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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치도록 가렵다 ㅣ 자음과모음 청소년문학 44
김선영 지음 / 자음과모음 / 2014년 6월
평점 :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4/0719/pimg_7484811841040455.png)
누군가의 삶이 가진 부피는 관심의 크기에 따라 다르게 보이기 마련이다.
무심한 눈으로 보자면 그의 삶이란 그저 얇은 평면에 지나지 않는다.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저마다의 폭과 깊이가 있음이 드러나게 된다. 누군가의 삶이 평면으로 보이느냐 아니면 입체로 보이느냐는 어디까지나 우리가 얼마나 그를 이해하기를 원하는가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부모에게 있어 아이의 삶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오로지 아이가 얼마나 공부를 잘 하는지 그것만 관심있는 학부모의 눈으로 보면 아이의 삶은 공부 하나 밖에는 없는 얇은 평면일 것이나 사람이 성품이 아니라 성적으로만 평가받는 이런 교육 환경 속에서 과연 제대로 버텨나갈 수 있을까 염려하는 부모의 눈으로 보면 아이들의 삶이 저마다 가진 상처와 통증 그리고 고민들로 켜켜이 쌓여진 입체란 걸 알게 될 것이다. 공교육이 무너지고 있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수업 환경은 나빠져만 가고 학교 폭력은 심해져만 간다. 어제와 오늘의 일도 아니다. 오랜 시간 곪을 대로 곪은 문제다. 모두가 문제라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쉬이 해결 되지 않는다. 교육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전세계적으로도 범접할 수 없을만큼 지대한데도 그렇다. 왜 이럴까? 우리 주위에도, 언론 지상에도 잇달아 나타나는 오늘날 교육의 희생자와도 같은 아이들을 보면 어쩔 수없이 이런 의문이 떠오르게 된다. 어쩌면 이 역시도 정말은 아이들이 아니라 어른인 우리에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닐까? 오컴의 면도날처럼 '학생은 그저 공부만 하면 되는 거지.'라며 공부말고 다른 건 아이의 삶에서 모조리 뭉텅 잘라내어 무시의 늪 아래로 던져버렸기에 말이다.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아이들의 신음은 우리가 다른 건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라서 그런 지도 모른다. 아이도 나와 똑같은 엄연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직장에서 업무 성과가 부족하다며 닥달을 당할 때마다 시어머니로부터 집안일을 두고 이런저런 야단을 맞을 때마다 혹 이런 생각이 들었던 적은 없을까? '아니, 다 사정이 있어서 그런 건데. 결과만 가지고 이렇게 나무라다니! 내가 무슨 일만 하는 기계야?" 아이들도 그렇게 보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가 원망했던 직장 상사의 눈이나 시어머니의 눈과 똑같이 기계로만. 그럴 때, 나에게는 원망이 생겼다. 그런데 왜 아이들은 당연하게 받아들여 주기를 바라는 것일까?
기계가 아닌 사람으로서 아이들이 처한 오늘의 현실은 참 고달프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의 행복 지수가 OECD 국가 중 최고로 낮단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주당 학습 시간이 49시간으로 세계 1위인데. OECD 평균보다 무려 15시간이나 많다. 기계처럼 공부만 해야 하는 시간이다. 놀 시간도 없고 한창 삶을 즐겨야 하는 나이인데 즐길 여유도 없다. 몸 속에는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데 하루의 거의 대부분을 앉아 있어야만 한다. 기계도 이 정도로 굴리면 잡음이 나고 고장나기 마련이다. 하물며 사람이 어찌 멀쩡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에게 통증은 당연하다. 하지만 우리들은 보지 않는다. 그들의 통증은 내가 얼마나 힘든지 좀 보아달라는 것인데 우리들은 쓸데없는 투정이나 이유없는 반항으로 치부하고 듣거나 헤아리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가렵다고, 가려워서 미치겠다고 하고 있는데 그저 가만히 팔짱을 낀 채 나와 상관없다는 듯 무심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과 같다. 좀 긁어달라고 내민 아이들의 등에 오히려 세게 등짝을 내리치기도 한다.
그간 그러했던 어른인 우리들의 모습을 아프게 되새기게 만드는 책이 있으니, 그것이 바로 김선영 작가의 세번째 소설, '미치도록 가렵다'이다.
