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 자매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김난주 옮김 / 민음사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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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툭.

 도토리가 떨어진다.

 아빠는 처음으로 본 태아의 사진이 도토리를 꼭 닮았었지 생각하며

 하나를 줍는다.

 진통을 시작한 아내가 딸을 분만하고 있는 사이에...

 아빠는 그 아이에게 '도토리'란 이름을 주었다.


 아내는 환영했다. 하지만 꼭 하나를 더 낳을 것이니 도토리를 나눠서

 돈코와 구리코로 하자고 했다.

 2년 뒤, 아빠는 다시 투명한 가을 햇살 아래서 도토리를 줍는다.


 그렇게 도토리 자매가 되었다.

 아빠 손 안에 가만히 놓여진 두 개의 도토리처럼.



 2010년에 나온 요시모토 바나나의 '도토리 자매'는 이처럼 분리와 결부가 테마인 듯 하다.

태어날 때 땅에 떨어진 도토리처럼 분리되는 상황이 있고 그 아빠가 주은 도토리를 주인공이 평생 지니고 있듯이 누군가에게 혹은 세상에게 '결부'되려는 욕망이 있다.


 소설이 진행될 수록 주인공은 러시아 인형처럼 자꾸만 거듭되는 분리의 상황에 놓인다. 처음엔 엄마와 아빠가 돌아가시고, 그녀를 거둬 준 삼촌 부부와 이모 부부와도 헤어지며 처음엔 계약 비슷하게 돌보게 되었던 친할아버지와도 결국 사별하게 된다. 거기다 같은 도토리 이름을 나눠받았지만 성격은 정반대인, 하지만 세상에서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언니 역시 방안 세계에만 칩거하는 주인공과는 달리 바깥 세상으로만 떠돈다. 그렇게 마치 시소놀이를 하는 것처럼 주인공은 거듭 분리와 결부 사이를 오고간다. 달이 차면 기울듯이 어느 정도 결부가 되었다 싶으면 분리가 오는 형국이다. 그러면서 오똑이처럼 분리와 결부 사이에서 서서히 균형을 찾아가는 것. 그것이 이 '도토리 자매'의 여정이라 할 수 있다.


 '도토리 자매'의 첫 인상은 얼른 2003년에 나왔던 '막다른 골목의 추억'에서의 첫 단편, '유령의 집'을 많이 연상시킨다. 이런 저런 유사한 점이 있지만 일단 먼저 눈에 들어오는 닮은 꼴은 주인공이 가장 결부되고 싶어하는 대상과 처음으로 함께 등장하는 계기가 되는 게 바로 '요리'라는 것. '유령의 집'에서는 주인공이 만든 전골을 애인과 함께 먹었는데, '도토리 자매'에서는 주인공이 만든 '삼계탕'을 언니와 함께 먹는다. 둘 다 혼자 먹기에는 많은 양이다. 양을 덜어줄 여분의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렇게 결부되려는 욕망의 상관물이다. 이 점은 '도토리 자매'의 삼계탕에서 더욱 노골적으로 표현된다. 주인공은 삼계탕 재료를 사기 위해 슈퍼마켓에 들른다. 거기서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엄마와 아이를 본다. 아주 평범한 대화였지만 그래서 더욱 그녀의 인상에 남는다. 오래 지속된 관계만이 가져다 줄 수 있는 평범함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주인공은 침대 속에서 여자와 남자가 나누는 대화도 이에 못지 않게 평범하다는 걸 알아차린다. 이제 그녀의 생각은 이런 쪽으로 연상되어 나간다.


 모두들 부모가 그리운 것이다. 그래서 연애에도 그리운 마음을 끌어들인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서도 로맨스를 추구하는 것은 나이가 들어 가면서 부모가 그리운 마음도 더 절실해지기 때문이다.(p. 16 ~ 17)


 남녀의 애정을 부모에 대한 그리움으로 주인공이 치환하는 것은 그 모두가 '함께 있다'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며 부모와 자식 간의 관계가 그 '함께 있음'의 가장 원형이 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이토록 그녀는 무언가에 이어지고 싶어한다. 누군가 혹은 세계와. 삼계탕은 그 바람의 표현이다. 그건 자신의 삶에 어떤 구심점이 있기를 바라는 소망이다. 위성이 되어 그저 그 궤도를 안정적으로 돌게 되기를 원하는.


