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자와 죽은 자 스토리콜렉터 32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김진아 옮김 / 북로드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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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년엔 세월호가 있었고 올해는 메르스가 있다.

 우리는 강한 기시감을 느낀다. 수수방관이나 다를 바없는 무력한 대처도 모자라서 비밀주의로 일관하는 정부, 컨트롤 타워의 부재, 언론 통제에다 진실을 알려는 국민의 욕구마저 다짜고짜 유언비어 엄단이라며 협박부터 하고 보는 모양새까지 마치 좀 더 광범위하게 세월호 참사가 또 한 번 반복되는 것 같다. 그러니 이런 생각이 든다. 메르스는 형벌이라고. 세월호 참사를 분명한 책임 규명과 엄중한 심판으로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우리들에 대한 신의 독화살이라고.


 세월호 참사를 우리는 일부만이 겪은, 그렇게 그들만의 아픔이라 여겼다. 하여 신은 그들의 아픔을 우리의 아픔으로 만들었다. 남의 일이기에 강건너 불구경했고 그랬기에 교통사고라며, 유족은 보상만 바라고 인양은 세금 낭비라는 망언도 서슴없이 했다. 하여 신은 우리들의 입을 막아버렸다. 보아야 할 것을 보지 않았고 생각해야 할 것을 생각하지 않았으며 말해야 할 것에 침묵했다. 누군가 비를 맞고 있을 때, 그 비 역시 언젠가 우리들이 맞을 수도 있을 폭우였기에 곁에 서서 함께 견디고 더불어 이겨나가야 했지만 우리 모두는 자기만 피할 수 있는 우산을 찾기 바빴다. 하여 신은 서로를 불안하게 보도록 만들고 아예 홀로 격리시켜 버렸다.


 메르스는 신의 집게 손가락이다. 그것은 똑바로 우리를 항하면서 다그치듯 책임을 묻고 있다. 어찌하여 외면했냐고, 해결된 것은 하나도 없는데 왜 서둘러 잊어 버렸느냐고. 메르스는 우연한 재난이 아니다. 세월호 참사가 그랬듯이. 그건 세월호 참사에 대한 우리의 방관과 망각에 따른 필연적인 귀결이다.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자주 보지 않았던가? 과거의 잘못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자들에게 역사는 언제나 가혹하게 복수해 왔다는 것을. 모든 위정자들은 과거의 아픔일랑 서둘러 잊어버리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라고 잘도 말한다. 하지만 과거를 제대로 결착 짓지 못하면 미래도 없다. 그런 미래란 그저 다이너마이트의 심지에 불과하다. 저 끝에서는 과거에 행한 무책임한 망각이 계속 불꽃처럼 타 들어와 결국은 폭발시키고 마는 것이다. 지금의 메르스처럼. 그러니까 세월호를 강 건너 불구경 했던 우리에게 남아있던 미래란 심지는 고작 1년 뿐이었다. 진정한 미래는 심지를 끊을 때 보존될 수 있다. 그리고 그 단절은 오로지 분명한 원인 규명과 엄중한 심판 그리고 통렬한 자성만이 가져올 수 있다.


 이제 한 권의 소설을 이야기하려 한다.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이란 소설로 이제는 제법 우리에게도 익숙할 이름인 넬레 노이하우스의 '산 자와 죽은 자'라는 작품이다. 당신은 이 소설을 어떻게 읽을 지 모르겠다. 어쨌든 나에게 이 소설은 정확히 지금 우리들 모습의 반영이었다. 소설은 복수극이다. 바로 그 복수를 당하는 대상에서 나는 우리의 모습을 보았다. 복수자에겐 리스트가 있다. 오래된 과거에 한 여인에게 죽음을 선사한 자들의 리스트다. 그런데 리스트에 오른 사람들의 죄책은 동일하지 않다. 이기적인 욕망으로 주도한 자들도 있고 단순히 조력한 자들도 있다. 협박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이 협력한 자들도 있다. 하지만 복수자의 총탄은 동일하게 그들이 가장 사랑하는 가족의 머리나 심장을 뚫는다. 죄질은 달랐으나 형벌은 동일하다. 얼른 떠오르는 말이 있다. 영화 '올드보이'에서 복수자였던 이우진(유지태가 연기했던)의 말이다. "조약돌이나 바윗돌이나 물에 가라앉기는 마찬가지다."


