퐅랜, 무엇을 하든 어디로 가든 우린
이우일 지음 / 비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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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이들은 봄이나 여름 혹은 가을에 여행서 읽는 것을 좋아하겠지만, 저는 겨울에 읽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어떤 이들에게 여행서는 다만 정보 취득이라는 실용의 목적 뿐이겠지만 저는 다른 목적으로 읽습니다. 굳이 내게 쓸만한 정보를 얻고자 함이 아닌 것입니다. 그래서 이불 밖으로 발도 빼기 싫은 겨울에 여행서를 더 즐겨 보는 것입니다. 여행서란 내게 상상 속 세계로의 초대장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언제 그 곳으로 가기 위해 여행서를 읽지 않습니다. 공상을 위해서 입니다. 그 풍경 속에 있는 제 모습을 상상합니다. 글 속의 인물들을 내가 만나면 어떤 대화가 오가고 일들이 펼쳐질까 몽상합니다. 제겐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러므로 세세한 정보들이 가득 들어있는 여행서 보다 저자 자신이 겪고 경험한 여행 에세이 읽는 것을 선호합니다. 이를테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시드니' 같은 책 말이죠. 그 책 읽어보셨나요? 제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여행에 대한 책이었습니다. 마라톤에게 도대체 무슨 매력이 있는지 모르겠다는 분은 '시드니'를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마라톤'이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전략적이고 흥미로운 스포츠라는 걸 물씬 느낄 수 있으실 겁니다. 저는 원래 여행 에세이도 잘 읽지 않았습니다만, '시드니'를 읽은 후로 바뀌었습니다. 다른 책의 리뷰인데, 자꾸만 '시드니'를 언급하는 것은 제게 여행 에세이의 재미를 처음으로 깨우쳐 준 책이기 때문입니다.


 이우일의 '퐅랜'도 그렇게 해서 읽게 된 책입니다. 네, 이 책도 여행 에세이입니다. 



 가족 모두가 2015년에 미국 포틀랜드로 훌쩍 떠나서 2년 간 살아온 경험이 한 권의 책으로 엮이어 나온 것입니다. '퐅랜'이란 제목은 아마도 '포틀랜드'의 원어 발음이 아닐까 싶습니다. 제게 '포틀랜드'하면 떠오르는 것은 구스 반 산트 영화 감독입니다. '포틀랜드'라는 곳을 그의 영화를 통해 처음 접했기 때문입니다. 구스 반 산트 감독 자신이 포틀랜드 출신이기도 합니다. 데뷔작 '말라 노체'를 비롯해서 '드럭스토어 카우보이', '나의 고향, 아이다호', '굿 윌 헌팅', '엘리펀트'를 다 포틀랜드에서 찍었습니다. 이게 그의 필모그래피에서 재밌는 점이기도 합니다. 그의 작품 중 높은 평가를 받는 것은 꼭 '포틀랜드'에서 찍은 것이거든요. 뭔가 '포틀랜드의 힘' 같은 게 있는 걸까요? 그러나 토박이 구스 반 산트는 어쨌든 제겐 그런 힘이 있으리라고 잘 생각되지 않습니다. 구스 반 산트의 영화를 통해 제가 본 포틀랜드의 풍경은 참으로 쓸쓸하고 우울하며 절망적이었거든요. 특히 '나의 고향, 아이다호'는 정말...


 도대체 작가 이우일은 어디서 포틀랜드의 매력을 느꼈던 것일까요? 이렇게 책까지 낸 것을 보면 매력이 꽤나 큰 것 같습니다. 설마 주구장창 까기 위해서 책 한 권을 쓰진 않겠지요. 쓴다고 해도 누가 그런 것을 읽어줄까요? 그러니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읽게 되었습니다. 내가 미처 느끼지 못한 포틀랜드의 매력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일단 포틀랜드는 비가 참 많이 옵니다. 10월부터 다음 해 5월까지 우기가 계속된다고 합니다. 아, 가을과 겨울 그리고 봄 내내 비가 온다니... 상상만 해도 우울해질 것 같습니다. 그런 곳이 자전거 도시로 유명하다고 합니다. 포틀랜드는 '자전거의 도시'라는 별명답게 미국 최대 규모의 잘 정비된 자전거 도로가 있답니다. 그래서 미국에서 차가 없이도 살 수 있는 유일한 도시라고 하는군요. 이 점은 마음에 듭니다. 그리고 맛집도 상당히 많다고 합니다. 특히 요즘 유행하는 푸드 트럭이 아주 많다는군요. 비가 오지 않는 날에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며 다양한 푸드 트럭에서 이것 저것 골라먹는 제 모습을 상상하니 어느새 입에 군침이 가득 고입니다. 작가는 말미에 포틀랜드의 맛집까지 소개해 놓았더군요. 그렇지 않아도 포틀랜드는 해마다 재즈 페스티벌이 열려 재즈의 도시로도 유명한데, 그런 맛집에서 재즈 밴드의 연주를 들으면서 먹는다는 상상을 하니 공복감이 더욱 치밀어 오릅니다. 아아... 이 허기를 어쩌란 말입니까? 


