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마지막 대륙
미지 레이먼드 지음, 이선혜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12월
평점 :
절판



 삶의 시간이 유한하고 내일을 과거처럼 알지 못하며 남의 마음이 내 맘 같지 않은 이상 상실은 필연적이다. 누구나 그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잘 안다고 해서 상실로 인한 고통이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알고보면 사람이 살면서 하는 모든 일의 근본에는 이토록 고통을 가져오는 상실을 어떻게든 줄이려는 마음이 있다. 누구는 그 아픔이 너무 두려워 혼자 되기를 고집하기도 하고 또 누구는 더 많이 가지고 더 높이 올라가 상실이 가져다 주는 고통에서 달아나려 애쓴다. 그러나 상실은 능력이 뛰어난 술래다. 아무리 잘 숨고 멀리 달아나도 언제든 반드시 찾아내거나 따라잡는다. 이토록 삶에 상실이 본질적으로 내재되어 있다면 우리가 더 많이 생각해야 할 것은 상실이라는 사건 자체보다 그 이후여야 하지 않을까? 다시 말해, 어떻게 하면 상실로 인한 고통 속에 주저 앉거나 자멸하지 않고 잘 감내할 것인가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런 상실 이후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만드는 소설이 하나 있다. 그것이 바로 미지 레이먼드의 '나의 마지막 대륙'이라는 책이다.


 미지 레이먼드, 잘 모르는 작가다. 이 책을 읽게 된 것은 오직 소설의 배경이 남극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존재가 충만한 곳보다 부재하는 쪽을 선호하다. 내가 가장 가고 싶고 머물고 싶은 곳은 사막이나 높은 산 또는 북극 혹은 남극이다. 남극은 내 오랜 로망 중 하나다. 살면서 언제고 한 번 꼭 가서 머무르고 싶었다. 요즘은 남극 관광도 한다고 들었기에 예전처럼 불가능한 꿈은 아니게 되었다. 그래서 이 소설이 남극이 배경이라기에 그 때를 위해서라도 읽어 본 것이다. 정작 읽고 나선 남극 관광에 대한 내 생각을 접어야 했지만.



 이 소설은 '뎁 가드너'라는 여성이 주인공이다. 그녀는 남극의 펭귄을 연구한다. 원래는 사진 전공이었지만 상실로 인한 고통을 겪다가 펭귄에게 매료되어 전문적으로 연구까지 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펭귄은 그녀에게 삶이 준 두 번째의 기회였다. 해마다 그녀는 남극으로 떠난다. 하지만 그렇게 하는 것은 개인이 책임지기엔 너무나 큰 비용이다. 그래서 그녀는 '코머런트 호'라는, 남극 크루즈 여행선에서 일한다. 그녀가 소속된 비영리 연구 단체인 '남극 펭귄 프로젝트'는 코머런트 호와 연구자들이 그 배에서 관광객들을 일하며 무상으로 남극까지 올 수 있도록 제휴했던 것이다. 뎁은 남극에서 온전한 자유를 느끼며 할 수 없이 미국에 있어야 할 때면 언제나 다시 그 곳으로 돌아가길 바란다. 남극, 그 곳은 뎁에게 상실로 인한 아픔이 치유되는 곳이다. 뎁만이 그런 것은 아니다. 소설은 뎁처럼 남극에서 치유와 새로운 희망을 찾는 이들을 계속해서 등장시킨다. 리처드와 케이트 부부 그리고 켈러 같은 사람을.


 켈러는 뎁에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다. 뎁의 연인이니까 말이다. 켈러도 커다란 상실을 겪었다. 원래 잘 나가는 변호사였던 그는 하나밖에 없는 아이를 잃었다. 그로 인해 삶의 모든 의욕과 희망까지 무너져 버린 그는 남극에서 뎁처럼 삶의 두 번째 기회를 찾았다. 그렇게 켈러와 뎁은 닮았다. 둘은 서로에게 급속히 빠져들지만 상실의 고통에서 아직 헤어나오지 못한 켈러는 뎁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지 못하다. 뎁 또한 켈러를 정말 사랑하면서도 그와 정착하는 것에 일말의 불안을 느낀다. 삶은 하나의 모습이 아니라 언제나 이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남극 또한 그렇다. 치유의 땅인 그 곳은 죽음의 땅이기도 하다. 이것은 소설 초반 데니스라는 남자의 죽음에서 나타난다. 그 또한 이별의 고통을 잊기 위해 남극을 찾았는데, 그만 죽어버린 것이다. 사고인지 자살인지 분명하지 않다. 이 죽음은 사실 하나의 복선이다. 소설은 처음부터 '난파 며칠 전'이란 형태로 전개되는데(이 소설은 한 챕터가 바뀔 때마다 시간이 과거와 현재를 마구 넘나들기에 그 시간을 항상 유념하고 읽을 필요가 있다.), 이처럼 여기엔 아주 커다란 비극이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난 남극 관광에 대한 계획을 사실상 포기했다. 아무튼 바로 그 어마어마한 비극을 위한 복선이 데니스의 죽음인 것이다. 이렇게 남극은 희망의 땅이자 절망의 땅이다. 남극을 연구하기 위한 비용을 남극을 파괴시킬 뿐인 관광 사업을 통해서만 조달할 수 있는 것과 똑같은 모순이다.


 그러므로 남극은 뎁의 말처럼 '더 이상 갈 곳이 없는 사람과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는 사람'을 위한 곳이 아니다. 남극이 온전한 치유를 줄 수 없는 건 세상 여느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다. 결국 소설이 전하고자 하는 바는 확실하다. 나 바깥의 것에 기대어 상실의 아픔을 치유하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그 어떤 바깥의 것도 치유를 줄 수 없다.


 '뜻밖의 수확'이란 말이 있다. 내겐 이 소설이 정말 그렇다. 별 기대없이 읽었는데 진짜 좋았다. 인용하고 싶은 문장이나 대목들이 많은데, 그걸 다 쓰면 너무나 길어질 것 같아서 하지 못하는 게 유감이다. 번잡한 일상 속에서 왠지 너무 붕붕 떠다니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면 이 소설을 한 번 벗해보는 것도 좋겠다. 읽다보면 어느새 침잠하게 되고 내 삶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된다. 이야기 자체도 새롭고 흥미롭다. 저자가 실제 펭귄 연구를 했던 체험을 토대로 썼기 때문에 소설의 모든 상황에서 현실감이 넘쳐난다. 남극에 대해 관심이 많다면 이 책을 통해 간접 경험을 해 보는 것도 좋으리라. 어쨌든, 당신이 내 지인이라면 일부러라도 연락해서 무조건 추천하고 싶을 정도로 마음에 드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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