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부 러시아 고전산책 6
막심 고리키 지음, 이수경 옮김 / 작가정신 / 201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언젠가 막심 고리키의 '어머니'는 대학 초년생들에게 있어 필독서였습니다.
 평범한 주부였다가 남편의 죽음과 아들의 인도로 점점 혁명에 눈 뜨고 결국 혁명의 화신이 되는 펠라게야 밀로브나의 삶이 마치 화인처럼 그 가슴에 새겨지곤 했죠. 아직도 '그러나 우리가 더 많을 것이다.'라는 그녀의 말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 많을 줄 압니다. 뭔가 의지의 힘줄을 돋구게 만들었던 그녀의 말들이 아직도 새록새록 떠오르는군요.

 '마부'는 그 고리키의 소설입니다. 장편은 아니고 단편집입니다.
 그의 나이 39살에 쓴 '어머니'는 25살에 작가로 데뷔한 그가 세상에 내놓은 첫 장편이었죠. 그 14년이라는 세월의 간격 동안 고리키는 단편과 중편 그리고 희곡을 썼습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소개된 그의 단편집 '마부'가 커다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면 그런 고리키의초기 모습을 흠뻑 맛볼 수 있다는 게 될 것입니다. 여기에 실린 단편들은 모두 그가 서른이 되기 전에 발표한 것들이니까요. 그렇게 우리는 막심 고리키가 첫 작가적 여정을 시작할 때 과연 어떠했는지, 달리 말하면 '어머니'라는 걸작은 과연 어떻게 해서 가능했던 것이지 그 실상이자 흔적을 바로 이 단편집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죠.




 모두 10개의 단편들이 실려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버릴 게 하나도 없는 단편집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머니'가 무엇보다 '의식화'가 아니라 공감이라는 형태를 통해서 혁명으로 나아갔듯이 바로 악마란 그러한 공감이 결여된 존재임을 보여주는, 조금은 초현실주의적이라고 해도 좋을 '마부'부터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의 유령'처럼 크리스마스 날 문득, 어떻게 하면 자신의 인생을 의미있게 남길 수 있는 지를 한 환영의 존재를 통해 깨닫게 되는 한 부유한 가장이 등장하는 '환영'에다 자신이 헌납한 종이 깨어짐으로 인해 드디어 그동안 저질렀던 죄악이 어떤 형태로든 결코 지워질 수 없을 것을 깨닫는 자본가를 그린 '종'과도 같이 하나같이 뚜렷이 부각되는 주제와 깔끔하게 마무리되는 이야기인지라 무려 130년 이상이라는 세월의 간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공감가는 흥미로운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정말 흥미로운 것은 4번째 이야기인 '로맨스'와 그 뒤로 죽 이어지는 '아름다움','푸른 눈의 여인' 그리고 '아쿨리나 할머니' 입니다. 불우한 소년시절 우연히 만난 한 여인 때문에 평생 거기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사내를 그린 '로맨스'와 역시나 산책길에서 우연히 보게된 아름다운 이국적 여인에 대한 매혹을 그린 '아름다움'은 '혁명' 자체를 은유하고 있는 듯 보여집니다. 혁명도 그렇게 첫사랑처럼 매혹으로 시작되니까요. 그러다 '로맨스'의 주인공처럼 이기적 욕망으로 변질되고 말죠. '아름다움'은 그 시작의 순간을, '로맨스'는 그런 과정을 그린 듯 합니다. 사내는 결국 그 첫 만남을 잊지 못하고 결국은 그 미련 때문에 자기 인생마저 망치고 마는데 그렇다고 고리키가 삶에 다가온 그 전면적 변화의 순간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사내가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하니까요.

