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바꾸려면
오구마 에이지 지음, 전형배 옮김 / 동아시아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2011년 3월 11일. 그 날 일어났던 일본 원전 사태 이후로 일본 국민의 분위기는 완전히 달라졌다. 이전까지만 해도 일본인들은 'JAPAN AS NO.1'이라는 자부심으로 자신이 속한 일본 사회가 전혀 문제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잘 굴러가고 있다고 여겼다.  버스 안의 얌전한 승객들처럼 핸들을 쥐고 있는 정부를 신뢰하며 이렇다 할 토를 달지 않고 묵묵히 순응하는 편이었다. 그러다 덜컥 사고를 만나게 된 것이었다. 그것도 차량이 전복될만큼의 대형 사고를.


 일본의 또 하나의 자부심이던 안전신화는 여지없이 붕괴되었고 그것을 바탕으로 비판적 여론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전 사업을 민영화시키고 지속적으로 사업 확장까지 시켜온 정부에 대한 신뢰 역시 그와 함께 가라앉고 말았다. 이제 사람들은 더이상 참지 않았다. 40%라는 초유의 시청률을 보여준 일본 드라마 '한자와 나오키'는 단적인 그 증거였다. 한자와 나오키는 주인공의 이름인데 그는 은행원이다. 조그만 중소기업을 운영하던 아버지가 은행의 악랄한 속임수로 기업은 도산하고 결국 자살까지 하게 되자 복수를 위하여 아버지를 파멸로 이끌었던 은행에 취업한 것이다. 하지만 은행원이 된 동기가 오로지 복수인 것만은 아니었다. 다시는 아버지와 같은 비극을 겪는 사람이 없도록 제대로 된 은행으로 만들겠다는 신념도 있었다. 그러나 그 은행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온갖 악행과 불법을 저지르며 자신의 이익에 반하는 인물은 사전에 잡초처럼 밟아버리는 곳이다. 당연히 신념을 관철하려는 한자와 나오키 앞으로 탐욕에 물든 상사들의 날카로운 발톱이 날아올 수 밖에 없다. 그냥 묵묵히 상사들의 명령에 순응했다면 생채기 하나 안 났을 삶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한자와 나오키는 그러지 않았다. 타인의 눈물을 자아내는 불의가 있다면 결단코 바로잡으려 했다. 조직을 등에 업은 상사들의 발톱은 한자와 나오키에게 꽤나 깊은 상처를 남기고 그는 자주 파면의 위기에 봉착한다. 그러나 그는 굴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말을 하면서 더욱 결의를 굳건히 할 뿐이다. 그 말이 바로 '바이가에시'다. '당한만큼 반드시 돌려주겠다!'는 뜻이다. 그것도 백배, 천배로.



 바로 이것이 40%라는, 일본드라마로서는 참으로 경이로운 시청률을 이끌어낸 장본인이었다. 이 말은 원전 사태 이후에 변해버린 일본인들의 마음을 정확히 대변하고 있었다. 원전 사태는 많은 일본인들에게 믿고 순응했던 자신을 바보라고 여기게 만들었다. 더구나 뒤이은 정부의 은폐와 여론 호도 조작은 일본인들을 더욱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그제야 깨달았다. 국가가 국민을 철저히 무시해왔음을. 가만히 있었더니 진짜 '가마니'로 여기고 함부로 해 왔음을. 한자와 나오키처럼 이를 갈지 않을 수 없었다. '바이가에시'는 그러한 그들의 마음이라 할 수 있었다. 더 이상 무시당하지 않겠다는.


 여기서 무시라는 말을 꺼내게 된 데는 연유가 있다. 바로 이것을 2011년의 '월스트리트 점령 운동'이나 아프리카의 '자스민 혁명'등, 작금에 이르러 거세게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움직임을 가져오고 있다고 말하는 책이 있기 때문이다. 


현대에는 '우리'가 조각조각 흩어진 채 소우주처럼 난립되어 있기 때문에, 이것을 바꾸면 사회가 바뀐다고 공통적으로 여길만한 것을 찾기가 대단히 어렵다. (...) 그러나 현대에 사는 누구나가 공유하는 문제의식은 있다. 그것은 '아무도 내가 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게 되었다', '나는 무시당하고 있다'라는 등의 감각이다. 이것은 수상이든, 고급관료든, 비정규고용자든, 필시 공유하고 있다. 그것을 바꾸면 누구에게나 '사회를 바꾸는' 것이 된다고 말할 수는 없을까? (p. 370)

  

