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적 폭력 비판 -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
주디스 버틀러 지음, 양효실 옮김 / 인간사랑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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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은 알튀세르에서 시작된다.

 그러니까 그를 절망케 했던 것. 바로 체자레 보르지아의 운명.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모델이기도 한 그는 오래도록 분열되어 있었던 이탈리아의 통일이라는 위업을 바로 목전에 두고 병마로 쓰러진다. 그리고 그 우연히 걸린 병 때문에 이탈리아 통일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흐름은 그대로 좌절되고 만다. "어떻게 이럴수가! 이토록이나 위대한 역사가 한낱 병마 따위에!" 마키아벨리는 진심으로 아파했다. 알튀세르에게도 이건 충격이었다. 그가 믿고 있던 마르크스의 역사 법칙이 한 순간에 무너지는 것이었으니까. 마르크스는 말한다. 역사란 필연적으로 법칙을 따른다고. 그렇게 인류의 역사는 지금의 자본주의에 이르기까지 원시공산제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전해왔으며 그와 똑같이 공산주의 사회로 필연적으로 다다르게 될 것이라고. 하지만 체자레의 사건은 전혀 다른 걸 보여주었다. 병마와 같은 작은 우연이 거대한 역사적 필연마저도 거꾸러뜨릴 수 있음을. 그래서 그는 마르크스의 유물론적 역사관을 수정하기에 이른다. 저 고대 그리스의 루크레티우스를 따라 우발성의 유물론을 정초하기에 이른 것이다.

 

 이제 질문이다. 역사란 과연 우연일까? 필연일까?

 어떤 이들은 이게 동전의 양면이라고 말한다. 채무자를 기다리고 있는 채권자를 생각해보자. 그 채권자는 채무자가 몇 시에 어디를 통해 집으로 오는지 훤하게 알고 있었고 그래서 골목 한 모퉁이에서 가만히 그 채무자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채무자는 채권자가 그정도까지 알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못했고 그 날도 여느날과 다름없이 홀가분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느닷없이 꺾어진 골목에서 채권자가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는게 아닌가!  채무자에게 이 채권자의 출현은 느닷없이 당한, 우연의 횡액이겠지만 채권자에겐 아니다. 채무자의 출현은 필연인 것이다. 뭐, 우연과 필연은 보기 나름이라고 편하게 정리내릴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이렇게만은 이야기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이것이 우연인지 필연인지를 정확히 가늠할 수 있는 것은 신(神)적 인식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만한 인식을 가지지 못한 보통의 우리로서는 무엇이 우연이고 또 무엇이 필연인지를 분명히 구분할 수 있다. 알튀세르도 바로 그 수준에서 우발성의 유물론을 이야기한다. 이 알튀세르의 이론을 진지하게 받아들여 하나의 사회 이론으로 정립한 이들이 있으니 그들이 바로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상탈 무페다. 그 둘은 우연적으로 결정되는 것과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을 받아들여 한 권의 책을 썼는데 그것이 바로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이었다. 이는 보편적이며 필연적인 것에 바탕을 둔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중대한 수정이었다. 하부에 의한 결정이 아니라 상부에 의한 구성이 더욱 강력하며 그렇게 헤게모니 또한 얼마든지 우연히 변화될 수 있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그들에 의해 알튀세르로 부터 제기되었던 '우연성'이 보다 더 부각되게 된 것이다. 이제 그들은 중요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렇게 우연성이 넘쳐난다면 보편성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건 과연 정립 가능한 것인가?

