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사회인으로 산다 - 연대와 공존으로 나아가는 유쾌한 삶의 방식
데루오카 이츠코 지음, 조한소 옮김 / 궁리 / 2014년 3월
평점 :
절판


 '사회인'이란 말에 나도 얼른 직장인을 떠올렸다. 우리 사회에서 그 말은 어느 정도 고정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직장에 나가 제 밥벌이를 스스로 한다는 식으로. 데루오카 이츠코에 따르면 '사회인'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일본으로부터 온 모양이다. 일본인들도 '사회인'을 흔히 '취직하는 것'과 동일하게 생각한다고 하니까. 하지만 이랬을 경우 여기엔 어쩔 수 없이 배제되는 이들이 생긴다. 오늘날 취업이라는 건 그리 만만한 일이 아니니까. 청년 실업률이 날마다 오르고 있는 추세다. 그렇다면 비사회인들이 많아진다고 여겨야 할까?


 도대체 이런 식의 고정관념은 언제부터 생겼을까? 그건 아무래도 70년대와 80년대 무렵인 것 같다. 그 때는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모두 고도 성장기로 노동력의 수요가 한창 많았던 때다. 최인호의 소설 '바보들의 행진'에서 보듯 그렇게 낭만과 자유를 구가하고도 대학만 졸업하면 얼마든지 취업하는 게 가능했다. 물론 지금으로서는 꿈도 못 꿀 일이지만. 누구나 쉽게 직장을 얻을 수 있었으니 사회인이란 곧 직장인이란 등식이 가능했던 것이다. 하지만 지금 취업은 빙하기다. 우리나라도 일본도 마찬가지다. 사회인이 곧 직장인인 이 두 나라에서 취업하지 못한다는 것은 어엿한 성인으로서 한 사람 몫을 하고 있지 못하다는 자괴감을 당사자 내적으로도 가지고 타인들로부터도 받게 된다. 영화에서 백수들이 불쌍하게 흔히 묘사되는 것도 그 인식의 연장선상에 있지 않을까? 그렇게 인간성 평가까지 당하게 되므로 바늘구멍만큼이나 좁아진 취업문은 청년 세대들에게 더욱 미래에 대한 불안으로 작용할 수 밖에 없는 듯하다. 하여 자기 연민과 비하를 가져오고 자신 이외의 일에 무심하게 만들며 정치적으로도 소극적으로 만든다. 날이 갈수록 젊은 세대의 투표율이 떨어지고 보수적이 되는 것은 어쩌면 그러한 불안이 만연해 있다는 증거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초점이 잘못 맞춰져 있다. 젊은 세대들이 취업되지 못한 것 하나로 불안감에 빠져들고 자기 비하에 빠지는 것은 그 취업되지 못함을 오로지 자기 책임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그렇게 바라본다는 것 자체가 생각의 오류이다. 취업난은 어디까지나 사회 구조적인 문제로 그것은 개인의 능력 여부와 관계가 없다. 앞서 70년대와 80년대 상황에 대해 이야기 한 것을 떠올려 보라. 그 때는 지금 요구되는 스펙의 10분의 1만으로도(아니 졸업장만 있어도) 취직이 가능했다. 이처럼 개인의 능력이 그다지 변수가 되지 않았다. 수요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건 구조적인 문제다. 취업이 호황일 때 그랬다면 취업난일 때도 역시 마찬가지이지 않을까? 분명하다. 사회가 잘못하고 있는 것이다. 국민의 막대한 세금을 거두는 정부가 구조적으로 이런 취업난이 일어나지 않도록 했어야 했다. 아니면 사회안전망을 확충하여 취업하지 못하더라도 생존에 대한 걱정 없이 미래를 준비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사회인이 되지 못했다고 해서 스스로를 비하하거나 괴롭히지 않도록 말이다.


