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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와 바나나 ㅣ 테마 소설집
하성란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4월
평점 :
비가 온다. 우리들은 젖는다. 비에 젖어 목소리를 잃었다. 진짜 언어를 모조리 잃어버린 세상에서 오로지 비만이 사나운 사자의 포효처럼 성을 내고 있다. 하늘이 낮고 무겁다. 그 많던 새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길마다 부서진 빈 둥지들이 가득했다. 누군가 젖은 신문지로 둥지를 만들어 나무에 올려주었지만 세찬 비는 그마저도 모조리 찢어버렸다. 보지마, 기억하지마, 싸우려 들지마. 비는 그렇게 말하고 있었고 젖은 우리들은 잇달아 올라오는 한기에 어깨를 떨며 그만 받아들일까 고민하고 있었다. 길은 점점 진창이 되고 있었다. 부와 권력을 뽐내는 차들만이 그 곳을 지나갈 수 있었다. 그들은 언제나 굉장한 속도로 지나갔다. 마치 그 자체로 매정함을 드러내려고 하는 것 같았다. 당연히 바퀴들은 엄청난 진흙을 우리에게 튀겼다. 더러운 오물들은 마치 양동이에 담아 퍼붓듯 한가득 우리의 얼굴과 몸에 뿌려졌다. 그 진흙으로 우리는 점점 제 모습과 제 마음을 잃어갔다. 어느새 우리는 다같은 진흙 인간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더이상 나홀로 개체가 아닌 하나의 풍경, 배경이었다. 그렇게 되자 무정하게 지나가던 차들이 우리 앞에 멈추기 시작했다. 좋은 양복에 기름기 좔좔 흐르는 얼굴의 인사들이 내려 보기 좋다면 단일의 진흙이 되어버린 우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국민'이었다. 진흙은 우리의 입을 막고 뇌도 먹어버렸다. 우리는 더이상 스스로 생각할 수 없었고 스스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다. 그제야 비로소 '국민'이 되었다. 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고 누구도 우리에게 우산을 씌워주지 않았다. 그들은 그럴 필요가 없음을 잘알고 있었다. 어차피 말없는 국민에게 우산은 사치일 것이었다.
문학은 이런 우리에게 우산이 되어줄 수 있을까? 진흙을 닦아주고 우리가 제 모습과 목소리를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까? 신음이 아니라 비명인 우리의 미처 말이 되지 못한 목소리에 귀기울여줄 수 있을까? 요즘은 그런 마음으로 우리의 문학을 읽는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지금의 젊은 세대의 문학은 과연 어떻게 하고 있을까? 그런 의문으로 '키스와 바나나'를 읽는다. 언젠가 누군가에 대한 기억들로 짜인 태피스트리를. 비가 온다. 세찬 비가 온다. 오로지 하나의 소리만 가득한 세상이다. 사라져버린 새들, 잃어버린 말들과 마음들. 어디선가 둥지를 잃고 홀로 떠도는 그들을 위해 읽는다. 언젠가는 그 말과 마음에 들러붙은 진흙들이 지워지길 바라며 읽는다. 견뎌가는 것. 이것만이 과연 최선일까? 생각하며 읽는다. 질문은 많지만 대답은 어디서도 찾을 수 없는 오늘, 그 질문들마저 포기해서는 안 될 것 같아서 읽는다. 그렇게 읽는다. 함께 비맞으며 온기를 찾고 있는 그들의 이야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