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 것들은 전략이 있다
서광원 지음 / 김영사 / 2014년 4월
평점 :
품절


 세상에는 허다한 경영서가 있다. 처세서의 수도 그 못지 않다. 거기서 서광원의 '살아있는 것들은 전략이 있다'라는 이 책은 다소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성공적인 경영과 처세의 방법들을 생물학과 연결하여 찾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약육강식의 생태계에서 나름의 전략으로 살아남은 것들에게서 그 생태계와 비슷한 환경이라 할 수 있는 경영과 현대인의 삶에 있어 유용한 것들을 한 번 취해보자는 것이 이 책의 탄생 배경이고 지향점이다. 그래서 말인데 읽으면서 좀 서글프기도 했다. 본능에 따라서 움직이는 자연계나 이성을 사용하여 소위 문명이란 것을 이루고 살아가는 인간계나 모두 같이 생존이라는 지상 목표를 위해 경주해야 하는 존재들이라니. 인류는 역사 이래로 참 많이 진보해왔다고 하는데 본질적인 면에선 지금 우리의 삶이나 고대 유인원의 삶이라 별로 차이가 없으니 도대체 그많은 진보의 과실들은 어디로 다 가버린 것일까? 이런 생각에 좀 우울했다. 누구나 말한다. 현대는 성공 지상주의 사회라고. 그렇게 대다수의 사람들이 성공이라는 결승선을 향해 경마장의 말들처럼 오로지 앞만 보고 뛴다. 하지만 그 성공의 의미는 이제 예전과 달라졌다. 예전에는 보다 나은 삶의 상태 같은 것을 의미했겠지만 지금은 생존의 확실한 보장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가 사는 시대는 이전보다 삶의 불확실성이 훨씬 높아졌고 그만큼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더라도 생존을 안정적으로 보장할 가능성 또한 희박해져 버렸다. 개인적으로 서광원의 착안점은 좋다고 본다. 사실 지금 우리의 삶이란 생태계 맨 아랫단에 놓인 작고 약한 초식동물이 무시무시한 맹수들이 날뛴다는 정글을 앞에 둔 것과도 다를 바 없다고 할 수 있으니까. 자신의 존재와 세계의 상태를 제대로 아는 것. 그것이야말로 생존을 위한 가장 첫 번째 원칙이 아니던가! 이것이 서광원이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일점혁신주의'에서의 '일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약한 존재는 주위 상황에 민감하다. 그들은 대기의 조그만 변화도 놓치지 않고 감지하기 위해 귀를 늘이거나 목을 늘인다. 생존을 위해 도움이 될만한 정보들을 최대한 모으려는 몸짓이다. 그건 우리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책을 읽는 이유도 근본은 보다 많은 정보로써 잘 생존하기 위한 데 있을 것이다. 나는 그래서 이런 책들이 오히려 우리 삶의 서글픔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 안주는 죽음이니 부단히 나를 변화시키기 위해서 계속 채찍질을 멈추지 말아야 하며, 업무 성과는 성과대로 높이고 인간 관계 역시 원만하게 유지하는, 그렇게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며 승진을 위해 자기 능력을 개발해야함과 동시에 인간성까지 고양시킬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한다. 참으로 성공이란 열매의 단맛을 맛보기 위해 한 개인에게 과중되는 짐이 너무도 많다. 실제 우리의 스트레스는 일이 많고 너무 바빠서가 아니라 한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해오기 때문이 아닐까?

 책에서 인상 깊게 다가왔던 부분이 있다. 뛰어난 능력 덕분에 두 번의 이직으로 억대 연봉을 받게 된 이의 이야기였다. 원했던 만큼의 자리에 이르고 보니 마음이 허전해왔단다. 특히나 주위에 아무도 없어서 더욱 그랬다고 한다. 그래서 예전에 알던 지인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하지만 모두들 바쁘다는 핑계로 만나주지 않았다. 마지막에 건 선배 역시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이야기의 주인공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선배님도 많이 변하셨네요?"
 "그래 변했지 (...) 정말 너를 생각해서 하는 말인데 들어보겠어?"
 "무슨 말인데요?"
 "왜 사람들이 너에게 바쁘다고 하는지 모르지? 네가 그렇게 만든 거야. 잘 나갈 때는 연락 한 번 하지 않다가 자기가 필요할 때만 온갖 반가운 척 다 하며 연락하는 사람, 만나기 싫어서 바쁘다고 하면 '너 변했다'고 가시 같은 한 마디를 던지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너다. 내가 변했다고? 그래, 변해야지. 네가 그렇게 대하는데 변하지 않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변해야지. 그만 끊는다."(p. 84)