 

 아시다시피, 포스트모던은 보편성을 부셨다. 거대 서사의 종말. 그렇게 그것은 지역적인 것, 특수적인 것에 특권을 부여했다. 포스트 모던이 나왔을 때 부터 그것이 소비지상주의를 떠받치고 보수를 강화하는 쪽으로 흐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하는 목소리들은 있었다. 그 예언은 맞아 떨어졌고 포스트 모던은 2008년의 서브프라임이 일으킨 금융 공황과 더불어 침몰하고 있는 중이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샴페인을 성급하게 터뜨렸다. 아직 헤겔이 말한 역사의 종말은 도래하지 않았으며 이제는 다시금 '보편성'을 생각해야 할 시대가 온 것이다. 무엇보다 거대 서사의 종말이 가져온 지금의 모습을 보라. 사무엘 헌팅턴의 예언대로 갈수록 인종주의, 부자와 빈자간의 대립은 격해지고 있다. 이제까지 그들을 제어해주던 최소한의 이념적 틀마저 사라졌기 때문이다. 미국은 미국대로 패권을 유지하려 하고 중국은 중국대로 자신이 패권국가가 되려하며 일본은 일본대로 또다시 제2의 대동아공영을 부르짖을 준비를 하고 있다. 서로가 합의하에 공생의 길을 도모하는 '보편성'이 시급히 요청되는 시기인 것이다.

 

 최근의 철학적 흐름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러한 보편성을 정초시키는데 있으며 주디스 버틀러는 그 흐름의 대표적인 학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이미 국내에 소개된 그녀의 주저 '젠더 트러블'에서 보여주듯이 그녀는 성적 정체성을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구성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그녀는 우연적인 것을 포용한다. '과정 중의 형성' 그것이 핵심이다. 바로 거기에 맞처 그녀는 '보편성'을 정립하는 것도 탐색하고 있는데 이번에 나온 '윤리적 폭력 비판'은 바로 이러한 구성주의적인 것을 '나'라는 주체성 확립에 연결지어 탐색한 것이다. '윤리적 폭력 비판'의 원래 제목은 'GIVING AN ACCOUNT OF ONESELF'다직역하자면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제목 자체가 이 책에서 주디스 버틀러가 하려는 것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왜 자기 자신을 설명하는 것에 천착하는 것일까? 그건 '보편성의 정립'을 염두에 두면 쉽게 답이 나온다. 보편성의 정립이란 쉽게 비유하자면 일종의 대화와 같다. 그렇다면 대화가 이루어지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은? 물론 그건 자기 소개다. 그렇게 자신을 설명하는 것이다. 의례적 만남이든, 사교적 만남이든 모든 만남에는 필연적으로 타인에게 나 자신을 설명하는 과정이 뒤따르게 된다. 그래야 서로 이해의 차원으로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서로 이해의 차원을 '보편성'이라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나 자신을 설명한다는 것은 상대방과의 상호 보편성을 정초하는 데 있어 필요한 기초 작업인 셈이다. 보다 원활한 상호 이해가 가능한 가급적 투명한 보편성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그 시작이 되는 '나 자신에 대해 설명하기'가 잘 이루어져야 한다. 때문에 그녀는 천착하는 것이다.

 

 여기서 뒤따르기 쉬운 하나의 오해.

 '나 자신을 설명한다'고 했을때 우리가 과연 설명하는 '나'란 고정적인 것일까, 우연적인 것일까?

아마도 고정적인 나일 것이라 생각하시는 분이 많으실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주디스 버틀러는 모두 3부에 걸쳐서 나 자신에 대해 말한다는 것이 정말 어떤 의미인가 말하고 있는데 그 중 1부의 이야기가 바로 내가 말하는 '나'라는 게 내가 익히 경험했고 알고 있는 나는 아닌 것임을 보여주는데 있다. 그러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설명할 때 우리의 진실된 모습을 설명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보다 정확히는 그 설명하는 순간 우리는 만들어지고 바로 그 과정중에 형성된 우리 자신을 설명할 뿐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늘 가지고 있었던 자아를 그 설명의 순간 '쨘!'하고 드러내는게 아니라 오히려 그 설명을 통해 정의를 얻지 못했던 우리의 자아가 그제서야 비로소 명확해지는 것이다. 즉 우리의 정체성이란 바로 그 설명의 순간 형성되어진다. 이것이 바로 1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핵심이다. 그렇게 우리의 정체성이란 고정 불변의 자아가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해 발화하는 순간 다양하게 가변화되는 우연의 존재인 것이다. 하지만 우리 스스로는 우리를 꽤나 고정 불변적인 것으로 여긴다. 누구나 다 '나는 이러이러한 사람이야.'라고 생각하고 있듯이.

