상을 보여준다는데, 현재 북한의 모습을 그 내부에 있는 목소리로 들여다 보고 싶었던 내게는 좋은 기회가 되어줄 것 같았다. 저자 '반디'는 필명으로(북한 사회를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책이니 실명을 안 쓰는 것은 당연하겠지.), 책의 마지막에 있는 '출간에 부쳐'라는 글에 따르면, 1950년 태생의 조선작가동맹 중앙위원회 소속 작가라고 한다. '고발'은 '1994년 김일성 사망 시점에 시작된 소위 고난의 행군으로 자신과 인연을 맺고 살아왔던 많은 이들이 죽어나가고, 먹고 살기 위해 고향땅을 등지고 떠나는 이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자신이 지금껏 살아왔던 북한 사회(p. 270)'에 대해 깊은 회의를 가지게 된 작가가 폐쇄 정책으로 바깥 세계에 전혀 알려지지 않은 북한 사회의 참된 모습에 대해 '고발'할 생각으로 89년부터 96년 사이 완성한 7개의 단편을 담고 있다. 흥미가 동하여 읽긴 했지만 사실 별 기대를 하진 않았다. 고발 문학은 목적성이 분명한 글이라 그 선명한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 문학적 가치와 재미를 상실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원고에 얽힌 사연도, 제목도 여기의 소설들이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확연히 드러내고 있었으므로 얼른 보통의 고발 문학들이 거치는 궤적을 그대로 따르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처음 '탈북기'까진 '그럼 그렇지' 하고 생각했었는데, 두 번째 단편 '유령의 도시'에서 그런 생각은 보기 좋게 깨어지고 말았다.



 개인적으로 7개의 단편 중, 이 '유령의 도시'가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전체주의가 어떻게 하나의 사회를 장악하고 개인들을 유령처럼 존재감 없는 것으로 만드는지 카프카적인 색채로 참으로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의 배경은 평양. 국경일을 하루 앞두고 평양은 행사 준비로 한창 달아오르고 있는 중이다. 무려 100만의 시민이 참여하는 시위 행사다. 이번 시위는 특히 전세계에 선전용으로 방송되는 것이라 정권의 시민 동원과 준비는 한층 더 가열차고 집요하다. 이런 상황이 주인공 한경희는 여간 괴롭지 않다. 자신의 아이 때문이다. 아이가 김일성 사진만 보면 경기를 일으키며 크게 울어대는 것이다. 하필 자신이 참여하는 궐기대회 장소가 마르크스의 초상화가 내려다 보고 있는 곳이라 아이를 도저히 데려갈 수가 없다. 그렇다고 아픈 애를 집에 혼자 둘 수도 없다. 이도저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한경희는 행사에 빠질 생각을 한다. 그러나 아무리 그런 사정이 있어도 또 그녀가 공산주의 항쟁에 희생당한 이의 유가족이라는 신분으로 신변이 철저히 보호된다고 해도 북한의 전체주의는 그녀를 곱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하필이면 집의 창문에 김일성의 초상화가 보여서 아이 때문에 커튼을 쳐 놓았더니 이내 집에 커튼이 쳐져 있는지, 안 쳐져 있는지 관리하는(평양의 모든 집은 김일성 수령을 환영한다는 의미로 김일성 초상화가 잘 보이도록 창문의 커튼을 내려서는 안 된다.) '가두 비서'가 찾아와 커튼을 걷으라고 닦달한다. 한경희는 할 수 없이 아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늦게 들어온 남편은 왜 그런 사실을 알렸느냐고 원망한다. 벌써 당간부인 남편 상관에게 그 말이 들어가 남편이 엄중한 경고를 받았던 것이다. '유령의 도시'는 유령처럼 아무런 존재감이 없게 되어버린 전체주의 안에서의 개인을 다양한 문학적 장치를 통해 신랄하게 보여준다. 아이는 마르크스를 괴물 '어비'로 여겨 우는데, 나중에 한경희는 평양이라는 도시 전체가 이미 '어비'에 의해 지배되고 있음을 다음과 같이 보게 된다.


 에구머니나! 저게 뭐지?... 두 고층 아파트 지붕을 양다리고 디디고 호통치는 털이 북실북실한 저 괴물 같은 것이!... 옳아! 저게 바로 '어비'로구나!