 그것이 바로 62년의 동경에서 태어나 현재는 게이오기주쿠 대학에서 정책학 교수로 있는 오구마 에이지가 쓴 '사회를 바꾸려면'이라는 책이다. '한자와 나오키'의 인기는 그러한 무시당했다는 감각이 일본 저변에 확대되어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에는 '격차 사회'라는 말이 유행했다. 한 때 '1억명이 중산층'이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인구에 회자될만큼 일본은 그동안 사회적 격차에 대해선 둔감한 편이었다. 그러던 것이 2011년을 기점으로 유행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 '격차 사회'란 말도 그 감각에서 발현된 것이다. 그걸 어떻게 아느냐 하면 격차에 대한 반감이 향하고 있는 대상을 통해서다. 일본인들의 반감은 '연 수입 10억엔 이상의 큰 부자에게는 향하지 않는다. 이상하게도 연 수입 300만엔 정도의 공무원이나 정사원만이 원망의 대상으로 떠오른다.(p. 371)' 이런 모습은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날로 빈익빈 부익부가 심화되고 있다면서도 우리들 원망의 이빨은 이건희 같은 재벌가들 보다 교사나 공무원 들에게 잘 들이댄다. 왜 그럴까? 바로 여기에 무시에 대한 감각이 깔려 있음을 이 책을 읽고서야 알았다. 대기업의 정사원 그리고 교사나 공무원들이 자주 원망의 화살을 받는 것은 오직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그들이 안정적이라는 것. 즉 그들은 테우리 안에서 보호받고 있다고 사람들은 느끼는 것이다. 격차의 심화는 날로 테우리 안에 보호받는 사람들의 수를 줄였다. 우리나라도 이미 비정규직이 절반을 넘었다. 날로 테우리 바깥으로 떨어져 나가는 이들이 많다. 사회안전망이 부족한 일본이나 전무하다시피한 우리나라에서 테우리 바깥으로 내몰리는 것은 한없는 불안과 마주하는 일이다. 거기서는 생존마저 위태롭다. 오구마 에이지는 말한다. 빈곤이란 사실은 사회 어디에도 자기 자리가 없다는 감각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현대 일본어의 '격차'라는 것은 단순히 수입과 재산의 차이만을 지칭하지 않으며 '나는 무시당하고 있다'라는 감각의, 일본 사회 구조에 입각한 표현이기도 하다고 말할 수 있다.(p. 373)


 그들에게는 설 자리가 없다. 조르주 아감벤이 말한 법의 보호 바깥으로 밀려난 '호모 사케르'인 것이다. 깨끗이 무시된 자들. 원망은 거기에서 비롯되었다. 즉 그들의 원망이란 기실 나도 당당한 사회의 성원으로 인정받고 싶다는 호소에 다름아니었다. 그렇다면 사회를 바꾼다는 것은 진정 어떤 의미인가? 여기에 오구마 에이지는 이렇게 답한다. 되도록 많은 이들이 '무시당하고 있다'는 감각을 가지지 않도록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의 근본된 모습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무엇을 '나를 무시하는 존재'의 상징으로 보는가는 시대마다, 각 사회의 구조마다 다르다. 이 무시의 감각을 지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현실 사회에 존재하는 구체적 구조의 모습을 알아야 한다. 때문에 그는 책의 시작이 되는 1장에서 지금 일본 사회의 구조부터 살핀다. 그에 따르면 지금 일본 사회는 공업화 사회에서 탈공업화 사회로 변했다. 탈공업화 사회의 특징은 무엇보다 유동하는 정체성이다. 공업화 사회는 '종신 고용'이라는 말처럼 정체성이 안정적이었다. 오구마 에이지에 따르면 '전업 주부'도 공업화의 산물이라고 한다. 원래 일본에는 여성 취업률이 남성보다 높았었는데 이제 공업화 사회로 들어서면서 종신 고용으로 남성들이 안정적으로 임금을 지급받을 수 있게 되자 더 이상 바깥에서 일할 필요가 없게된 여성들은 가사에만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종신 고용의 신화가 붕괴된 탈공업화 사회에선 더 이상 그런 안정의 획득이 불가능해졌다. 비정규직 비율은 날로 높아져가고 있으며 대학을 나와도 번듯한 일자리 잡기는 하늘의 별 따기가 되었다. 무엇보다 그동안 일본 성장의 근간이 되었던 제조업이 크게 쇠퇴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제조업들은 임금이 상대적으로 낮은 중국이다 동남아 쪽으로 넘어갔다.  이제 일본은 다른 선진국들처럼 서비스업 종사자의 수가 제조업 종사자의 수를 크게 웃돌게 되었다. 이 서비스업 종사자 수의 증가가 바로 탈공업화 사회의 특징이다. 또한 대부분이 비정규직이다. 탈공업화 사회로 가면 갈수록 비정규직의 비율은 늘어날 수 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들은 공업화 사회만큼 통일된 정체성을 가지기가 어렵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이 서로에 대해 가지는 생각들이 그러하듯이. 거기다 서비스업은 직종도 또 의복도 천차만별이다. 때문에 정체성은 한없이 산포되고 그만큼 유동적이 된다. 이건 달리 말해 어떤 사안이 터졌을 경우 '이게 내 문제다'라는 감각을 가지기가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우리'라는 감각을 만들기가 어려운 사회. 그것이 바로 탈공업화 사회이다. 이는 지금까지의 사회 운동 방법 역시 재고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동안 사회 운동 방식은 어디까지나 '우리'가 쉽게 만들어질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당연했다. 그 때까지는 정체성이 어느정도 단일화 되어있고 항구적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그런 시대는 지나갔다. 너무나 많이 다변화된 정체성으로 '우리'의 문제로 가져오기 어렵게 되었다. 지금 일본은 그러하다. 우리나라 역시 점차 다가가고 있다. 사회 운동의 방법 역시 전면 수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상황에서 모두가 무시받지 않도록 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우리'라는 감각을 어떻게 일깨울 것인가? 당연히 들 수 밖에 없는 의문이다. 오구마 에이지는 이를 위해 제법 긴 장을 할애하여 설명한다. 그는 민주주의의 참 의미를 답사하고 자유 민주주의의 한계 지점까지 나아간다. 그러면서 근대 사회와 철학의 역사까지 아울러 훑는데 이러는 까닭이 있다. 근본적으로 탈공업화 사회 자체가 가져다주는 상황의 어려움이다.


