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솔길 끝 바다
닐 게이먼 지음, 송경아 옮김 / 시공사 / 2014년 6월
평점 :
품절


 나는 양쪽에 각각 나무딸기와 들장미가 있는 좁은 오솔길을 따라 천천히 털털거리며 차를 몰았다. 오솔길 가장자리 어디에도 개암나무나 손질하지 않은 산울타리는 서있지 않았다. 시간을 거슬러 차를 몰고 가는 것 같았다. 다른 건 전부 달랐는데, 그 오솔길은 예전 그대로였다.

-오솔길 끝 바다, P. 14 -

사람은 나이가 들면 점점 뒤를 돌아보게 된다고 합니다. 젊은이는 미래에 대한 희망으로 살지만 노인은 과거에 대한 추억으로 산다는 말도 있잖아요. 그 추억 속에는 한 결같이 등장하는 공간이 있게 마련입니다. 늘 행복한 풍경으로 그려지는 곳이. 그리고 생각하죠. '언젠가 꼭 한 번 그 곳에 다시 가보고 싶다'라고.

 이럴 때, 저는 작가들이 부럽더군요. 우리들은 겨우 찾은 추억이라도 기껏 잠시 엉덩이를 붙였다 나올 뿐이고 종국에 가선 저와 함께 사라져 버릴 터이지만 작가들은 마치 랜드마크를 만들듯 그 기억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여 영원히 남겨둘 수 있으니까요. 극장판 '은하철도 999'를 보셨나요? 그것은 린타로가 가졌던 유년에 대한 그리움을 가득 담은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에 떠나는 메텔을 보며 줄줄 흐르는 철이의 눈물은 이제 다시 올 수 없는 유년을 떠나보내는 린타로의 눈물이나 마찬가지였죠. 그러한 애절한 그리움이 나이가 들어갈수록 파란색 잉크에 떨어진 천이 그렇듯이 마음 한 구석 점점 물들어가는 것 같습니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기에 더욱 애절한 그리움이.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에다 그런 그리움을 담는 것이겠죠. 린타로가 그러했듯이. 닐 게이먼도 그러합니다. 소설에다 그리움을 가득 실어 보내는 것이죠. 홀연히 바다를 건너 우리 앞에 도달한 다시 오지 못 할 유년에 대한 그리움의 배.그것이 바로 이번에 나온 '오솔길 끝 바다'입니다. 


 네, 닐 게이먼이 돌아왔습니다. 환상문학의 거장이라는 타이들이 전혀 빈말이 아님을 보여주는 그 닐 게이먼이 말이죠. 이 사진이 닐 게이먼의 모습이에요. 앞서 이 소설이 그리움의 배라고 했죠? 그렇게 말한 이유는 이번 작품에 닐 게이먼의 자전적 요소가 참 많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유년의 자기 모습이 말이죠. 그는 책만이 유일하게 세상과 소통하는 창구였던 유년의 자신 모습을 그대로 주인공에게 주었습니다. 주인공이 소설에서 하는 어떤 행위들은 그대로 과거 자신의 행위이기도 합니다. 닐 게이먼은 오래도록 잊었던 기억을 불러내게 만들어준 어린시절의 사진들을 많이 보내온 자신이 여동생에게 특별히 감사의 인사를 전하더군요. 이를테면 이런 사진 같은 것.



 이게 진짜 그 사진인지는 모르겠어요. 이 사진은 소설 속에도 삽화처럼 들어가 있습니다. 흑백으로 말이죠. 이 벽돌집은 닐 게이먼의 집 그대로라고 하는데 어쩌면 진짜 사진일 수도 있을 것 같네요. 그럼, 저 배수관 위의 소년이 어린 시절(소설에서는 일곱살로 나옵니다.)의 닐 게이먼이겠군요. 이 배수관 사진은 소설의 에피소드로 그대로 사용되었습니다. 정말 흥미진진한 탈출기로.