 한경희는 넋이 나가도록 질겁하며 어디로인가 냅다 뛴다. 그런데 어비가 디디고 선 아파트의 벌집처럼 총총한 창문마다 오종종 긴장하며 바깥 동정을 살피고 있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모두 토끼들이 아닌가! 아하, 저게 바로 남편이 걸핏하면 외우곤 하던 토영삼굴의 그 토끼들이구나. 한데 이상한 것은 한경희 자신도 어느새 토영삼굴에 뛰어들어 앉아 있는 것이었다.(p. 96)


  창문이 자신의 사생활을 보호하는 곳이 아니라 오직 체제 유지를 위한 감시의 구멍이 되는 전체주의 사회에서 개인은 그저 겁먹은 토끼일 뿐이다. 살던 굴에서 쫓겨나지 않으려면, 죽지 않으려면 '어비'의 눈 밖에 나지 않아야 한다. 그 '어비'는 아주 조금의 흠도 용납하지 않고 거역에 따른 처벌 역시 가차 없다. '탈북기'에서 일철이 가족들 전부를 데리고 탈북을 결심하게 된 건 자신에게 따라다니는 '적대군중'이란 신분 때문이었는데, 그런 신분이 붙게 된 연유는 너무나 사소했다. 아버지가 당에서 받은 한 파장의 '랭상모(벼농사를 위해 심는 모)'를 죽여버렸기 때문이다. 고작 그런 이유로 자신뿐만 아니라 아들까지 온갖 불이익을 받게 되니 일철은 탈북을 결심하게 되었던 것이다. 반디는 '탈북기'와 '유령의 도시'처럼 전체주의의 희생자로 주로 '가족'을 놓는다. 모든 작품에서 전체주의는 가족을 파괴시키는 주범으로 등장한다. 김일성 행차라는 '1호 행사' 때문에 통행이 금지되어 강 하나만 건너면 되는 지척에 두고도 어머니 임종을 지키지 못하는 아들의 이야기(지척만리)나, 역시 '1호 행사'로 인해 역이 폐쇄되어 그로 인한 혼잡 탓에 부상당한 가족의 이야기(복마전), 그리고 공장의 할당량을 채우느라 아내가 아궁이에 쓸 장작 좀 구해달라는 부탁을 들어주지 못해 결국 재떨이를 던져 아내를 내쫓고 마는 한 노인의 이야기(준마의 일생)가 대표적이다. 더구나 그 눈이 '어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고, '어비' 아래서 지배받고 있는 모든 이들의 눈 또한 '어비'의 눈이라, 그 상호 감시 때문에 겁먹은 토끼들은 더욱 체제가 시키는 대로 하게 된다. 각본에 따른 정확한 연기는 개인이 전체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몸짓이다. 단편 '무대'는 북한 사회 자체가 하나의 무대이며, 자신들은 그저 체제가 원하는 연기를 하고 살 뿐이라는 것을 절망 속에서 고백한다. 이 모든 단편들에 나오는 주역들은 하나같이 한 평생 체제를 믿고 그것에 헌신해 온 인물들이나 그것을 계기로 그들은 체제가 '빨간 버섯'과 같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한경희가 '어비'를 보았던 것과 똑같이.


 "왜 자신해서 벽돌집 시녀가 됐던가 말야!"

 "간판에 속아서였지. 나처럼. 속엔 독재의 칼을 품고도 겉으로만 평등이요, 민주주의요, 역사의 주인이요, 지상낙원이요 하는 허울 좋은 그 간판에 속아서 말야."

 "맞네. 세상 만물은 독한 것일수록 고운 허울을 뒤집어쓰고 있는 법이네."

 "그래, 독버섯처럼 말이지? 독버섯처럼!" ('빨간 버섯', p. 261 ~ 262)


 '고발'은 한 마디로 북한 사회라는 단일한 차원을 넘어, 전체주의가 얼마나 개인의 삶을 무너뜨릴 수 있는지 잘 보여주는 소설이었다. 이렇게 자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을 겁먹은 토끼로 만들어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기 때문에 박근혜나 김기춘 같은 존재들이 전체주의를 꿈꾸는 지도 모른다. 그들이 만들었던 '블랙리스트'야 말로 '어비의 눈'이 아니던가! '계엄령을 선포하라!'나 '촛불 시민 총살하라!'는 팻말을 아무런 부끄러움 없이 당당히 들고 다니는 '태극기 집회'의 사람들을 보노라면, '고발'은 '우린 북한이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야'하고 읽어야 할 소설이 아니라 '이러다 우리도 이렇게 될 지 몰라' 하는 무서운 경고로 읽어야 할 것 같다.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이 혹시 고운 허울만 뒤집어 쓴 독버섯은 아닌지 곰곰이 따져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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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의 무기 - 이응준 이설집
이응준 지음 / 비채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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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응준. 잘 모르는 작가다. 고작 그의 소설 두 권만 읽었으니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소설로 만나 본 그는 문장을 참 잘 쓰는 작가였다. 왜 어떤 글을 읽으면 글 쓰는 솜씨를 훔치고 싶은 작가가 있지 않은가? 솔직히 그런 작가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번에 나온 그의 책, '영혼의 무기'를 보고 알게 되었다. 요컨대, 이런 글을 통해서다.