 영국의 저명한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는 이러한 사회의 특징을 무엇보다 '재귀성의 증가'로 꼽았다. 재귀성이 얼른 이해 안되면 '되먹임'으로 생각하면 좋을 것이다. 즉 존재든 사건이든 하나에 그치지 않고 자꾸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재구성해 나간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이것은 훗설의 현상학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다. 훗설은 말하기를 데카르트가 생각했듯이 주체와 객체는 미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지향성' 속에서 사후적으로 구성되는 것이라 하였다. 즉 우리는 고정된 자아로서 타인과 세계라는 객체를 대하는 것이 아니며 그들과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면서 변해간다는 이야기다. 또한 내가 변하면 내가 바라보는 객체도 변하게 마련이니 관계는 고정적이지 않고 가변적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드라마 같은 데서 잘 나오는 이야긴데 앙숙처럼 지내던 남자에게 어느 순간 사랑을 느낀 여자를 생각해 보자. 사랑을 느낀 그녀의 눈에 이제 남자는 더 이상 같은 하늘을 두고 살 수 없는 원수가 아닐 것이다. 예전에는 밉게 보이기만 했던 행동도 이제는 사랑스럽게 다가올 것이다. 이 중, 어느 것이 과연 진짜 그녀일까?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미 변해버린 그녀는 더 이상 과거의 그녀에게 연연하지 않을 것임은 틀림없다. 훗설은 바로 이것을 말한 것이다. '재귀성'은 바로 이것이다. 나도 너도 매일 변한다는 것이다. 나와 너가 만나 이루는 관계 역시 요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진짜다! 진리다!' 말할 수 없는 시대. 그것이 바로 기든스가 바라보는 탈공업화 사회다. 지그문트 바우만은 모든 것이 흐르는 물처럼 한없이 유동한다고 하여 '액체 근대'라고 부르기도 했다. 오구마 에이지는 이것을 가져와 '우리'라는 감각을 일깨우는 사회 운동 형성의 어려움을 토로하고 있다. 출렁이는 바닷물 위에 하얀 백묵으로 선을 긋는 것과도 같이 어려운 작업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방치할 수는 없다. 변화는 언제나 실제의 시도에서만 발현되기 때문이다.


