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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 세계의 역사와 지도를 바꾼 물고기의 일대기
마크 쿨란스키 지음, 박중서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대구(cod)는 대표적인 흰 살 생선이지만 사실 우리나라에서 인기는 그리 높지 않다. 그러니 어쩌면 마크 쿨란스키의 이름을 전세계에 대대적으로 알린 이 책 '대구'를 만났어도 그냥 쉽게 지나쳐버릴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렇게 된다면 책을 통해 여행할 수 있는 가장 좋은 곳 하나를 놓치게 되는 셈이다. 자주 독서를 여행에 비유하는 말들을 듣게 되곤 한다. 아무래도 책이 지금까지 전혀 경험해보지 못했던 낯선 세계를 눈 앞에 열어주기 때문이리라. 사실 책은 그런 것을 줄 수 있다. 이를테면 요네하라 마리의 '팬티 인문학'은 어떤가? 매일 입으면서도 무심코 지나치기 쉬운 팬티. 그것은 그저 하잘 것 없는 하나의 사물일지 모르지만 요네하라 마리의 손끝에서라면 다르다. 팬티 하나가 역사적으로 또 인류학적으로 거기에다 지정학적으로도 얼마나 다채로운 역할을 해왔으며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그녀는 진실로 잘 보여주기 때문이다. 정말 놀라게 된다. 팬티라는 사물 하나에 엄청난 이야기의 신대륙이 저장되어 있음을 보고는.
그래서 말인데 우리 주위의 하나의 사물은 땅아래 수많은 갈래로 여기저기 뻗어내려간 잔뿌리를 가지고 있는 들풀과도 같다. 책은 바로 그 잔뿌리를 모조리 들어내어 사물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호미이며 바로 그 순간 우리는 너무나 익숙해서 권태말고는 아무런 의미를 찾을 수 없었던 나를 둘러싼 일상이 얼마나 흥미진진하면서도 신비로운 매력을 지니고 있는 존재인지 문득 깨닫게 되는 것이다. 책이 위대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지 않을까. 어쩌면 그래서 지금까지도 이어졌고 미래에도 아주 오래도록 여전히 책이란 존재는 남을지 모르겠다. 세상에서 가장 많은 전인미답의 신천지를 간직한 곳이기에.
요네하라 마리가 '팬티 인문학'에서 팬티를 통해 보여주었던 것을 마크 쿨란스키는 '대구'라는 생선을 통해서 보여준다고 하면 이 책에 대한 설명으로 어울릴 것 같다. 아무튼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팬티 인문학'을 읽고 어떤 놀라움을 느꼈다면 분명 이 책에서 같은 것을 느낄 것이라는 거 말이다.
책 표지에 쓰여 있는 바와도 같이 이 책은 대구라는 생선의 생태에 대해 말해주는 책이 아니다. 그보다는 역사 속에서 대구라는 생선이 어떤 역할과 의미가 있었는지 보여주는 책이다. '기껏해야 하나의 생선일 뿐인데 설사 역할과 의미가 있다고 하더라도 뭐 얼마나 있겠어?'라고 생각하신다면 당장 이 책을 읽는 것이 좋겠다. 어부 집안 출신에다 어부를 동경했던 마크 쿨란스키는 놀랄만한 열정으로 샅샅이 자료를 조사하여 우리의 상식을 뛰어넘을 정도로 '대구'가 세계 역사에 미친 여파를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으니까. 정말로 이 책을 읽게 되면 인기 없었던 대구를 다시 보게 될 지도 모른다.
몰랐는데 대구는 대항해시대를 열어젖힌 장본인이었다. 오랜 항해에서 가장 문제되는 것은 역시 음식이다. 냉장고도 얼음도 없던 시대이니 음식만큼 상하기 쉬운 것도 또 없기 때문이다. 로마시대 때부터 원정의 가장 골칫거리는 어떻게 하면 음식을 상하지 않게 오래도록 보관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통조림도 발명되었지만 그 이전까지는 소금이 맡았었다. 이 소금과 천생연분이었던 생선이 바로 대구였다. 소금에 절인 대구는 다른 어떤 생선보다 오래 상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러한 대구의 특성은 쿨란스키가 말하길 바스크 족이 가장 먼저 발견했다고 한다. 대구가 다른 생선보다 오래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최초의 종족은 바이킹이었으나 소금에 절이면 더욱 오래 보관할 수 있다는 것을 최초로 안 것은 바스크 족이었다고. 덕분에 그들은 바이킹 보다 훨씬 더 장기간 항해할 수 있었고 이후에 대항해시대까지 가능케 한 것이다.
