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 도종환 시화선집
도종환 지음, 송필용 그림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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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밤이 늦었다.
요즘은 쉬이 잠들지 못한다. 무더위 때문이 아니다. 어떤 여파다. 한동안 오래도록 새벽까지 일을 했는데 그게 끝난 지가 얼마되지 않는 탓이다. 관성이라는 게 생활 리듬에도 적용되는 모양이다. 시차 부적응 처럼. 밤만큼 시를 위한 시간은 없다. 불면의 밤엔 더더욱 그러하다. 낭독하노라면 밤이 가져다 주는 특유의 고독도 어느 정도는 씻을 수 있다. 원래는 사람 목소리가 있으면 좋겠다 싶어 라디오를 틀어놓곤 했는데 이제는 내 목소리로 공간을 채운다. 그렇게 읽었다. 도종환의 시를.


 새로이 모습을 바꾸고 다시 찾아왔다.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시집이 아니라 시화집이다. 고등학교 때, 축제가 오면 나는 참 바빴다. 문학 동아리의 시화를 부탁받곤 했던 것이다. 이런 경우 흔히 전문으로 하는 가게에 맡기지만 그럴 경우 뻔한 그림이 나올 확률이 높아서 그게 싫은 아이들은 연줄을 이용해 내게 의뢰해왔던 것이다. 여기서 연줄이란 거창한 게 아니고 여자친구를 말한다. 여하튼. 시화란 쉬운 것 같으면서도 어렵다. 언어의 조탁만큼이나 어려운 것이 그림의 조탁이다. 언어는 홀로 샘솟아 무언가에 어울려야 하는 제약이 없지만 그림은 언어에 어울려야 하는 제약이 따른다. 맞지 않으면 거들어주려 태어난 그림이 오히려 방해가 될 뿐이니 시보다 고민이 더 들어간다. 때문에 나는 꼭 먼저 시를 달라 청했고 그림을 그리기 전까지 시가 준비되지 않으면 거절하고 그랬다. 시화집을 볼 때 그 수고를 더 칭찬해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림을 그린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 시화집을 읽고 마음에 들었다면 그림을 그린 이도 꼭 기억해 두자. 그의 이름은 송필용이다. 슬프게도 날개에 사진 하나 없다. 소개글도 실리지 않았다. 시가 다 끝난 마지막에 추신처럼 붙어 있다. 흑, 왠지 내가 담당한 것처럼 조금 가슴 아프다.

그런데 원래 시를 위해서 그려진 그림이 아닌 모양이다. 몰랐는데 더 나중으로 가니 시화의 도판이 나와 있었다. 제작 연도가 다 다른 걸 보니 그림은 그냥 독립된 작품으로 시와 어울리는 것으로 가져와 배치한 것 같다. 흠, 이러면 별로 억울할 것도 없겠다. 도종환의 시야 감히 내가 뭐라 할 게재가 못된다. 시야, 어차피 시흥의 발현이고 이성 보다는 감성의 산물이니 어디까지나 주관적 취향의 대상일 뿐, 객관적 판단의 대상은 아니니까. 내게 그만한 깜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저 한 번 입에 시어를 머금기 시작하면 오래도록 음미하게 된다는 것만 얘기해 두자. 몰랐는데, 도종환의 시는 참 막걸리를 많이 부르게 하더라. 삶이 신산하고 사랑은 속절없으며 이별의 그늘 또한 짙어서 그저 외롭게 버텨가야할 인생이라고 시가 노래하고 있어서일까? 읽다보면 한 탁배기 생각이 간절했다. 거기다 총각김치 잘 생긴 놈으로 하나 골라서 한 입 크게 배어물면 좋을 것 같다. 시를 읽으면 취하고 싶다. 아프고 힘드니 뭐니 해도 살만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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