 그러던 차에 '우리'라는 감각을 가지게 만들 좋은 계기가 닥쳐왔다. 그것이 바로 '원전 사태'다. 오구마 에이지가 특별히 6장을 일본 원전에 할애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바로 그 원전이 지금까지 잠재된 일본이 가진 모든 문제점들을 전면적으로 드러내었고 변화의 정당성을 촉구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원전은 일본인 모두의 생존을 위험하게 만들었기에 '우리'라는 감각을 갖지 않을 수 없게 하였다. 말하자면 원전은 모두가 '나의 문제'라고 여기게 만들어 변화를 위한 소중한 디딤돌이 되어 준 것이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것을 어떻게 모으고 뻗어나가게 할 것인가에 있다. 그것을 위해 오구마 에이지는 현실 속에서 존재했던 전후 일본의 사회 운동 역사를 참조하려 한다. 지금까지 일본 사회 운동의 역사는 한번도 성공한 적이 없었기에 그건 실패한 역사의 복기에 불과하다. 하지만 타산지석이라고 지나간 운동의 실패는 우리가 어디를 디디면 안되는지는 알려줄 수 있다. 돌다리도 두드려보고 건너는 조심스러움이 눈에 띈다. 그만큼 이 계기를 놓칠 수 없다는 뜻일테고 그만큼 절박하다는 뜻일 터이다. 비록 재귀성이 한껏 증가하는 탈공업화 사회에서 변화로 흐르게 만드는 사회 운동의 물꼬를 트는 일은 지난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구마 에이지는 행여나 건너가지 못하여 발을 동동 구르는 길손이 있을까 하여 징검다리를 놓는 기분으로 작업을 이어나간다. '사회를 바꾸려면'는 바로 그런 책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 책은 그 원전 사태 때문에 쓰여졌다. 정작 저자인 오구마 에이지 자신은 원전 사태가 발생했을 때 병원에 입원해 있어 그 사실을 몰랐지만. 어쨌든 원전에 대한 반대운동이 한창 높아져 가고 그만큼 정부의 은폐와 억압 또한 치열해 지던 향후의 추이를 보며 쓰여진 것이다. 말하자면 이 책 역시 '바이가에시'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이 책이 단호한 선언, 뜨거운 호소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차가운 지성의 책이다. 차분하고 냉정하게 논리적으로 그리고 분석적으로 좌초중인 일본 사회를 바꾸려면 진정 어떻게 하면 좋은가를  탐색하고 있는 것이다. 총 439페이지에 도합 9장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나름 단단한 뼈대가 엿보인다. 무엇보다 사회를 바꾼다고 이야기할 때 흔히 따를 수 있는 위험인 '탁상공론'이 되지 않도록 만드려는 뼈대가.


 그렇게 이 책은 실천 가능한 대안을 마련하기 위하여 펼쳐진 진지한 모색의 작업이다. 일본 사회의 역사와 서양의 이론들까지 아우르는 내용은 꽤나 풍부하여 읽는 이의 흥미를 돋우고 현실 일본 사회의 구체적 모습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논의는 꽤나 진지하여 이 쪽에 별 관심이 없었던 이들도 읽다보면 여기에 대해 고민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후기에 저자는 자신의 책이 교과서로 읽히지 않고 어디 독서모임 같은 곳에서 토론 거리로 사용되었으면 좋겠다고 피력했는데 과연 거기에 어울려 보인다. 굴비들을 한 쾌로 엮듯 분명 주제의 일관된 흐름이 있지만 그와는 또 별도로 전체에 걸쳐 이것저것 생각할만한 꺼리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기 때문이다. 분명 저마다 다른 유동적인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들이 서로의 마음에 대해 알 수 있게 만드는 하나의 공간을 마련하기 위함일 것이다. 그렇게 이 책은 저자 자신이 말했던 대로 해답이 아니라 촉발이다. 고민의 도착점이 아니라 사유의 출발점인 것이다. 참조할 수는 있으나 구애받을 수는 없다. 오구마 에이지가 내내 설파해온 대로 정답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강 건너편으로 건너가기엔 마지막 징검다리 하나가 빠져 있는 셈이다. 그건 길손인 우리가 놓아야 한다. 이 책을 읽고 고민하는 것 자체가 바로 그 마지막 돌을 드는 것이라 생각한다. 오구마 에이지도 이 책 어디에선가 말했듯이 목소리를 스스로 내지 않으면 누구도 돌아봐주지 않는다. 물론 무시가 점점 보편화되고 있는 세상에서 그건 어렵다. 하지만 어렵기 때문에 더욱 해야 한다는 당위가 성립된다. 그렇지 않아도 독자가 주저할 것임을 예상했던지 오구마 에이지는 다음과 같은 조언이랄까 응원이랄까 하는 말을 해 놓았다.


 부당한 것에는 항의해야 한다는 체험을 이미 해봤고, 막상 해보면 재미있고,그렇게 어렵지도 않다. 바로 그런 습관을 몸에 익힌 사람들이 그만큼 늘어나면 사회는 바뀌게 마련이다.(p. 276 ~ 277)


 무엇이든 처음만 어려운 법이다. 몸에 배이게 되면 더는 고민할 것도 없다. 그 첫 단추를 이 책으로 시작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