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변의 피크닉 스트루가츠키 형제 걸작선
스트루가츠키 형제 지음, 이보석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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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년대에 우리나라에서 영화 좀 본다고 말하기 위해선 마치 통과 의례처럼 필수적으로 알아야만 했던 러시아 감독이 하나 있었으니, 그가 바로 영화로 시를 쓴다고 평가받는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였습니다. 이걸 잘 보여주는 사례 하나가 있는데, 바로 처음으로 극장에서 개봉된 그의 영화 '희생'입니다. 유럽 사람들조차 영화가 너무 어려워서 흥행 실패한 이 작품이 우리나라에선 영화광들이 너도 나도 앞다투어 보는 바람에 흥행을 하여 유럽을 깜짝 놀라게 한 것입니다.


 물론 저도 그 감독에게 빠진 영화 키드 중 하나였죠. 대학 다닐 때 철학 논문을 그의 영화를 주제로 할 정도로 말이죠. 언제나 구원이라는 주제에 집착했던 그의 필모그래피 중에서 딱 두 편의 SF 영화가 있는데, 하나는 스티븐 소더버그가 리메이크 한 바도 있는, 스타니스와프의 원작으로 하여 '솔라리스'고, 나머지 하나는 이번에 소개할 아르카디 스트루가츠키와 보리스 스트루가츠키 형제의 소설인 '노변의 피크닉'을 원작으로 하여 만든 '잠입자(STALKER)'입니다. 저는 이 두 작품을 주로 칸트의 '초월적 이성'과 관련하여 풀어나갔는데, '솔라리스'는 원작 소설까지 번역되어 도움을 많이 받을 수 있어 좋았던 반면, '노변의 피크닉'은 번역되지 않아 무척 아쉬웠던 기억이 지금 새록새록 떠오릅니다. 어쨌든 그렇게 글을 쓸 정도로 정말 좋아하는 작품입니다. 그 때 산 비디오를 아직도 이렇게 소장하고 있을 정도로 말이죠. 그러니 이번에 나온 이 소설 또한 여간 반갑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원작 소설의 작가들 역시 '잠입자'의 시나리오에 참여했지만 원래 타르코프스키 감독 자체가 원작을 그대로 재현하는 감독은 아닌지라 소설은 어떤 영화와 또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이제야 비로소 그 오래된 궁금증을 풀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말이 나온 김에, 소장하고 있는 '잠입자' 비디오와 이번에 나온 '노변의 피크닉'을 함께 찍어 봤습니다.


 우리나라에선 지금에서야 소개되었지만 해외에선 이미 77년에 번역 소개되어 지금은 가장 대표적인 러시아 SF 중 하나로 엄청난 추앙을 받고 있는 작품입니다. 물론 이 소설에 영향을 받은 작품들도 많구요. 가장 최근까지도 그러합니다. 이를테면 '스파이더맨 홈커밍'을 들 수 있겠네요. 거기서 메인 빌런인 벌처가 했던, '어벤저스'의 뉴욕 침공 때 외계인이 남긴 유류물을 수거해 그 기술을 몰래 사고 파는 행위들 있잖아요? 그것이 바로 '노변의 피크닉'에 나오거든요. 이 소설의 주인공 '레드릭 슈하트'란 남자가 그와 비슷한  일을 합니다. 생존을 위해 누군가의 의뢰를 받아 목숨을 걸고 금지 구역에 몰래 들어가서 외계인이 남긴 물건을 가져오죠. 영화만이 아닙니다. 음악도 있습니다. 2013년에 영국의 프로그레시브 락 그룹 'GUAPO'가 발표한 음반이 바로 그것입니다.



 '노변의 피크닉'을 읽으신 분들이라면 앨범 제목만 봐도 이 음반이 '노변의 피크닉'을 주제로 한 작품이라는 걸 아실 듯 합니다. 앨범 제목인 'HISTORY OF THE VISITATION'은 '노변의 피크닉'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필먼 박사가 쓴 책의 이름이니까요. 네, 이 앨범은 '노변의 피크닉'을 바탕으로 하는 컨셉(음반의 모든 곡을 하나의 주제로 통일한 걸 가리키는 말입니다.)앨범인 것입니다. 이렇게 다양한 분야에서 다양한 방면으로 영향을 끼쳤습니다. 물론 거기엔 'S.T.A.L.K.E.R'나 '메트로 2033'과 같은 게임도 포함되지요.


 외계인과의 접촉을 다루는 소설이지만 정작 외계인은 나오지 않습니다. 등장하는 것은 외계인이 잠시 머물다 간 지역에 그들이 남긴 물건 뿐입니다. 이것이 이 소설이 가진 가장 독특한 점입니다. 영화 'E.T'나, '클로즈 인카우터'처럼 조우 그 자체를 다루지는 않고 그 '여파(aftermath)'를 더 많이 다룬다는 것 말이죠. 소설은 필먼 박사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하기까지 합니다.


