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환화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54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민경욱 옮김 / 비채 / 2014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1. 몽환화, 그 뜻은?...


 "하지만 삼촌은 내게 말했어. 어떤 꽃을 피워도 좋지만 노란 나팔꽃만은 쫓지 마라. 이유를 물었더니 그것은 몽환화이기 때문이라고 했어."

 "몽환화?"

 "몽환의 꽃이라는 의미일세. 그 뒤를 쫓으면 자기가 멸하고 만다고, 그렇게 얘기했어."(p. 220)


 그동안 온갖 장르를 섭렵한 히가시노 게이고가 유일하게 미답의 영역으로 남겨두었던 역사물에 드디어 도전한다며 2002년부터 역사잡지 '역사가도'에 2년간 연재되었지만 막상 한 권의 소설로 나오기까지는 10년이 걸렸던 소설, '몽환화'! 그 제목이 뜻하는 것은 이러했다. '몽환화', 그것은 바로 노란 나팔꽃이었던 것이다.


 소설은 2013년에 나왔다. 거의 전면적인 개고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계기가 있었다. 바로 2011년, 3월 11일에 일어난 일본 원전 사태. 통칭하여 3. 11. 그것이 소설에 전면적인 영향을 주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전의 1988년 실제로 일어난 여고생 콘크리트 살인사건에 바탕을 두고 소년범 문제를 다룬 '방황하는 칼날'이나 역시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일본 대학 입시를 비판한 '호숫가 살인사건'에서 보듯 원래 동시대의 사회 문제와 연동하는 작가였다. 그런 그가 일본 역사상 미증유의 참사에서 영향받지 않기란 불가능하다. 그 징후는 이미 2012년에 나온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그 소설이 3.11의 반향이라는 것은 소설이 취하고 있는 시대적 배경 때문이다. 바로 70년대에 일본에 닥쳐온 오일 쇼크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당시엔 그것이 전후 일본 최대의 위기라는 걸 고려해보면 하필이면 이 시점을 택한 것이 똑같이 전후 역사상 최고의 위기라 불리고 있는 3. 11을 환기하기 위한 것임은 분명해진다. 그러한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간단히 말해 상실감에 대한 치유인데 이로써 이 소설에 드리운 히가시노 게이고의 진의가 무엇인지는 대략 추정할 수 있을 듯하다. 즉, '과거 전후 최대의 위기였던 오일 쇼크를 우리는 무사히 극복했다. 그러니 현재 전후 최대의 위기인 3.11도 무사히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너무 좌절하지 말고 그 때의 우리를 거울 삼아 서로의 아픔을 배려하고 도와나가자.'란 걸 말이다.


 공교롭게도 이러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치유는 일본 원전 사태 이후에 일본 정부가 국민에게 일관되게 유포한 구호와 그리 다르지 않았다. 오노 미쓰야키는 3.11이 오래도록 변하지 않았던 일본의 풍경을 찢어놓았다고 했다. 1995년에 한신 고베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무라카미 하루키가 그동안 믿었던 일본이 깡그리 붕괴당한 느낌이었다고 고백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말이다. 가라타니 고진이나 '도주론'의 아사다 아키라 그리고 '동물화하는 포스트모던'의 아즈마 히로키와 같은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지식인들에 따르면 일본에는 지금까지 단일한 풍경 밖에는 없었다고 한다. 타자와 변화라는 게 깨끗이 배제된 고인 웅덩이와도 같은 공간. 그것이 '일본'이라는 것이다. 그런 일본에게 재난은 외재성의 침입이요 그 고정된 풍경의 틈새를 열어 그동안 일본이 얼마나 편협한 풍경에 사로잡혀 있었는 지를 보게 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재난은 변화에의 부름이며 그 부름에 실천적으로 응답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재난 앞에서의 성찰적 태도라고 그들은 말한다. 하지만 지금 일본 정부가 하는 것은 그 풍경의 틈새를 다시 기워 아예 없었던 것으로 치부하는 것에 불과하다. 원전과 현재 일본 시스템의 반성과 전면적 변화를 요구하는 시민들 앞에 일본 정부는 '과거의 아픔은 잊고 미래를 바라보자!", "지금이야말로 일본인 모두 하나가 되어 복구를 향하여, 미래를 향하여 나아가자'고 외칠 뿐이다. 반성은 없다. 변화도 없다. 그저 어둔 과거가 빨리 잊히기를 바랄 뿐이다. 아베 총리가 2020년 동경 올림픽에 사활을 걸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 과거 일본 전성기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동경 올림픽을 다시금 재현하여 일본의 영광은 여전히 변함 없을 것이라는 믿음을 국민 모두에게 심어주고 싶은 것이다. 히가시노 게이고가 오일 쇼크를 다시금 가져온 것과 비슷한 재현 전략이랄 수 있다. 그러므로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한계가 있었다. 참 따스한 이야기인 건 사실이나 외연을 사회적으로 확장하면 조금은 문제가 될 수 있는 태도였다.