 도대체 '사회인'이라는 게 뭔가? 따지고 보면, 그건 오로지 자본이 만든 규정일 뿐이다. 노동력은 언제나 자본이 요구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그런 자본의 요구에 응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게 스스로를 '비사회인'으로 비하 한다거나 타인을 무시하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우리나라엔 '부자 나라, 가난한 시민'이란 책으로 첫 선을 보여 모두가 부자와 성장이라는 도그마에 빠져 신자유주의가 흑사병처럼 만연하고 있을 때 진정한 사회의 풍요란 어떤 것인가를 보여 깊은 인상을 남겼던 일본 경제학자 데루오카 이츠코는 이제 그동안의 편협한 사회인의 규정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그는 이제 우리가 진정한 사회인이 되는 것에 눈을 돌릴 때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것이 바로 '나는 사회인으로 산다'는 책이다.



 사회인이 된다는 건 취업하는 것과 다르다 데루오카 이츠코는 후자를 '회사인'으로 불러야 한다고 말한다. 이렇게 따로 규정하는 이유는 사회인과 회사인이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그걸 20년 전에 인상 깊에 읽었다는 다나카 미쓰히코의 '원자력 발전 왜 위험한가? 전직 설계기사의 증언'이란 책을 통해 설명한다. 다나카 미쓰히코는 2011년 3월 11일 일본 원전 사태를 일으킨 후쿠시마 원전의 설계 부문에서 일했다. 거기서 그는 우리나라의 원전 비리처럼  원전의 심장부라는 압력 용기에 법규를 초과한 결함을 발견했는데 그건 안전 검사에도 통과되지 못할 정도로 심각한 것이었다. 다나카 미쓰히코는 그 문제가 어떻게 아무 문제가 없는 것으로 처리될 수 있었는지 당시 기업의 사고 방식, 국가의 대응, 그 배경에 있는 일본 사회의 습성을 모두 망라하여 자세하게 소개했다. 그런데 그런 기업의 처사에 대해 말하는 건 함구령이 엄격하게 내려져 있었다. 그는 갈등을 겪었다. 그 결함을 발견하기 전 그는 자신이 하고 있는 원전 설계가 지역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될 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는 말한다. '조직의 역학은 사람의 마음을 어떤 특유한 상태로 만든다'고. 그렇게 그는 조직의 원리로 움직였다. '자신이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사회라는 더 큰 맥락에 놓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그 결함을 발견한 후엔 더이상 조직의 일원으로 있을 수 없었다. 그 압력용기가 이대로 도쿄 전력의 원전에서 사용되면 장차 문제를 일으킬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과연 조직의 일원으로서 조직의 이익을 위해 이대로 침묵할 것인가 아니면 사회의 일원으로써 발언할 것인가? 그것을 두고 고민했다. 결국 그는 후자를 택했다. 그리하여 책을 쓰게 되었던 것이다.


 '회사인'은 다나카 미쓰히코의 고백에서 보듯 '사회인'의 진정한 의미가 될 수 없다. '회사인'은 조직이 규정한 범위 밖에는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이기 때문이다. '회사인'은 지금 자신의 행위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보지 못한다. 오히려 오직 조직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느라 사회 전체에 해를 입히기도 한다. 최근 이상호 기자가 연합 뉴스 기자에게 한 욕설이 인구에 회자되었다. 연합 뉴스 기자가 구조하기 좋은 정조의 시기에 고작 소수만 수색 작업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상 최대의 구조작전이라며 왜곡, 과장 보도를 했기 때문이었다. 이것이 검색 순위 상위에 오르고 네티즌에게 비난을 받자 그 기자도 억울했던지 자신의 블로그에 이런 글을 올렸다.