 

 이렇게 자전적 요소가 참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램프를 들고 어두운 터널로 들어가는 닐 게이먼의 사진을 가져왔어요. 사진처럼 추억의 램프를 들고 오래도록 망각의 심연 속에 가라앉아 있었던 그 때의 기억을 터널 속에서 길을 찾듯이 거슬러 올라가고 있으니까요. 은근히 소설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나요? 그 여정의 결과로 나온 것이 바로 2013년에 나온 '오솔길 끝 바다'라고 할 수 있겠네요.

 


 표지가 굉장히 근사합니다. 아무래도 이 말부터 할 수 밖에 없어요. 개인적으로는 '역대급'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에요. 한동안 갖고 다녔는데 주위에서 보는 이마다 예쁘다고 하더군요. 후후.


 띠지를 벗긴 모습이에요. 이런, 야간이라서 좀 흐리게 나왔네요. 윗사진처럼 파랑의 색감이 뛰어난데 이 사진에선 하나도 드러나지 않는군요. 망했어요. 망한 사진이 문제라서 그렇지 표지는 정말 뛰어납니다. 거기다 햇살이나 형광등에 비쳐보면 표지 전체가 반짝거려요. 아마도 달에 비친 연못의 물결을 표현하려 한 게 아닐까 싶어요. 일러스트는 소설의 마지막 장면에서 가져왔더군요. 그것도 에필로그에서. 주인공이 마지막으로 바라보는 햄스톡 농가의 오리 연못 모습을 말이죠. 연못 위에 비친 저 두 개의 달이 하나의 반달로 겹쳐지는 장면으로 소설은 끝나는데 마지막 문장은 이러합니다.

 잊힌 기억처럼 혹은 황혼 속에 녹아드는 그림자처럼 과거 속으로 희미해져버린 것.(p. 287)


 일러스트는 그 연못이 주인공에게 무엇이었나를 잘 나타내고 있는 듯 보여요. 바로 자신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그 무엇보다도 자신의 존재 그 자체로 충만할 수 있었던 유년 중 가장 소중한 공간이라는 것을. 읽어보시면 아시겠지만 일러스트의 저 검은 고양이는 바로 주인공의 분신이랄 수 있는 존재랍니다. 그 분신과도 같은 고양이가 내내 연못을 바라보고 있군요. 잊힌 기억처럼 희미해져가지만 자신은 언제나 그 곳에 있고 싶다는 바람 같은 것을 나타낸 것은 아닐까요?

 

 어쨌든, 저 마지막 문장에도 어떤 아쉬움, 그리움 같은 것이 느껴지죠. 저는 '은하철도999' 극장판의 마지막 모습이 떠오르더군요. 유년을 상징하는 메텔을 떠나보내야 하는 철이의 눈물. 소설에는 나오지 않지만 분명 주인공도 눈물을 흘리지 않았을까 싶어요. 괜한 비유는 아니에요. 정말 이 소설에는 메텔이라 말할 수 있는 존재가 나오거든요. 그 메텔처럼 소년에서 어른으로 성장시켜 주는 누군가가. 

 

 소년에겐 누나에 대한 선망 같은 것이 있습니다. 프로이트라면 오디이푸스 컴플렉스 때문에 엄마와 결합하고 싶은 욕망이 아버지라는 상징계의 질서로 좌절되자 그 대리충족의 대상으로서 누나를 원하게 된 것이다라고 말하겠지만. 이유야 어쨌든, 분명 그런 것이 있어요. 뭐랄까 둥지 같은 존재로서. 네, 저는 누나가 없었기에 더욱 그랬는지 모르지만. 그래서 이 소설의 주인공에게 더욱 감정이입이 된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그 메텔과도 같은 존재가 누구냐구요?



