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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언덕 풍경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61
가즈오 이시구로 지음, 김남주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평점 :
하루는 미국에 이민 간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월마트에서 모욕적인 인종차별을 받고는 속상한 마음에 머나먼 곳에 있는 나에게까지 전화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외국에 나가면 꼭 한 번은 심한 향수병에 걸린다고 하는데 정말인 것 같다면서 요즘은 어쩐지 뿌리가 잘려나간 나무가 된 기분이다.'라며 울컥하는 어조로 그는 말했다.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은 가즈오 이시구로 때문이다. 가즈오 이시구로는 올해 노벨문학상을 탔다. 워낙에 많은 사람들이 관심 있고 세계적으로 권위가 있는 상이니만큼 나 또한 수상 작가에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 세계를 순서대로 제대로 한 번 파봐야겠다고 생각했고 데뷔작,인 '창백한 언덕 풍경'부터 일단 손에 잡았다. 그 소설을 읽다가 문득 친구가 생각났던 것이다. 소설에 나온 주인공이 실은 그 친구와 그리 다르지 않은 내면의 풍경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삶의 새로운 가능성을 믿고 변화를 찾아 떠났지만 그건 또한 자신이 안전하게 거하고 있던 껍질이 깨어지는 것과 같아서 전보다 더 많은 타격에 당황하는 모습을 말이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데미안'에 나오는 유명한 말과 같다.
알은 세계이다. 새롭게 태어나려 하는 자는 누구든 이전의 세계를 파괴하지 않으면 안 된다.
'창백한 언덕 풍경'은 바로 변화에 따른 파열과 통증을 그리고 있다.
주인공은 가즈오 이시구로의 고향이기도 한 일본 나가사키에서 50년대에 살다가 지금은 두 번째 남편인 영국인을 따라 영국에 와서 살고 있는 에츠코라는 여인이다. 남편도 죽고, 첫 번째 남편과 낳았던 첫째 딸인 게이코도 자살한 지금, 그녀에겐 영국인 남편과 낳은 둘째 딸, 니키밖엔 없다. 그녀는 과거 일본의 기억을 잊기 위해 영국 이름을 지어주길 원했지만 남편이 일본식 이름을 고집하는 바람에 영국 이름도 아니고 일본 이름도 아닌 니키가 되어버렸다. 이름에서 나타나듯 니키는 경계의 존재다. 영원히 거주하는 것도 아니고 영원히 방랑하는 것도 아닌, 한 마디로 얼레에 아주 느슨하게 연결된 연과 같은 존재인 것이다. 그런 니키가 첫째 딸 게이코의 자살로 상심해 있는 에츠코를 위로차 찾아오고 게이코 때문에 에츠코는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나가사키에서 만났던 사치코와 그녀의 어린 딸, 마리코를 떠올린다.
때는 1950년대.
일본은 2차 세계 대전의 패전을 딛고 한국 전쟁을 기회로 한창 재건과 부흥의 기치를 올리고 있었다. 소설의 주된 배경은 가즈오 이시구로의 고형이기도 한 나가사키. 올해 상영한 영화 '군함도'로 더욱 유명해진 이곳은 아시다시피 2차 대전 때 원자 폭탄이 떨어진 도시다. 절망과 죽음만이 가득했던 폐허. 하지만 현재엔 그런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소설은 주인공 에츠코가 사치코와 한 '케이블카' 탑승과 그녀의 시아버지인 오가타 상과의 '평화 공원' 외출을 통해 두 번이나 나가사키가 과거와 완전 다른 곳이 되고 있다는 것 강조한다. 시대는 그렇게 변하고 있었다. 과거의 질서나 가치관 그리고 상처는 빠르게 유물이 되었고 사람들 기억에서 사라져 갔다. 에츠코는 사치코 옆에서 완전히 변모한 나가사키를 내려다보며 오늘부터 낙관주의자가 되어 행복한 미래를 설계하겠다고 결심한다. 사치코는 그런 변화를 아주 적극적으로 껴안으려는 인물이었다. 창공 높이 한없이 오르기만 하는 연처럼 그녀는 새로운 삶을 손에 쥐기 위해 미국인 남자를 사귀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안정된 현실과 딸 마리코의 강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미국으로 가려한다. 내 친구가 그랬듯.
소설엔 이렇게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이 있다.