 '인류가 존재한 이래 가장 중요한 발견은 방문이라는 사실 자체입니다. 방문자의 정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어디서 왔는지, 무엇을 하러 왔는지, 왜 그렇게 잠깐 머물렀는지, 그 후 어디로 사라져 버렸는지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인류가 우주의 외로운 존재는 아니라는 사실을 이제 분명히 알게 됐다는 게 중요하지요." (p. 18 ~ 19)


 이런 시도는 SF 소설 역사상 처음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감히 바로 이런 점이 이 소설을 무엇보다 특별하고 꼭 시간을 들여 읽을만한 존재로 만든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외계인이 등장하는 여타의 소설과는 달리 이 소설은, 특히나 윤리적인 관점에서, 전혀 다른 질문을 독자에게 하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일단 윤리라는 것을 어디까지나 타자에 대한 나의 태도에 관계된 문제라고 한정시키도록 하죠. 그런데 그 때까지 외계인이 등장하여 직접 대면하는 것을 다뤘던 소설들은 공통적으로 외계인에 대해서는 수많은 질문('그들이 누구고, 이런 것을 어떻게 할 수 있지?' 등등)을 해댔지만 정작 그 '외계인'이라는 타자를 바라보는 나 자신에 대해서는 의문을 갖지도,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사실 그렇게 나타났던 외계인들 조차 엄밀한 의미에서 타자는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 모두 인간이 가진 이성이라는 범주 내에서 이해가능한 존재들이었죠. 영화 'E.T'를 생각해보면 잘 아실 겁니다. 아니면 '별에서 온 그대'도 좋구요.


 그런 존재들에게 우리가 '이건 정말 이상하다. 진짜 외계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구나!'하는 점은 별로 보이지 않을 겁니다. 그들의 사고도, 행동도, 모두 우리가 헤아리거나 예상하는 범위 내에 있으니까요. 이건 이상하죠.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와 전혀 다른 환경과 사고 방식의 산물이니까요. 원래는 개미가 물고기를 만나는 것 같아야 하는 겁니다. 그런데도 그들과 소통이 가능하고 그들의 내면을 헤아리며 행동도 예측할 수 있다? 그러면 그건 이미 외계인이 아니지 않을까요? 그저 외계인이라는 가면을 쓴 인간에 불과한 게 아닐까요?


 달리 말하면, '외계인'이라는 점에서 더욱 더 인간에게는 절대적으로 타자인 그런 존재마저도 우리는 이처럼  '인간주의적인 시선' 속에 가둬 보고 있었다는 겁니다. 나랑 닮았거나 별 차이가 없는 존재이었기에 굳이 나 자신에 대해서도 질문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던 것이죠.


 그러나 절대적 타자는 필연적으로 나 자신에게 질문을 제기합니다. 그런 존재들은 지금까지의 내 합리적 이성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도 없고, 예측할 수도 없어서 끝내 내가 지금 갖고 있는 지식이나 하고 있는 생각들이 옳은 것인가 하고 의심과 회의를 움트게 하니까요. 그런 식으로 절대적 타자는 나의 완결성에 흠집과 균열을 내고 겸허의 자각과 변화의 용납을 자아냅니다. 그래서 '노변의 피크닉'은 정말 대단하고 중요한 작품이라는 것입니다. 이 소설은 외계인이 나왔던 다른 SF 소설은 줄 수 없던 것, 그 의심과 회의를 통한 겸허와 변화를, 가져다 주니까요.


 영어 판 '노변의 피크닉' 표지입니다. 영화 '잠입자'에 나오는 장면을 표지로 썼네요.


 바로 이것이, 요즘 같은 때에는 더욱, 우리가 이 소설을 만나야 하는 이유가 됩니다.

 왜냐하면 지금은 전세계적으로 나의 완전무결함을 애써 믿거나 남에게 강요하고 있는 시대이니까요. 미국의 트럼프와 일본의 아베, 시리아의 IS 그리고 브렉시트를 단행한 영국이 대표적입니다. 다들 내가 가지고 있는 정체성이 절대적인 진리라는 믿음으로 타자를 용납하지 않고 있지요. 그들이 타자에게 허용하는 것은 딱 두 가지 뿐입니다. 자기처럼 바뀌거나 아니면 제거되거나. 네, 이러한 모습은 2차 대전의 독일 나치와 그리 다르지 않지요.


 아마 스트루가츠키 형제들이 이런 소설을 쓸 수 있었던 것도 당시 소련 체제가 역시 한 몫 했을 겁니다.

 그 때의 소련이란, 독일 나치와 어깨를 견줄 만큼 엄혹한 전체주의 사회였으니까요. 특히나 형제가 열심히 이 소설을 집필하던 무렵의 60년대는 소련이 바깥으로 자신의 힘을 엄청나게 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체코슬라바키아는 소련 침공으로 '프라하의 봄'을 잃어버렸고 헝가리 역시 같은 꼴을 당해야했습니다. 소련은 자신의 체제 지속을 위해서라면 타자의 자유와 행복 따위는 깡그리 없애버릴 수 있는 나라였던 겁니다. 이런 '천상천하 유아독존'식의 자기 중심주의로 똘똘 뭉친 소련을 보면서 그들은 더욱 과연 자신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이념이나 신념이 옳은 것인지 스스로 질문할 수 있는 소설을 써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틀림 없습니다. 이런 점은 소설 속의 한 박사가 한 다음과 같은 말에서 더욱 분명해집니다.