 그 전에, 참고로 원서의 표지는 이렇게 생겼습니다. 우리나라가 연못을 위에서 본 모습을 나타냈다면 원서는 아래의 모습을 나타내고 있군요. 저 연못 아래에 있는 소녀가 바로 주인공과 함께 모험을 하게 될 '레티 헴스톡'입니다. 헴스톡은 닐 게이먼의 소설을 좀 읽어본 사람이라면 친숙한 이름이죠. 닐 게이먼이 다른 소설에서 자주 반복해서 쓰곤 했으니까요. 다른 작품에서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정도의 존재로 등장했는데 여기서는 핵심적인 역할을 맡았습니다. 닐 게이먼의 팬으로서는 드디어(!) 헴스톡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게 된 셈이랄까요. 팬으로선 이것만으로도 이 소설을 벌떼처럼 달려들어 읽을 가치가 있는 것이죠. 네, 어디까지나 게이먼의 팬이라는 전제 하에서 말입니다.

 

저 소녀가 바로 메텔입니다. 이름은 벌써 말했죠? 레티 헴스톡이라고. 소설에서는 11살 정도로 나옵니다. 정도로 표현한 것은 사실 이 소녀의 나이가 11살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소녀는 그보다 훨씬 오래 살았어요. 얼마나 오래인지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말이죠. 레티 헴스톡은 엄마랑 할머니와 삽니다. 농장엔 이 세식구가 전부에요. 남자는 없어요. 엄마는 중년으로 보이고 할머닌 노인으로 보입니다만 진짜 나이는 보이는 것과 다릅니다. 무려 할머니는 달이 하늘에 생기는 걸 직접 봤다고까지 말하고 있어요. 나이 계산이 불가능해요. 네, 이들은 인간이 아닙니다. 인간을 훌쩍 초월한 존재들이죠. 주인공에게 그들은 '대양'에서 왔다고 그래요. 소설의 가장 첫 부분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레티는 자기들이 오래된 나라에서 대양을 건너 이 곳에 왔다고 말했다. 레티의 어머니는 그게 오래전 일이라 레티가 기억을 못하는 것이며, 그 오래된 나라는 가라앉았다고 했다. 레티의 할머니인 헴스톡 노부인은 딸과 손녀 둘 다 틀렸고, 가라앉은 곳은 진짜 오래된 나라가 아니라고 했다. 자기는 진짜 오래된 나라를 기억할 수 있다고 했다. 헴스톡 노부인은 그 진짜 오래된 나라는 폭발했다고 했다. 

 

  그들이 온 통로가 바로 OCEAN, 즉 '대양'입니다. 원서 제목의 'OCEAN'은 바로 그것을 가리키죠. 그런데 우리나라는 바다로 바뀌었군요. 아마 '오솔길 끝 대양'이 어감상 별로 좋지 않아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고 저 '대양'이 바다를 가리키는 것 아니에요. 사실은 헴스톡 농장 뒤쪽에 있는 오리 연못을 가리키는 것이죠. 그 연못을 헴스톡 사람들은 '대양'이라 부릅니다. 원서 표지는 그 대양 아래로 가라앉은 레티를 나타내는 것이에요. 저 상황도 사실 소설에 나오는 내용인데, 그것은... 으음,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밝히기가 어렵네요.

 

 

 