각 글마다 이런 부록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것은 '포틀랜드 맛집 소개' 란입니다.

 이우일 작가가 직접 그린 삽화 또한 많이 들어 있는 책 읽는 재미를 높입니다.


 그런데 그 허기 보다 더 큰 것이 또 저를 옥죄어 옵니다. 솔직히 저는 이우일 작가가 포틀랜드로 떠난 게 다른 거 다 집어치우고 바로 이 때문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포틀랜드가 바로 수집가들의 천국이라는 사실 말입니다. 이우일 작가는 여러 가지 것을 수집하는 것으로 유명하죠. 그런 그에게 온갖 중고 물품이 넘치는 포틀랜드는 그야말로 매력적인 곳이 아니었을까요? 글에서도 그런 마음이 마구 묻어납니다. 자신이 원하는 물건을 구매할 때의 글은 글마저 저자 마음처럼 덩달아 신이 난 것 같거든요. 저도 못 말리는 수집 욕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글을 보노라니 허기 보다 더 큰 수집욕이 절 옥죄어 오더군요. 이처럼 여기 '퐅랜'엔 다른 여행서에는 잘 볼 수 없는, 오직 거기서 오래 산 자만이 쓸 수 있는 포틀랜드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다 읽고나면 굳이 직접 가지 않아도 이미 가 본 듯한 느낌마저 납니다. 후후.


 여행서에는 제가 만든 말이긴 합니다만 '이방인 버프'라는 게 있습니다. 현지인의 눈엔 별 거 아니고 오히려 나쁘게 보이는 것도 이방인의 눈에는 너무 좋게 보이고 매혹적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걸 달리 말하면 '이국적'이란 것이겠지요. 경주 사람들에겐 심드렁한 기와 지붕이 외국인 눈엔 전혀 다르게 보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죠. 이우일의 '퐅랜' 또한 그런 게 없다고 말하긴 어려울 듯 합니다. 그래서 그 역시 프롤로그에서 '이것은 지극히 나만의 퐅랜 이야기다'라고 단서를 달아 놓았겠죠. 하지만 그걸 감안하고 봐도 이 책 속의 '포틀랜드'는 참 매력적입니다. 이우일이 결심했듯이 정말 한 번 가서 오래 살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한없이 이국적인 것과 조우할 때 오히려 자유를 느끼고 보다 더 참된 자신의 모습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고 말했는데, '포틀랜드'도 그런 것을 줄 것 같습니다.


책의 마지막엔 이렇게 이우일 작가가 직접 그린 포틀랜드 일러스트 지도가 부록으로 들어있습니다.


 겨울은 여행에 어울리지 않는 계절입니다. 그러나 꼭 몸이 움직여야 여행일까요? 머릿속의 움직임도 여행이라고 얼마든지 부를 수 있지 않을까요? 마음 먹기에 따라서 우리들은 얼마든지 책으로도 아주 흥미로운 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건 제가 여러 번 경험한 것이기에 자신있게 말할 수 있어요. '퐅랜'은 겨울이라는 이유로 굼뜨는 육체의 한계에서 자신을 해방하여 내면을 통해 멋진 여행을 마련해주는 책입니다. 여기엔 노자도, 다른 준비할 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저 펼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어느 순간 당신은 비 내리는 포틀랜드 어느 거리에서 우산 없이 쏘다니는 많은 행인들과 중고 매장에서 기쁜 마음으로 이런 저런 빈티지한 물건들을 고르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것입니다. 풍경은 그렇게 찾아오고 일상의 여백이 홀연히 생겨납니다. 그 여백 속에서 비록 지금 있는 곳이 좁은 이불 속이라 해도 낯선 것이 가져다 주는 자유를 가득 호흡할 것입니다. 감히 그런 책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퐅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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