콜럼바인
데이브 컬런 지음, 장호연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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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럼바인. 이 이름을 잊기란 어렵다. 아직도 1999년 4월 20일에 일어난 그 사건을 TV에서 보도하던 모습이 생생하다. 그때의 기억이 조금도 퇴색되지 않은 것은 두 가지 사실이 내게 매우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대량 살상이 다른 데도 아닌, 그것과 거리가 너무나 멀어 보이는 고등학교에서 발생했다는 것. 다른 하나는 그런 학살을 자행한 범인이 테러리스트도 아니고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다는 것. 이 두 가지는 말 그대로 내 이성을 뒤흔들었다. 그 바로 얼마 전에 나는 고등학생이 연쇄 살인마로 나오는 웨스 크레이븐의 영화 '스크림'을 봤었다. 그걸 볼 때만 해도 고등학생이 사람을 무차별로 죽이고 다니는 것은 그저 영화 속에나 등장하는 일로만 알았다. 그랬는데, 그게 현실에서 벌어진 것이다. 충격이었다.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과 가진 상식으로 도저히 헤아릴 수 없었다. 마치 우리 세계가 또 다른 새로운 시대로 접어든 느낌이었다. 누구나 괴물이 될 수 있고 그 어디도 안전할 수 없는 시대로 말이다.


 때는 곧 밀레니엄이었고 종말에 대한 요한계시록과 노스트라마무스의 불길한 예언들이 횡행하고 있었다. 내게 콜럼바인의 학살은 밀레니엄 버그(Y2K로도 알려진)만큼이나 그런 예언이 실현될지 모른다는 전조로 다가와 불안을 더욱 가중했다. 다행히 역사는 그 모든 걸 비껴갔지만 콜럼바인 사건이 우리가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것의 신호라는 것만은 옳은 것으로 밝혀졌다. 2001년에는 세계무역센터에 여객기가 일부러 부딪치는, 이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사태가 일어났고 미국은 생화학 무기가 있다고 날조하여 이라크를 침공했다. 이처럼 바야흐로 폭력과 살육이 난무하는 시대가 열렸으니까 말이다. 그건 IS의 온갖 소프트 타깃 테러와 더불어 여전히 진행 중이다. 바로 최근만 해도 명절 연휴의 기분을 삽시간에 암울하게 만들어 버린 라스베이거스 학살 사건이 있지 않았던가. 한 노인의 총기 난사에 무려 58명이 희생당했다. 


 그 기원에 바로 콜럼바인이 있었다. 적어도 내겐 그렇게 보였다. 그래서 꼭 들여다보고 싶었다. 그 비극이 어떻게 하여 일어났으며 무엇을 남겼는가를. 상세하게. 하지만 알기 어려웠다. 콜럼바인 사건에 대해 알려주는 것은 구스 반 산트의 영화 '엘리펀트'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볼링 포 콜럼바인'말고는 만나기 힘들었다. 그 역시도 콜럼바인의 전과 후를 다 밝혀 총체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보다는 사건이 발생한 당일의 모습만 담거나 총기 규제와 관련한 하나의 문제의식으로만 접근하고 있어 전모를 알기에는 엄연히 한계가 존재했다. 결국 단편적인 정보들을 가지고 자의적으로 소화한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 이 책을 만났다. 데이브 컬런의 '콜럼바인'을 말이다. 10년 동안 사건을 취재하고 집필한 책이었다. 사건에 대한 것을 책으로 만나는 것은 처음이었고 사건에 대해 내가 알고 있는 것 또한 늘 미진하다고 느꼈기에 당장 손에 잡았다. 읽어보니 사건의 전후뿐 아니라 범인과 희생자 그리고 가족까지 포함하여 일어났던 일과 그들의 말을 정확하게(책의 마지막에 실린 주(註)는 책에 인용된 관계자들의 말과 그들에 대한 기록이 모두 실제의 것이라는 걸 증명하고 있다.) 기록하고 있었다. 내가 원하던 바로 그 책이었다. 솔직하게 여태껏 장님이 코끼리 만지듯 한 기분이었는데 이 책을 통해 비로소 콜럼바인 사건이란 코끼리를 온전히 들여다본 것 같다.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이 책이 '콜럼바인 사건' 이후에 그것이 사람들에게 무엇을 남겼는지에 대해서도 아주 비중있게 다룬 점이었다. 그것을 보면서 특히 다시 일어나선 안 될 비극적인 사건의 경우 그것의 원인을 규명하는 것도 필요하고 중요한 일이지만 그 이후를 살펴보는 것도 그 못지 않게 필요하며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똑같은 비극을 겪었어도 사람들의 반응은 결코 같지 않았다. 그건 범죄로 피해를 입은 자나 그 때 범죄 현장에 있었던 자라고 해도 마찬가지였다. 유독 인상 깊게 다가온 것은 진실을 알기 보단 자신이 믿고 싶은 쪽으로만 믿으려 했으며 그것에 위배되면 아무리 진실된 증언이라 해도 묵살하는 모습이었다. 죽음의 진실과 상관없이 순교자로 미화되어 신앙의 영웅이 되어버린 캐시 버넬은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었다. 비극은 저마다 가진 자의적 목적에 맞춰 멋대로 규정되었다.


