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처럼 희다 스노우화이트 트릴로지 2
살라 시무카 지음, 최필원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원래 3부작으로 계획된 살라 시무카의 '백설 공주' 3부작 중 두 번째의 것이 드디어 나왔다.

 첫 권, '피처럼 붉다'가 내겐 너무나 매력적이었으므로 후속작이 얼른 나오길 기다렸는데 기다림이 길었다. 거의 1년이 되어서야 만나게 되었으니.

 제목은 '눈처럼 희다(As White As Snow)'.



 시리즈의 제목은 모두 그림형제의 동화 백설공주 첫 부분에서 따왔다. 주인공 이름은 루미키. 핀란드어로 '백설공주'를 뜻한다. 아, 혹시 이 작품을 이 글을 통해 처음 만나시는 분들을 위해 말씀드리자면, 이 시리즈는 핀란드 작가 살라 시무카에 의해 원래 핀란드어로 쓰여졌다. 1편에서 뜻하지 않게 거대한 범죄조직 북극곰과 관련된 범죄에 연루된 루미키는 그 사건을 무사히 해결하고, 그로부터 4개월 후인 6월의 여름을 이제 체코의 프라하에서 보내고 있다.


 그녀는 홀로 관광을 위해 여기에 왔다. 세계 각지에서 몰려드는 온갖 이방인들로 넘쳐나는, 그야말로 타자들의 도시에. 그런 의미에서 그녀는 지금 그녀가 있었던 세계와 가장 멀리 떨어진 곳에 있다고 할 수 있다. 나는 여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살라 시무카는 루미키를 괜히 이 곳으로 보낸 것이 아니다. '백설 공주 3부작'은 단적으로 정의하자면, '백설 공주 다시 쓰기(rewriting)'라 할 수 있다.



 (전작 '피처럼 붉다' 리뷰에서 소개했던 안젤라 바렛의 '백설공주'의 표지.

 '눈처럼 희다'의 루미키는 지금 이런 상황이라 할 수 있다.)


 1부의 내용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동화 백설공주의 초기 부분과 유사하다. 그러니까 백설공주의 어머니가 죽은 뒤에 홀로 된 아버지가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여 다시 새 왕비를 얻게 되고 그러다 결국 백설공주가 쫓겨나는 부분말이다. 백설공주가 가혹한 운명 속으로 떨어지게 된 것은 따지고 보면 아버지가 더이상 아버지가 아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의 고통과 고독에만 너무 골몰한 나머지 자신이 정말로 돌보아야했던 딸을 밀어내고 모르쇠 했기 때문인 것이다. 읽어보면 아실테지만 이 부분은 얼개만 놓고 보자면 정말로 1권과 상당히 유사하다. 1권에서 우리는 루미키가 이름 그대로 백설공주의 분신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물론 과거의 백설공주가 아닌 대안으로써의 백설공주 말이다.


 그렇다면 2부는?

 2부는 바로 태어나 처음으로 와 본, 한없이 낯설기만 한 숲에서 일곱 난쟁이를 만나는 부분을 리라이팅(rewriting)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작가 살라 시무카는 루미키가 처음 보는 낯선 국적, 인종들로 넘치는 프라하로 보낸 것이다. 숲으로 쫓겨난 백설공주와 똑같이. 거기서 루미키는 숲 속 백설공주와 마찬가지로 맨발로 있다.


 루미키는 돌벽에 앉아 샌들을 벗고 다리를 끌어올렸다. 일본인 관광객들이 발가락을 꼼지락거리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젊은 여자 둘이 킥킥 웃었다. 맨발 처음 보나? 안녕하세요. 난 무민의 나라에서 왔어요. 무민도 맨발이잖아요.(p. 10 ~ 11)


 그런 루미키는 프라하에서 정말로 일곱 난쟁이를 만난다. 물론 진짜 난쟁이는 아니고 그 난쟁이들이 이루고 있던 공동체와 똑같이 작은 규모의 가족과 같은 공동체를 만나는 것이다. 그것도 종교 공동체다.