'미치도록 가렵다'는 한 학교의 '독서회'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다. '독서회'라고는 하지만 책을 좋아하는 아이들이 모인 게 아니다. 학교에서 아무도 받아주지 않기에 오게 된 아이들이다. 그렇지 않아도 중학교에서 일하는 선생님으로부터 들은 말이 있다. 학교에서 잘 적응하지 못하고 마음에 상처가 있는 아이들이 도서관으로 자주 온다고. 달리 갈 데가 없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수인이 맡게된 독서회의 아이들도 별 반 다르지 않다. 상처가 있고 자신의 통증을 누군가 봐주었으면 하는 아이들이다. 소설의 '독서회'는 허구가 아닌 것이다. 어쩌면 바로 우리 주위에 있는 학교에서 볼 수 있을지도 모르는 현실이다. 사서인 수인은 그 독서회를 자신이 맡고 있는 도서관에서 지도한다. 아이들과의 첫 인상은 과히 좋지 않았다. 아이들은 별 관심도 없어 수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이고 쓸데없는 질문으로 방해하거나 비아냥으로 선생님인 수인을 얕보는 태도를 보이기도 한다. 어쩌면 그리도 수인이 도서관에서 받은 첫인상과 닮았는 지. 이제 막 부임해온 수인이 처음 도서관을 보았을 때 받은 느낌은 이랬다.
천장까지 닿은 서고가 눈앞을 막았다. 역시나 머리 위부터 짓누르는 위압감이 드는 배치였다. 알 수 없는 어떤 힘이 이미 도서관을 점령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안에 서면 주눅이 들어 누구든 저절로 움츠러들 것만 같았다.(p. 24)
숨막힐 듯한 버거움. 그것이 도서관이 수인에게 준 느낌이었다. 아이들도 그랬다. 그 속에서 수인은 이름대로 정말 갇혀 있는 수인(囚人) 같았다. 아니, 정말 수인(囚人) 이었다. 수인이 햇살이 잘 들어오지 않아 늘 어둑하기만 한 도서관 위치를 이전시켜 줄 것을 학교에 건의했을 때 학교 역시도 도서관과 마찬가지로 숨막히는 버거움으로 무장한 곳이었다는 걸 똑똑히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학교는 '사서 주제에'라는 말로 진지하게 내놓은 그녀의 의견을 가볍게 묵살한다. 괜한 파장을 일으키지 말라고 으름장도 놓는다. 동료 교사들은 행여 그 불똥이 자기에게 튈까봐 그녀를 따돌린다. 그렇게 격리되었고 그녀는 도서관에 갇혔다. '독서회' 아이들과 같은 처지가 된 것이다. 소설은 '독서회'에 온 아이들의 사연과 그들을 맡아 가르치는 수인의 사연을 병치하고 있는데 얼른 보아서는 드러나지 않는 이들 사연의 병렬은 사실 동병상련으로 나아가고 있다. 즉 수인의 처지가 아이들의 처지와 같게 되면서 처음에는 그저 자신의 목을 조르는 것만 같았던 아이들을 자신만큼이나 상처받고 고뇌하는 '한 사람'으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제서야 우리는 왜 작가가 하필이면 소설의 주 무대로 도서관을 택했는 지도 깨닫게 된다. 다름아닌, 아이들이란 존재는 한 권의 책과도 같다는 것을 말이다.
아이들은 책이다. 저마다의 생각, 고민 그리고 아픔으로 빼곡히 들어찬 책. 도범이 계속 써 온 일기와도 같다. 소설에서 도범의 일기가 나오는 것은 이렇게 아이들이 한 권의 책과도 같다는 것을 은연 중에 드러내기 위해서이리라. 아이들은 어른들이 펼쳐서 자신의 내면을 읽어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어른들은 무정하게도 펼쳐 읽으려 들지 않는다. 그저 표제만 쓱 보고는 '넌 이런 아이야' 단정지어 버린다. 도범이 그렇다. 다른 무엇도 아니고 범죄자를 연상시키는 '강도범'이란 이름 때문에 그만 문제아까지 되고만 도범. 도범은 과거의 자신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정말 힘겨운 노력을 하고 있으나 어른들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그저 피하거나 사건이 터지면 다짜고짜 범인으로 취급할 뿐이다. 지금 자기의 내면이 어떤지 들여다 보지도 않고 이름이라는 또 과거의 행적이라는 표제만 보고 낙인을 찍는 어른들에게서 도범은 수인과 똑같은 숨학히는 버거움을 느낀다. 그러한 어른들의 편견 안에서 도범도 수인(囚人)이다. 어두운 서가에 그저 꽂혀있기만 한 책만큼 갇힌 존재도 또 없으니.