 왠지 찔리는 구석이 많았기에 참 많이 와 닿았던 이야기였다. 저자는 정말 자신이 인정받기 원하는 부분으로 방향을 정해 달릴 것을 원하며 이런 이야기를 했지만 나는 '그래, 사는 게 다 이렇지. 어떻게 두 가지를 다 이룰 수 있겠어?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내줄 수 밖에 없는 것, 그것이 지금 우리가 사는 모습이 아니야?' 이런 생각만 들었다. 저자는 뒤에 가서도 한 여자 임원의 이야기를 예화로 들려주는데 그 이야기 역시 성공 하느라 아래 사람에게 잘 못하여 주위에 사람이 없게 된 경우였다. 물론 나라고 모든 경우를 다 아는 건 아니다. 하지만 직장에서 인간 관계도 잘하면서 성과도 좋은 이는 잘보지 못했다. 그동안 내가 보아온 바에 의하면 주위와 아래 사람에게 잘 했던 상사들이 가장 먼저 도태되었다. 그런데 그 사람들 만나서 이야기해 보면 애초부터 직장에서의 성공을 그다지 원하지 않았던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그게 더 좋아서 그렇게 했던 것이다. 보면서 생각했다. '결국 사람이란 자신이 정말 무엇을 좋아하고 원하는 지는 처음부터 다 알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러므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진정 원하는 지 찾는 노력이 아니라 내가 정말 원하는 것을 끝까지 밀고 나갈 용기가 아닐까?'라고.

 그래서 말인데, 이 책은 내게 안주하지 말 것을 요구하지만 난 그만 안주하고 싶다. 사실 저자조차 현상유지란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호수 위에 떠다니는 백조가 아래로는 쉴 새없이 물갈퀴 달린 발을 휘젖고 있듯이 안주하는 것조차도 실은 꽤나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다. 나의 나됨을 받아들이고 그걸 온전히 긍정하는 것마저도 쉽지가 않다. 세상은 부단히 나에게 그들의 가치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니까. 또한 너무나 많은 것이 불확실한 이 세상에선 사람은 자연스럽게 무언가에 예속되기를 바라게 되고 남들과 닮게 되기를 바라는 법이니까. 저자의 말대로 이 세상이 생태계와 똑같이 온갖 위협으로 들끓는 곳이라면 바로 그렇게 나의 나됨을 긍정하고 그것을 유지하는 것에 대한 위협이라고 하겠다. 나는 저자의 '일점'을 받아들인다. 오롯이 한 곳에 집중하는 것에 동의한다. 이 책의 어느 부분에서 요구하듯이 두 마리 토끼를 다 잡고 싶지는 않다. 나 자신에게 너무 버거운 짐들을 부과하기도 싫다. 사실 굳이 그렇게 살아야 할 까닭을 모르기 때문이다. 난 그저 적당한 위치에서 적당히 구가하다가 사라지고 싶다. 그렇다. 난 굳이 서식지를 넓히지 않으려는 동물이다. 그저 있는 이 자리에서 최대한 삶에 충실하는 것. 그게 나의 생존전략이다.  저자도 방법 보다는 방식을 먼저 찾아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흔들리지 않을 방식을. 이걸 나의 방식으로 삼겠다. 더 많이 가지려, 더 높이 오르려 안달하지 않겠다. 너무 많은 것을 욕심내지 않겠다. 일이든, 사람이든.

 사실, 이건 탄식이다.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 중에 '우리의 광기를 참고 견딜 길을 가르쳐 달라'라는 것이 있다. 한창 핵무장에 강대국들이 열을 올리던 시절, 이렇게 아둥바둥 살아도 어느 순간 핵무기로 세상이 멸망해버릴지 모른다는 절망 속에서 그 소설은 쓰여졌다. 헤아리기 힘든 거대한 광기가 전 세계에 소용돌이 치고 있는데 어떻게 미쳐버리지 않고 태연하게 일상의 삶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 그것을 묻는 소설이었다. 지금도 다르지 않다. 어이없이 수면 아래에서 삶을 빼앗겨버린 수백의 생명들. 저마다의 이기적 욕망에 단 한 명조차 구조되지 못하고 그대로 수장된 목숨들을 보면서 어찌 절망에 빠지지 않고 태연하게 이전처럼 일상을 유지할 수 있겠는가? 방식을, 근본적인 태도를 변화시킬 수 밖에 없다. 다윈에 따르면 자연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생물들은 모두 닥쳐온 위기에 자신의 삶적 태도를 바꿔온 존재들이었다. '세월호'는 우리에게 보다 근본적인 삶의 가치를 묻고 있다. 나는 거기에 응답하고 싶다. 그런 고로 이 글은 이 책을 읽으면서 그리게 된 나의 응답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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