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퀴, 세계를 굴리다 - 바퀴의 탄생, 몰락, 그리고 부활 사소한 이야기
리처드 불리엣 지음, 소슬기 옮김 / Mid(엠아이디)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소리 없이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 비단 철만은 아니다. 철 보다는 좀 소음이 나겠지만, 바퀴 역시 철만큼 오늘 우리의 세상을 움직인다. 아마도 우리의 일상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을 바퀴. 출퇴근 때도, 여행 갈 때도 그리고 마트에서도 우리의 바퀴의 힘을 빌린다. 그런 바퀴는 어떻게 세상에 태어나 오늘날까지 이르게 되었을까? 만화나 영화에서 흔히 보았던 것처럼 바퀴는 정말로 석기 시대부터 있었을까? 그런데 문득 우리나라 조선 시대 사극 드라마가 생각난다. 사극 하면 흔히 보게 되는 가마. 고관대작들도, 양반집 규수들도 모두 네 사람이 드는 가마를 타고 다닌다. 생각해 보면 이상하다. 그  때 분명 소가 끄는 우마차가 있는 것을 보면 조선 시대에도 바퀴의 효용성을 충분히 알려진 것 같은데, 어찌하여 바퀴의 힘을 이용한 교통 기관이 발달하지 않고 계속 사람의 힘에만 의지한 것일까? 혹시 드마라를 보면서 이런 궁금증을 가져 본 적 없었는지? 나는 가졌다. 같은 시기, 유럽에선 말이 끄는 마차가 등장했다. 그런데 유럽보다 문명이 그리 떨어지지 않은, 아니 어떤 의미에선 더 발달했을지도 모를(오로지 과학적 잣대로만 문명의 발달 정도를 파악하는 것은 너무 협소한 시각이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 하는 말이다.) 조선에선 마차가 등장하지 않은 것일까? 그러고 보면 서양의 과학 기술이 본격적으로 소개된 뒤라 할 수 있는 일본 식민지 시대에도 사람들이 더 많이 이용했던 것은 사람이 끄는 인력거였다. 인력거가 일본에서 건너온 것을 감안한다면 동물을 사용한 교통 기관은 동아시아에서 자리 잡은 적이 별로 없다. 도대체 이것은 어찌된 연유일까? 바로 그 궁금증을 한 권의 책으로 모조리 풀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리처드 불리엣의 '바퀴, 세계를 굴리다'이다.



 이 책은, 간단하게 말하자면 바퀴의 역사를 담고 있지만 아주 논쟁적이다.

 왜냐하면 바퀴의 탄생과 흐름에 대한 기존의 학설에 정면으로 도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바퀴의 탄생에 있어서 결정적인 학설은 고고학자 스튜어트 피곳의 것이었다. 그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바퀴가 최초로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컬럼비아대에서 중동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리처드 불리엣은 그것이 틀렸다고 말한다. 바퀴를 사용했던 가장 초기 흔적은 원래 동시대 유럽과 메소포타미아 유적에서 모두 발견되고 있는데, 피곳이 메소포타미아 문명을 바퀴의 창세기로 삼은 것은 연대를 측정하는 '탄소-14 연대측정법'을 적용할 때, 비슷한 수명을 지닌 나무의 '탄소-14' 감소 수준을 측정해 비교하는, 흔히 말하는 '나이테 조정'도 함께 해야 하는데 그것을 하지 않아 일으키게 된 착오라고 꼬집는다. 그리고 나이테 조정까지 감안하면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아니라 유럽, 그것도 카르파티아 산맥의 구리 광산이 바퀴가 최초로 사용된 곳이라 주장한다. 그의 근거는 꽤나 설득력이 있는데, 그것은 책에서 직접 확인하시길 바라고 여기서 비로소 그의 진짜 의문은 시작된다. 왜 하필이면 여기일까? 이 질문은 이 책 전체를 이해하는데 있어 정말 중요하다. 왜냐하면 기술과 환경의 관계에 대해 우리가 고정관념 비슷하게 가지고 있었던 생각에 균열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기술과 환경.