 

 혹시 궁금하게 여기진 않았는지?

 왜 우리는 우리가 가진 존재의 가능성을 이토록 협소하게 이해하고 있는지?

 

 주디스 버틀러는 그 까닭을 밝혀준다.

 바로 거기서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윤리적 폭력 비판'이 들어온다. 칸트의 '비판' 시리즈를 오마쥬하고 있는 듯 보이는 이것은 2부 '윤리적 폭력에 대항해서'에서 상세히 설명되고 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말 좀 이상하다. 윤리와 폭력이 어떻게 결합될 수 있을까? 윤리란 원래 서로 간의 폭력을 없애기 위해 사람들 사이의 약속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던가? 그런데 주디스 버틀러는 그러한 윤리가 우리에게 폭력적으로 작용한다고 말한다. 때문에 2장의 제목은 '윤리적 폭력에 대항해서'인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말하는 윤리란 도대체 무엇일까? 그리고 그것은 또 어떻게 해서 우리에게 폭력적이 되는 것일까?

 

 이걸 알려면 다시 나 자신을 설명하는 순간으로 돌아가야 한다. 남에게 자신을 설명하는 순간을 다시 한 번 떠올려 보자. 그 때 우리의 의식은 어떻게 전개되는가? 과연 우리는 그 순간 우리 자신을 있는 그대로 설명할 수 있는가? 정말 투명하게 드러내는가? 아마도 아닐 것이다. 앞서도 말했듯, 우리는 우리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지 못한다. 일례로 사람들 사이에는 언제나 일정한 자기 소개의 규칙이 존재한다. 우리 자신을 설명하는 행위는 언제나 그 규칙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내 자의대로 나 자신을 설명하지 못한다. 설령 자의대로 한다고 해도 상대방이 나에게 규칙에 따를 것을 요구한다. 할 수 없이 외부에 이미 존재하는 규칙이나 혹은 방식에 따라서 나 자신을 설명할 수 밖에 없다. 어떤 의미로 그것은 예의라고도 불리고 혹은 배려라고도 불린다. 이렇게 나 자신을 설명한다는 것은 외부의 규칙을 가져올 수 밖에 없다. 규칙 뿐만이 아니다. 나 자신을 설명하는 것 자체도 언제나 외부에 기댈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나 자신을 언어로 설명하는 그 순간, 나의 말들은 바로 탈취되어 내 삶에서 우러나온 담론이 아닌 타인에게 받아들여진 언어의 담론으로 즉각 변형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건 내가 속했던 시간이 아니고 타인이 속했던 시간 틀 위에서 새롭게 번역된다. 내 삶의 직접 경험이라는 터전 위에서가 아니라 그 타인이 살아온 삶의 경험적 틀 위에서 말이다. 즉 다시 말해서 우리가 아무리 서로에게 투명하게 나 자신을 설명한다고 해도 그것이 언어라는 또 문법이라는 혹은 예절이라는 외부적 형식을 빌려오는 한 마치 서로 다른 언어를 하는 사람들끼리 번역해서 듣는 것처럼 할 수 밖에 없다는 그런 의미다. 나는 일부러 언어 이외에 '문법'이라는 말을 썼는데 왜냐하면 이를 통해 강조하고 싶은 게 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문법에서 연상되어지는 '규범'의 존재를 나타내기 위해서다. 예절이라는 것도 그 규범의 존재를 강력하게 시사한다. 즉 우리에겐 서로가 소개하고 또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매개항으로써 '규범'이란 게 존재한다는 걸 말하고 싶은 것이다.