 더 놀라운 사실은 루미키를 그 공동체와 만나게 해 준 장본인이 바로 그녀의 언니라는 사실이다. 루미키는 마치 무슨 운명의 장난처럼 자신의 언니라 주장하는 소녀를 만나게 된다. 그녀의 이름은 젤렌카. 그녀는 루미키의 아버지가 프라하에 왔을 때, 자신의 엄마와 사랑에 빠졌고 결국 자신을 낳았다고 한다. 사실 젤렌카의 말대로 루미키의 아버지는 한 때 혼자 프라하에서 오래 머문 적이 있다. 그래도 여전히 반신반의했지만, 루미키를 대하는 젤렌카의 모습에 거짓은 느껴지지 않아서 결국은 어머니가 사고로 강물에 빠져 죽는 바람에 고아가 되어버린 젤렌카를 가족으로 거둬준 종교 공동체까지 가게 된다. 젤렌카는 완벽에 가까운 가족 공동체라고 말했지만, 루미키가 활약하는 '백설공주 시리즈'에서 '완벽하다'는 말은 그만큼 불길하다는 것과 동의어이다. 과연, 그 공동체의 어둠을 한 기자에게 발설하려 했던 남자가 뜻하지 않게 죽고 그 남자를 우연히 알아 본 루미키에 의해 공동체에 서려있던 불길한 어둠이 서서히 드러난다. 이제 프라하에서의 시간은 루미키에게 전혀 다르게 변한다. 관광의 시간이 아니라, 언니일지도 모를 젤렌카를 음험한 공동체에서 구해내는 것으로.


 '눈처럼 희다'에서는 백설공주에게 또다른 삶의 의미를 주었던 일곱 난쟁이의 공동체가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백설공주'에서 일곱 난쟁이와 함께 한 삶은 완벽한 가족의 모습이었다. 따스하고 사랑이 넘치는. 하지만 이 소설에서 그런 일곱 난쟁이와의 공동체는 전혀 다르게 나타난다. 지배와 종속, 거짓과 착취 그리고 탐욕과 죽음의 공동체로. 공동체의 리더는 늘 순수를 말하며, 구성원들 또한 순수를 주문처럼 외우고 다니며 스스로 순수하게 되리라 마음먹고들 있었지만, 실은 그 순수는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위한 것이었으며 그 또한 자신을 좀 더 손쉽게 착취하게끔 만들어주기 위한 이념적 도구일 뿐이었다. 여기서 제목의 '눈처럼 희다'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분명하게 드러나게 된다.  그리고 이런 공동체의 모습에서 우리는 살라 시무카의 '백설공주 시리즈'가 실은 백설공주를 페미니즘적으로 다시 쓰고 있는 것이라는 걸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시무카가 리라이팅을 통해 동화 '백설공주'를 공격하는 것은 '일곱 난쟁이의 공동체가 어떻게 가능했는가?'에 있다. 동화에서 백설공주는 가사 일에 전념한다. 백설공주는 혼자 그들을 위해 8인분 음식을 준비하고, 그들이 아침에 일하러 나가고 가면 여덟 명이 먹은 그릇들을 닦고 청소를 하며 빨래를 한다. 난쟁이들은 먹는 것도 함부로 먹고 옷이나 도구를 아무렇게나 던져 놓으며, 옷이 더러워지는 것에 별 신경도 안 쓰기 때문에 그들이 비록 난쟁이라 할지라도 백설공주가 혼자 감당해야 할 일의 몫은 엄청나게 많다. 하지만 그 어느 판본을 봐도 난쟁이들이 백설공주와 그 일을 함께 했다는 말은 없다. 알고 보면 일곱 난쟁이들은 귀찮은 가사 일을 대신 해 줄 식모를 그것도 급여 없이 들여 놓은 것이나 마찬가지다. 한 마디로 일곱 난쟁이들이 안전을 대가로 백설 공주를 착취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리고 그들의 따스하고 사랑 넘치는 공동체는 바로 그것을 통해 이뤄지며 유지되고 있었다. 동화에선 백설공주가 주체처럼 묘사되지만, 실은 볼모에 지나지 않았다. '눈처럼 희다'의 젤렌카처럼.


