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란 언제나 글을 쓰지 않는 마이너리티와 우연히 마주친다는 것입니다. 이 마이너리티를 위해서, 마이너리티를 대변해서, 마이너리티의 뜻대로 책임지고 글을 쓴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것이 아니라 [그저] 서로가 서로를 밀고, 자신의 도주선 위로, 서로 결합된 탈영토화 속으로 끌어들이는 우연한 마주침이 있다는 말이지요. 글쓰기는 항상 다른 어떤 것 - 자신의 고유한 생성이 되는 어떤 것과 합류합니다.( 들뢰즈의 '대담' 중에서)
들뢰즈는 글쓰기를 단적으로 '타자-되기'로 정의한다. 여성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여성-되기'이고 동물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동물-되기'이며 흑인에 대해 글을 쓴다는 것은 '흑인-되기'이다. '타자화'라는 점에서는 번역도 글쓰기와 마찬가지다. 번역은 무엇보다 타인의 언어를 나의 언어로 바꾸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타인의 언어를 제대로 번역해내기 위해서는 타인이 어떤 마음으로 그 말을 하는지 그 타인의 내부로 들어가는 것이 필요하다. 내가 번역하려는 타자의 입장에 서지 않으면 제대로 된 번역이 나올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번역 또한 '타자-되기'라 할만하다. 윤여일의 이 책 제목이 '사상의 번역'으로 된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 있지 않을까 싶다. 타인의 사상을 내 것으로 하는 것도 번역 과정에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단순히 말하자면 번역은 일종의 대화다. 그런 까닭에 타인의 사상과 만나 나의 것으로 내재화 하는 일도 답습이 아니라 대화라 할만하다.
'사상의 번역'은 현암사에서 나오고 있는 우리시대 고전 읽기 총서 중 한 권이다. 이 총서시리즈는 한 권의 책을 텍스트 삼아 이야기를 풀어내는 게 특징이다. 총서의 네번째로 발간된 '사상의 번역'은 다소 우리에게 생소하다고 할 수 있는 중국 여류 학자 쑨거의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을 주된 텍스트로 한다.
저자가 자신의 책을 특히나 '사상의 번역'으로 한 것은 기실로 하나의 작품을 읽는다는 것이 그러한 번역이기 때문이다. 그 자신의 말을 들어보면 이렇다.
작품이 진정 작품이라면 그 제약을 딛고 나와 타인에게로 손을 뻗는다. 자신의 진실에 천착했던 유한한 개체의 지난한 사고의 흔적이 타인에게 물음으로 육박해간다. 작품의 문제 의식은 짙은 농도로 말미암아 읽는 자에게로 삼투되고 읽는 자는 작품에 자신의 내면 세계를 투사해 거기서 잠재되어 있던 여러 물음이 모습을 이룬다.그런 작품에는 어떤 번역성이 감돌고 있다. 원문에서 이미 번역이 시작되고 있다.(p. 8)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쑨거의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물음'이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한 개체의 사상을 번역한 번역서라고 한다. 같은 의미에서 윤여일의 이 책 또한 쑨거가 번역한 다케우치 요시미를 다시금 번역한 번역서다. 하지만 이 책의 제목이 번역인 게 단순히 그것만을 뜻하지 않는다. 거기엔 한 가지 의미가 더 결부되어 있는데 그건 바로 이 책이 취하고자 하는 방법론이다. 다케우치 요시미라는 사상가는 얼른 파악하기가 힘든 사상가다. 그에 대한 평가도 분분하다. 쑨거는 다케우치 요시미 같은 유형의 사상가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무엇보다 내재적 비판이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건 주로 다케우치 요시미의 사상적 공헌이 그의 한계와 밀착되어 있기 때문인데 그런 의미에서 다케우치 요시미의 사상이란 선택의 여지가 조금도 없는 상태에서 어렵게 내린 개인적 결단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결단의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무엇보다 그 결단을 내린 시점의 당사자 안으로 들어가는 것 말고는 달리 없다. 따라서 내재적 비판이어야 하는 것이다. 저자에 따르면 내재적 비판이란 이런 것이다.
