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 BOOn 2호 - 2014년
RHK일본문화콘텐츠연구소 편집부 엮음 / RHK일본문화콘텐츠연구소(월간지)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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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혹시나 알고 있는지?
 2014년 1월부터 격월로 'BOON'이란 잡지가 나오고 있다. 폭발음의 'BOOM'이 아니다. 'BOON'이다. 유쾌함을 뜻하는 말로 '문화'의 일본어 음독인 분카에서 '분'이란 발음을 차용한 말이다. 발간한 곳은 RHK일본문화콘텐츠연구소. 즉 이 잡지는 '일본문화전문잡지'라는 것이다.  하지만 무겁지 않고 '분'이라는 말처럼 가볍게, 그렇지만 가쉽이 아니라 깊이 있게 일본 문화를 뜯어보는 것. 그것이 바로 'BOON'의 정체라 할 수 있다.



 이 잡지의 창간 소식을 들었을 때, 개인적으로 반가웠다. 예전부터 일본 소설 리뷰 하면서 일본 소설에 대해 좀 더 깊이 있는 이야기를 들려 줄 채널 하나 정도는 있었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실제 나오리라고 기대하기엔 우리나라 출판 상황이 좋지 않았다. 나날이 책을 읽는 이들은 줄어들고 있고 그런 상황에서 아무래도 예전만큼은 관심이 높지 않을 일본 문화에 대해 이렇게 전문적으로 다룬 잡지를 낸다는 건 무리한 도전일 것 같아서였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는 법인데 이번만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이렇게 마치 저 위의 누군가가 나를 좋아한 것처럼 떡하니 나와 주었으니까. 더구나 이번 호는 내 눈이 더욱 휘둥그레질만한 아이템이 특집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바로 '흔들리는 대지'라는 제목의 특집이다. 분명 루치오 비스콘티의 영화에서 따왔을 제목이지만 영화에 대한 것은 아니다. 사실은 3. 11의 여파(AFTERMATH)에 관한 것이다. 아시다시피 2011년 3월 11일 동일본은 '흔들리는 대지'였다. 쓰나미가 몰려왔고 원전이 붕괴되었다. 전후 최고의 재난 중 하나였고 게다가 그건 아직도 진행 중이다. 무시무시한 방사능이 어디까지 퍼졌고 얼마나 일본을 오염시켰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는 생각한다. 문화라는 것도 사회라는 국물 안에 있는 건더기와 같다고. 그렇게 그것들이 속해 있는 국물이 한 번 크게 흔들리면 건더기는 아무래도 영향 받기 마련이다. 독일의 철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그것을 이런 말로 표현했다. '아우슈비츠 이후에는 시를 쓰는 일이 결단코 불가능하다!'

 그것이 남긴 상흔, 아픔을 무시하기란 불가능하다. 아니, 그건 작가의 태도가 아니다. 예전 풀리처 수상작이었던 사진이 논쟁을 일으켰다. 그 사진은 아프리카에서 굶어죽어가고 있던 소녀를 찍은 것이었는데 독수리가 그 소녀가 굶어죽기를 머리 맡에서 기다리고 있어서 더욱 비극성을 강조했다. 아프리카의 처참한 현실을 제대로 포착했다고 풀리처 상까지 수상했지만 결국 작가는 거센 비판에 직면해야 했다. 사진기를 치우고 소녀부터 구했어야 하지 않느냐는 비난이었다. 그렇게 죽어가는 소녀를 그저 피사체로만 본 작가에게 사람들은 '보도 기자의 사명을 버렸다.' '비인간적이다'라고 비난을 해댔고 결국 그 작가는 자살했다. 이 사건은 사람들이 작가에 대해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사회에 대해 어떤 책임을 질 줄 아는 것.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작가의 모습이라고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라면 3. 11에 대해 어떻게든 자신의 작품에다 반영하기 마련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3. 11 이후에 나온 일본 미스터리 소설들을 리뷰할 때면 그런 입장에서 쓰기도 했었다. 물론 거기에 대해서 난 전공도 아니고 지극히 아는 바도 적었기에 자주 한계를 느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당연히 3.11과 그 여파에 대해서 좀 제대로 말해줄 수 있는 텍스트가 있었으면 했었다. 바로 그걸 이 'BOON' 2호에서 본 것이다. 어찌 不亦樂乎, 不亦樂乎 하지 않겠는가! 