 

블로그에 방문해주신 여러분, 감사합니다.
저라고 뭐 용빼는 재주 있겠습니까? 위에서 시키니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죠.
그 위에 프런트도 결국 사장딱가리, 사장은 대통령 딱가리... 다 그런거잖아요.
그리고 그 정부 뽑아준건 여러분들이구요. 왜 저한테만 그러시는지.
솔직히 여러분을 연합뉴스 기자 시켜줘도 저랑 똑같이 행동할꺼잖아요


 여기서 데루오카 이츠코가 말한 '회사인'의 한계는 여지없이 드러나는 것 같다. 그들은 그 너머를 보지 못한다. 사회 전체의 이익 보다 조직의 이익이 더 중요하다. 아니, 조직의 이익을 지켰을 경우에 따라오는 자신의 이익이 더 중요하다. 그래놓고도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했다는 것으로 정당화한다.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거, 다들 알지 않느냐는 것이다. 모두가 이런 핑계를 댄다. 세월호의 침몰과 더불어 차마 입밖에 내기도 힘들 만큼의 어마어마한 학생들이 어이없이 목숨을 잃었다. 모두 조금이라도 그들을 생각했다면 구할 수 있었던 목숨들이었다. 선장이나 선원들이 제 목숨만 생각하지 않고 빨리 빠져나가라고 안내 방송만 했더라도, 최소 신고에서 침몰까지 걸린 세시간동안 해경이든 어디든 빨리 구조 헬기와 배만 보내줬더라도, 국민 안전에 더욱 치중하겠다고 선언했던 정부가 그 말 그대로 유속이 어떻다는 둥, 책임 소재가 어디라는 둥 핑계를 대지 말고 그냥 총대를 매고 적극적으로 구조에 총력을 기울였더라면 정말 많은 목숨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들은 그러지 않았다. 선장과 선원들은 자신과 기업의 이익을, 해경은 해경의 이익을, 해수부는 해수부의 이익을, 언딘은 언딘의 이익을, 선거 후보자들은 자신의 이익을, 정부는 정권의 이익만을 앞세웠다. 그들에게 생떼 같은 자식을 잃어버린 부모의 아픔은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항의는 미개한 짓거리였고 그들의 절규는 귀찮은 소음일 뿐이었다. 총리라는 작자 역시 그 부모들이 제발 대화좀 하자고 차창 밖에서 하소연을 하고 있는데도 잠을 잤으니 말 다했다. 정말 오늘의 비극은 어디에 있는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모두 그 너머를 보지 못하는, 협소한 회사인의 시각에 빠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리고 그렇게까지 회사인으로 있으려고 하는 것. 그것 역시도 사회인으로 있으려면 어쩔 수 없다는  저 연합 기자의 글에서도 보듯, 잘못된 사회인에 대한 시각 때문이 아닐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라도 빨리 '사회인'의 진정한 의미를 되찾아야 한다. 그건 이런 비극을 또다시 겪지 않기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이다. 그렇다면 진정한 '사회인'은 어떤 존재인가? 핵심은 연대와 공존이다. 데루오카 이츠코는 왜 이것이 필수적일 수 밖에 없는 지를 은퇴한 자들의 고백들을 통해 훌륭하게 증명한다.  다음은 그 고백들 중 하나이다.


 너는 아직 자신의 의견을 발표할 곳이 있고 자기 의견에 응답해줄 상대가 있지. 하지만 나는 그런 게 없어. 그런 게 없다는 허기를 과연 너는 알까? 살아가는 데 가장 중요한 것은 타자와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 응답을 받음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실감할 수 있다는 것, 모르던 것을 알게 됨으로써 새로운 지식을 얻는 놀라움과 기쁨이 있다는 것, 이런 게 아닐까? 그건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변하지 않는 인간의 근본적인 욕구야. 현역 시절과 달리 혼자가 되고 보니 새삼 그런 욕구르 느껴. 타인고 대화하면서 그 욕구를 채우고 싶어도 요즘 사회는 그걸 민폐로 여기고 차갑게 떠나가버려. 응답해줄 상대가 없으니 나는 고독해질 뿐이야. 이래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어.(p. 51)


 '나는 사회인으로 산다'는 이처럼 협소한 조직의 이익을 넘어 전체 사회와의 연대와 공존으로 그 책임마저 적극적으로 떠맡는 진정한 '사회인'으로 가는 길을 보여주는 책이다. 그리하여 개개인의 강화된 역량으로 성숙한 시민 사회를 만들어 결국 '좋은 사회'를 이루고 싶어 한다. 그 '좋은 사회'란 어떤 사회인가?


