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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이지 러브 - 하나님과 지독한 사랑에 빠지다
프랜시스 챈 지음, 정성묵 옮김 / 아드폰테스 / 2014년 6월
평점 :
절판
지금 이 땅에서 복음의 불씨를 꺼뜨리고 있는 것은 과학적 의심이나 무신론, 다신교, 불가지론이 아니다. 가장 큰 문제는 교만하고 감각적이고 사치스럽고 형식적인 교인들이 많다는 것이다.(p. 83)
미국에 '코너스톤'이라는 교회가 있다. 수입의 반 이상을 무조건 기부하는 것으로 유명해진 교회다. 우리말로 하자면 '모퉁이돌 교회'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유대인들에게 특히 건축에 있어 '모퉁이돌'은 중요한 존재였다. 건축의 모든 시작이 바로 이 '모퉁이돌'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모퉁이돌은 집의 벽을 쌓는 기초였다. 모퉁이돌이 제 역할을 못하면 벽은 제대로 지탱되지 못했고 집은 쉬이 무너졌다. 프랜시스 챈은 1994년 30명의 창립멤버와 함께 교회를 개척하면서 바로 이 이름을 교회에 붙여주었다. 여기엔 보다 깊은 의미가 있었다. 프랜시스 챈은 지금의 기독교가 참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다고 보았다. 앞에서 인용한 그의 말에는 그가 바라보는 지금의 기독교가 어떤 모습인지 잘 나타나 있다. 왜 그렇게 되었는가? 그는 생각했다. 아무래도 그건 사람들이 가진 속세의 욕망이 너무 커서 그만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 하나님이라는 존재의 참모습이 먹구름 사이에 들어가버린 달처럼 너무 가리워져 버렸다는 데 있는 것 같았다. 영적 건망증이 퍼지고 있었다. 그것이 너무나 퍼져서 하나님은 그저 이름만 남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세상 곳곳에 영적 건망증이 퍼지고 있다. 이 병에서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다.(p. 28)
그의 말은 이제 의미없는 몸짓에 불과하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희미한 여명에 너울거리는 그림자 연극과도 같이 삶에 아무런 생생한 울림을 가지지 못한다. 말이 빛을 잃자 고삐는 풀려버렸다. 이제 어떤 것을 취하든 부끄럽지 않게 되었다. 태연히 하나님의 뜻이라 주장도 할 수 있게 되었다. 욕망의 경고였던 하나님의 언어는 오히려 욕망을 정당화 하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빈자들을 내쫓고 교회 부지를 넓혀도, 재개발을 노리고 교인과 교회를 사고 팔아도 아무런 거리낌이 없었다. "가난한 집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경주 불국사로 가면 될 것이지 왜 배를 타고 가다 이런 사단이 벌어졌는지 모르겠다."와 "대통령이 눈물 흘릴 때 함께 눈물 흘리지 않는 사람은 다 백정"이라고 말해 국민의 공분을 샀던 한기총의 부회장까지 했던 목사는 심지어 무인가 신학교를 나온 인사였다. 이런 일들이 기독교를 부끄럽게 만든다. 그것도 어쩌다 한 번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비일비재하기에 더욱 고개를 못 들게 만든다. 종교는 정작 그 말 보다는 그것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모습으로 더 많은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다. 로마가 로마에게 있어서는 한낱 사막의 잡신에 불과했던 여호와를 국교로 받아들이게 된 것은 무엇보다 그것을 믿고 있는 사람들의 행동 때문이었다. 그들은 순전히 하나님과 예수가 말하는 바를 지켰다. 가지고 있는 재물을 모조리 나눠주었고 가난한 몸과 마음이 되어 신과 이웃들에게 헌신했다. 로마인들에게 그들의 모습은 진정 별종이었다. 많은 이들이 그들이 여호화를 믿고 머리가 돌아버렸다고 여겼다. 하지만 주위의 괄시와 핍박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모습은 한결 같았고 비웃고 폭력을 휘두르던 자들이 점점 감명받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기독교의 인기는 점점 올라갔고 순교를 각오하고 믿어야했던 기독교는 이윽고 로마의 국교가 되었다. 하나님이라는 존재가 아니라 그 존재를 따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게 만든 것이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기독교에 대한 실망과 오욕(汚辱)도 그러할 것이다. 종교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믿는다는 사람들의 모습이 그렇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프랜시스 챈은 그러기에 새로운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보았다. 그건 물론 이제까지의 영적 건망증을 벗어나 하나님이 정말 어떠한 존재인지 제대로 알고 기억하는 것이다. 명목상이 아니라 실제적인 대면이다. 그것이 필요하다고 프랜시스 챈이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보다 그가 신자들의 삶에 가져오려 하는 것 때문이다. 그건 바로 '헌신'이다. 그는 이 헌신이 부족해서 오늘날의 기독교가 이처럼 많은 문제를 가지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는 단순히 무조건 믿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말한 바를 실제 삶에서 실천하는 것을 말한다. 말로만 믿는 것이 아닌 삶으로써 믿는 것. 그것이 바로 프랜시스 챈이 신자들에게 가져다주고 싶은 '헌신'이다. '크,레이지 러브'는 이러한 프랜시스 챈의 마음을 그대로 담아낸 책이다. 제목은 예전에 로마인들이 기독교인들을 보고 느꼈듯이 남들이 미쳤다고 생각할 정도로 하나님과의 사랑에 빠져볼 것을 권하고 있다. 사랑은 맹목을 낳는다. 사랑하는 존재 하나만 보이고 다른 것은 하나도 안 보이기 때문이다. '크레이지 러브'는 그렇게 세속적인 가치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사랑을 뜻한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을까?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각시킨다. 정말로 어떤 존재인지 이야기 한다. 그만한 존재이기 때문에 지독하게 사랑해도 문제 없다고. 이쯤되면 무엇이 먼저일까 생각하게 된다.
경험을 통해 믿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믿음이 경험마저 달리 보게 만드는 것일까? 전자는 이적을 바라는 마음과 다르지 않고 후자는 도박을 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파스칼이 신의 존재를 두고 내기한 것과 마찬가지다. 칸트를 따르자면 전자는 진짜 사랑이 아니다. 외재적인 조건을 이유로 사랑을 하는 것은 본능을 따르는 동물과 마찬가지여서 자유의지를 가진 인간의 행위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런 외재적인 조건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사랑해야 하기 때문에 사랑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인간만이 가진 자유 의지의 표현이요, 그렇기에 진정한 사랑이다. '크레이지 러브'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영화 '심판'에서 변호사로 나왔던 폴 뉴먼은 이런 명대사를 남겼다.
"신념이 있는 것처럼 믿고 행동하면 언젠가 저절로 신념대로 행동하게 될 것이다."라고.
진정한 우리를 만들어가는 것은 마음이 아니라 행위다. 타인에게서 받는 인정이 무엇보다 근본 욕망인 우리인지라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 저 신으로부터의 인정은 날마다 우리를 회의와 번민에 젖게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몸으로 실천해 나간다면 언젠가는 저절로 그 회의와 번민에서 자유로워질 것으로 믿는다.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그게 당위이기 때문에 하는 것. 아마도 이것이 진정한 '크레이지 러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