 요즘은 누구든지 개인 미디어에 실시간으로 글을 올려버리는 가공할 자신감과 광기에 가까운 습성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제대로 된 글을 쓰는 능력을 함양하고자 하는 이라면 아직은 미숙한 자신의 글이 세상에 돌아다니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진정한 자존심이 있어야 한다. 과거 우리의 작가들은 글을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만큼이나 글이 발표되는 것을 두려워할 줄 알았다. 그리고 대중은 그러한 작가정신을 흠모함으로써 자신의 소박한 문장을 되돌아볼 줄 아는 아름다운 교양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떠한가? 작가들의 글은 한낱 철지난 상품이 돼버리고 그런 작가들을 자신의 분신보다 열등하게 여기는 대중의 문장은 변기 모양의 흉기다.(...) 글이 그 내용과 형태의 가치를 담보할 때까지 스스로 감추고 기다리는 태도야말로 글쓰기의 가장 중요한 기법일진대 이 당연한 사실을 작가와 대중이 모를 때 그 사회는 언어의 무간지옥 속에 갇힌다.(p. 201 ~ 202)


 그는 쉽게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나의 글을 세상에 내보는 것을 두려워 하며 조금이라도 더 제대로 된 글로 보내기 위해 노력하는 자였다. 얼른 영화에서 흔히 보았던 도자기 만드는 장인이 떠올랐다. 설령 단 한 개의 도자기도 세상으로 내보내지 못한다 할지라도 자격이 되지 않으면 모조리 깨버리는 장인. 이응준에게 글은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그가 쓴 '비인부전(非人不傳)'이라는 말에서 언뜻 그런 것이 감지된다. 그에게 있어 글은 그냥 글이 아니다. 어쩌면 자신의 존재 전부를 걸어야 할 지도 모를, 영적인 그 무엇이다.


 필사로 문장이 얻어진다는 것은 철저한 허상이다. 문장은 영적인 물질이다. 그것은 반 이상이 타고난다. 또 문장을 못 쓴다고 소설가가 될 수 없는 것도 아니다. 거칠고 아귀도 맞지 않는 문장을 쓰면서도 독특한 세계관으로 이름을 날린 작가들은 많다. 그러나 그들이 아름다운 문장의 소설가라는 말을 듣지는 못할뿐더러 문장이 소설의 전부는 아니더라도 소설의 맨 처음이기는 하다. 더더욱 필사를 멀리 해야 하는 이유에 다름 아니다. 작가가 되려면 일단은 마음에 새겨진 것들을 글로 옮겨야 한다. 그것이 비록 누구의 영향을 받아 싹을 틔웠든 간에, 결국에는 작가 나름의 해석과 정신이 담긴 글이어야 하는 까닭이다. 필사를 통해 작가가 됐다고 믿는 사람들은 스스로들 무슨 대단한 고행 중에 문학의 본령을 터득한 줄로 아는데, 알고 보면 그들의 글을 문학으로 승격시킨 요소는 무식한 필사가 아니라, 하다 못해 필사까지 감행하게 한 열정과 노력이었을 것이다.(p. 229)


 '영혼의 무기'를 읽다보면 그가 굉장히 종교적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글은 그런 그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번제로 드리는 기도는 아니었을까 싶다. 


 아무 말이나 막 할 때 눈을 뜨고 있는 우리는 눈을 감고서 기도한다. 세상은 살인적인 속도에 온갖 현란한 치장과 야비한 선전 들을 실어서 보여준다. 그러나 그럴수록 인간이라는 상처는 참혹해지고 삶은 중심을 잃지 않았던가. 나를 보고 사랑한다고 하는 이의 말을 믿지 않는다. 나를 듣고 뭔가를 깨달은 그 사람의 영혼을 믿는다.(p. 27)


 그것이 작가로써 가지는 세상과 대중에 대한 의무이기에. 쉽게 말하자면, 진정성. 그랬기에 그는 설사 자신의 문단 생활이 망쳐지더라도 신경숙의 표절에 대해 '침묵의 공범'이 되기를 거부하고 기꺼이 '내부고발자'가 되었을 것이다.


 신경숙은 한국문학의 당대사 안에서 처세의 달인인 평론가들로부터 상전처럼 떠받들어지고 있으며 동인문학상의 종신 심사위원을 맡고 있는 '등등'의 요인들로 인해 문단 최고의 권력이기도 하다. 그러한 신경숙이기에 신경숙이 저지른 표절이 이른바 순수문학에 대해서는 순진할 수밖에 없는 대중, 특히 한 사람의 작가만큼이나 그 개개인이 소중하기 그지없는 한국문학의 애독자들과 날이 갈수록 하루하루가 풍전등화인 한국문학의 본령에 입힌 상처는 그 어떤 뼈아픈 후회보다 더 참담한 것이다.(p. 389)


 '영혼의 무기'는 이런 이응준의 글들을 담고 있다. 시인으로 등단하여 소설가를 겸하는 그가, 시와 소설로 발표하지 않은 글을 다양하게 담고 있는 것이다. 문학적 장치로 여과되지 않은 것이라 더욱 자신의 생각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는 글을. 작가는 스스로 '이설(異說)집'이라 이름 붙였다.