 우리는 지금까지 기술이 환경을 이끌고 간다고 생각했다. 에디슨이나 벨의 허다한 발명 스토리처럼, 한 천재의 영감과 노력 속에 기술이 태어나고 그것이 우리의 환경을 혁신적으로 변화시킨다고 말이다. 그렇게 인간이 기술이 자연을 리드하고 환경은 수동적으로 끌려가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바퀴를 매개삼아 펼치는 리처드 불리엣은 그 생각과 반전된 모습을 보여준다. 환경이 기술을 창조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다시 말해, 인류의 역사를 도전과 응전으로 보았던 토인비처럼 환경이 인간에게 어떤 한계를 부여하고, 그 한계를 초월하려는 노력에서 자연스럽게 결실을 맺게 된 것이 '기술의 발전'이라는 것이다. 예컨대, 구리 광산이 그렇다. 기원전 5,500년 전 당시 사람이 굳이 지하로 굴을 파고 구리를 캐냈던 이유는, 그런 구리라야 비싼 값에 팔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대의 기술로는 아주 적은 구리밖에 못 캐냈고 많은 인부를 이용하면 수지가 맞지 않았다. 결국 적은 인원으로 보다 많은 구리를 캐내야 했는데, 그러다 보니 사람이 등으로 져 날라야 하는 구리의 양이 또 문제가 되었다. 그렇다면 소와 같은 짐승을 이용하면 되지 않ㅇ아 생각하실 것 같은데, 그 때의 기술로는 넓은 굴을 파는 게 어려웠기에 짐승은 굴로 들어갈 수 없었다. 이렇게 여기를 막으면 저기가, 저기를 막으면 또 여기가 터져 나오는 문제에 대처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바퀴를 이용하게 된 것이었다. 토인비 말대로 도전에 대한 응전의 결과였다. 이 때, 사용된 바퀴는 윤축이었다.


 바퀴에는 크게 세 종류가 있다.

 윤축, 독립 차륜 그리고 캐스터다. 이런 말이 생소하게 다가오실 분들을 위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윤축은 바퀴와 양 바퀴를 연결하는 축이 일체라 바퀴와 축이 함께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바퀴의 가장 초창기 형태로, 구리 광산에서 쓰던 바퀴도 윤축이었다. 독립 차륜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축은 움직이지 않고 바퀴만 움직이는 것을 말한다. 역사적으로 윤축에서 독립 차륜으로 발달되었다. 우리가 영화에서 흔히 보는 사륜 마차는 이런 독립 차륜이다. 캐스터는 차축과 바퀴가 모두 다르게 회전하는 것을 말한다. 마트에서 흔히 사용하는 카트의 바퀴가 이런 '캐스터'라 할 수 있다. 카트를 이용한 경험을 떠올려 보면 독립 차륜과 어떻게 차이가 나는지 금방 이해하실 수 있을 듯 하다. 카트는 우리가 방향을 이리저리 마음대로 바꿀 수 있지만 독립 차륜을 그렇게 할 수 없다. 서부 영화를 보면 마부가 마차의 방향을 급히 바꾸면 마차가 쓰러지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독립 차륜이라 그렇다. 바퀴는 이렇게 크게 세 단계로 발달되어 왔다. 우리는 바퀴가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이라 생각하는데, 리처드 불리엣은 실은 그게 근대에 들어와 새로 생겨난 생각이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바퀴의 역사는 비록 오래되었을망정 근대가 될 때까지 문명의 무대 변방으로 물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바퀴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그렇게 널리 사용 되지 못했다. 지형 때문이었다. 길은 좁고 험했다. 방향도 바꾸기 어렵고 옮기는 데 인간의 근력을 아주 많이 필요로 하는 바퀴 보다는 그냥 사람과 짐승이 옮기는 게 더 편했다. 사용이 별로 없으니 바퀴의 발달은 느렸고 그래서 독립 차륜이 생겨난 것은 그로부터 5백년이 지나, 지금의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남부 지방인 흑해 북부의 평야 지대였다.



 이 때엔 짐승이 끄는 우마차가 많이 사용되었다. 하지만 무역이 성행했기 때문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 우마차에 싣고 다녔던 것이 바로 주택이었기 때문이다. 흑해 북구 평야 지대의 사람들은 마차 위에서 먹고 자고 생활했다. 유목민이라서가 아니라 홍수의 공포 때문이었다. 기원전 5천년, 빙하기가 지나고 얼음들이 본격적으로 녹기 시작해 해수면이 올라갔다. 그래서 흑해 해안의 광대한 지역이 홍수로 물에 잠겼다. 더구나 그것은 한 번도 아니었고 시시때때로 다가왔다. 그래서 그들은 정주를 할 수 없었다. 그들이 독립차륜으로 된 우마차에서 살게 된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이렇게 독립차륜 역시 환경의 역습으로 나타난 것이었다. 바퀴는 그렇게 필요에 의해 우리 앞으로 도래했다. 우리가 영화에서 흔히 보았던 마차 역시 근대에 들어와 더욱 발전하게 된 교통의 발달이 가져온 게 아니었다.