 이런 왜곡된 정보가 마구 유포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기도 했다. 콜럼바인 사건은 미국 전역에서 가장 높은 관심을 받았지만 그 관심에 걸맞을 정도의 비극이 지닌 의미와 교훈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해 보려는 움직임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콜럼바인 사건을 일으킨 에릭 딜런의 삶을 그들이 남긴 기록을 통해 오래도록 끈질기게 추적했던 수사관 퓨질리어처럼 긴 시간을 들여 자세히 살펴보고 찬찬히 음미해야 하는 일이었지만 그러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그저 빠르고 편한 대답만을 원했다. 사이코패스로 밝혀진 에릭은 그렇다 치고 딜런 토마스라는 시인의 이름을 이어받았고 교양 있는 부모 밑에서 남부러울 것 없는 가정환경에서 자란 딜런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흔한 아이로 그런 아이가 아무런 개인적인 원한이 없는 학우와 선생님을 날려버리려 폭탄을 설치하고 거침없이 총격을 가하는 존재가 되었으면 분명 자신에게도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 마땅히 진실에 대한 깊은 관심과 비극의 반복을 방지하기 위한 자성(自省)이 이뤄져야 할 텐데도 그저 '괴물'이란 딱지를 붙여 저만치 던져두고선 자신과 상관없는 일로 간주하는 것을 택했다. 그건 어떤 특정한 시간대에, 특별한 사람에게만 일어난 비극일 뿐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어쩌겠냐? 산 사람은 살아야지...'. 타인의 비극 앞에서 우리도 곧잘 가지는 마음을 그들도 가졌던 것이다. 


 한 언론인이 정상으로 돌아간 학교 모습을 취재하려고 들렀을 때 아이들은 당혹해했다. 따분한 학교에 왜 관심을 갖는 거지? 그들은 정말 몰랐다. 그가 도시에서 왔다고 하자 아이들 표정이 밝아졌다. 거기 클럽은 어때요? 콜팩스 거리에 가봤어요? 정말 스트립 클럽이랑 술꾼이랑 창녀들이 있나요? 아이들은 물론 비극을 기억했다. 그 끔찍한 날을 어떻게 잊겠는가. 초등학교가 전부 폐쇄되고 다들 두려움에 떤 그날을. 당시 형 누나가 고등학교에 갇혀 있었던 아이들도 있었다. 부모들은 몇 달 동안 안절부절못했다. 그래서 덴버는 어때요? (p. 594~5)


 살아남은 자의 슬픔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비정(非情)을 보여주는 그 마음을 말이다. 아마도 우리가 그런 냉혹한 가면을 쓰는 것은 정말로 냉혹해서라기 보다는 비록 개인적으로 연루되진 않았어도 그래도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써 뭔가 그런 비극이 일어나도록 방치한 것만 같은 죄책감과 그런 감정을 느끼면서도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에 더하여 당한 이에게 어떤 도움도 줄 수 없는 부끄러움을 얼른 털어내기 위해서일 것이다.