 '그리움'은 주인공의 결부되려는 욕망을 나타내는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녀가 현재 가장 그리워 하는 대상은  최근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다. 왜 그토록 그리워하게 되었나 하면 그 때가 할아버지를 중심으로 언니와 더불어 흔히 가장 안정적인 도형이라는 삼각형을 완벽하게 이루어 살 수 있었던 시간이었기 때문이다. 즉 그리움의 강도는 누렸던 안정감의 강도에 비례한다. 커다란 그리움은 커다란 안정감을 향한 욕망의 또 다른 모습이다. 이는 다음과 같은 주인공의 고백에서도 알 수 있다.


 그러나 할아버지가 없다.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그저 당혹스러웠다. 할아버지가 사라지고 정말 사라졌다는 것을 제대로 인식한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멍하게 지냈다.

 아침에 불단에 향을 피우고 꽃을 바치고 나면, 할 일이 거의 없었다.

 바지런한 우리에게는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다.(p. 37~38)


 '우리'라는 표현을 쓴 만큼 주인공의 언니도 마찬가지다. 그녀 역시 주인공 못지 않게 결부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표현의 방식은 다른데 주인공이 그걸 '그리움'으로 나타낸다면 언니는 연애를 통해 나타낸다. 언니는 참 많은 남자를 만난다. 조금은 극단적인 성격의 그녀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줄 상대가 아니면 결혼하기 싫다고 한다. 그래서 연애는 대부분 초기에 끝난다. 언니 역시 완전한 결부에 대한 허기가 있고 잠깐 동안의 연애를 통해 굶주림을 비워낸다.


 이런 식으로 바나나는 소설에서 우리 역시 가지고 있는 타인 혹은 세계에 결부되려는 욕망의 그 표현하는 방식을 주의 깊게도 모두 다뤄간다. 우리는 결부되려는 욕망을 꼭 진짜 있는 존재로 드러내지 않는다. 때로는 진짜로 있지 않은, 환영적인 것으로도 드러낸다. 그렇게 주인공의 그리움은 지금 여기에 있지 않은 대상에 대한 것이므로 환영적 반면, 언니의 연애는 어디까지나 진짜로 존재하는 남자들을 대상으로 하므로 실재적이다. 요시모토 바나나가 굳이 자매를 가져온 것은 이 같은 방식을 다 보여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자매는'도토리 자매'라는 홈페이지를 운영한다. 고민이 있는 사람들이 그 홈페이지로 사연을 보내면 도토리 자매가 답해주는 사이트다. 이 역시 그녀들의 결부되려는 욕망의 표현이다. 누군가에게 뭔가 도움이 되기 위해 시작한 일이지만 사실 수면 아래엔 할아버지의 상실이 남긴 분리의 여백을 채우고 싶다는 바람이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너무 외롭고 몸도 둔해져서, 뭐든 상관 없으니까 그 때 일을 떠올리고 싶다고. 할아버지와 할머니 손발의 주름과 얇아진 피부를 보고 싶고, 오줌 냄새라도 좋으니까 늙은 사람의 냄새를 맡고 싶다고, 돌봐주고 싶다는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이나 있어서, 언니도 그런가 싶었기 때문이다.(p. 44)


 하지만 결부되려는 욕망은 주인공의 과거가 잘 보여주듯이 계속 충족될 수 없다. 상실과 헤어짐은 필연이며 언젠가는 '홀로서기'를 각오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그 '갇힌 세계'로 부터 그녀들을 끌어낼 필요가 생긴다. 언니는 한국 남자를 만난다. 그 남자를 통해 삶의 균형점을 서서히 찾아간다. 실재의 궤적은 벗어나지 않지만 일본의 입장에서 보자면 가장 외부에 있을 존재를 끌어들인다.


 그렇다면 주인공은? 그녀 역시 마찬가지다. 환영의 궤적을 벗어나지 않지만 그녀의 입자에서 보자면 가장 외부의 방법으로 균형점을 찾아간다. 그 방법이란 '역전(逆轉)'이다. 지금까지 그녀의 그리움은 실재에서 출발하여 환영으로 나아갔다. 하지만 고등학교 때 만나 첫사랑이라는 걸 느꼈지만 이후로는 영영 만나지 못했던 아이인 '무기'에 대해서만은 '환영'에서 실재로 나아간다. 어떤 슬픈 꿈을 통해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의 죽음을 희미하게 예감하게 되고 결국 그가 이미 죽어서 세상에 없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 무기와의 재회를 통해 주인공은 균형점을 찾는데 이렇게 보자면 요시모토 바나나가 둘 모두에게 그녀들의 가장 바깥의 것으로써, 그렇게 가장 타자적인 것을 삶의 중심추로 가져다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니 바나나의 소설에 있어서 이게 처음은 아니다. '유령의 집'에서도 그랬다. 거기에선 연인이 주인공이었다. 주인공 여자는 고인 물처럼 살아간 반면 남자 친구는 흐르는 물처럼 살아갔다. 그렇게 여자는 삶을 고수하는 쪽으로, 남자는 삶의 변화를 받아들이는 쪽으로 다른 색채를 보였다. 이 역시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대표적인 방식을 모두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서로의 존재를 통해 도토리 자매들 처럼 균형점을 찾아 가는데 그 가장 계기가 된 것은 남자 친구가 살고 있는 집에 불현듯 출현하는 생전에 그 집에 살았던 노부부의 유령 때문이다. 그래서 제목이 '유령의 집'이다. 그 집에서 어느날 주인공은 그 유령들이 살았던 당시 모습 그대로 일상을 영유하고 있는 모습을 본다. 오래 함께 살아온 부부만이 보여줄 수 있는 특유의 무심함, 초연함이 거기에 있었다. 주인공은 그 관계의 밀도에 감명받는다. 문득 삶에서 조금 힘을 빼도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그렇게 남자 친구를, 자신에게 있어선 변화를 받아들인다. 유령이라는 가장 타자화된 존재를 통해서.