 아주 원대하고 고귀한 정의를 말해 보지요. 이성이란 주변 세계를 해치지 않으면서 그 세계의 힘을 이용하는 능력이다.(p. 227)


 여기서 방점은 분명 주변 세계를 해지지 않는다는 데 찍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야말로 당시 많은 이들에게 고통과 절망을 주었던 소련이 하고 있는 것과 정확히 반대되는 일일 테니까요. '노변의 피크닉'은 그런 그들의 생각이 낳은 최상의 결과물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시작을 여는 필먼 박사의 짧은 인터뷰를 제외하면 모두 네 개의 파트로 이뤄져 있으며 세 번째 부분을 빼면, 모두 가장 탁월한 '스토커(stalker)'인 레드릭 슈하트의 입장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 남자가 사실 소설의 진짜 주인공으로 소설은 그의 9년이란 시간을 다루고 있지요. 그 9년의 시간 속에서 레드릭은 결혼을 하고 아이까지 가지는 등 자신의 삶에 지속 가능한  점차 안정적인 형태를 부여하는데 아이러니 하게도 그러면 그럴수록 더 크게 구역의 여파에 자신의 삶이 흔들리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러한 흐름이 이 소설에선 정말 중요한데, 왜냐하면 이것을 통해 진정한 주체성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처음 레드릭이 소설 속에 등장할 때는 구역으로 여행을 떠나는 그룹의 리더로 그는 정말 독립적이며 강한 리더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가 강한 주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여지없이 드러나는 장면이죠.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그런 주체성은 점차 훼손됩니다. 그토록 강했던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약하고 혼란스러운 모습이 도처에서 목격되는 것이죠. 그리고 마지막 장면, 그러니까 구역의 영향으로 인간이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 자신의 딸 때문에 그것을 고쳐줄 수 있는 금빛 구체를 찾아 다시 구역으로 들어간 최후의 여정에서 드디어 금빛 구체 앞에  다다르자 그는 자신이 짐승이라고 선언하게 됩니다.


 나는 짐승이다. 나는 말을 모르고, 나에게 말을 가르치지 않았고, 나는 생각할 줄 모르고, 그 더러운 놈들이 나에게 생각하는 법을 가르치지 않았다.(p. 330 ~ 1)


 레드릭의 고백 그대로 그는 자신이 정말로 원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언어를 잃었습니다. 그런데 이 언어란 과연 무엇입니까? 프랑스의 철학자 라캉에 따르면 언어란 한 개인을 사회화 시키는 가장 원초적은 도구로써, 우리는 언어를 매개로 자신의 진정한 주체성을 희생시키고 사회에 포섭됩니다. 그러므로 그 언어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잃어버렸다는 것은 진정한 주체성을 장악하고 있는 사회가 부여한 정체성에서 벗어 났다는 것과 동일한 의미입니다. 한 마디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진정한 주체성의 해방인 것이죠. 그것은 레드릭이 짐승이라 고백한 다음 하게 되는 다음과 같은 선언에서 두드러집니다.


 나는 내 영혼을 그 누구에게도 팔아넘긴 적 없으니까! 그건 내 것, 한 인간의 것이다!(p. 331)


 타자는, 그것도 헤아릴 수 없는 정체불명의 타자는 주체를 불안과 혼돈에 빠지게 만들기 때문에 위험한 것이라 우리는 배워왔습니다. 이방인을 잔뜩 경계하는 것도 그 때문이죠. 하지만 이 소설은 '과연 그럴까?'하고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실은 절대적 타자야말로 사회에 압도되어 자신조차 방기하고 있었던 진정한 주체성을 자각하는 매개체일지도 모른다고 하면서 말이죠. 그러므로 타자는 배척의 존재가 아니라 설령 그것이 끝없는 불안과 혼돈을 준다고 해도 끝까지 대면하고 대화해야 한다는 것도 더해서.


 도대체 이유를 알 수 없는 외계인의 짧은 방문과 그들이 남기고 간 정체 불명의 물건들에 대한 너무나 멋진 비유를 제목으로 쓴 '노변의 피크닉(ROADSIDE PICNIC)'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질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넌 지금 네가 생각하는 너를 진짜 너라고 생각해? 그런 너야말로 오히려 편협하고 협소한 자아가 아닐까?"라고 묻는 것이죠. 그들이 이 소설을 썼던 때와 오늘의 시대적 분위기를 생각한다면 한 번쯤 스스로에게 꼭 물어야 할 질문인데다 소설 또한 명불허전을 느낄 정도로 뛰어나기 때문에 꼭 한 번 만나보시라고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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