 그렇게 헴스톡 농장은 초월적 존재들이 사는 초월적 공간입니다. 어느 날 주인공은(주인공의 이름은 나오지 않습니다. 소설에서 아버지가 딱 한 번 주인공을 두고 '핸섬 조지'라고 부르긴 하는데 진짜로 조지라서 조지라 부른 것인지 아니면 어릴 때의 별명을 부른 것인지 확실하지 않아요. 단 한 번도 주인공이 자신의 이름으로 불리지 않는 것을 보면 닐 게이먼이 일부러 주인공을 익명의 존재로 남겨두려 한 것 같네요.) 경제적으로 어려워져 세를 내준 자기 방에 살던 오팔 광부가 자동차에 숨져 있는 것을 아버지와 함께 발견합니다. 경찰이 출동하고 사고 현장을 수습하던 차에 주인공이 방해가 되자 어디 데려다 놓을 데가 없나 살피고 있는데 마침 어떤 여자 아이가 자기 농장에서 잠시 데리고 있겠다고 말합니다. 그 소녀가 바로 레티였죠. 주인공은 그렇게 하여 오솔길 끝에 있는 헴스톡 농장으로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다 '대양'이라 불리는 연못에서 기이하게 죽은 물고기를 발견하게 되는데 그 이유가 물고기 내장 속에 있던 은화 6펜스 때문임을 알게 됩니다. 그 때부터 이상하게도 주인공에게 돈이 들어옵니다. 그 후, 밀납인형이 되어버린 할아버지가 자신의 입 속에 숨막히도록 무언가를 자꾸 집어넣는 꿈을 꾸게 되는데 겨우 일어나 뱉어보니 은화 6펜스가 나오는 것입니다. 이 은화를 들고 헴스톡 사람들에게 보여주자 헴스톡 노부인은 대양을 통해 무언가가 이 세상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노부인 스스로는 들러붙어 나오기에 '벼룩'이라 부르는. 하지만 그대로 놔주면 세상에 커다란 혼란을 가져오는.

 

 노부인은 레티에게 '그것을 묶고, 길을 막고, 잠의 세계로 돌려보내야 한다'고 말합니다. 레티는 동료로서 주인공을 데려가겠다고 합니다. 위험하다고 어른들이 반대했지만 말을 듣지 않는 레티. 결국 그녀는 주인공을 데리고 대양을 통해 들어온 정체불명의 존재를 찾아 숲으로 떠납니다.

 

 드디어, 만나게 된 존재. 그것은 이렇게 생겼습니다.

 

 얼굴은 너덜너덜했고, 눈은 천에 뚫린 깊은 구멍이었다. 그 뒤로는 아무 것도 없는 회색 캔버스 가면뿐이었다.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거대한, 다 너덜거리고 찢어진, 폭풍에 휘날리는 가면.(P. 72)

 

 다시 말해, 이렇게...

 

 

 그 존재를 좀 더 사실적으로 표현하면 이렇게 되겠죠...

 

 

 결국 레티는 이 존재를 물리치나 그 전에 절대 놓지 말아야 했던 손을 주인공이 그만 놓쳐버리는 일이 발생하고 맙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주인공은 정말 커다란 곤경에 처하게 됩니다. 바로 수수께끼의 미인 가정부 '어슐러 몽턴'이 나타나 자신을 집에 가두고 아버지를 유혹하여 죽이려고 하는 것이죠.

 

 

이 여인이 바로 어슐러 몽턴입니다. 이 일러스트는 '팬아트'인데 소설에서 도망가는 주인공을 하늘에서 날아 쫓아가는 그녀를 그린 것입니다. 이 장면 묘사 정말 좋더군요. 일곱 살 아이가 폭풍우 치는 밤에 무시무시한 존재로부터 쫓기는 공포와 긴박감을 제대로 그려내고 있었습니다. 역시 닐 게이먼이로구나 생각했습니다. 묘사가 그리듯이 되어 있어 상상만으로도 얼마든지 영상을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했는데 그렇지 않아도 '오만과 편견'의 영국 감독 조 라이트가 영화로 만들고 있다고 하는군요. 이 장면이 영화로는 어떻게 표현될지, 그게 가장 궁금합니다.

 

'오솔길 끝 바다'는 정말 환상적인 이야기입니다. 이야기는 끝까지 어디로 튈 지 모르는 공처럼 예측 불허의 전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거기다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신비한 존재들까지 등장해서 독자의 상상력을 마구 부채질하고 있죠.

 

 소설 속에서 또 하나의 공포스런 존재였던 '청소부'들 처럼.