 인간적으로 납득되지 않는다. 아니, 어떻게 적극적으로 저지른 자와 그저 지켜보기만 한 자의 죄책이 같을 수 있느냐고 묻고 싶다. 맞다. 우리 형법은 분명히 '정범'과 '방조범'으로 구별하고 있다. 하지만 복수는 그렇지 않다. 복수자의 눈엔 이 놈이고 저 놈이고 다 '그 놈'이다. 중요한 잘못을 했든, 사소한 실수를 했든 그들 모두가 한 데 어우러져 대체 불가능의 소중한 사람의 목숨을 빼앗은 장본인인 것이다. 복수자의 눈에 개체는 보이지 않는다. 그저 모두가 똑같은 일원인 집단이 있을 뿐이다. 시선이 다르다. 법정이라는 제3자가 아니라 당한 당사자이기 때문이다. 방은진 감독의 영화 '오로라 공주'도 그러지 않았던가? 엄마인 주인공은 딸의 죽음을 초래한 이들 모두에게 행위의 경중을 따지지 않고 죽음으로 복수하지 않았던가. 이제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역사야 말로 우리의 방관과 망각에 대한 가장 가혹한 복수자라는 것을.


 "그들이 무관심이나 욕심 때문에 야기한 고통을 그들도 직접 겪게 하려는 거죠."('산 자와 죽은 자. p. 410)


 복수자인 역사는 단죄한다. "너희 모두의 책임이다." 우리는 항변하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그 때 우리는 문득 상기할 것이다. 이 시대에 우리가 당사자로 참여하고 있다는 것을. 이 시대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우리 자신이 만든 현실이라는 것을. 당사자인 우리에게 역사의 복수를 피할 구실 따윈 없다. 우리 모두가 한데 어울려 역사를 엉망으로 만들었으므로. 그래도 우리는 변호하고 싶다. "나는 그저 지켜보기만 했을 뿐이다. 침묵했을 뿐이다." 스스로도 그렇게 큰 잘못이 아닌 것 같다. 밥벌이의 힘겨움 앞에서 좀 더 제대로 된 현실을 만들기 위해 관심을 기울이고 노력하는 것은 모두 다 쓸데없는 오지랖으로도 보인다. 나무가 잘 자라려면 가지치기가 필수이듯이 이 각박하고 피말리는 세상에서 생존하려면 적당한 무관심과 망각은 어쩔 수 없는 게 아닌가!


 그런데 역사는 바로 그런 우리의 생각을 비난한다. 그런 항변이, 변호가 역사를 망친 진정한 장본인이라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는 우리의 본심을 보기 때문이다. 무관심과 방관 그리고 침묵과 망각. 그 모든 것의 근저에 있는 것은 주도적으로 역사를 망친 장본인들의 것과 별로 다르지 않기에 그렇다. 어쨌든 모두 일란성 쌍둥이와 같은 자기 본위적 욕망의 발로가 아닌가! 드러난 외형은 각자마다 다를지라도 뿌리는 같으니 역사에겐 모두가 똑같은 가해자인 것이다. 이우진이 오대수에게 "조약돌이나 바윗돌이나 가라앉는 것은 마찬가지다!"라고 말한 것도 그런 의미다. 개체는 다를 지언정 가라앉는 본성은 똑같듯이 아무리 오대수처럼 그저 자신이 본 것을 친구에게 말한 것 뿐이라 해도 자신과 누나를 괴롭힌 자와 본성에 있어서는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역사는 정의의 여신 디케처럼 눈을 가리고 있다. 그는 우리 개인의 행위를 보지 않고 그것을 낳은 본심을 본다. 그리고 그 본심에 있어서라면 우리는 누구도 스스로를 변호할 수 없다. 


 사실 레나테 롤레더, 파트릭 슈바르처, 베티나 카스파 헤세가 한 일은 중벌에 처해질 죄는 아니다. 이미 기억에서 지워지고 마음속에서 정리된 사소한 실수, 인간적인 실수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사소한 실수가 누군가에게는 깊은 상처를 남겼고, 긴 시간이 지난 후 무시무시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p.473)


 메르스는 그런 우리에 대한 단죄이다. 소설처럼 세월호 참사를 남의 일이라며 무심히 정리하고 기억에서 지워버렸기에 날아온 총알인 것이다. 하여 우리는 소설 속 리스트의 인물들과 똑같이 치사율 40%라는 죽음을 앞에 두고 있다. 우리의 무심과 망각에 대한 대가를 이토록 뼈저리게 치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산 자와 죽은 자'는 타우누스라는 가상의 마을 이야기라고만 할 수 없다. 사실은 바로 우리 자신의 이야기인 것이다.