 시무카는 자신의 소설에서 일곱 난쟁이와 비슷하게 만든 공동체를 통해 그것을 공박한다. 그 공동체 구성원들은 루미키에게 내내 자신들이 가족이라고 말한다. 가족은 사회에서 가장 기본적인 사회화의 장소이다. 우리의 의식을 이루는 것들 중 아주 많은 부분이 바로 여기서 만들어진다. 우리가 자본주의적 인간형이라면 그 역시 토대는 가족을 통해 형성된다. 시무카는 그런 가족을 두 번째 소설에서 가져왔다. 바로 우리가 잘못 생각하고 있는 여성성이 기초적으로 만들어지는 장소를 드러내기 위해서다. 1권, '피처럼 붉다'와 비교해 보자면 범위가 확장되었다. 아버지에서 가족으로. 그것은 그대로 여성성이 조직되는 과정과 일치한다.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착취가 수월한 여성성을 설계하고, 그것을 가족 제도로 유포하는 경로인 것이다.(어려서부터 읽는 동화들 역시 여기에 일조하고 있다. 그래서 원래 동화작가였던 살라 시무카는 가장 대표적인 백설공주를 삼부작을 통해 리라이팅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을 나타내기 위해 시무카는 삼부작의 각 권마다 그 내부에서 희생당하고 있는 여성들을 기워놓았다. 1부는 엘리사였고, 2부는 젤렌카였다. 3부는? 3부도 물론 있다. 그것은 2권에 와서 비로소 있는 것으로 밝혀진 '언니'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들이 바로 진짜 백설공주들이다. 왜냐하면 동화 속 백설공주와 똑같은 아픔을 겪으니까 말이다. 루미키는 바로 이런 존재들을 구해낸다. 마치 새로 쓰인 백설공주가 옛날에 잘못 쓰인 백설공주를 구하는 형국이다. 그야말로 다시 쓰기(rewriting)'라 아니 말할 수 없다.


 '눈처럼 희다'는 한 번 잡으면 끝까지 내처 읽게 되는 재밌는 작품이다. 하지만 소설의 재미는 홀로 있지 않다. 은근슬쩍 동화 백설공주를 끌어들이며(무엇보다 '눈처럼 희다'에서 진정한 배후로 드러나는 사람은 백설공주의 그 분을 강하게 연상시킨다. 어디를 가나 주체가 되지 못한 공주들이 문제다. 그러고 보면 백설공주의 영원한 악역 여왕도 이제는 달리 해석해야 하지 않을까? 그녀는 남성 중심 사회에서 남성들이 바라는 여성성의 구현체가 되었을 백설공주를 스스로 떠나게 만들어 자신만의 주체성을 만들도록 해 준 사람일 수도 있다. 생각해 보면, 그녀가 남자들에게 둘러싸일 때마다 여왕은 나타나서 백설공주를 그 세계에서 벗어나도록 만든다. 예전부터 남성 사회로부터 독립하려는 여성들은 자주 마녀라든지 괴물이라는 외피가 씌워졌다. 여왕도 그런 매커니즘으로 악역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자연스럽게 여성성이라든가, 여성의 현실 같은 것을 생각해 보게 만든다. 시무카의 본심은 분명 여기에 있을테지만 그렇다고 자신의 주제가 서사를 해치도록 놔두지 않는다. 이야기는 이야기대로, 주제는 주제대로 잘 균형을 이루면서 빠져들고, 들여다 보는 깊이에 따라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도록 만들고 있다. 한 마디로 꽤 읽을만한 소설이다. 얇고, 십대 소녀가 활약한다고 해서 허투루 볼 작품이 아니다.


 (이왕 여왕 이야기가 나왔으므로 생각나는 그림책 하나가 있다. 바로 트리나 샤트 하이만의 '백설공주'다. 하이만은 칼데곳 메달상까지 받은 유명한 작가인데, 이 그림책이 이채로운 것은 여왕이 이야기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아니, 사실 백설공주의 이야기라기 보다 여왕의 이야기라도 보아도 무리 없을 정도로 꽤 많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다. 그것을 통해 하이만은 여왕이 왜 백설공주를 그렇게까지 할 수 밖에 없었는지 그 이유를 추적하고 있다. 그림책에서 여왕은 자신의 늙음을 서러워하다 우울증에 빠져버린 보통의 중년 여인으로 그려져 있다. 아래와 같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