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들의 꿈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 지음, 송병선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2월
평점 :
절판



 솔직히 말해 이 책은 내게 전혀 예기치 않게 받아버린 선물과도 같았다.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는 오늘날 중남미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거의 보르헤스와 맞먹을 정도의 평가를 받고 있지만, 어찌 된 일인지 우리나라에 번역된 것은 그리 많지 않았다. 과문한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알기로 우리나라에 나온 그의 작품은 딱 둘 뿐이다. 하나는 '모렐의 발명', 다른 하나는 '러시아 인형'. 전자는 장편이고 후자는 단편집이다. 카사레스는 생전에 9 개의 장편을 썼는데, 소개 된 것은 초기작인 '모렐의 발명' 딱 하나인 것이다. '러시아 인형'은 그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발표한 단편집니다. 이렇게 우리나라에 소개된 것은 그의 첫 모습과 마지막 모습밖에 없다. 중간 과정이 싹 빠져 있는 것이다. 그러던 차에 카사레스의 네 번째 장편인 '영웅들의 꿈'이 나온 것이다. 다시 말해 중간 과정, 한창 자라나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모습을 열렬히 보고 싶었던 내겐 선물이라 할밖에.


 '영웅들의 꿈'은 '모렐의 발명'과 색깔이 많이 다르다.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부를만한 요소가 그리 드러나지 않는다. 현실 속 아르헨티나의 공간을 가져왔고 이야기 역시 리얼리즘적인 색채가 강하다. 물론 이것은 '모렐의 발명'이 가상 현실을 다루고 있고, '영웅들의 꿈'이 실제 현실을 다루고 있다는 차이 때문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영웅들의 꿈'이 '모렐의 발명'과 아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어느 정도는 느슨하게 연결되어 있다. 현실이 반복되고 진실을 찾아가는 과정이 미스터리적 구성을 취하고 있으며 진리는 외부가 아니라 전적으로 내부의 문제라는 것과 사랑이 이 모든 당황스럽고 혼란과 불안 속에 내던져진 우리네 삶의 유일한 구원이라는 게 그러하다.



 주인공은 가우나란 남자다. 어느 날 그는 경마에서 큰 돈을 벌었는데 그 돈을 친구들과 함께 모조리 써버리기로 작정한다. 그러다 우연히 가면을 쓴 여자와 만났다. 그는 단 번에 매혹되었는데, 술에 몹시 취한 상태에서 어쩌다 헤어져 버린다. 그는 여인을 잊지 못하고 내내 그녀를 찾아 헤맨다. 그러다 연극을 하고 있는 '클라라'를 만난다. 그녀와 사랑에 빠지는 바람에 잠시 가면을 쓴 여인을 잊지만, 그녀가 자기 말고 다른 남자와 데이트 한 사실을 알게 되자 멀어질 결심을 한다. 그러나 가우나는 배신을 당해 헤어지는 건 자존심이 상해 클라라를 비롯하여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이별하는 것으로 보게끔 그녀를 피하는 것으로 거리를 둔다. 대면 보다는 회피를 선택한 그는 비겁하다. 우리는 여기서 이 소설이 두 개의 대비되는 세계가 있는 것을 본다. 하나는 비겁자의 세계고 다른 하나는 영웅의 세계다. 그렇다. 제목의 '영웅들의 꿈'은 자신에게 아무리 상처가 되고 두려움과 역경을 가져다 주어도 피하지 않고 당당히 맞서는 자들을 나타낸다. 소설에서 영웅이란 마주 보는 자, 당당하게 겨루는 자다.


 이런 영웅에 가장 걸맞는 존재는 클라라다. 우리는 소설 마지막에서 가우나가 꿈처럼 겪었던 가면을 쓴 여인을 만났던 사건의 진실과 그것이 내내 반복되는 이유를 알게 된다. 클라나는 자신에게 닥쳐올 운명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지만 가우나처럼 피하려 하지 않는다. 마법사인 아버지가 남겼던 예언을 믿고 누군가를 보호하기 위해 자신의 전부를 건다. 이렇게 소설 '영웅들의 꿈'은 믿음과 영웅에 대한 소설이다. 그것을 비겁자에서 영웅으로 나아가는 가우나의 여정을 통해 보여준다.


