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정도전의 바람이 거세다. 정도전을 주인공으로 한 대하 드라마가 방영 중이고 그에 대한 책들도 잇달아 나오고 있다. 그 숱한 정도전에 관한 책들 중에 김탁환의 '혁명'을 들어야 한다고 한다면 그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먼저 김탁환이라는 이름에 있을 것이다. 굳이 따로 설명이 필요없을 정도로 그 이름은 이제 역사 소설에 있어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름 중 하나가 되었으니까. 대부분 가장 혼돈스러웠던 역사적 시기에 그 역사적 소용돌이의 아슬아슬한 경계선 위에 서 있는 인물들을 주로 그리면서 그들의 선택과 그 여파를 그려왔던 그의 소설들은 늘 재미와 깊이를 모두 보장한다고 정평이 나 있었던 바였다. 그런 그가 조선 건국이라는 역시나 거센 소용돌이 속에서 그동안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던 정도전을 그리고 있으니 일부러라도 들춰보지 않을 까닭이 없다.
하지만 과연 작가의 그 이름 뿐인가? 굳이 그것이 아니라도 상관없다고 생각된다. 설사 그 이름을 괄호치더라도 이 소설을 읽을 가치는 충분하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는 이게 작가의 이름보다 더 큰 이유가 되리라고까지 생각한다. 거기에 대한 설명을 그 설명을 먼저 이렇게 시작해 보자.
이 소설은 거대한 행보의 첫 발걸음이다. 어쩌면 아주 길지도 모를 행군을 앞두고 처음 올리는 봉화라 해도 무방하다. 현재 김탁환은 원대한 꿈을 가지고 있다. 유네스코가 세계 유산으로 인정할 정도로 그 가치를 인정받은 조선왕조실록을 모두 60권의 소설로 형상화하겠다는 바로 그 꿈이다. 정도전처럼 그도 참으로 거대한 꿈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이제 우리도 발자크의 '인간 희극'에 버금가는 방대한 분량의 소설을 가지게 될 지도 모르겠다. 지금 나온 '혁명'은 바로 그러한 꿈의 시작인 것이다.
'혁명'은 제목 그대로 조선이 건국되는 과정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말했을 경우 당신이 예상할 수 있는 것에서 이 소설은 살짝 벗어나 있다. 혁명이 이루어지는 그 과정 전체를 보여주지는 않기 때문이다. 조선 건국에 대한 실록 기록 모두를 소설이 형상화하고 있지 않는다는 말이다. 정확히 소설이 담는 시간은 겨우 18일이다. 정도전이 새로운 나라에 대한 이상을 가지고 이성계를 만나 혁명에 대한 꿈을 심어주고 포은 정몽주와 더불어 신진사대부 세력의 주축이 되어 조선을 건국해가는 시간은 그보다 훨씬 길었지만 소설은 이성계가 낙마하고 정몽주와 정도전이 서서히 갈라지고 결국 정도전으로서는 예상 밖으로 정몽주가 이방원의 손에 참살되고 이성계가 왕위에 올라 신하들의 간언에 따라 고려의 왕족인 왕씨를 모두 살해하기까지의 기간만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김탁환이 이 소설을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온전히 드러나는 듯 하다. 소설의 부제는 광활한 인간 정도전이지만 사실 김탁환이 보여주고자 하는 건 정도전이라는 인물이 아니다. 솔직히 여기서 정도전이란 인물은 주축이라기 보다는 관찰자에 더 가깝다고 본다. 자기가 꾸었던 원대한 꿈, 뜻이 맞은 동지들이 함께 꾸었던 커다란 이상이 권력 획득을 위한 현실 논리에 빛이 바래지고 처참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보는 관찰자.
어쩌면 순전히 개인적인 느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꾸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꿈의 변질이다. 현실을 이길 수 없는 이상의 무력함 같은 것. 그렇게 두터웠던 신의마저 현실적 계산 앞에서 여지없이 허물어지는 것을 보는 씁쓸함.
왜 이런 말을 하느냐고?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었던 바와는 달리 정도전과 정몽주는 서로 반발하는 사이가 아니었다. 목은 이색 아래에서 같이 동문수학 했었던 그들은 그 어떤 이보다 더 가깝게 지냈던 사이였다. 조선의 백아와 종자기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그들은 나라를 새롭게 바꾸겠다는 이상을 가지고 있었고 그 꿈을 위해 같이 노력했다. 세상 그 어떤 유대보다도 더 긴밀한 유대가 그들 사이엔 있었다. 이는 뒤늦게 그들의 관계에 동참한 이성계도 마찬가지였다. 서로의 됨됨이, 포부를 잘 알았고 설사 정적이 되었더라도 그 깊은 이해를 통해 서로를 포용해줄 줄 아는 그릇들이었다. 사실 정도전이 꿈꾸던 세상도 그런 것이 아니었던가? 무력으로 타자를 다스리기 보다는 말로 서로를 설득하여 합의를 도출해나가는 나라. 그런 토론이 그가 꿈꾸던 재상 국가의 바탕이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랬던 정도전이 흔들린다. 아무 것도 없었던 시절엔 꿈 하나로 모든 것을 믿고 의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곧 뭔가가 손아귀에 들어온다고 느껴지자 사소한 것 하나도 오해를 낳는 이유가 되고 두려움에 젖게 할 근거가 되며 해치워야 할 당위가 되었다. 무엇이 그렇게 만든 것인가? 꼭 이것이어야만 한다는 고집. 남의 길을 헤아리지 않는 아집. 목표의 실현이 가까워질 수록 시야는 좁아져 이제 자기 발 아래의 것 밖에는 보지 못한다. 나여야 한다. 나만이어야 한다. 조화와 균형이 주축이 된 이상은 그렇게 폐허가 되고 정도전은 끝내 지우지 못할 상처로 남을 실수를 하고 만다.