 이설(異說). 그것은 왼손잡이와 같다. (너무 서툰 비유라 미안하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계속해 보련다.) 다들 오른손으로 하라고 강요하지만 결코 굽히지 않는 왼손잡이. 당당히 왼손을 들고 오른손잡이가 보지 못하는 세상의 모습을 외치는 왼손잡이. 이 책에 담긴 이설(異說)의 형상이다. 그것은 듣기에 편치 않은 말이다. 고개를 외로 꼬고, 삐딱한 시선으로 면전에서 대놓고 '나는 당신과 생각이 달라' 하는 말이니까. 실제로 불편한 글이 있다. 보수와 진보 양 쪽의 적대적이며 편협한 태도들을 공박하는 글을 읽노라면 팔짱만 끼고 말만 앞서는 양비론자 같기도 하고 혹은 잔혹한 괴물에게도 어느 정도 인간성이 있을 것이라 순진하게 기대하고 있는 이상주의자로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는 도중에 책을 던지지 않고 끝가지 읽게 되는 것은 설령 그런 글이라 하더라도 그 바탕에서 어떤 아집이나 타산 같은 것이 아니라 '나도 이렇게 고민하고 있다. 우리 같이 고민해 보자.' 하는 식의 진정성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맞다. 그의 이설(異說)은 종착지가 없다. 누구나 종착지로 생각하는 곳에서 홀연히 나타나서는 '아직 우리는 더 걸어야 한다'고 말하는 길과 같다. 온전한 이해를 위한 부단한 회의(懷疑). 그것이 바로 그의 이설(異說)이다.


 인간에 대한 회의(懷疑)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오히려 우리는 인간에 대한 희망을 잃어버리고 만 것은 아닐까?(p. 198)


 그러므로 '영혼의 무기'는 두 가지 점에서 이롭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작가 이응준의 영혼이 가진 전체적인 형상을 투명하게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해답 같은 것은 나와 있다고 생각했던 문제들에 대해 평소 잘 생각해 보지 못했던 방향에서 전혀 새로운 쪽을 가리키며 진행되는 사유의 경로를 살펴볼 수 있다는 것이다.


 단언컨대, 아주 흥미로운 여정이었다. 그가 보여주는 색다른 풍경은 흥미로웠고, 동의할 수 없는 지점들은 치열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왔다. 무려 831 페이지의 책으로, 책 자체가 무기가 되는 책이지만 지루해서 하품이 나거나 난해해서 건너뛰는 곳은 없었다. 알뜰하게 읽게 되고 살뜰하게 다가오는 글이 대부분이었다. 하나는 확실하다. 이응준 작가를 좀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 작가는 그것 역시 회의(懷疑)해야 한다고 말할 지도 모르겠지만. 이 책은 그의 반려견 '토토'에게 바쳐졌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모양이다(정확히는 2016년 7월 1일). '토토'에 대한 그의 태도는 그의 회의(懷疑)가 실은 좀 더 사랑하기 위해서라는 걸 드러낸다. 어떤 존재든 그냥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 우리는 내 앞에 있는 존재가 얇은 평면이 아니라, 저마다 살면서 감내해 온 과정이 있는 입체로 인식해야 한다는 것. 그렇게 타자에 대한 존중이 먼저고, 이해가 우선되어야 한다는 것. 바로 그런 것을 위한 회의(懷疑)이기 때문이다. 그런 눈을 가진 그이기에, 인간과 동물 사이엔 아무런 차이가 없다. 하나같이 묵직한 삶의 무게를 견디고 있는 존재들이므로.


 세상의 혼돈 앞에서는 숨이 막히듯 말문이 막힌다. 그리고 그 혼돈을 견뎌내느라 날이 갈수록 강퍅해지고 잔인해지고 사나워지는 사람들 앞에서 다름 아닌 나 자신을 본다. 만약 공부라는 것이 있다면, 공부란 그 반대편으로 걸어가려는 안간힘일 것이다. 이것이 공부의 시작이거나 공부의 전체가 될 수는 없겠지. 그러나 공부의 중간 점검 정도는 될 것이다. 그릇된 공부는 때려치워야 한다. (2016년 8월 7일 / p. 711)


 그에게 회의(懷疑)란 공부고 종국엔 사랑이다. 이런 이설(異說)을 어찌 감미롭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때로는 독주(毒酒)가 약이 되기도 한다. '영혼의 무기'가 그렇다. 자주 흠뻑 취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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