 

 

 


그들은 하늘 높이 떠 있었고 칠흙같이 검었다. 너무나 검어서 실재하는 존재가 아니라 내 눈 속의 얼룩 같았다. 그들은 날개를 가지고 있었지만 새는 아니었다. 새들보다 더 오래된 존재였다. 수십, 아니 수 백 마리가 원과 고리와 소용돌이를 만들며 날았다. 새는 아니지만 퍼덕이는 그것들은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려왔다(P. 207)

 

 

 어릴 때, 가을이면 들판에 저렇게 까맣게 무리지어 날아다니는 새떼들을 보곤 했는데 혹시 닐 게이먼도 유년 시절에 그걸 보고 저런 기이한 생물을 상상해낸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요. 아무튼 이들은 그 막강한 헴스톡 노부인도 여간 처리하기가 까다로워 '말썽쟁이들'이라고 부를 만큼 공포스런 존재입니다. 그만큼 강하고 무엇이든 먹어치우는 이 존재들이(그래서 그들 스스로는 청소부라 부르죠.) 일곱 살 주인공을 먹어치우려 달려드는 것입니다. 주인공은 참 운도 지지리 없군요. 어린 나이에 이토록 무서운 공포와 몇 번이나 맞딱뜨리다니.

 

이제 대강 소설의 분위기를 아셨나요? '오솔길 끝 바다'는 이런 소설입니다. 여러 차례의 고난을 통해서 어른으로 성장하는 이야기인 것이죠. 근저에는 다시 재회할 수 없는 유년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잔뜩 배여있는. 어쩌면 이 때문에 어른이 된다는 것의 서글픔까지 묻어나는 소설입니다. 닐 게이먼은 이 소설을 어른을 위한 동화라고 했다더군요. 그건 어쩌면 주인공을 공포에 떨게 만드는 존재들 중 하나가 어쩌면 독자인 어른 자신의 모습과 닮아있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사실은 스스로 약해서 권위적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모습, 남들의 행복을 위해 일한다고 하지만 실은 오로지 자기 행복만을 위해서 모든 것을 해왔던 어슐러 몽턴의 모습, 욕망 충족을 위해서라면 앞 뒤 안 가리고 뭐든 닥치는 대로 해치우는 '청소부들'의 모습. 분명 언젠가는 우리들 역시도 그 모습들 중 하나를 가지고 있었을 겁니다. 어쩌면 '대양'이라는 물의 이미지를 가져온 것도 사실은 이 소설이 그처럼 반추의 의미로 독자들에게 다가가기 원해서였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드는군요. 특히나 주인공의 에필로그를 생각하면 더욱 그래요.

 

 거기서, 어른이 된 주인공은 헴스톡 노부인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그럼, 전 합격했나요?"

 오른 쪽에 있는 노부인의 얼굴은 짙어지는 황혼에 가려서 읽을 수 없었다. 왼쪽의 젊은 여인이 말했다.

 "사람으로 사는 일에 합격이나 불합격은 없단다."(P. 282)

 

 

 주인공의 이 같은 질문을 어른인 독자들도 하게 될 것 같습니다. '나 지금 제대로 살고 있는 거야?'하는 것 같은 질문을. 어쩌면 주인공에게 이름을 주지 않은 것도 독자들이 감정 이입하기 쉽게 하려는 의도였는지도 모르겠군요.

 

 저는 원래 닐 게이먼을 좋아했습니다만 이 소설은 특히나 마음에 드는군요. 이야기도 나무랄 데 없이 재밌고 뜯어보면 여러 상징이나 비유들이 제법되어 꽤 독해의 재미까지 주고 있거든요. 그야말로 무더운 여름밤을 잊기 위해 제격인 작품이지 않나 싶습니다. 

 

그럼, 이제 여러분들도 이 오솔길로 여행을 떠나보지 않으시렵니까?

저 기억 속 어딘가에 있을 유년의 연못으로...


 

아래 사진은, 외국에서 나온 '오솔길 끝 바다' 한정판입니다.

근사해 보여서 가져와 봤어요. 우리나라도 이 소설이 많이 팔리면

이런 한정판으로 내어줬으면 좋겠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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