 어쩌면 히가시노 게이고 스스로도 그것을 감지했을 지 모른다. 아니면 지금까지도 3. 11에 대해 아무런 반성은 커녕 제대로 된 대책도 없이 오로지 잊을 것만 강요하는 일본 정부에 대해 한계를 절감했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몽환화'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앞에서 인용한 '몽환화'에 대한 경고의 말에서 드러난다. 그 뒤를 쫓으면 자신이 멸하게 되는 꽃. 이것은 바로 현재도 일본이 지속하고 있는 원전에 대한 경고가 아닐까?



 2. 나팔꽃의 첫번째 꽃말은 '허무한 사랑'...


 그러고 보면 나팔꽃이 가진 꽃말 역시 의미심장하다. 나팔꽃의 꽃말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허무한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결속'이다. 여기서 '허무한 사랑'이 바로 원전에 대한 일본의 사랑을 뜻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생각해보면 원자력에 대한 일본의 태도는 어딘가 이상하다. 왜냐하면 일본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맞은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역사적 경험에 비추어 보자면 원자력은 그야말로 기피되어야 할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경험에도 불구하고 전후 일본은 오히려 원자력에 대한 과한 사랑을 보여왔다. 일례로 우리는 그것을  일본의 대표적인 만화 캐릭터인 데즈카 오사무의 '아톰'에게서 엿볼 수 있다. 캐릭터의 이름을 '원자'를 뜻하는 영어에서 그대로 따왔을 뿐만 아니라 아톰을 가동시키는 에너지의 원천 또한 원자력이다. 거기다 아톰의 동생 이름도 우라늄을 뜻하는 '우란'이다. 즉 아톰의 활약과 거기에 대한 대중의 사랑은 바로 원자력의 긍정과 희망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건 무엇보다 현재 일본에 존재하는 많은 원전의 숫자로도 증명된다.(현재 일본의 원전 수는 48기로 미국과 프랑스에 이어 세계 3위다. 참고로 우리나라는 23기로 5위다. 국토 면적에 비해 정말 얼마나 많은 원전이 있는지 실감할 수 있다. 거기다 잦은 고장을 일으키고 있는 고리 원자력 발전이 이미 설계 수명인 30년을 넘었음을 감안한다면 일본 원전 사태가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님을 알 수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몽환화'를 우리 역시 귀담아 들어야 할 이유 중의 하나다.)