내재적 비판이란 상대의 문제의식을 파고들어 그 문제의식으로부터 상대가 내딛지 못한 다음의 일보를 비판자가 재구성하는 것이다.(p. 19)
쑨거처럼 이 책도 이 방법을 취한다. 윤여일은 다케우치 요시미의 문제의식을 파고 들고 그를 번역한 쑨거의 문제의식으로 파고들어 그들이 봉착한 한계에서 그 너머에 있을 수 있는 것들을 비판적으로 재구성한다. 이 책은 그러한 대화이다. 무엇보다 타자-되기의 대화이다. 들뢰즈는 언젠가 자신의 철학은 남의 등에 달라붙어 자라났다고 고백한 적 있는데 이 책이 취하는 내재적 비판과 그리 다르지 않는 것 같다.
쑨거가 다케우치 요시미에게 주목했던 이유는 다케우치 요시미가 타자인 중국과 대면하면서 일본인이라는 입장에서 중국을 보고 그것을 일본적으로 동일화했던 것이 아니라 거꾸로 중국이라는 타자의 중심에 서서 일본인이라는 자신의 한계를 절감하면서 오히려 일본이라는 자기 내부를 지속적으로 허물어 갔음에 있었다. 그 타자 지향성에 쑨거는 대화의 가능성을 발견했다. 그건 그대로 서구 중심의 근대에 간직된 한계에 대한 대안이기도 했다.
하이데거가 말했던 대로 근대는 어디까지나 포식자와 같았다. 즉 자신과 차이 나는 것들을 그 모습 그대로 존중하지 않고 모조리 삼켜서 자기와 똑같이 만들었다. 푸코가 말했던 대로 근대의 이면엔 선택과 배제가 차별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자신과 닮을 수 있는 것은 선택했지만 그럴 가능성이 없는 것은 가차없이 배제되었다. 그렇게 자기 동일화의 이데올로기가 근대의 본질이었다. 그러므로 모든 게 단일한 전체가 되는 파시즘이 근대에 들어와 태동되었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헌데, 쑨거가 보고 있는 다케우치 요시미의 사상은 그와 정반대에 위치해 있었다. 거기엔 자기 동일화가 없었고 오히려 타자와 대면하면서 끊임없이 자신을 수정해가는 '타자-되기'가 있었다. 근대가 간직하고 있는 해악을 치유할 수도 있는 대안의 모습이 거기에 있었던 것이다. 윤여일은 쑨거가 다케우치 요시미와 대면하면서 찾아낸 대안의 맹아들을 하나하나 찾아나간다.
먼저 다케우치 요시미가 문학을 바라보는 태도다. 다케우치에게 문학은 장르가 아니라 하나의 태도였다. 어떤 태도인가 하면,
자기부정만이 진정한 부정의 가치를 지니며, 자기부정을 거치지 못한 지식, 바깥에서 주어진 지식은 생명력을 지니지 못한다. 문학이란 태도며, 자기부정적 태도다. 문학가라면 마땅히 유동적 상태로 자기를 갱신할 수 있어야지 굳어버려서는 안된다.(p. 58)
다케우치에게 문학은 자기부정의 태도였다. 나와 같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부정하기 위해 중국 문학을 대했고 중국을 대했다. 그는 그런 식으로 평생 연구했고 늘 닮고 싶어했던 루쉰의 문학도 대했다. 사실 자기부정으로서의 문학적 태도는 루쉰을 연구하며 가지게 된 것이었다. 무엇보다 루쉰 역시 늘 자기 한계를 긍정하면서 한 걸음을 더 내딛으려 한 결과 나온 것이 그의 문학이었기 때문이다.
루쉰은 스스로를 노예라 여겼다. 그건 현실 중국 사회에 대한 절망의 표현이었으나 다케우치는 그 절망 때문에 루쉰은 저항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말했다. 저항은 절망의 행동화로 드러난다고.