 

  자신을 설명하는 순간, 규범이 도래한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의 틀이 되어 나 자신을 거기에 맞추게 한다. 나는 다양하지만 정해진 규범의 틀은 마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틀에 맞지 않는 걸 잘라낸다. 폭력적이다. 다양한 나는 규범이 허용하는 틀 내에서 협소해지고 앞서도 말했듯이 나 자신의 정체성은 그 발화의 순간 형성되는 것이기에 어느 순간 그것은 나의 모습으로 받아들여진다. 그래서 나 자신 역시도 나라는 존재를 협소하고 고정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외부의 규볌이라는 윤리는 우리에게 폭력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이걸 니체를 들어 설명한다.

  니체는 우리가 나 자신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무엇보다 사법적 체계로 부터 비롯된 것이라 말한다. 즉 타인에게 상해를 입혔을 때, 자신에겐 전혀 그런 고의가 없었음을 스스로 입증하던 것에서 나 자신을 설명하는 것이 나왔다는 것이다. 니체의 이말은 우리가 알고 있는 자아가 온전히 있는 그대로의 자아가 아니라 외부에 의해 강제적으로 형성된 것임을, 그리고 그걸 그대로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인 것임을 강력히 시사한다. 왜냐하면 법정 앞에서 자신의 변호란 아무래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내기 보다는 남이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나로 만드는데 더욱 초점을 맞추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애시당초 나를 설명한다는 것이 변호로 부터 출발했고 이제는 본질이 되었기에 우리는 앞에서 가해지는 윤리적 폭력 앞에서 일종의 자기 방어로써 나 자신을 협소한 것으로 그리고 고정 불변의 존재로 스스로 규정해왔던 것이다.

 

 결국 우리는 왜곡된 우리의 자화상을 진실인 것처럼 알고 살아가는 것이며 이런 왜곡된 상으로는 주디스 버틀러가 바라는 투명한 보편성을 정초할 수가 없다. 깨어진 거울로는 서로의 진정한 모습을 비출 수가 없는 것이다. 해서 우리는 윤리적 폭력에 대항해서 보다 온전히 나 자신을 드러내고 받아들일 수 있는 '설명하기'로 나아가야 한다. 그 탈주, 미끄러짐을 이야기 하는 것이 바로 제3부의 '책임'이다. 3부에 책임이 나오는 것에 대하여 의아해 할 분들이 계실지 몰라서 부언하자면 이는 어디까지나 나 자신에 대한 설명이 사법적 체계 아래에서 나왔다는 니체의 말과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책임이 등장하게 된 것이 바로 법 때문이었기 때문이다. 근대에 들어와 인간 개인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형벌 또한 중세처럼 연좌제가 아니라 오로지 그 개인에게 돌릴 수 있는 것만 내리게 되었다. 그렇게 개인에게 그 처벌을 감당해야 할 이유로써 '책임'이라는 게 대두되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책임이란 '나의 나-됨'의 완성이다. 주디스 버틀러는 책임을 이렇게 설명한다.

 

 자신을 책임진다는 것은 자기-이해의 모든 한계를 시인하고, 이 한계를 주체의 조건으로서뿐 아니라 인간 공동체의 곤궁으로서도 확립한다는 것이다(p.146)

 

 '책임'은 나를 설명하고 그 와중에 나를 만들어가는 것의 종착역이다. 거기서 나라는 상은 만들어지는데 왜 주디스 버틀러는 이것을 마지막 장으로 불러온 것일까? 그건 바로 나라는 상(像)의 확립과 관계가 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과정의 진실된 정체를 밝히는 것. 책임이란 우리가 바라보는 우리 자아의 확정된 모습인데 과연 그것은 있는 그대로의 우리 모습인걸까? 주디스 버틀러는 정신분석학자 라플랑슈와 푸코의 고백 이론을 들어 이 확정된 자아의 상을 남김없이 때려 부순다. 실로 그런 건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말이다.