 '도토리 자매'의 주인공도 다르지 않다. 무기를 다시 찾게 된 가장 결정적인 계기가 된 무기의 장례식 꿈이 그렇다. 더구나 무기 역시 '유령의 집'의 남자 친구 이와쿠라랑 많이 비슷하다. 이는 또한 이 사이에 존재하는 '사우스포인트의 연인'과도 유사하다. '화와이'라는 가장 먼 남쪽에서 부재하는 '유키히코'를 통해 주인공은 균형점을 찾아간다.



 '막다른 골목의 추억'에서 부터 '사우스포인트의 연인' 그리고 '도토리 자매'. 이 일련의 소설들은 바나나의 관심이 '자신'이라는 경계를 허무는 '타자'에 있으며 바로 거기에 삶에 복원력을 가져다 주는 '치유'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 문장으로 말하면 삶의 구원은 가장 먼 바다로 부터 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밀려오는 타자의 파도를 받아들이려는 마음이 필요하다. 끊임없이 자신의 경계를 흐물어뜨리며 자신의 영토를 내어주는 해변의 모래사장처럼 말이다.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처럼, 쾌감과 불쾌감이 다가왔다가는 사라진다. 집에 틀어박히는 시기가 있고 그다음에는 밖으로 나가고 싶은 시기가 반드시 온다. 그 반복은 파도와 같아서, 하염없이 바라만 보거나 그 한가운데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어도, 절대 싫증 나지 않는다. 그것이 살아 있음의 유일한 기쁨이다.(p. 130)


 결국 이렇게 타자를 통하여 삶의 균형점을 찾아가는 건 어디까지나 이 순간에 존재하는 현재를 가장 충실하게 보내고자 하는 마음이다. 요시모토 바나나는 삶이란 미래의 결산을 위해 현재는 그 과정이 될 수 밖에 없는 적금이 아니라 어느 때의 현재든 그 자체로 다 의미있고 가치가 있는 예금이라 여긴다. 결국 추운 겨울이 다가올 것임을 안다면 이 생명력 넘치는 초록의 여름을 할 수 있는 한 마음껏 누리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아직 다가오지 않은 것에 불안하기 보다는 지금 내게 존재하는 순간 순간에 최선을 다하자고 한다. 파도 타기를 하는 것처럼. 그렇지 않아도 파도 타기에 능숙한 자들은 언제나 이렇게 조언한다. '다가올 파도는 신경쓰지 말고 오직 지금 타고 있는 파도에만 집중하라.'고.


 개인적으로 여기에 약간 불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는 밝히고 싶지 않다. 이 소설은 2011년의 3.11이 일어나기 전에 나왔다. 현재 자체를 중요하게 여기고 충실히 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쓸데없이 끼어드는 무분별한 욕망을 자제하게 만드는 순기능이 있다. 대부분 우리의 불안과 힘겨움은 실제로는 내게 별 필요도 없는, 그저 타인의 인정을 구걸하기 위한 양산된 욕망에서 비롯되니까 말이다. 하지만 3. 11 같은, 또 지금의 '세월호' 같은 파국적인 사태 앞에서도 여전히 이러한 삶적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가는 의문이다. 그저 이 순간을 소중히하고 충실히 하는 것만으로 충분할까? 아니, 충분함의 범주에 그저 사는 것말고 다른 무언가를 더 집어넣어야 하지 않을까? 아직 이 소설의 바나나는 그걸 경험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경험 후의 바나나를 보고 싶다. 그 때까지 여기에 대한 진짜 대화는 미뤄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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