 그런 '산 자와 죽은 자'는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가? 간단하다. 남의 비극을 사소하게 생각하지 말 것을. 아무리 오래된 과거의 아픔이라 하더라도 결코 잊지 말고 모든 진실이 드러날 때까지 관심을 갖고 기억할 것을 원한다. 소설에서 어머니의 죽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아버지의 진실을 찾아내려고 홀로 분투했던 여인 카롤리네 알브레히트처럼. 주인공 형사인 보덴슈타인과 피아 보다 바로 그 여인의 여정이 소설이 우리에게 바라는 모습인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를 보여주기 위하여 넬레 노이하우스는 가족을 가져왔다. 시간적 배경도 크리스마스와 설날 전후로 가장 가족적인 분위기로 넘치는 때로 정했다. 가족에 유념해서 보다 보면 여주인공 피아의 결혼이 소설에서 아주 의미심장한 부분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소설 초반에서 피아는 신혼 여행을 앞두고 있다. 피아는 신혼 여행을 다녀온 뒤 동거 중인 크리스토퍼와 정식으로 결혼할 작정이다. 하지만 저격 살인이 일어나자 그녀는 도저히 사건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어 신혼 여행을 미룬다. 크리스토퍼는 홀로 외국으로 떠나고 피아는 독일에 혼자 남아 수사를 계속한다. 결국 크리스토퍼와 피아가 완전한 가족을 이루는 때는 사건이 해결된 다음이다. 넬레 노이하우스는 일부러 에필로그까지 써가며 독자들에게 그들이 행복하게 결혼했음을 알려준다. 여기서 우리는 꼭 가족의 결합이 사건 때문에 저지당한 느낌을 받는다. 그것도 가장 가족적인 분위기의 크리스마스와 설날 전후 내내 말이다. 이것은 마치 사건으로 인해 가족의 성립이 더 이상 불가능해 진 것처럼 보인다. 아니나 다를까 범인은 이런 독백까지 한다.


 집에서 사람들의 말소리와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아이들은 만화영화를 보며 즐거워했다. 그림 같은 풍경이다. 새 집을 얻은 행복한 가정. 그러나 이 밤이 지나면 가정은 사라진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는 행복하지 못할 것이다.(p. 453)


 궁금해진다. 작가는 왜 이런 설정을 한 것일까? 왜 구태여 가족을 소설의 중심으로 가져왔으며 사건과 가족의 불가능성을 연결짓는 것일까? 생각해 보면 가족은 가장 개인적인 영역이다. 바로 여기에 이유가 있는 것 같다. 타인의 고통에 대한 무심함과 과거 잘못에 대한 망각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우리 개인의 삶과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라는 것. 우리가 사회가 저지른 타인의 아픔을 방관하고 그 잘못을 무심히 쉽게 잊는 것은 대부분 우리 자신의 삶과 그다지 관계 있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우리가 나 자신의 영역과 타인의 영역을 쉽게 나누고 담을 높이듯 그 경계가 확고하리라는 생각에 어디까지나 타인이 영역에서 일어나는 일이라 쉽게 치부하는 까닭이다. 하지만 과연 그런가? 넬레 노이하우스는 묻는다. 하여 그녀는 우리가 세월호 참사에 대해 행했던 것처럼 그러한 타인의 비극과 사회의 잘못에 대한 무심과 망각이 만연된 상황에서는 그 어떤 사적 영역의 형성도 불가능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그런 이유로 넬레 노이하우스는 용의주도하게도 범죄의 모습을 하필이면 '저격'으로 가져온 것이다. 날아가는 총알은 그 어떤 경계도 넘나들기에. 또한 피해자들은 가장 사적인 상황에서 살해당하지 않았던가.


 결국 기울어진 운동장에 서 있는 것과 같이 그 어떤 개인도 사회가 초래한 타인의 비극, 사회의 실패와 과오로 부터 벗어날 수 없다. 조약돌이든 바윗돌이든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복수자인 역사에게도 몸통이든 깃털이든 다 똑같이 보이는 것이다. 하여 우리는 사회의 가장 작은 자의 아픔이라 할 지라도 내 일처럼 관심을 갖고 귀기울이며 그들이 당한 일과 이유를 기억해야 하는 것이다. 세월호와 메르스처럼 무심과 망각은 언제나 반복된 비극을 낳기 때문이다. '산 자와 죽은 자'는 우리에게 그런 이야기를 한다. 2차 대전의 과오와 만행을 어느새 잊고 날로 우익화 되어가는 독일 국민만큼이나 비슷한 착각과 오해 속에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좋은 경고가 되어 줄 듯 하다. 타인을 아프게 하고 영혼마저 이기심으로 굳어버린 돌이 되지 않기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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