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천득의 수필 '인연'은 거듭된 재회는 실망을 줄 수 있다고 말하고 있지만 책에 관해서라면 예외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그걸 이번에 새로이 번역되어 나온 다카기 아키미쓰의 '문신 살인사건'에서 다시금 확인한다. 나는 이미 2007년에 동서판으로 읽었고 8년만에 이번에 검은숲에서 나온 판본을 읽었다.



 여기엔 다시 재회할 수밖에 없었던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가장 첫째는 아직 한 번도 소개되지 않았던 단편인 '어둠 속에 열린 창문'이 들어 있기 때문이었고 또 하나는 책 뒤에서 일본에서 '문신 살인사건'이 판을 거듭할 때마다 쓴 다카기 아키미쓰의 글을 모아두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실 이 글들이 꽤나 중요하다고 보이는데 왜냐하면 여기엔 일본 미스터리 세계에 있어 명실상부한 대표작이라 평가받는 '문신 살인사건'이 어떤 연유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으며 또 어떻게 착상되었고 집필되었는지 상세하게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처럼 '문신 살인사건'에 매혹되어 그 뒷 이야기마저 심히 궁금했다면 이 책은 꼭 읽어야할 필독서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431 페이지에 있는 '탐정 소설 작법'은 자신이 '문신 살인사건'을 어떻게 썼는지, 그 인물과 트릭의 설정 그리고 전개에 있어서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소상히 밝히고 있어 작품 이해를 더욱 도와줄 뿐만아니라 혹여 미스터리 소설을 쓰고자 하는 이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어 줄 것 같다. 이것만으로도 다시 '문신 살인사건'을 소장할 이유는 충분하지만 그래도 이건 보너스에 불과하다. 아무리 그래도 결국 본편의 퀄리티가 제일 중요하다. 그러니까 부가된 것 말고 핵심이 되는 작품이 예전 동서판 보다 나아졌는가를 따져볼 수밖에 없다. 그런 경우 역시 눈이 가는 곳은 표지와 번역이다.


표지로 눈이 가는 이유는 동서판의 표지가 좋게 말해서 너무 아스트랄 했기 때문이다. 나는 동서판 미스터리의 띠지를 보관하지 않는 편인데 이 것만큼은 이렇게 보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들에게 대놓고 보이기엔 차마 부끄러운 그 곳을 띠지로 가려야했기 때문이다. 동서판은 원래 검열의 칼날이 시퍼렇게 살아있던 70년대에 나왔는데 그런 상황에 어떻게 이런 표지가 버젓이 세상에 나올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저 불가사의하기만 하다. 아무튼 그래서 홍길동이 호부호형 못하듯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 책은 내 책이요!' 하지 못했던 상황이 빈번했다.('아, 빌린거야.', '어쩌다 보니 줍게 되었어.'라고 변명을 늘어놓는 상황) 하지만 '문신 살인사건' 작품 자체는 너무 좋아서 제발 표지 갈이가 되었으면 했던 책이다. 그러니 이렇게 예전 보다는 훨씬 점잖은 표지로 새로 나와 주어서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다. 내가 보기에 '문신 살인사건'은 표지 만들기가 꽤나 어려운 축에 드는 것 같다. 일본판을 검색해 봤는데 하나같이 표지가 별로였다.


 (오른쪽 맨 끝에 있는 것은 미국판 표지의 모습이다. 주된 소재가 밀실이 된 욕실에 팔 다리와 머리만 남아 있고 문신이 새겨진 몸뚱아리는 없는 엽기적인 사건이라 그런지 국적을 막론하고 표지가 참 괴이하다.)


 그런 표지들에 비하면 검은숲 판은 꽤나 잘 빠진 편에 속한다.



 그럼 이제 번역이다.

 동서판 '문신 살인사건'의 번역도 그렇게 나쁜 건 아니다. 다만 너무 오래된 번역이라 지금 감성으로 읽기엔 텁텁함이 많이 남는다. 그런 면에서 검은숲 판은 아주 매끄럽게 읽힌다. 역자가 '고백', '살아있는 시체의 죽음', '완전 연애'를 번역한 김선영인데 번역에 공을 많이 들인 것 같다. 무엇보다 이전 판과 비교해 읽어보니 단어의 선택에서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차지하고서라도 검은숲 판이 동서판에 비해 좀 더 정확하게 번역하고 있다는 점을 꼭 짚어줘야겠다. 아무래도 '문신 살인사건'은 불가능에 가까운 밀실 살인 미스터리를 다루는 본격물이다보니 독자에게 현장과 상황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주는 것이 핵심이기에 그렇다. 그런 면에서 이전 동서판은 좀 두리뭉실한 면이 있었고 현장의 상황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난점이 있었다. 그런데 검은숲 판은 그걸 다 해소하고 있다.


 예를 들어 이 미스터리의 핵심인 '3자 견제'를 설명하는 장면이다.

 먼저, 동서판에서는 이렇게 나왔다.