 좋은 사회란 개인으로는 대처할 수 없는 어려움에 부딪쳤을 때 사회적으로 지원함으로써 개인의 자립과 자유로의 길을 여는 사회다. 나쁜 사회는 그 반대로, 개인으로는 대처할 수 없는 책임을 개인에게 떠맡김으로써 모든 것을 잃게 만든다.(p. 91)


 좋은 사회란 '부자 나라 가난한 시민'에서 말했던 진정한 풍요의 나라와 다르지 않다. 개인이 자신의 삶을 충실하게 영유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줄 수 있는 사회. 그것이 좋은 사회다. 나쁜 사회란 그 반대다. 지금 세월호 참사에 대해 정부가 하는 것을 보면 지금 우리 사회는 나쁜 사회라 할 수 있다. 구조에 너무나 소극적이었던 정부는 결국 모든 걸 부모에게 떠넘기지 않았던가? 그저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 밖에는 할 수 없는 부모들에게. 그리하여 진실로 모든 걸 잃게 만들지 않았던가?

 세월호 참사로 딸을 잃은 한 부모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CBS 노컷뉴스 김민재 기자 페이스북에서)


 내가 이번 일 겪으면서 첫번째 느낀게 내가 참 못난 부모였구나 하는 걸 느꼈어요. 내가 참 부족한 부모구나. 이 나라에서 사려면 나 정도 부모여서는 안된다, 내 새끼를 지키지 못하기 때문에. 이 대한민국이란 나라에서 자식을 지키려면 최소한 해수부 장관은 되야 돼. 무슨 말인지 알죠? 나 같은 사람은 자식을 죽일 수밖에 없는 사회야 이 사회는.

나는 내가 잘났다고 생각했어 내 자식들한테. 내가 20대 때만해도 이 사회가 이렇다는 걸 알았어. 전두환 정권 잡고 살 때 나도 내놓았던 사람이기 때문에 이 사회가 썩었다는 거 알았어. 그래서 내가 잘 되어야 하고 강해져야 한다는 걸 알고 나름 발버둥쳐서 이렇게 왔는데 근데 지금 이렇게 내 자식 잃고 보니까 나는 못난 부모더라고. 난 능력없는 부모고 자식을 죽인 부모에요. 살리지 못한 부모에요. 이렇게 능력 없는 부모가 무슨 할 말이 있다고 방송에 떠들어요.

한국정부가 꼼짝도 하지 않고 내가 던진 계란이 그 바위를 더럽히는 그 정도도 아니더라고. 그래서 전 세계에 떠든 거야.


 나쁜 사회의 전형적인 모습은 데루오카 이츠코의 표현대로 하자면 '격차사회'다. 사람들을 의식 면에서도 생활 면에서도 '격차와 차별의 벽'으로 사회적으로 분리해버리는 사회다. 정규직과 비정규직으로 구분하는 것 혹은 종북 프레임을 씌우는 것 등이 대표적인 예다. 지금 사회는 겉으로는 평등을 외치고 있지만 실상은 그 격차를 더욱 벌여나가는 데 집중하고 있다. 그것이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격차는 분열을 낳고 적대를 낳는다. 내부적으로는 어느 위치에 있던 구성원이든 불안하게 만든다. 그래서 그들의 시야를 한없이 좁힌다. 타자에 대해 공감과 배려를 가지지 못하며 자신의 행위가 사회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는지 자각하지 못한다. 오로지 자신과 조직의 이익만을 위해 움직이며 거기에 방해되는 타인들은 모두 방해꾼이나 적으로 간주한다. 결국 격차 사회는 회사인들을 가득 생산한다. 그리하여 종국엔 이렇게 된다.