사치코가 그렇고, 변하는 나가사키를 보며 과거의 상처에 얽매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에츠코도 그러하며 나가사키에서 누구나 알아주는 고귀한 신분이었다가 전쟁으로 가문이 완전히 몰락하여 이제는 작은 국숫집을 운영하는 후지와라 부인도 그러하다. 후지와라 부인의 과거 위세를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에츠코의 시아버지 오가타 상은 몰락한 그녀의 처지를 더없이 슬퍼하며 그러고 어떻게 살 수 있을까 걱정하지만 정작 후지와라 부인 본인은 화려한 과거에 연연하지 않는다. 그는 변한 현실을 오롯이 받아들인다.
반면 시대가 그렇게 변했는데도 그것을 전혀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오가타 상이다. 그는 과거의 질서와 가치관에 연연한다. 그래서 일본 제국주의 때, 군부와 결탁하여 올바른 목소리를 낸 교사들을 함부로 해직시키고 체포당하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과오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은 시대의 희생자였을 뿐이라며 스스로 정당화하고 그런 과오를 언급하며 자신을 공격한, 아들의 친구였던 시게오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오히려 찾아가 따지려 한다. 그런 오가타 상이 에츠코에게 자주하는 말은 '그래도 옛 것이 좋다.'다. 영국으로 와서 완전히 달라져 버린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못하고 자살을 결행한 게이코도 여기에 속한다.
이렇게 보자면 오가타 상과 에츠코 그리고 사치코를 변화 앞에서 과거를 대하는 태도를 가지고 하나의 선으로 연결할 수 있을 것 같다. 오가타 상은 변화된 현실을 거부하고 과거만 존속시키려 하고 사치코는 그와 정반대로 변화를 위해 과거를 깡그리 지우려 한다. 이런 태도를 작가는 사치코가 전쟁 때 폐허가 된 도쿄에서 본, 자신의 아기를 두 손으로 물속에서 익사시키려 하는 여인의 모습으로 형상화 한다. 사치코 역시 소설의 마지막에서 자신과 함께 미국으로 가려 하지 않는 마리코가 애지중지하는 새끼 고양이들을 강물 속에 익사시킨다. '데미안'에 나왔듯, 새로운 세계를 만나기 위해 이전의 껍질을 파괴하는 것과 같다. 에츠코에 있어서 게이코의 자살 역시 이와 비슷한 의미라고 보인다. 니키에게 영국 이름을 고집했던 에츠코의 모습이 마리코의 새끼 고양이들을 죽이는 사치코와 은연중 닮아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가사키의 에츠코는 그 중간에 있다.
낙관주의자가 되기로 했다는 에츠코의 말은 '과거는 과거고, 미래는 미래다'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과거와 미래. 에츠코는 그 어느 하나도 섣불리 파괴하려 하지 않는다. 이른바 '절충주의'다. 이런 점에서 나는 특히 소설에서 두 장면에 눈길이 갔다. 소설 후반에 강변 언덕의 어둠 속에서 에츠코와 마리코가 만나는 장면과 마지막에 미키와 기차역에서 헤어지는 장면이다. 마리코도, 미키도 딸의 위치에 있고 모두 에츠코와 마지막 장면이라는 점에서 둘은 상당히 닮아있는데 연출 또한 그랬다. 마리코와 미키 모두 기묘한 충격 속에서 에츠코를 보는 것이다. 마리코는 공포 속에서 에츠코를 본다. 마리코가 내내 두려워했던, 자신을 강 건너 어딘가로 데려가려는 무서운 여인의 모습을 에츠코에서 봤기 때문이다. 미키는 충격이다. 자기처럼 변화에 온전히 자신을 내맡기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실은 어딘가에 강하게 매여있는 사람이란 걸 알았기 때문이다. 마리코는 과거를 고수하려 하고, 미키는 과거를 거부하려 한다. 이렇게 둘의 입장은 정반대다 하지만 그 순간, 에츠코를 바라보는 시선만큼은 꽤 닮아있는 것이다. 이유는 하나다. 에츠코가 절충주의이기 때문이다. 에츠코는 두 얼굴을 가진 야누스다. 마리코와 미키 모두 자신과 상반되는 에츠코의 얼굴을 보고서 놀란 것이다. 에츠코는 둘 모두에게 전혀 다른 가능성을 말하는 존재다. 그러나 섣불리 취할 수 없는 가능성이다. 그리스 신화 속 세이렌의 노래처럼 자칫하다간 파멸의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르기에. 자신이 언제까지나 거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세계의 껍질이 산산이 깨어지는.