 오로치마루는 커다란 뱀이 요술 부리는 거잖아요. 이야기책을 읽어보면 커다란 두꺼비를 부리는 지라이야하고 커다란 괄태충을 타고 나타나는 쓰나데히메, 이들 셋은 도카구 산 깊은 곳에서 끊임없이 요술로 서로 싸운답니다.(동서판, p. 69~70)


 반면, 검은숲 판은 이렇다.


 오로치마루는 이무기를 부리는 마술사잖아요. 책을 보면 두꺼비를 부리는 지라이야와 거대한 민달팽이를 타고 나타나는 쓰나히데메, 이 세 사람은 도카쿠시야마 산 속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요술을 겨뤄요.(검은숲판 p. 78~79)


 동서판은 오로치마루를 설명하는 첫 문장부터 오로치마루가 뱀인 것처럼 독자를 혼동시킨다. 하지만 원래 오로치마루는 검은숲판이 말하듯이 이무기를 부리는 자다. 아마도 만화 '나루토'를 보신 분들은 이를 금방 이해할 것이다.


 (애니메이션 '나루토'에 나왔던 3자 견제. 처음 '문신살인사건'을 볼 때는 나루토를 열심히 보고 있을 때였는데 덕분에 나루토의 전설의 세 닌자가 일본에서 예로부터 전승되어오던 3자 견제에서 나온 것임을 알았다.)


 이외 괄태충이라는 알쏭달쏭한 말이 민달팽이로 정확해졌고(사실 이 민달팽이는 정말 중요한데, 밀실 현장에도 남겨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추리를 위한 중요한 단서인데 동서판은 괄태충으로 표기해서 도대체 이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나는 검은숲판을 읽고서야 그것이 민달팽이인 줄 알았다.) 동서판이 그저 도카구 산이라고만 했던 것도 도카쿠시야마 산이라는 구체적 지명이 되었다. 이런 면에서 번역이 보다 정확 혹은 정밀해졌다는 의미고 문장도 검은숲판이 소화하기에 깔끔하다.


 더구나 때로 동서판엔 생략된 곳도 존재한다.


 "하야카와 헤이치로, 흥, 문신 박사 따위와는 이제 와서 만나고 싶지도 않아. 아픈 걸 참고 문신을 하긴 했지만 구경거리는 아니라고 거절해버려. (동서판 p. 203)


 여기서 생략된 부분을 검은숲판에서 알 수 있었다.


 "하야카와 헤이치로, 흥, 문신 박사 따위 이제 와서 만나고 싶지도 않아. '남편도 저도 말주변이 없습니다. 아픔을 참고 문신을 새기기는 했습니다만 구경거리는 아닙니다."하고 쫓아내." (검은숲판 p. 242)


 이런 이유로 솔직히 검은숲판으로 작품을 훨씬 더 잘 이해하게 되었다. 이렇게 본편에만 초점을 맞춘다 하더라도 검은숲판을 소장할만한 이유가 충분해 보인다.


 여기까지 현재 나온 검은숲판과 예전 동서판을 비교해 보았다. 원래는 작품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생각이었는데 아무래도 달라진 표지와 번역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 없어 정작 작품에 대해선 아무 말도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그만 글이 길어지고 만다.


 일본 미스터리 문학 역사상 1948년에 나온 다카기 아키미쓰의 '문신 살인사건'이 지니는 위치는 각별하다. 요코미조 세이시의 '혼진 살인사건'에 많은 영향을 받은 이 작품은 모든 미스터리 작가들이 꼭 한 번은 도전하고 싶은 테마인 밀실 살인에 주력하고 있다.


 "이 창문은 바깥쪽에 쇠창살이 박혀 있어. 창문 안쪽에 자물쇠도 걸려 있는 듯하고, 유리는 전혀 부서지지 않았네. 그런데 입구도 안에서 잠겨 있다면, 대체 어떻게 되겠나?"

 "밀실 살인!"

 "바로 그걸세. 밀실 살인. 완전범죄. 모든 탐정소설 작가가, 아니, 현실의 범죄자가 영원히 갈구하는 엘도라도. 게다고 원해도 실현되지 않는 환상의 꿈이야."(p.113)


 그런데 사건 현장이 독특하다. 바로 '욕실'이다. 왜 하필이면 '욕실'로 했느냐에 대해선 작가 자신이 아예 작품에서 작중 인물의 입을 빌려 이렇게 밝히고 있다.


 종래의 일본 가옥은 그 구조상 밀실 살인이 불가능하다는 게 정설이다. 각각의 방은 맹장지와 장지문으로 간단히 옆방과 나뉘어 있다. 예컨대 독립된 공간으로 보여도 천장이나 마루 밑은 하나라, 천장 밑을 지나 벽장 속으로 숨어들거나 마루 밑을 지나 다다미라도 들어 올리면 간단히 침입할 수 있는 구조다.