 우리는 이것이 과학 기술이 가져온 수혜 같은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리처드 불리엣에 따르면 심리적 효과가 더 크다고 한다. 더구나 마차가 발달하게 된 것은 우리나라에서 가마가 발달하게 된 이유와 놀랍도록 흡사한데, 그 이유는 대체로 두 가지다. 하나는 여성 억압과 관계가 있다. 당시 남성 중심 문화는 여성을 가급적 이동하지 못하도록 했다. 남성들은 그것으로 여성과 차이를 만들려 했고 또 그것을 차별의 근거로 삼았다. 그래서 남성은 말을 타고 멀리 자유롭게 움직이지만 여성은 가마나 마차를 이용해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격리된 가운데 오직 짧은 거리만 움직일 수 있게 만들었다.



 우리는 마차가 처음부터 먼 거리를 이동했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것은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가능했다. 왜냐하면 당시의 남성들은 마차 타는 것을 아주 수치스럽게 여겼기 때문이다. 란슬롯이 선언했듯, 남자라면 마차를 똥을 피하듯 해야했다. 그것은 오로지 미천한 신분과 여성의 전유물이었다.


 16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남성들도 마차를 타기 시작했다.

 이렇게 말하면 많은 분들이 고개를 갸웃거릴 것 같다. 분명 우리는 그리스 신화에서 아폴로가 타는 태양 전차라든가, 영화 '벤허'에서의 경주 전차처럼, 남자들이 말이 아니라 바퀴 위를 타는 것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랬다. 사실 바퀴는 실용적인 면보다 과시적인 면에서 더 많이 사용되었다. 이를테면 왕과 여왕이 백성 앞에서 행진할 때처럼 말이다. 그럴 때 바퀴는 타고 있는 사람의 신분과 권위를 그것을 쳐다보는 사람들과 확실히 구별하기 위해 크기도 더 커지고, 외양도 화려해졌다. 요컨대 '바퀴살'은 그런 용도로 만들어졌다. 우리는 바퀴살이 하나의 나무에서 깍은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실은 그것은 여러 판자를 덧대어 만들어졌다. 꽤나 정교한 기술이 필요했기에 장인만이 할 수 있었다. 그런 바퀴는 누구나 쉽게 구하지 못하는 것이었으므로 가지고 있는 자의 권위를 수월하게 드러낼 수 있었다. 바퀴엔 이런 점이 있었다. 우리는 실용성이 바퀴를 지금처럼 발달시켰으리라 생각하지만, 사실은 바로 이런 과시 효과, 바라보는 사람들에게 미치는 심리적 효과 때문에 바퀴가 발달해 온 것이었다. 남자들이 16세기에 이르러 마차에 타게 된 이유도 거기 있었다. 당시 '후스파 전략'이란 게 있었다. 전차를 이용한 전략인데 곳곳에서 승리를 거둬 남성들에게 아주 인기가 많았다. 원래 전차는 조그만 장애물에도 걸려 넘어지는 등 전쟁에서 별 가치가 없는 존재였다. 하지만 후스파 전략은 전차를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로 만들어 놓은 것이었다. 이제 전차는 용맹의 상징이 되었다. 그리고 그런 용맹이야 말로 여성과 구별되려는 남성이 가장 바라마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남성들이 마차를 타게 된 것이었다. 마차의 탑승이 자신의 남성성 과시로 삼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이렇게 바퀴는 환경을 이끌기 보다 환경에 의해, 실용적인 면보다는 심리적인 면 때문에 오늘에 이른 것이었다. 이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기술에 대한 생각에 많은 변화를 가져온다. 어떻게 보면 스티브 잡스는 이런 기술의 모습을 보다 일찍 알아차린 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애플의 매력을 구매자의 심미적인 면과 심리적인 면에 보다 호소하도록 하고, 아예 구매자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중요한 매개체로 만든 것은 여러 면에서 16세기 이후 유럽 남성들이 마차를 타게 된 이유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일본이 인력거를 애용하게 된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았다. 기술은 그 자체의 효용성 보다 환경이나 사용자의 욕구 혹은 욕망에 맞아 떨어졌을 때 더 많이 발달했다. 스티브 잡스도 강조했듯이, 우리가 과학만큼 인문학도 열심히 연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결국 기술의 수명 또한 인간 이해와 밀접하게 연관되기 때문이다. 기술의 진보를 더 많이 원할수록 우리가 인간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야 한다는 진리를 이 책은 바퀴의 운명을 통해 충분히 납득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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