 그런 사랑의 결과가 바로 3.11이었다. 이만큼 허무한 사랑도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히가시노 게이고는 제대로 된 비유를 쓴 셈이다. 나팔꽃은 그야말로 현재 일본에 대한 상징이니까 말이다. 과연 소설은 처음부터 허무하게 끝나버린 비극적 사랑으로서의 3. 11을 강하게 환기시킨다. 소설엔 프롤로그가 2개나 붙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 역할을 한다. 단란한 가정이 아침 출근 길에 느닷없이 참살당하고 한 중학생의 풋풋한 첫사랑이 갑작스럽게 깨어진다. 둘 모두가 아무런 예고가 없었다는 점에서 닮았다. 그리고 죽음과 이별이라는 상실로 끝났다는 것도. 정확히 3. 11이 일본에게 가져다 준 것이다. 과연 뒤이어 허무한 사랑에 맞닥뜨려 버린 인물들이 나온다.  원자력에 대한 일본의 사랑과 똑같이 하나만 보고 달리다가 어느 순간 방향을 잃어버린 인물들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소설을 이끌어가는 핵심 인물들이라는 점이다. 처음은 아키야마 리노. 그녀는 올림픽 출전까지 예정된 일본의 수영 기대주였으나 알 수 없는 이유로 수영을 그만둔다. 수영을 좋아하고 좋은 수영 선수가 되기 위해 어릴 때부터 한 길로 달려온 그녀이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이 수영 불능의 상태에서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지 그 미래가 불안하기만 하다. 불안하기로는 그녀와 단짝이 되어 몽환화의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가모 소타도 그리 다르지 않다. 그는 현재 원자력을 전공하는 대학원생이다. 대학에 입학할 때만 해도 원자력은 촉망받는 학문이라 선택에 아무런 고민이 없었는데 3. 11 이후로 원자력은 일본 사회에서 가장 기피하는 학문이 되었다. 어디가서 원자력을 전공했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다들 미래가 없는 학문이라고 말한다. 이런 상황에서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지 가노 소타는 고민하고 있다. 이 둘 모두 젊은 세대라는 점에서 히가시노 게이고는 '몽환화'가 3.11에 직면하여 미래가 불안할 수 밖에 없는 젊은 세대에게 보내는 전작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 나오는 '답장 편지' 같은 것이라는 걸 분명히 한다. 그렇다. 이 소설에는 히가시노 게이고가 보내는 어떤 조언 같은 것이 있다.



 3. 나팔꽃의 두번째 꽃말은 '결속'...


 그것이 바로 '나팔꽃'이 가진 또 하나의 꽃말, '결속'이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전작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과 달라지고 분명 한 발 더 나아갔다고 생각되는 지점이다. 여기서 히가시노 게이고는 일본 정부의 외침과는 다르게 분명 '책임'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책임'의 모습은 작중 인물의 다음과 같은 말로 분명히 선언된다.


 "세상엔 빚이라는 유산도 있어. 소타군." 다카미는 다정한 말투로 말했다. "모른 체해서 없어지는 거라면 그대로 두면 되지.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누군가 이어받아야 하잖아? (....) 확신할 수 있을 때까지 누군가 감시를 계속해야만 해. 마성의 식물을 확산시켜 버린 사람의 피를 물려받은 인간의 의무라고 생각해. 도망칠 수 없지.(p. 409)