이런 식으로 쿨란스키는 역사에 있어 문화에 있어 대구라는 생선이 끼친 여파와 가지고 있는 의미를 아주 세밀하게 촘촘히 짜 넣는다. 거의 대구에 관한 모든 것을 들을 수 있는 책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말미에는 세계 각지에서 대구를 어떻게 조리하는지 그 방법까지 나오고 있으니, 대구에 관해서라면 절대반지와 같은 책이라고 해도 그리 무리는 아닐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의 가치는 대구라는 생선을 보다 잘 알게 되는 것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보잘것 없는 하나의 작은 사물이라 하더라도 그냥 허투루 존재하는 법은 없으며 나름대로 세계 역사에 걸쳐 뚜렷한 존재의 의미와 깊이있고 다양한 이야기들을 지니고 있음을 깨닫는 것에 있다고 보여진다. 대구라는 하나의 생선에 무려 339 페이지에 걸쳐 빼곡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면 다른 것이라고 해서 그게 안 될 까닭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이 책은 그 존재 자체로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것을 웅변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태양 아래 의미가 없다거나 쓸모가 없다거나 보잘 것 없는 존재는 하나도 없다는 것을. 어떤 존재든 나름의 뚜렷한 의미와 커다란 존재 가치를 가지고 있으며 그 모든 건 그 자체로 다 소중하다는 것을. 팬티도 그렇고 대구도 그러하니 이것을 믿지 않을 이유가 어디있단 말인가?
사회가 점점 커지고 조직이 비대해지면서 한 개인이 가지는 가치는 점점 작아지게 되었다. 찰리 채플린이 '모던 타임즈'라는 영화에서 보여주었듯이 지금이 자본주의 아래에서 한 개인이란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나사 한 개와 그리 다를 바 없는 존재다. 하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사회가 그렇게 여기도록 만드는 것일 뿐이다.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에서도 나오듯이 그래야 별 저항없이 노동력을 가뿐히 착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 개인이 자신의 존재와 능력에 대한 신뢰가 커지고 자긍심이 높아지는 것을 이 자본주의라는 사회는 바라지 않는다. 지금의 사회가 모든 미디어를 동원하여 필요없는 불안을 조장하고 학연이니 지연이니 배경을 중시하게 만들며 획일적인 기준으로 경쟁을 강요하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한 개인이 자신의 존재 가치와 힘을 믿지 못하도록 만들기 위해서인 것이다. 결국 자신을 긍정하지 못하고 자기 불신을 하게 만드는 것. 이 체제의 목적은 바로 그런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작은 한 사물이라 할 지라도 풍부한 이야기의 보고이며 결코 무시될 수 없는 커다란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주는 이런 책들은 참 소중하다 할 것이다. 이 책들이 내 주위를 둘러싼 사물들의 긍정으로 이끌며 나아가서는 나 자신에 대한 긍정으로 이끌기 때문이다.
푸코는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어쩌면 오늘날 주요 목표는 우리가 누구인가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존재하는 현재의 방식을 거부하는 것이지 않을까? 개별화인 동시에 전체화이기도 한 근대적 권력구조의 정치적 이중구속으로부터 우리를 해방하기 위해서, 우리가 누구일 수 있는가를 상상하고 구축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제기되는 정치적, 윤리적, 사회적, 철학적 문제는 국가와 그 제도들로부터 개인을 해방시키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국가에 연결되어 있는 개별화의 형태로부터 우리를 해방하는 것이다."
국가와 국가에 연결되어 있는 개별화란 부정적인 자기 인식을 통해 불안 속에서 전체에 달라붙게 만드는 이중구속을 유지시킨다. 그 이중구속 속에서 개인은 전체의 입맛에 맞는 인간으로 스스로 길들여간다. 당연히 그것은 진정한 개별화도, 그것이 수반할 주체화도 아니다. 기존의 권력 관계를 뒤엎는 새로운 주체화를 통한 저항은 그러므로 전혀 다른 쪽의 개별화로 부터 시작할 수 밖에 없다. 서투르게 표현하자면 그것이 바로 자기 긍정을 통한 개별화가 아닐까 말하고 싶다. 그런 저항의 선들을 만들기 위하여 이런 책들이 소중한 것 같다. 팬티든, 대구든, 그 무엇이든.
일본의 인문학자 사사키 아타루는 '잘라라, 기도하는 손을'에서 책을 읽는 것 자체가 혁명임을 말한 바 있다. 혁명이 무엇보다 기존의 주체가 아닌 전혀 새로운 주체들을 만들어내는 작업임을 감안한다면 바로 이런 책을 읽는 것 자체가 혁명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의 저 유명한 명령 하나를 살짝 변형해서 이렇게 끝맺고 싶다. "읽어라, 잃는 것은 한 줌의 돈과 시간이요, 얻는 것은 해방과 전 세계일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