 하지만 욕실은 순수한 일본 가옥 속에서도 다른 방과 완벽히 독립된 공간이다. 이 욕실 역시 바닥과 벽에 빈틈없이 타일을 바르고, 천장에도 모르타르를 발라놓았다. 문 아래위에도 틈은 없고, 마쓰시타 일행이 안을 들여다본 틈새로도 실이나 바늘을 넣기란 절대 불가능했다. 그 후 수사 당국은 현미경이라도 들여다보듯 세밀하게 현장을 수색했지만 비밀 통로  같은 단순한 트릭은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 (p. 120)


 이런 공간에 몸뚱아리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머리와 두 팔, 두 다리만 놓여 있는 것이다. 과연 범인은 이런 밀실에서 어떻게 살인을 저지르고 몸뚱아리를 가져갔는가가 '문신 살인사건'이 독자들과 대결하고자 하는 주된 수수께끼다. 정말로 여기엔 엘러리 퀸의 소설처럼 '지금까지 모든 힌트를 다 제시했으니 독자들이여 추리를 통해 범인과 그 트릭을 맞춰보라'는 뉘앙스의 도전문까지 나온다. 아무튼 욕실을 선택한 것은 일본 전통 가옥 구조상 욕실만이 온전히 밀실이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선 에도가와 란포의 '천장 위의 산책자'를 떠올리면 쉽게 수긍이 갈 것 같다. 그 소설에서 관음증 환자인 범인은 벽장을 통해 천장으로 올라가 돌아다니며 그 집에 있는 모든 남의 방을 엿본다. 이런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기에 엄밀한 의미에서 욕실말고는 밀실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이 부분을 읽다 혹시 느낄지도 모르겠는데 작가가 은근히 미스터리 오타쿠 취향을 드러내고 있다. 일본 가옥은 구조상 밀실이 불가능하다느니 욕실의 설정에 대해서도 가능한 완벽한 밀실이 되도록 빈틈없이 묘사한 것이라든지. 오래도록 미스터리를 애호하지 않았다면 나올 수 없는 말들을 하고 있다. 사실 그렇다. 그는 '문신 살인사건'을 쓸 때까지만 해도 그냥 좋아서 미스터리 소설을 즐겨 일던 사람이었다. 무려 20년 동안 한결같이. 그가 '문신 살인사건'을 쓰게 된 것도 창작에 뜻한 바가 있어서가 아니라 순전히 해고 당한 뒤로 생계가 막막했기 때문이다. 때는 패전 후였고 삶은 극도로 불안한 시기였다. 그러던 차에 자기가 좋아하는 미스터리 소설을 써서 먹고 살 수는 없을까 하고 썼던 것이 바로 이 '문신 살인사건'이었다. 당시는 에도가와 란포가 일본 미스터리계의 중흥을 위해 온갖 신인들의 원고를 받고 있었으므로 다카기 아키미쓰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란포에게 원고를 보냈다. 그런데 예상 외로 란포에게서 '소설로서의 결점은 있지만 이만한 트릭과 플롯이라면 추리소설 애호가들의 정열을 자극하지 않을 수 없다'란 호평을 받고 그 란포가 이와야 쇼텐 출판사에 출판 의뢰까지 하게 됨으로써 '문신 살인사건'은 전격적으로 출간되게 된다. 결국 그 란포의 도움으로 다카기 아키미쓰는 미스터리 작가로 먹고 사는 꿈을 이루게 된다.


 말하자면 그는 프랑소와 트뤼포가 말한 매니아 단계에서 최종 단계에 오른 사람이다. 20년간 열정적으로 미스터리 소설을 읽어온 끝에 작가로 성공까지 했으니. 그는 이후에 이어진 '가면 살인사건' '인형은 왜 살해되는가' '대낮의 사각' '유괴' '파계재판'등을 비롯한 수많은 작품을 통해 일본 미스터리계에서 거성처럼 빛나고 있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이 다 20년간 꾸준히 미스터리 소설을 독파하면서 쌓아온 내공 덕분이었으니 여기서 우리는 또 하나 읽음은 그냥 사라지지 않으며 널리 많이 읽어야 좋은 작품을 쓸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생각난 김에 소장한 다카기 아키미쓰의 작품들을 한 자리에 모아보았다.)


 덧붙여, 이 작품은 일본 패망한지 얼마 후에 쓰여 전후의 윤리적으로 혼란스럽기만 했던 상황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무뢰파'로 유명한 사가구치 안고가 딕슨 카의 '연속 살인사건'의 제목을 살짝 바꿔 쓴 '불연속 살인사건'과 같이 읽으면 그 때의 분위기를 한층 더 잘 느낄 수 있어 좋을 것 같다. 유명한 미스터리의 애호가이기도 했던 안고인 지라 솔직히 본격으로서의 재미는 좀 떨어지는 편이긴 해도 '연속 살인사건'은 충분히 흥미롭게 읽을만 하다. 안고의 '무뢰파' 담론을 알고 있다면 더욱 재밌게 읽을 수 있다. 작품이 상식적 수준의 윤리는 저 멀리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리는 작품이므로. 


  

 더운 여름이다. 마침 '크라임신'도 끝나고 두뇌 회전을 요하는 지적 자극이 필요하다면 이렇게 불가능에 가까워 보이는 트릭들과 대결하면서 보내는 것도 좋은 피서 방법이 아닐까 싶다. (그러고 보니 오늘 '지니어스 그랜드 파이널'이 시작되었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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