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설하고, - 김민정 산문
김민정 지음 / 한겨레출판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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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도 몰랐고, 어떤 책인지도 몰랐다. 난 제목에 끌렸다. '각설하고,'
이건 어떤 무모함이다. 지금까지 무슨 이야기가 오갔든지 간에 자기 할말은 하겠다는 선언. 하지만 그 무모함이 오만해 보이지 않는 건, 오리무중 속에서 자꾸만 불어나는 말의 지방들을 깔끔하게 빼버리고 해야 할 말만 담백하게 하자는 뜻이 담겨 있기 때문이리라. '각설하고'는 내 속내를 이야기하겠다는 신호이기도 하다. 이 이전의 말들은 바로 이 말을 하기 위한 예고편에 불과했다는 듯이.

 그래서일까 우승자를 발표하는 순간을 마주한 것처럼 우리는 더욱 귀를 쫑긋 세우게 된다. 말이 자꾸만 인플레이션 되는 시대에 '각설하고'는 어쩌면 우리의 일상이 되어야 할 말인지도 모른다. 너무 과잉의 말들이 넘쳐나 우리를 홀리려들고 헛갈리게 만들며 길을 잃도록 하니까. 진짜 할 말을 하고 진짜 들어야 할 말만 듣게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우리는 진짜 진심보다 몇 배의 거짓을 말할 수 밖에 없고 또 들어야 한다. 사는 건 단 하나의 진심을 말하거나 듣기 위해 긴 거짓의 목록을 작성하는 일이니까.

그런 말들의 환영 속에 둘러싸이다 보면 어느 순간 '각설하고'라는 말이 그리워진다. 그렇게 나오는 속내를, 진심을.

 지은이는 시인이다. 그리고 출판사 편집자. 돈이 안되는 시집들을 기획해서 마케팅 담당자로부터 지청구도 자주 듣는다고 한다. 지금 우리나라에서 시인들의 삶이란 어떨까 궁금했다. 그들은 내게 천연기념물처럼 보였다. 곧 도래할 종말 앞에서 간신히 버티고 있는 존재들. 어쩌면 누구보다 지금 세월의 무게가 무거울 그들이 두 어깨로 어떻게 현실을 떠받치고 살아가는가 궁금했다. 하여 읽었다.

 그런 시인의 산문 모음이라 했다. 어디 어디 지면에 발표한 짧은 글들. 많아봐야 3페이지 안에 다 들어가는 말들. 짧은 대화를 나누듯 읽으면 되니 부담은 병아리 눈꼽만큼. 받자마자 간을 보듯 읽었는데 이런! 그만둘 수 없었다. 역시 시인의 문장이구나 감탄사가 무심코 나왔다. 말들이 빗물에 새로이 목욕을 한 조약들처럼 반짝반짝 윤이 났다. 손 안에 넣고 쥐면 매끄러운 감촉이 느껴질 것 같은 말들. 거기에 취해 읽다보니 어느새 마지막 페이지. 그렇게 이 책은 내 시간을 예기치도 않게 홀라당 먹어버렸다. 간장게장이 밥도둑이라면 이 책은 시간도둑이라 할 만해, 아무렴. 때로는 이런 책이 필요하지 않을까? 거창한 깨달음도 뭔가 삶에 써먹을만한 지식 같은 것도 주지 않지만(아니, 있었을지도?) 나와 비슷한 것을 보며 비슷한 생각을 하는 사람이 어디선가 이렇게나 맑은 언어로 길어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기분좋게 읽고 가볍게 권할 수도 있는 책이다.
 각설하고, 지인의 곁에 살짝 놔둬 보는 것은 어떨까 싶기도 하다.
 책임은 못짐, AS도 불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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