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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 - 조심하라, 마음을 놓친 허깨비 인생!
정민 지음 / 김영사 / 2014년 6월
평점 :
추하다. 애처롭다. 권력을 쥐려는 자의 모습이란 어째 하나같이 다들 이럴까? 문득 박지원이 '담연정기'에서 도하와 청장이란 새에 관해 한 말이 생각났다.
둘 다 물가에서 고기를 잡고 사는 새다 . 먹이를 취하는 방식은 판이하다. 도하는 진흙과 뻘을 부리로 헤집고, 부평과 마름 같은 물풀을 뒤섞이며 쉴 새 없이 물고기를 찾아다닌다. 덕분에 깃털과 발톱은 물론, 부리까지 진흙과 온갖 더러운 것들을 뒤집어쓴다. 허둥지둥 잠시도 가만있지 않고 부지런히 먹이를 찾아 헤메나디지만 종일 고기 한 마리 잡지 못 잡고 굶주린다.
청장은 해오라기의 별명이다. 신천옹으로 불린다. 이 새는 맑고 깨끗한 물가에 날개를 접은 채 붙박이로 서 있다. 한번 자리를 잡으면 좀체 옮기는 법이 없다. 게을러 꼼짝도 하기 싫은 모양으로 마냥 서 있다. 바람결에 들려오는 희미한 노랫가락에 귀를 기울이듯 아련한 표정으로 수문장처럼 꼼짝않고 서 있다. 물고기가 멋모르고 앞을 지나가면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고개를 숙여 날름 잡아먹는다. 도하는 고생을 해도 늘 허기를 면치 못한다. 청장은 한가로우면서도 굶주리는 법이 없다. 연암은 이 두 가지 새에 대해 설명한 후, 이것을 세상에서 부귀와 명리를 구하는 태도에 견주었다.
이번에 나온 정민의 책 '조심' 중 '도하청장'에 나오는 이야기다. 연암답게 비유가 그야말로 촌철살인이다. 연암은 이덕무에게 이것을 들려주었다고 한다. 덕무는 이 이야기를 듣고 청장이 좋아서 청음관이라고 쓰던 자신의 당호를 '청장관'으로 바꾸기까지 했다고 한다. 부귀와 권력은 진흙과 같아서 쫓으면 쫓을수록 제 몸만 더러워질 뿐이다. 그걸 우리는 오늘날 총리 후보들에게서 명약관화하게 보고 있지 않은가? 연암만이 아는 진리는 아니다. 사실은 우리 모두도 이미 알고 있는 일이다. 부귀를 쫓을수록 사람은 옹졸해지고 권력을 쫓을수록 사람은 비굴해진다. 초라함만이 늘어갈 뿐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왜 이리도 다들 경마장의 말마냥 애오라지 그걸 향해 달리는 것일까?
채찍이 엉덩이를 때리기 때문이다. 불안이라는 채찍. 어디서도 안정을 구가할 수 없는 사회, 그것이 바로 한국의 자화상이 아니던가. 낙오에 대한 공포가 스모그처럼 천지를 뒤덮는다. 그저 빨리 달려 남들보다 얼른 차지하는 게 살길인 것 같다. 그러니 조급증이 날 수 밖에.
이덕무는 '이목구심서'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조선시대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이 삼전도(혹시 삼전도가 무엇인지 모를 분이 있을 지 몰라서 책에는 나오지 않으므로 간단히 설명하자면 잠실 나루 부근으로 인조가 청나라에 항복하기 위하여 9번 절한 곳이기도 하다. 훗날 '삼전도의 굴욕'이라 불렀다.)를 건너며 지었다는 시다.
바야흐로 백사장에 있을 적에는
배 위 사람 뒤처질까 염려하다가,
배 위에 올라타 앉고 나서는
백사장의 사람을 안 기다리네.
막 떠나려는 나룻배를 향해 백사장을 달릴 때는 자기만 떼어놓고 갈까봐 조마조마 애가 탔다. 겨우 배에 올라타 앉고 나자, 저만치 달려오는 사람은 눈에 안 보이고 왜 빨리 출발하지 않느냐며 사공을 닦달한다는 것이다. (p. 164 ~ 165)
여기에 우리 모습이 있는 것 같다. 나룻배가 나만 떼어놓고 갈까봐 다들 두려워하지 않는가? 그래서 필요도 없는 스펙 쌓느라 열심이고 통장 잔고 늘리려 열심이며 사교육을 왕창 동원하면서까지 아이들 교육에 열심인 게 아닌가? 분명 조급증이 있다. 하지만 이것을 탓할 수도 없다. 정말로 떼어버리고 가는 것이 이 사회의 생리이기 때문이다. 이덕무에 따르면 나룻배에 한 번 올라타고 나면 더이상 떼어놓고 갈까봐 조마조마 애타는 마음은 신경쓰지 않는다. 자신 또한 똑같은 경험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다려주지 않는다. 배려는 없다. 오히려 지연되는 출발에 짜증만 날 뿐이다.
살면서 많이 겪는다. 상황이 달라지면 사람도 달라지는 것을. 한 번 올라타면 손을 내밀기 보다 쳐내기 바쁘다는 것을. 우리의 조급증은 그러한 경험의 산물이다. 무정하게 떠나는 나룻배를 보며 백사장에 주저앉은 설움의 산물이다. 그러니 개구리가 올챙이적 생각을 하는 것만이 우리의 조급증을 근본적으로 없애는 것이리라. 가까스로 배에 올라탄 사람들이 뒤쳐 오는 자를 보며 언젠가 자신도 저랬었지 생각하며 그를 위해 손을 먼저 내밀어 주는 것. '우리 다같이 가자!'고 하는 것. 그것만이 우리를 도하로 만들고, 경마장의 말처럼 만드는 것에서 벗어나는 길이리라. 이렇게 보면 완전한 타인이란 없다. 과거 언젠가 지녔던 나의 얼굴이 있을 뿐. 정녕 그 때 나는 누군가 손을 내밀어 주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그 과거의 절실했던 도움을 현재의 내가 주려하는 것으로 생각할 수는 없을까?
'조심'을 읽고 드는 생각의 한 조각이다. 정민에 따르면 원래 '조심'이란 마음을 잘 붙들어 내 마음의 주인이 되라는 뜻이라 한다. 그렇게 내 마음을 잘 붙들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100개의 사자성어를 이 책에 담았다. 그렇다. 2012년에 나온 전작 '일침'과 비슷한 구성이다. 하나의 사자성어를 중심으로 옛 사람의 글이랑 생각과 정민의 사유가 어우러지는 것이다.
흙갈색 소반 위에 깨끗한 하얀 접시 하나 놓여진 것처럼 정갈하다. 문장은 소담하고 담긴 뜻은 담백하다. 속도는 완만하여 이른 새벽 하늘이 밝아져오는 것이나 저녁에 황혼이 물들어가는 것을 보는 느낌을 준다. 천천히 완상하면 더욱 좋을 책. '일침'이 마음에 들었다면 필시 이 책 역시도 마음에 들 것이다. 읽어보니 옛 사람이 사는 모습이나 지금 우리가 사는 모습이나 별 반 다를 바 없다. 과거의 글이지만 가슴에 콕콕 박히는 말들이 어찌나 많은지. 한 번에 후루룩 읽기 보단 천천히 오래 곱씹으며 읽어야 할 것 같다. 장맛은 오래 묵혀야 한다. 이 책도 그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