 그의 옆에는 한 아이가 있었다. 귀가 덮일 정도로 모자를 푹 눌러썼으며, 손으로 도자기 그릇을 들고서 돈을 받았다. 그 아이를 보자 가우나는 이렇게 생각했었다. '불쌍한 그리스도! 손에 침 뱉는 그릇을 들고 있다니! 이것은 배꼽 잡고 웃어도 될 일이야!' 하지만 그는 웃지 않았다. <달빛>을 들으면서 그는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과 인류 전체와 우애를 돈독히 하겠다는 긍정적인 충동을 가슴으로 느꼈고, 선을 위해 행동하겠다는 억누를 수 없는 충동을 느꼈으며, 보다 나은 사람이 되어야하겠다는 우울한 욕망도 느꼈었다. 목이 매어 눈물을 흘리면서 그는 마법사가 죽지 않았다면 자기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p. 293 ~ 294)


 믿음이 나오는 것은 비겁자가 되느냐, 영웅이 되느냐가 바로 세상에 대한 나의 해석으로 이뤄지기 때문이다. 그 해석이란 세상을 내가 어떻게 바라보고 있느냐 하는 것을 나타낸다. 즉 '믿음'이다. 이런 믿음의 테마는 클라라 아버지인 마법사의 예언을 통해 제시된다. 비겁과 영웅의 대비와 마찬가지로 '영웅들의 꿈'엔 또 하나의 뚜렷하게 대비되는 두 세계가 존재한다. 하나는 믿음이 없는 자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믿음이 있는 자의 세계다. 소설 초반에 가우나가 속했던 '발레르가 박사'의 세계가 전자의 것이고 클라라 아버지 세계는 후자의 것이다. 때문에 소설 후반에서 클라라를 두고 발레르가와 가우나가 결투를 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가우나가 클라라처럼 영웅이 되기 위해선 발레르가의 세계를 찢고 나아가지 않으면 안되니까 말이다.


 믿음이란 결국 자신에게 달린 것이므로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느냐는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나를 보는 시선이 곧 세상을 보는 시선인 것이다. 그 시선을 통하여 발레르가 박사와 마법사의 세계는 또 다른 의미를 얻는다. 전자는 속물의 세계요, 후자는 영웅의 세계라는 것을. 모든 걸 하나로 연결지어 생각해 보면 발레르가의 세계는 이런 의미가 된다. 믿음이 없어 오로지 세상의 기준에 눈을 맞추어 자신의 부족과 불행만을 보고 보다 고귀한 가치를 위하여 정면으로 맞서야 할 때 피하려 한다면 비겁자요, 속물에 지나지 않는다고. 마법사의 세계는 여기에 정확히 반대의 의미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영웅은 어떻게 될 수 있을까? 이 질문을 바로 카사레스가 이 소설을 통해 보여주려는 궁극적인 것이 아닐까 싶다. 그는 분명하게 말한다. 영웅은 자신의 결단을 통해 형성한다고.


 '모렐의 발명'이 그랬듯이, 우리는 어떤 존재를 찾기만 하면 삶이 달라지리라 생각하지만 그런 건 대개 가상 현실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가우나가 그토록 찾아 헤맸던 가면을 쓴 여인이 실은 아주 가까이에 있었던 것처럼, 진정한 우리의 구원은 사실 저 바깥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것이다. 원효대사가 해골에 고인 물을 감로수라 여기며 마셨던 것에서 깨달은 '일체유심조'와 통하는 이야기라 말하겠지만, 그래도 어쩌랴! 진리는 물과 같아서 담는 그릇에 따라 그 모양은 달라질지언정, 본질은 전혀 변하지 않는 것을.


 이런 구도의 소설로 읽으면 왜 아돌포 비오이 카사레스가 보르헤스에 버금가는 중남미 문학의 거장으로 평가받는지 잘 이해될 듯 하다.

 그렇지 않아도 너무나 좋은 문장이 많아서 그렇게 여길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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