분열된 사회를 내버려두면 폐해가 생긴다. 분열을 역이용해서 자기 세력의 확대를 꾀하는 권력자가 있고, 합의 보다도 힘으로 억누르는 결정이 옳다고 믿게 만드는 정치가도 나온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일을 어쩔 수 없다며 무기력하게 체념해 버리거나, 스스로 하나하나 쌓아올리는 것이 귀찮다는 이유로 있을 수 없는 영웅이나 리더십이 나오기를 기다려 전부 맡겨 버린다.(p. 174)


 이런! 이건 바로 우리 사회의 모습이 아닌가! '해도 별 소용없을거야!'라는 무기력, '이것도 다 지나가리라!'는 체념. 나 대신 이 사회를 구원해줄 누군가를 기다리며 입과 손가락으로만 욕하는 사이, 결국 우리는 오늘의 저 커다란 비극을 부르고 말지 않았던가.


 앞에서 인용한 어머니는 같은 인터뷰에서 계속하여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우리가 분노하는 이유는 할 수 있으면서도 안하는 것과 못해서 안하는 건 다르잖아요. 내가 능력이 없어서 못하는데 물살이 세든, 장비가 부족하든 간에 한명이라도 구조하겠다고 애쓰면 부모 입장에서는 정부가 우리를 위해서 노력했으니까 피눈물 나도 저 사람들도 귀중한 목숨인데 감사해요. 설사 못 건졌다하더라도 감사하죠.


 근데 걔네들은 어떤 액션도 하지 않았다. 역으로 얘기하면 죽을 시간 기다린거죠. 가장 골든타임이라 첫째날 둘째날 다 시간 놓쳐놓고 셋째날부터 뭔가 해보겠다고. 근데 한 거 없다. 액션만 한 것 뿐이지 배 갖고 돌기만 하고. 해경이 첫날도 둘째날도 뭐하겠다고 브리핑했는데..아무 것도 한 게 없어서 학부형들이 찾아가서 보면, 이 사람들 여기서 브리핑한 거 아무것도 안한 거에요. 헬리콥터 15대 뜬다고 했는데 1대 돌고 있고요. 잠수부도 내려간댔는데 물살이 세서 못한대. 4시간 지나서 해야한대. 또 근데 4시간 지나서 한다는 말이 또 못한다는 거에요. 그런 게 계속 반복됐다. 그렇게 날이 지나서 애들 다 죽었어요.


 대한민국 머리 있는 사람들이라면, 정부가 인원이 한 명도 안나오고 있는 거면, 문제가 있다는 걸 다 알죠. 저거 문제가 있다, 290명이 들어가 있는데 구출해내는 사람이 없고 똑같은 방송만 할 떄는 문제가 있다고 생각을 하죠. 멍청한 국민만 이렇게 말하는 거에요. 물살이 세서, 장비가 어째서. 구조할 수 있는 배 만들어놨다면서요. 실험을 해도 여기 와서 실험해도 되잖아요. 어차피 죽일 바에는 와서 실험해도 되잖아요. 그러면 억울하지라도 않다니까 민간구조대들이 이정도면 내려갈 수 있다고 할 때 해경이 못 내려가게했잖아요. 막지라도 않았다면, 살리려고 액션을 취한 거잖아. 그것도 안했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미치는 거에요.


 우리 학부형이 미쳐 돌아가는 건 자식이 죽은 것도 기가 막힐 노릇인데 그것보다도 자식이 죽어가는데 구조하겟다는 의지 아무 것도 없이 방송에서만 열심히 구조하고 있다고 거짓보도 했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부모들은 피가 말라가는데 잠수부들 들어갔다 몇 번 하고 다시 오고 들어갔다 몇 번 하고 3일 4일, 그렇게 해놓고 방송에는 헬기 열다섯대 띄우고 물살이 세서 못 들어가고 계속 그렇게 방송했어요.