 한 마디로 우리 대부분은 비겁하기에 비정해진다. 윤성희 작가의 단편, '가볍게 하는 말'에서 주인공의 고모는 주인공의 아버지 칠순 잔치에서 세 오빠가 서로 얼싸 안으며 지금까지 잘 살았다면서 자화자찬하는 것을 보고 못 참겠다는 듯 일어나 이렇게 일갈한다. "부끄러운 게 뭔지도 몰라, 오빠들은." 고모가 왜 이렇게 말했는지는 나중에 가서 이렇게 밝혀진다.


 장례식장에서 고모는 넋을 놓고 우는 친구의 아들에게 말했다. "어떻게 하냐, 그래도 기운내라. 산 사람은 살아야지." 고모가 손자의 손을 잡았다. "그렇게 말해선 안된다는 걸 그때는 이 할미가 몰랐단다. 그건 부끄러운 말이란다. 그건 예의가 없는 말이란다."(윤성희, '베개를 베다'(p. 29))


 맞다. 우리의 이러한 태도는 비극을 당한 자에게 예의가 없는 일이다. 진정 우리가 그들에게 예의를 다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다만 침묵하고 그 비극으로 들어가야 한다. 비극에 처한 자들의 말들로 온전히 우리를 채우고 그걸 단단히 기억해 두어야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걸맞은 예우란 오직 둘 뿐이다. 바로 용기와 기억다.


 그러고 보니 미국 드라마 '파고'에서 이런 장면이 있던 게 생각난다. 연쇄살인마가 조금 전에 살인을 하고 남의 차를 타고 돌아다니다 경찰에게 검문을 당한다. 경찰이 다가와 신분증과 차량등록증을 요구하자 연쇄살인마는 보여주는 것을 당당하게 거부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경관, 길 중엔 절대 가지 말아야 할 길이 있어요. 옛날 지도에는 그런 길을 여기 용이 있다고 적어 놓았었죠. 지금은 그러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용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경찰은 상대가 그렇지 않아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는데 그런 말까지 하자 두려움을 느끼고 그냥 보내준다. 용이 있는 길을 들어가지 않기로 작정한 것이다. 그러나 나중에 가서 그 선택이 더 큰 비극을 가져온 것을 알고는 엄청난 괴로움에 빠지고 결코 그 밤에 비겁했던 자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한다. 비극적인 사건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안락을 위해 잠시 비겁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얼른 망각을 선택하지만 바로 그 비겁이 족쇄가 되어 끝내 자신을 영원히 부끄러움 속에 결빙시킬 것이라는 건 예상하지 못하는 것 같다. 그 결빙이 언젠가 비극의 반복을 초래하리라는 것도. 저자는 에릭의 과거를 통해 여실히 보여주지 않았던가? 어제의 작은 방관과 망각이 오늘의 비극을 낳았다는 것을. 그러므로 내 삶에 콜럼바인 사건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길 바란다면 용기를 내야 한다. 바로 지금 용이 사는 곳으로 뛰어들어야 한다. 피한다고 해서 용은 없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번식을 통해 용이 있는 길만 많아질 뿐이다. 뛰어들어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없애지 않으면 안된다. 비극 또한 그와 같다. 반복의 사슬을 끊는 것은 동참의 용기와 기억의 칼을 늘 벼려 두는 것뿐이다. 데이브 컬런도 같은 생각이었다고 믿는다. 그 생각이 콜럼바인의 비극으로 뛰어드는 것과 자그마치 10년 동안이나 그 비극 속에 머무를 수 있는 용기를 주었을 것이다. 거기에 이제 우리가 답할 차례다. 그가 기록한 콜럼바인의 전모를 오롯이 기억하는 것으로.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에서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고 말했다지만 거대한 비극의 모습 또한 고만고만하지 않나 생각된다. 총을 맞은 콜럼바인의 교사 데이브 샌더스 실은 살 수 있었으나 경찰이 알고도 세 시간이나 방치하는 바람에 사망한 것에서 세월호 참사가 겹쳐지듯 말이다. 궁극적으로 비극에는 소유격이 없다. 모든 비극에 대해 우리가 예의를 갖춰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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