아이들을 책에다 비유하는 것은 도리어 우리들에게로 향하는 질타가 된다. 일본에서 건너온 '중2병'이란 말이 우리들 사이에서도 유행이다. 일본이나 우리나 그만큼 어른들이 지금의 청소년들을 참 이해하기 어렵다고 공감하고 있는 탓이다. 하지만 난 그 말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 말을 들으면 이런 의문부터 든다. 과연 우리들이 이해하려고 제대로 노력이나 했을까? 그저 이런 말로 이해하려는 노력을 쉽게 포기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히려 그 책임은 아이들에게 전가시키고서 말이다. 그래서 싫다. 또한 아이들은 전혀 몰이해의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책이 몰이해의 존재로 있는 것은 오직 들춰보지 않았을 때 뿐이다. 책을 펼쳐서 읽으려들면 책은 언제라도 자신의 내면을 술술 내보이기 마련이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노력이 부족한 탓이지 아이들이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 있기 때문이 아니다. 아이들이 마음의 벽을 굳건히 한 것도 아니다. 사실, 아이들은 자신이 겪고 있는 통증을 누군가 먼저 봐주기를 바라고 있다. 겉모습이 아닌 속마음의 진실을. 통증은 견디기 힘들고 벗어나기 위해선 누군가 도와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통증은 가려움이다. 가려운 것은 참기 어렵다. 손이 닿지 않는 곳이 가려울 때는 누군가 대신 긁어줘야 비로소 벗어날 수 있다.
그 애들이 지금 올매나 가렵겄냐. 너한테 투정 부리는 겨. 가렵다고 크느라고 가려워 죽겄다고 투정부리는데 아무도 안 받아주고, 안 알아주고 가려워서 제 몸도 못 가눌 정도로 몸부림치는 놈들한티, 대체 왜 그러냐고 면박이나 주고, 꼼짝없이 가둬놓기만 하는데 어떻게 견딜 수 있겠냐. (..) 가려운 곳을 긁어주지는 못해도 네가 어디가 가렵구나, 그래서 가렵구나 알아주기라도 해야 하는 거 아녀? 너라도 알아봐줘야 하는 거 아녀?"(p. 216 ~217)
도범이 수인에게 마음의 빗장을 푼 것은 수인이 이십년 동안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고 가슴에 품었던 어렸을 때 겪은 손가락 염증에 대한 이야기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 혼자 있게 되자 한 번 이별을 겪은 수인은 자신이 잘못해서 또 엄마와 이별하게 될까봐 손가락이 아픈 것을 숨겼다. 참고 또 참았지만 갈수록 통증은 격해졌고 손가락마저 시퍼렇게 섞어 들어갔다. 결국 그것을 본 엄마가 급히 병원에 데려가 의사가 손가락을 째고 고름을 빼주어 통증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그 때, 의사는 엄마를 마구 야단쳤다.
"어떻게 아이가 이렇게 되도록 둘 수 있었냐고, 애가 제대로 잠이나 잤겠느냐고.(p. 169)
아이들은 혼자서 치유될 수 없다. 그들에게는 가려운 곳을 긁어줄 수 있는 어른들의 손이, 손가락이 아플 때 자신의 손을 부여잡고 병원에 데려갈 어른들의 손이 필요한 것이다. '스스로 알아서 잘 하겠지'하는 것은 그저 어른들이 자신의 책임을 방기하기 위한 변명에 불과하다. 수인의 엄마는 야단치는 의사 앞에서 죄인처럼 군다. 그동안 자신이 힘든 것만 생각하느라 딸에게 너무 무심했다는 자책 탓이다. 우리 역시도 반항하고 거칠게 나오는 아이들의 태도에 '중2병'이란 라벨을 붙일 것이 아니라 먼저 내가 그동안 그 마음을 제대로 헤아려 들지 않았음을 반성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이 소설은 그렇게 우리에게 아이들을 공부만을 위한 기계라는 평면이 아니라 힘겨워하고 상처받기도 쉬운 입체의 존재로 보도록 만든다. 부피도, 내용도 있는 한 권의 책으로 말이다. 그 책 표지는 들기에 그리 무겁지 않다. 내용이 모르는 외국어로 된 것도 아니다. 우리의 수고를 많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저 그 통증의 언어들을 읽어만 준다면, 헤아리려는 노력을 보여주기만 한다면 어느새 아이들도 다가와 스스로 환부를 내미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수인이 자신이 겪은 일로 인해 먼저 다가가 아이들 마음의 책을 펼쳐 읽기 시작하자 아이들도 바로 화답하듯 수인을 받아들였던 것처럼.
엉킨 실타래처럼 풀기 어려워만 보이는 오늘의 교육 현실. 의외로 해답은 찾기 쉬운 곳에 있지 않을까 싶다. 아이들이 한 권의 책처럼 저마다 폭과 깊이를 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어른들이 먼저 나서서 그 내면을 읽으려 노력한다면 조금은 아이들의 통증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신음과 비명을 줄여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어른들의 노력이 먼저 필요하다. 그런 노력을 위한 동기 부여를 위해서라도 이 소설의 '도서관'을 방문할 필요는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