구원을 바란다는 사실이 자신을 노예로 만들고 있다. 노예에서 벗어나려면 가야 할 길 없는 고통스러운 상태지만 깨어나 자신이 노예임을 자각해야 한다. 그 공포를 견뎌야 한다. 만약 공포를 견디지 못한 채 구원을 바란다면 그는 노예라는 자각마저 잃는다.(p. 109)
그런 의미에서 자신이 노예임을 자각하는 노예를 다케우치는 '깨어난 노예'라고 부른다. 그는 노예를 거부함과 동시에 해방의 환상 또한 거부한다. 깨어난 노예는 주인이 되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착취와 차별의 한 축이라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다. 개인의 상황이 아니라 그것을 만드는 근저에 놓여진 구조를 본다. 그러므로 자신의 처한 상황 밖에 보지 못하는 '노예근성'과 구별된다. 그렇게 다케우치는 끊임없이 개인이란 내부에서 빠져나가야 한다고 역설한다. 그는 사상가의 내적 모순이 사라지면 사상은 평면화되고 그렇게 되면 타락하게 된다고까지 말한다. 그는 통속화를 가장 두려워한다. 자기 모순, 자기 부정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오히려 이를 지향한다. 진정한 사상가는 오로지 거기에 있을 때라야 숨을 쉴 수 있기 때문이다.
쑨거는 이러한 다케우치의 태도를 루쉰의 말을 빌러 '쩡짜'라 부른다.
바로 서두에서 진정한 사상적 만남은 자신을 상대에서 투입하고 끄집어내는 과정을 거치면서 자신을 갱신하는 것이라고 말했는데 그게 바로 쩡짜의 의미다.(p. 113)
쑨거는 '쩡짜'가 깨어난 노예의 숙명이라고 한다.
주체는 쩡짜로 타자와의 대립 속에서 자신을 씻어낸다. 동시에 부단히 회심의 축을 향해 돌며 자기를 재형성한다. 이로써 주체가 얻는 것은 유동성이다. 다케우치가 말하는 행위란 바로 이런 의미다.(p. 115)
즉 무엇보다 주체가 되는 것은 흐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디든 고여있지 않고 그 어떤 곳이든 기꺼이 흐를 수 있는 것. 그것이 사상을 하는 주체가 지향해야 할 바라고 다케우치와 다케우치를 번역한 쑨거가 말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다케우치의 생각들이 한창 민족주의가 강해지던 시기에 나왔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군으로 2차 대전에 참전했다. 그의 첫 저작이자 대표작이었던 '루쉰'은 참전 직전에 죽을 것을 염두에 둔 그가 마치 마지막으로 할 말을 다하겠다는 일념으로 쓴 것이다. 그렇게 모두가 모두에 대해 배타적일 때 다케우치는 타자인 루쉰과 만나면서 주체는 무엇보다 흘러야 한다는 것을 깨쳤다. 쑨거는 그런 다케우치를 1988년에 만났다. 그 한 해 뒤에 중국에서는 현대에 들어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라고 할만한 '천안문사태'가 벌어졌다. 민주화를 바라는 중국 청년들과 지식인들의 염원을 탱크로 처참하게 짓뭉개버린 사건이었다. 천안문사태는 80년 후반에 들어와 더욱 거세어지던 중국 청년들과 지식인들의 민주화 운동의 절정과도 같았다. 그 열망에 대해서 중국 정부는 조금도 귀기울이려 하지 않았고 철저하게 무력으로 짓밟으려고만 했다. 이러한 중국 정부의 모습은 다케우치의 일본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그 시기에 쑨거는 다케우치를 만났고 그의 '쩡짜'를 경험한 것이다.
그런 상황 속에서 오히려 반대의 길을 걸어온 다케우치와 쑨거의 사상 편력은 지금 날로 우경화되는 추세 속에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과연 진정한 주체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무엇을 주체로 삼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여러가지 생각 거리를 가져다 준다. 그런 면에서 '사상의 번역' 역시 다케우치와 쑨거처럼 적절한 시기에 나왔다고 하겠다. 날로 동아시아 삼국 서로에 대한 적대의 시선을 키워가는 요즘 이 책을 통해 '쩡짜'로서 타인을 한 번 헤아려 보는 시선도 가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런 면에서 많은 분들이 이 책을 읽고 '쩡짜'를 한 번 경험해 보셨으면 좋겠다. 꽤나 좋은 책으로 적극 추천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