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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보쟁글스
올리비에 부르도 지음, 이승재 옮김 / 자음과모음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시작부터 실례인지 모르겠지만, 먼저 질문이 있다. 혹시 팀 버튼의 영화 '빅 피쉬'를 좋아하시는지? 물론 아예 영화 자체를 못 보신 분들도 있고, 2003년에 나왔으니 봤어도 내용이 전혀 기억이 안 나시는 분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 분들은 잠시 제쳐두고, 오직 영화를 아시고 좋아하시는 분들에게만 이렇게 말하고 싶다. 그 영화를 좋아하신다면, 이 소설 '미스터 보쟁글스'도 정말 좋아할 것이라고. 그리고 이 두 작품이 다 마음에 드신다면 당신은 나의 동지(同志)라고.(물론 이 자격은 얼마든지 사양하셔도 된다.)

'빅 피쉬'와 '보쟁글스'는, 읽어보면 바로 아시겠지만 비슷한 점이 많다. 한 단어로 말하라면, 이렇게 표현하겠다. '상상의 전복'이라고! 해산물 전복(全鰒)이 아니라 뒤집는다는 뜻의 전복(顚覆)이다.
'빅 피쉬'는 허풍선이 남작의 부활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허풍을 떠는 아버지가 주인공인 영화다. 아들은 처음엔 아버지의 환상적인 이야기를 현실이라 믿지만, 점점 자라면서 그것이 결국 허풍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고 아버지와의 관계마저 소원해진다. 영화는 그런 아들이 이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아버지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하려 부모님 집으로 오는 것에서 시작된다. 영화는 주의깊게 그런 아들의 귀환이 현실 세상에서, 아버지가 주관하는 환상 세계로의 전입임을 표현한다. 그러자 다시금 아버지의 거짓말이 생명력을 얻고, 아들은 아버지가 말한 것이 정녕 환상인지 아니면 진실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게 된다. 그러다 아버지 최후의 순간 제대로 목도하게 된다. 아버지의 이야기가 결코 환상이 아니었음을. 그렇게 영화는 상상에게 최종 승리를 건네주며 끝마친다.
'보쟁글스'는 최종 승리 따윈 없지만, 상상과 현실이 치열하게 대립한다는 점에서 '빅 피쉬'와 맥을 같이 한다. 소설은 '빅 피쉬'와 마찬가지로 아직 아이인 아들이 화자 역할을 맡는다. 아들은 아직 미성년이란 점에서 더욱 두 세계 사이에 걸쳐 있는 존재라는 게 두드러지는데, 그 두 세계란 다름아닌 그의 가족이 중심을 이루는 환상 세계와 학교가 중심이 되는 현실 세계다. 여기서의 환상이란, 문자 그대로의 환상은 아니다. 정말은 작위적인 환상이다. 즉 주인공의 가족들이 현실 따위 가볍게 무시하고 자신이 창조한 환상에 푹 빠져 그 환상을 진짜 현실로 여긴다는 의미다. 이것은 그들이 어리석어서도, 미쳤어도 아니다. 오직 자신들의 투철한 신념에 따른 결과일 뿐. 그들은 상상과 현실 사이엔 아무런 차이가 없으며, 마찬가지로 거짓 역시 진실과 얼마든지 등가 교환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쉽게 말해, 그들의 상상이 그들에겐 곧 진정한 현실이라는 말이다.
반면 학교는 정확히 그와 반대다. 아들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세계를 뒷받침하는 질서는 학교에서 아무런 힘을 못쓴다. 아들은 곧 거짓말쟁이가 되고 정신 나간 녀석이 된다. 가족 사이에선 왕자님이나, 학교에선 얼간이에 불과하다. 매일 마다 다양하게 바뀌는 어머니의 이름이, 학교에선 오로지 하나의 이름으로 고정되듯이, 가족에선 온갖 거짓과 상상으로 풍성했던 현실도 학교에선 생선 가시처럼 좁고 종잇장처럼 얄팍해져 버린다. 이것을 좀 더 쉽게 이해하는데 딱 도움이 될만한 책이 있다. 바로 존 버닝햄의 그림책, '지각대장 존'이다.

아침 학교 등교길에선 자신의 상상 속에서 존재감이 한없이 컸던 존이 현실 질서를 뜻하는 학교에 편입되자 더없이 작고 초라해져 버리는 모습은 그대로 '미스터 보쟁글스'의 아들과 같다. 그래서 아들은 이 두 세계의 충돌 사이에서 혼란스러워 한다. 이제 아들의 부모는 선택을 해야 한다. 상상이냐, 현실이냐? 무엇을 택할 것 같은가? 나는 바로 이 선택 때문에 이 소설이 정말 마음에 들었다. 올해의 인상적인 소설 중 한 편으로 기꺼이 꼽고 싶을 정도다.
부모는 상상을 택한다. 아들이 학교를 당장 그만두게 하는 것이다. '미스터 보쟁글스'는 이렇게 현실의 중력을 벗어나, 기꺼이 상상의 구름 속으로 뛰어드는 소설이다. 여기서는 현실이 아무런 힘을 쓰지 못한다. 현실 세계에선 상상이 압도 당한다. 하지만 적어도 이 소설에선 현실이 오히려 상상에게 압도된다. 물론 현실이 상상을 가만 내버려두는 것은 아니다. 세금으로 역습을 감행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목전에 둔 순간조차 상상은 굳건히 자리를 보전하며, 성인이 된 아들은 기꺼이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려 한다. '빅 피쉬'의 아들과 똑같이.
'미스터 보쟁글스'는 원래 니나 시몬의 노래 제목으로, 거기서는 고독과 피로에 찌들어 핏기라곤 하나도 없는 현실에 춤으로 기분 좋은 혈색을 되찾아 주는 존재다. 경쾌한 스텝으로 단조로운 일상에 리듬을 주고, 율동으로 묘지의 침묵만이 존재하는 삶에 만발한 화원의 생기와 숲의 활력을 만드는 존재인 것이다. 바로 상상이 하는 일의 은유다. 우리는 언제부터 거짓을 그냥 거짓으로만 생각했을까? 왜 거짓이 지닌 다른 가능성, 이 꽉 막히고 무조음의 현실 세계에 창문을 만들어 다른 세상을 엿보게 하며, 다양한 변주의 선율을 자아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까? 상상 없는 현실은 그저 한없이 초라하고 빈약할 뿐인데.
'미스터 보쟁글스'는 어느새 우리가 잊었거나 외면해 버렸던 상상의 힘을 다시금 복권시키려 한다. 그리고 설득한다. 기꺼이 그 힘에 도취되어도 좋다고. 그런 의미에서 '미스터 보쟁글스'를 한 번 더 정의하라고 한다면, 이렇게 말하겠다. '상상의 전복(全福)'이라고. 이 전복은 해산물도, 뒤집는다도 아니다. 완전한 행복을 뜻하는 전복(全福)이다.
p.s 원래는 '상상의 전복(顚覆)' 뒤에 가스통 바슐라르나 쥘베르 뒤랑이 말한 상상의 힘에 대하여 죽 썼지만 본말전도일 정도로 쓸데없이 사설만 길어져 생략하고 말았다. 굳이 이 사실을 언급하는 것은, 혹시 상상이 어떤 힘과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이 두 분 학자의 안내와 도움을 받아보시라는 뜻에서다. 말하자면, 동지의 배려(同志)랄까. (그 자격을 사양하셨다면 포교의 일환이라 생각하셔도 무방할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