그런데 이러한 절충주의적인 태도는 사실 가즈오 이시구로가 부모님을 따라 처음 영국에 왔을 때 가졌던 것이기도 하다. 그는 9살에 영국에 와서 이방인이 되었다. 이방인에겐 오직 하나의 운명만이 있을 뿐이다. 외톨이가 되지 않으려면 변화된 현실에 무조건 적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건 거부가 허용되지 않는 강요다. 가즈오 이시구로도 그랬다. 전범 국가 출신이라는 것 때문에 당한 인종차별, 자주 느꼈던 고향과 친구들에 대한 향수로 그는 자신이 이방인이라는 자각을 지녀야 했고 그때마다 일본은, 우리 또한 그러하듯이, 자신의 상상 속에서 한없이 이상화된 모습으로 구현되어 달콤한 유혹으로 찾아왔다. 그건 지금 있는 현실에 대한 거부와 변화에 대한 부정을 꼬드기는 속삭임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귀 기울일 수는 없었다. 적응하는 것 말고는 별다른 대안이 없는 이시구로에게 그 속삭임에 대한 반응은 아무래도 마리코처럼 달아나는 것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적응하는 것에 기를 쓰고 열을 올릴수록 남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 자신에게 힘겨움과 피로를 느꼈을 것이다. 그렇게 애써도 원하는 결과를 얻는 것 또한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기에 절망도 했을 것이다. 이방인은 다른 사람보다 현실의 중력을 더 많이 느낀다. 자연히 그 중력에서 벗어나고 싶은 열망도 클 수밖에 없다. 미키는 그런 저자의 열망이 형상화된 존재일 것이다. 마리코는 현실과 타협할 수밖에 없는 작가의 마음을 대변하는 존재였을 것이고.
그렇게 마리코와 미키 모두 실은 작가의 분신이며, 그 둘을 아우르며 그 사이에서 적절한 균형점을 늘 모색하는 존재로서 에츠코가 빚어졌을 것이다. 변화 앞에서 과거를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 특히나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처럼 정체성과 현실이 끝없이 유동하는 현대 사회인 것을 감안하면, 오가타 상이든 사치코든 누구의 손도 섣불리 들어줄 수 없으며 모든 것에 자신을 열어놓고 환경과 상황에 따라 이런저런 입장을 적절히 취하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길이라는 것을 암시하기 위하여. 주디스 버틀러의 말마따나 우리의 정체성이란 미리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마음먹고 행위를 한 것으로 비로소 형성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러나 이런 에츠코의 모습에 과거의 잘못은 전혀 반성하지 않은 채 무작정 이제 미래만 바라보자면서 화해를 요구하는 현재 일본의 모습이 자꾸만 겹쳐져 작가의 진심을 이해하면서도 순순히 받아들여지진 않는다. 특히나 이번 트럼프 방문 때 독도 새우에 대해 했던 것처럼 자신에게 불리한 것은 조금도 용납하지 않으면서 오만하게 비난만 해대는 행태를 보노라면 말이다. 이런 것을 적절히 걸러서 듣는다면, 무엇보다 저자가 살아온 경험이 눅진하게 배여있는 조언이기에 한 번 찬찬히 헤아려볼만한 가치는 있는 것 같다.
문득 밀란 쿤데라의 소설 '불멸'에 이런 말이 나왔던 게 생각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치통을 과소평가하는 지식인의 말이다. (...) 나의 자아는 사유에 의해 당신의 자아와 본질적으로 구별되지 않는다. 사람은 많으나 생각은 적다. (...) 만약 누군가 나의 발을 밟는다면 고통을 느끼는 사람은 나 혼자이다. 자아의 토대는 사유가 아니라 고통, 즉 제 감정 중에서 가장 기초적인 감정인 것이다.
알고 보면 '창백한 언덕 풍경'은 무엇보다 이런 감정의 풍경이며 그것도 변화로 인한 파열이라는 치통을 먼저 그리고 깊이 앓은 자가 그때의 심경을 짙게 투영하여 그려간 풍경화다. 딱히 사건이라고 말할만한 게 일어나지 않고 전개 또한 별다른 충격 없이 담담히 진행되기에 내게는 더욱 노벨문학상을 탄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소설이라기보다 그저 보통의 한 사람으로서 갑자기 닥쳐온 변화 앞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치열하게 고민한 것을 담백하게 풀어낸 기록으로 보인다. 그래서 나는 친구가 생각난 김에 다음에 만나면 바로 이 책을 선물할 생각이다. 여기, 너와 비슷한 고통과 고민을 가졌던 한 사람이 있다고. 부디 조금의 위안과 치유를 얻게 되길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