 여기서 '마성의 식물'이 바로 원전을 뜻한다는 건 두 말할 것도 없다. '모른 체해서 없어지지 않는다'와 '감시를 게을리 하지 않는 것이 의무'라는 말은 그대로 히가시노 게이고가 현재 일본 정부에게 보내는 날선(사람의 도리로까지 격상시키고 있기 때문에) 비판이다. 그리고 일본 대중에 대해서는 '도망쳐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아키야마 리노와 가모 소타가 대표하는 일본의 젊은 세대에게 보내는 조언이다. 물론 이 조언은 젊은 세대에만 그치지 않는다. 같은 미스터리를 추적하는 하야세가 대표하는 일본 기성세대에게도 똑같이 해당되는 충고이다. 생각해보면 하야세 역시 리노와 소타의 처지와 비슷하다. 그는 한 때의 불장난 같은 바람으로 가정을 잃었다. 리노와 소타는 미래의 불안에 대해 아무런 자신의 잘못이 없었지만 하야세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잘못으로 모든 걸 날려버렸다. 이런 하야세가 기성 세대를 대표하고 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핸드폰의 사진 전송 기술에 대해 놀라워하거나 노래방에서의 아는 노래가 하나도 없다는 식의 자잘한 고백을 통해 그가 전형적인 기성 세대임을 독자들에게 부각시킨다. 그런 그가 오롯이 자신의 잘못으로 일본의 축소판이라고 할만한 가정을 파괴해 버린 것이다. 그에겐 중학생 아들 유타가 있다. 그는 무엇보다 자신으로 인해 아들 유타가 받았을 커다란 상처를 걱정한다. 이 모든 설정은 히가시노 게이고가 3. 11에 직면하여 일본 기성세대에게 보내는 일침이다. 오늘의 잘못이 누구에게 있는가 그것을 곧장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도성장이라는 환영과 안전에 대한 맹신에 불륜이 그렇듯이 그만 무분별하게 도취된 나머지 스스로 자정할 그 어떤 노력도 기울이지 않은 바람에 유타와 같은 젊은 세대들에게 커다란 상처를 주지 않았느냐고  뼈아프게 지적하는 것이다. 그런 하야세가 유타의 부탁으로 몽환화에 얽인 살인 미스터리를 개인적으로 추적한다. 바로 이 모습이 일본 기성세대에게 보내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제안이다. 역시나 도망치지 말라는 것. 부모로써 자녀의 미래를 위해 책임을 다하라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책임의 각성을 통한 결속인 것이다. 그러므로 일본 정부가 외치는 외양만인 결속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바로 그런 진정한 결속, 또는 그래서 더욱 단단한 결속을 위한 구체적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 그것이 어쩌면 이 소설의 지향점일 수도 있다.


 그 점이 바로 참여의 촉구로 나타나는 것인데 그는 왜 이렇게 모두에게 도망치지 말고 참여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일까? 오노 미쓰아키의 글에서 인용된 재일 한국인 학자 정영혜의 말을 다시금 인용해 본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가 특권이라고 해도 뒤집어보면 가장 많은 것을 빼앗긴 상태이기도 합니다. '매저리티(majority)'의 경우에도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아도 될만큼 아무런 문제도 없는 상태이기는 커녕 온통 문제 투성이잖아요. 그런데도 '생각하지 않게끔' 이빨을 빼버리는 거니까요. "당신들은 생각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됩니다." "투표일에는 잠이나 자주면 고맙겠다." 이런 말인 셈이잖아요. (...) 그들 자신이 깨닫기 위한 계기를 하나씩 하나씩 싹을 제거하듯 빼앗긴 것이고, 그게 '매저리티'라 불리는 사람들이 가진 '특권'의 실태입니다.


 '매저리티'는 일본의 정치적 지형에서 일본 국민이 취하고 있는 태도를 일컫는 말이다. 즉 '말없는 다수'이다. 일본 국민이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것은 유명하다. 투표율도 늘 낮았고 일본 정부가 무슨 정책을 펴든 가타부타 말없이 순응하는 편이었다. 그 저변에는 일본의 정치가 자신의 삶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태도가 깔려 있었다. 그걸 핑계로 그들은 일본 정치 현실에서 도망쳤다. 현재의 일본은 사실 그 결과라고 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 '말없는 다수', '행동하지 않는 다수'에게 더이상 도망치지 말라고 부탁하는 것이다. 방관이 가져오는 것은 불안이요 비극 밖에 없다고 말이다.


 그런 이유로 몽환화의 미스터리 추적은 순전히 개인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리노와 소타는 경찰과는 하등의 상관이 없는 일반인이다. 중요한 것은 형사 하야세인데, 그조차 개인적으로 사건을 뒤쫓는다. 아예 소설에서 이건 순전히 내 개인적인 이유로 뒤쫓는 것이라고 밝히기도 한다. 소타의 형 요스케도 마찬가지다. 경찰청의 관료이지만 홀로 뒤쫓는다. 추적하는 모두가 그렇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이 소설에서 철저하리만치 조직의 움직임을 깨끗이 배제하고 있다. 이 설정이 중요하다고 본다. 여기에 히가시노 게이고가 젊은 세대든, 기성 세대든 주고자 하는 조언의 구체적 모습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바로 더이상 매저리티, 즉 말없는 다수에 속하지 말 것. 그것을 핑계대고 도망치지 말 것. 그러기 보다는 '마이너리티(minority)가 될 것. 일본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회 문제가 바로 자신의 삶과 직결되어 있다는 생각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는 더이상 일본이 잠자는 다수의 나라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몽환화'는 그들을 흔들어 깨우기 위한 소설이다.