 특집은 파트1과 파트2로 나뉘어져 있다. 파트1에는 주로 일본 드라마와 음악 그리고 '레이디코믹'에 나타난 3. 11의 여파를 추적했고 파트2에서는 후쿠오카 도미오카마치를 직접 답사하여 3. 11 이후의 일본 현실이 생생한 모습을 보여주는 르포를 비롯 보다 문화 바깥으로 초점의 영역을 확대하여 일본 사회와 과학 그리고 사회 운동 차원에서 3. 11이 남긴 영향들을 보여준다. 한 마디로 안과 밖, 모두를 폭넓게 조명해주는 특집이라 하겠다. 특집에 실린 글들은 모두 읽을만하다. 드라마 '가정부 미타'와 '아마짱'을 가지고 현재 일본이 3. 11에 대처하는 상반된 경향을 보여주는 이솔아의 글도 좋았고 3. 11 이후 음악에서 나타난 저항 운동을 보여준 임경화의 글도 좋았으며 특이하게도 레이디스 코믹에 집중해서 3. 11의 영향을 밝힌 김효진의 글도 인상깊었다. 특히 김효진의 글을 3. 11이 꽤 세부적인 장르까지도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괴수 고질라를 중심으로 역시나 원자력에 대한 일본이 양가적 입장을 살펴보는 다카하시 도시오의 글은 괴수물에 대한 새로운 의미를 깨우쳐 주었으며 그와 연계되어 일본 과학의 입장을 서술한 서동주의 글도 흥미로웠다. 특집은 과연 특집답게 나역시 천착하고 있던 3. 11에 대하여 많은 것들을 다시금 깨닫고 알려주었다. 특집 아이템만 보고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손에 들었던 나로서는 지극히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외 발견이라면 역시 소설신초와 공동으로 연재하고 있다는 히구치 유스케의 소설 '어항, 그 여름날의 풍경'이라 할 것이다. 이건 가공의 미래를 바탕으로 한 것인데 지금 일본의 거센 우익화 경향을 반영하듯 좀 파시즘화된 일본을 그리고 있다. 북한의 미사일 공격으로 여론은 타자에 대한 배려를 주장하는 좌파에게 등을 돌리고 일본 우익이 지배력을 공고히 하게 된다. 그들은 재일교포가 많이 있다는 생활보호대상자제도를 폐지하고 복지의 사각시대로 갑자기 몰려나게 된 극빈자들을 저임금의 잉여노동력으로 흡수한다. 값싼 저임금 제도가 아무런 저항없이 자리잡게 되고 그리하여 저임금을 찾아 중국으로 몰려갔던 기업들이 일본으로 들어온다. 정말 터무니 없는 임금으로 과중한 노동을 해야하는 이들의 인권은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일본은 제2의 호황기를 누리고 있다. 소설은 그런 시대를 배경으로 하다. 제목의 어항은 그렇게 정말 무엇이 문제인지도 모르고 적당히 만족하고 살고 있는 일본을 은유하고 있는 듯 하다. 이 소설은 그대로 현재 일본에 대한 묘사인만큼 어쩌면 히구치 유스케는 지금의 일본이야말로 '어항'이라고 여기고 있는 지도 모른다. 소설은 전반적으로 미스터리한 분위기를 많이 풍기고 있는데 희생이 되고 있는 청년 세대와 그것을 대가로 누리고 있는 노년 세대의 시선이 서로 교차하면서 이야기를 끌어가고 있다. 아직 2회밖에 연재되지 않았지만 지금의 이야기만으로도 뒷 이야기가 기다려지는 걸 어쩔 수가 없다.

 이외에도 나역시 번역되길 바라지만 결코 불가능할 나카자토 가이잔의 '대보살고개'에 대한 소개가 있어서 좋았고 최근 '침묵의 거리에서'를 발간한 오쿠다 히데오에 대한 글도 재밌게 읽었다. 알라딘 전자책 MD로 있다는 김재욱은 글에서 정말 만만치 않는 내공을 은근히 드러냈는데 다음엔 또 어떤 절기를 시전할 지 자못 궁금해진다.

 아무튼 너무나 반가웠던 잡지였다. 일본 문화에 대해서 나름대로 느끼고 있었던 갈증을 좀 해갈한 듯한 기분이었다. 좀 더 여력이 있다면 한 회분의 특집으로만 그치지 말고 자꾸만 가지를 뻗어나가 별도의 책으로도 만들어져 나오면 좋겠다. 그럴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오래도록 나와 주었으면 좋겠다. 3호도 무조건 기대하며 늘 응원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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