 

 놀라운 건 라플랑슈의 이론이다. 그는 우리가 우리 자아의 모습을 형성하는 유아기 때부터 아예 우리는 우리 스스로가 아니라 타자에 호응해서 자아를 만들어간다고 단언한다. 쉽게 말하면 나라는 자아는 나 자신의 뜻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반응에 따라 형성된 것이며 그 상호 조정의 결과라는 것이다. 그렇게 타자가 우리 내부에 원초적으로 깊숙이 들어와서 우리 자아의 형성까지 주관했다는 것이 라플랑슈의 주장이다. 그러므로 법이 네가 누구냐 물었을 때 비로서 나 자신이 태어났다는 니체의 말과도 같이  애초부터 우리에게 진정한 나의 모습이란 없는 것이다. 있다면 그동안 수많은 타자들과의 상호 작용 속에서 그때 그때따라 맞춰가며 형성된 '나'가 있을 뿐. 푸코의 고백에 대한 이론은 이를 더욱 증명한다. 푸코는 고백이 내면의 진실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로 그 고백을 통해서 내면의 진실이 형성되는 것이라 말한다. 즉 고백은 자신의 자아를 형성해가는 하나의 육체적 실천인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푸코는 고백을 통한 우리의 자아 표현이 '자신의 내면성을 용해시키고 자아의 외면성 속에서 자신을 재구성'하는 것이라 말한다. 이는 그대로 애초부터 타자에 의해 우리의 자아란 게 형성되어왔다는 라플랑슈의 이론과 그대로 이어진다.

 

 이렇게 라플랑슈도, 푸코도 우리의 자아란 고정된 것이 아니라 타인에 의해 그 때 그 때에 따라 변형되고 수정되어 왔음을 보여준다. 말하자면 지금 우리가 진실이라 알고 있는 모습 또한 내 삶의 어느 순간 타인과의 어떤 계기로 굳어진 것에 불과하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책임'이 '꽝!'하고 도장을 찍는 것과 같은 확정된 자아란 게 있을 수 있는가? 그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라플랑슈와 푸코 그리고 레비나스의 이론을 인용하면서 주디스 버틀러가 '책임'의 장에서 주장하는 건, 나 자신이란 건 부단히 형성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즉 나는 어떤 시점에 일의적으로 규정될 수 없고 마치 파인만의 경로처럼 무한히 가변될 수 있는 존재라고 말이다. '나 자신을 확실히 설명한다는 건 영원히 불가능할 노력'이라고 푸코가 말했듯이.

 

 주디스 버틀러는 나라는 존재가 이렇게 늘 수정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존재의 모든 부분이 수정 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이렇게 모든 변화와 수정에 열려있는 존재로 여기는 것이 보다 투명한 보편성을 위한 소중한 첫걸음이라고 여긴다. 왜냐하면 나를 이렇게 받아들여야만 되도록 윤리적 폭력으로 부터 비껴나서 보다 허심탄회하게 상대방에게 귀기울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나-됨을 고집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무엇보다 상호 타협을 위한 첫 계단이니까 말이다. 결국 여기에서 드러나는 건 나 자신을 설명한다는 게 진짜 어떤 의미냐는 것이다. 그건 우리가 얼른 이 말에서 생각했듯이 나의 '나-됨'을 남에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진실은 그만큼 나를 더 허물고 타인에게 여는 행위라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설명한다는 것은 내 안에 여백을 만드는 일이다. 혹은 더 많은 귀를 가지는 일이다. 나를 비우고 다시금 타인을 포용하면서 새로이 나를 만들어 가는 것. 그것이 바로 나를 설명한다는 것의 진정한 모습이다.

 

 들으려는 귀는 없고, 말하려는 입만 많은 요즘. 주디스 버틀러의 이와 같은 주장이 소중히 여겨지는 것이 과연 나뿐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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