포은 정몽주의 죽음. 그것은 지울 수 없는 얼룩이다. 정도전이 자신의 이상대로 아무리 훌륭한 나라를 세우더라도 그것은 대들보를 무너뜨리고 서까래를 부술 것이다. 그것은 내내 자신에게 물을 것이다. "이게 바로 네가 세우고자 한 나라였나? 나의 죽음을 무릎쓰고서라도?" 그리고 그 질문 앞에서 정도전은 내내 침묵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이매와 망량. 소설은 자주 그들을 언급한다. 정도전은 이매망량전을 쓴다. 그 이매와 망량은 정도전과 정몽주의 관계를 보여주는 또 다른 모습이다. 같은 꿈을 꾸고 한 몸처럼 같이 활동했던 그들은 결국 한 몸은 죽고 다른 한 몸은 헛되이 살아남아 갈라진다. 정몽주와 정도전이 그랬듯이. 이매와 망량의 파국은 정도전의 실패를 말하는 것이며 그것은 그의 이상이 투영된 조선의 실패를 뜻하는 것이기도 했다.
![](http://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14/0329/pimg_748481184992302.jpg)
다른 이를 널리 포용하지 못하는 이상은 연약한 마른 풀처럼 권력이라는 현실의 잔바람에게 쉬이 넘어지게 마련이었다. 이방원은 바로 그 차디찬, 자신 밖에 모르는 권력의 냉엄한 바람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존재였다. 이방원이 조선의 미래를 장악하려 하고 있었다. 정몽주의 죽음으로 인하여 생긴 균열은 계속 커지고 있는 형국이었다. 정도전은 그것을 본다. 그리고 예감한다. 결코 다시는 온전한 형태로 그 꿈을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걸. 그저 넘어지려는 대들보를 등으로 힘겹게 버티고 있는 게 할 수 있는 전부란 걸. 부서지는 서까래를 그 때 그 때 임시 변통으로 수리하는 게 자기가 할 수 있는 전부란 걸. 그 뻔히 보이는 지난한 과정 앞에서 그는 모든 걸 내려두고 낙향하려 한다. 포은의 무덤을 함께 찾아가자고 했던 이성계는 포은의 길도 괜찮지 않았을까 정도전에게 묻는다. 그렇다 한들 이제 어쩌랴. 이미 늦었는 걸. 자신의 옹졸한 두려움이 모든 걸 망쳐 버렸는 걸. 그저 할 수 있는 건 나날이 이빨을 드러내고 있는 혁명의 적, 이방원을 조심하라고 말하는 것 뿐.
스산한 가을 풍경 속으로 걸어가는 나그네의 등을 거칠게 내미는 바람처럼 씁쓸함이 갈수록 고이는 이 소설은 그렇게 바래져 버린 혁명의 주검들을 어떻게 보면 부검의의 시선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었다. 거기서 거꾸로 우리들은 '혁명'이라는 걸 생각해 보게 되는 듯 하다. 타산지석이라고나 할까? 아무리 거창한 이상도 결국 남을 포용하지 않고 자신의 것만 집착하다간 속절없이 쓰러지게 마련이라는 것을. 또한 한 번 믿음을 준 이를 가볍게 여기기 보단 그 됨됨이를 믿는다면 중요한 기로의 순간 내 판단 보다는 먼저 그의 마음을 헤아리고 그의 편에서 생각해보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거창하게 혁명까지 나아갈 것도 없이 삶에서도 얼마든지 필요한 그 말들, 마음들을 헤아리게 된다.
꿈은 광활했으나 거기에 걸맞는 그릇이 되지는 못했던 정도전. 김탁환의 이 소설은 결코 과거의 이야기가 아닐 이 이야기를 통해 진정한 광활함에 대하여 반추하게 한다. 결국 진정한 혁명이란 남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나를 바꾸는 일이다. 그렇게 부단히 나의 경계를 남을 더많이 포용할 수 있게 넓혀 가는 것. 그런 의미에서 광활하게 되는 것이 곧 혁명의 다른 모습일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