 이는 50년이라는 세월의 간격으로 보았을 때 전혀 상관있을 것 같지 않은 비극이 바로 한 개인의 삶과 직결되어 있다는 설정과 무엇보다도 록밴드를 이야기의 한 부분으로 삼고 있다는 것에서 드러난다. 후자가 특히 의미심장한데, 왜 히가시노 게이고는 하필이면 록밴드를 넣은 것일까? 이 역시 '매저리티'를 깨기 위한 개인적 저항의 촉발로써 집어넣은 것이라면 너무 앞으로 나가버린 해석인 걸까? 그런데 사실 3. 11 이후와 록 사이를 헤아려보면 꽤나 의미있는 지점이 나온다. 바로 3. 11 한 달 후에 나온 록가수 사이토 가즈요시의 '다 거짓말이었어'란 노래다. 3. 11로 일본이 말한 모든 것이 다 거짓말이었고 일본이 다 시궁창이었다는 게 들통났다고 외치는 이 노래는 원전 사고 이후 일본이 국민들에게 자숙을 강요하며 오로지 인내와 화합의 노래만이 펼쳐지고 있을 때 그 순응의 분위기를 깨어버린 첫 외침이었다. 일본 국민에게 강요하는 순응 아래에서 들끓고 있었던 저항심을 표출하게 만든 이 노래는 곧 일본 전역의 시위 현장에서 합창으로 불리워지게 되었다. 아마도 일본 독자라면 소설의 록밴드에서 곧바로 이것을 환기할 수 있었을 지 모른다. '매저리티'를 뒤흔들던 노래를 말이다.


 그 정도로 치밀하게 읽는 이를 뒤흔드는 소설. 그것이 바로 이 '몽환화'다. 최근까지 읽은 3.11 이후의 일본 대중 소설에서 가장 선명하고도 강력한 외침이 아닌가 한다. 전작 '나미야 잡화점에서의 기적'에서 느꼈던 한계를 이 작품은 후련하게 날려버렸다. 그렇지 않아도 최근 그의 작품에서 사회적 문제 의식을 잘 볼 수 없어 아쉬웠던 참이었는데 '몽환화'는 그나마도 넘치게 채워주었다. 여전히 가독성도 뛰어나고 여러모로 좋은 작품이지만 특히나 앞서 괄호 부분에서 말한 바와도 같이 일본의 오늘이 바로 우리의 내일이 될 수 있기에 추운 날 꽁꽁 언 몸을 녹이려 계속 곁불을 쬐듯 생각날 때마다 찾아 읽게 되지 않을까 싶다.


 재밌는 것은 이 책 자체는 '몽환화'가 가진 위험과는 정반대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이 책은 각성의 소설이요 결기를 돋우는 소설이다. 그래서 히가시노 게이고를 좋아하든 말든, 미스터리를 좋아하든 말든 상관없이 모두에게 권하고 싶다. 우리 역시 더 이상 '잠자는 다수'가 되지 않기 위해...


그냥 참고로...


사진은 몽환화로 불린 실제 노란 나팔꽃의 모습. 이게 히가시노 게이고가 말한 몽환화인지는 잘 모르겠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에도 시대에는 있었던 노란 나팔꽃이 어느 순간 멸종해버린 것에 착안해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사실 이 노란 나팔꽃은 희귀종이 맞다. 유럽의 희귀 식물 종자를 거래하는 사이트에서 이 노란 나팔꽃의 씨앗을 팔고 있던 것을 봤다.


 미국 아마존에서도 이렇게 일본의 나팔꽃으로 희귀하다며 그 씨앗을 팔고 있다. 소설을 읽고 나니 호기심에 한 번 구입해볼까 하는 강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 이유는 소설을 읽어보면 아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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