 우리 친척 중에 같이 있던 사람이 집에 가더니 전화 와서 하는 얘기가 "진정해라. 잘하고 있으니 믿고 가라"는 거에요. 잠깐 보고 간 사람이 텔레비전 보고 마음이 바뀌어서 그러는데. 결론은 같더라도 액션을 취해졌으면 안 돈다 이거에요. 미국 군함이 도와준다는데 안해도돼, 그런데 네이버에는 와서 있다고 뜨고. 뭐하자는 거냐고. 니 자식이 이렇게 들어가도 이럴 거냐고. 내가 못난 부모니까 내 자식 죽인 거라니까. 자식 낳지 말라니까.


 인터넷으로 유명한 나라고, 3, 40대 똑똑한 인재가 많은데 그 사람들 앉아서 뭐하냐니까? 그 사람 앉아서 쓸데없이 수다 떨고 있어요? 이 상황 알면 분연히 일어나야지. 그 사람들 50대 되면 나하고 똑같은 상황 겪을 텐데.


 내가 30대 때 삼풍백화점 무너졌어요. 그 때 사연을 보고 제가 많이 울었어요. 어떻게 이런 말도 안되는 일이 대한민국에서 벌어지나 울었어요.


 그런데 내가 아무 것도 한 게 없더라고. 같이 슬퍼해준 것 밖에. 10년 간격으로 대형 사고 나는 나라에서 구조적인 일에 내가 봉사를 했다든지, 데모를 했다든지 뭔가 해놨으면 이런 비극이 안 일어났을텐데 내가 그저 슬퍼만 하고 울기만 했기 때문에 이런 일 겪었다는 생각도 들어요.

지금 결혼해야하는 그 분들, 자식들 낳을 거 아니에요? 지금 나처럼 슬퍼만 하고 있으면 그 사람들 내 나이 됐을 때 똑같은 일 겪을 거라고.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든 바꿔놓고, 개선 안할 거면 결혼하지 말고 자식 낳을 생각이면 해수부 장관이 되든지 그것도 아니면 뭔가 액션을 취하려고 해야지 같이 슬퍼하는 거 이제 바라지 않습니다. 눈물 흘리는 거 바라지 않아요. 동정 바라지 않아. 내가 왜 동정받을 사람입니까? 나 동정 필요없어요. 당신들 할 일은 분연히 일어나서 지금 이 상황 같이 분노해주고 바뀔 수 있도록 행동을 해주는 거에요. 그거 아니면 울어주지 말라고.


 리뷰를 위해서가 아니라 잊지 않기 위해, 꼭 기억해두기 위해 여기 인용해둔다.

 결국 데루오카 이츠코가 말하는 '사회인'으로 산다는 건, 이 어머니가 우리에게 바라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데루오카 이츠코는 후쿠시마 원전 사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우리에게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안이하게 의존해버리는 '위임사회'가 비참한 사고를 일으켰고, 앞으로도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똑같은 사회적 참사를 부를 것임을 가르쳐주었다.(P. 92)


  우리는 정말 많은 것을 사회에 위임해버리지 않았던가? 당장 내 일에 관계없다고, 내 이익이랑 무관하다고 그저 강건너 불구경하듯 내버려두지 않았던가? 귀찮다는 이유로 또는 불이익이 두렵다는 이유로. 하지만 우리의 이러한 방관은 씨랜드가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으로 이어지고 또 그것이 세월호 참사로 이어졌듯이 내내 커다란 비극의 반복만 부를 뿐이다. 내 일, 내 비극으로 여기고 같이 분노하고 행동하는 것. 그것이 진정한 '사회인'이 되는 것이며 바로 그것만이 우리를 이러한 비극으로부터 지키는 일이다. 안전하고 좋은 사회에 살고 싶은가? 진실로 그건 저절로 얻어지지 않는다. 스스로 개척하고 개간해야만 얻을 수 있다. 당신의 적극적인 참여만이 당신의 안전을 보장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도 유일한 길이다.

 

 민주주의는 '지식을 아는 것'만으로는 민주주의 실체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민주주의를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P. 22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