 "내 인생에 있어서 유일하게 좋은 거였네... 얼마 안 되지, 그래... 이렇게 술로 세월을 보낸다네. 그런데 그녀에 대해 회상하면... 기분이 좋아져. 난 이렇게 회상하는 걸 좋아한다네. 그녀가 없었더라도... 살았겠지만.... 이야기할 거리도 없었겠지! 빌어먹을... 어떻게든 살다 죽었겠지. 어찌 되건 상관없어. 그런데 그녀가 있어서 회상할 거리가 있다네..."(P. 102)

 이걸 읽고 문득 이와이 슌지의 영화 '러브레터'가 생각났습니다.
 혹 기억나실까요? 왜 산에서 조난당해 죽은 후지이 이츠키를 같이 조난당했던 동료들이 기억하는 장면 말입니다. 그런 추위 속에서 잠들면 죽기 때문에 동료들이 잠들지 못하도록 끝까지 노래를 불렀던 후지이 이츠키를 회상하는 장면. 전 그게 묘하게 감동적이더군요. 결국 인생이란 그렇게 기억할만한 이야기를 가지거나 남긴다는 게 전부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막심 고리키도 그런 면에서 혁명이라는 걸, 혹은 변화라는 걸 받아들이는 것은 아닌지 생각되더군요. 설사 아무 것도 얻는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한 번 전부를 걸어보는 그 자체만으로 의미있다고 말이죠. 결과가 아니라 그 과정이 진짜 이야기로 남아 내내 기억속에서 갓 잡은 활어처럼 퍼덕이며 삶에 의미를 충전시켜 줄 것이라고.

 이 마음을 저는 다음의 이야기인 '푸른 눈의 여인'과 '아쿨리나 할머니'에게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 두 단편만으로도 이 단편집을 읽을 가치는 충분합니다. '푸른 눈의 여인'은 타인의 외형만 보고 모든 것을 판단해 버리는 한 경찰관의 이야기입니다. 그는 너무나 세파에 찌들었기에 타인의 진심은 보지못하는 청맹과니입니다. 결국 그는 자기가 전혀 잘못 보고 있었음을 가슴 아프게 깨닫게 됩니다. '푸른 눈의 여인'은 삶과도 같습니다. 우리도 보고 싶은 쪽으로만 보고 그것을 전부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계산적이고 소극적입니다. 그 경찰관처럼 우리도 서푼어치의 지식과 경험으로 삶 전체를 재단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지요. 바로 그런 우리의 어리석음을 통박해 오는 것이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아쿨리나 할머니'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아마도 이 단편과 '푸른 눈의 여인'이 어머니의 원형이 되는 것 같습니다. '모성의 강함과 위대함'을 잘 보여주는 단편들이기도 하니까요.

 아쿨리나 할머니는 참 감동적이면서도 아픈 단편입니다.
 그녀는 '늙은 악마'로 통하는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는 거지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녀에게는 손자, 손녀로 통하는 장성한 여덟 명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그들은 모두 작고 축축한 지하 방에 모여 삽니다. 그 여덟 명은 일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아쿨리나 할머니의 동냥질에 의해서만 살아갑니다. 그들 역시 아쿨리나 할머니만큼이나 사회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니, 아쿨리나 할머니에게 왔다는 것 자체가 사회에서 가장 밑바닥으로 떨어졌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 자들만이 아쿨리나 할머니에게 옵니다 그런 그들을 아쿨리나 할머니는 아무런 대가 없이 그저 먹이려고 매일 동냥질을 합니다. 

 헌신.
 하지만 그런 헌신을 사람들은 할머니를 '늙은 악마'라 부르듯이 경멸할 뿐이죠. 당연합니다. 구제될 길이 전혀 없는 사회 패배자인데다가 인간성도 나빠서 분명 밑뚫린 항아리에 물 붓는 것처럼 아무런 보답을 받지 못할 헌신임을 잘 아는 까닭이죠. 사람들의 시선이야 어떻든 할머니는 계속 먹이려고 동냥질을 합니다. 대가가 없는 것은 물론이고, 그걸 해 줄 인간들이 아니라는 것조차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말입니다. 자신이 아파 누워도 병원에 데려가는 걸 귀찮아하고 묘자리를 위해 모아 둔 돈 역시 자기들 배채우는 데 써버리는 인간들이지만 할머니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꺼이 그 돈을 내어줍니다. 그리고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숨을 거두죠.

 생각해보면 이만큼 바보 같은 삶도 없습니다.
 타산에 길들여진 우리의 눈으로 보자면 말입니다. 뭔가 희생을 할 때 사람들은 언제나 대가가 부머랭처럼 되돌아오기를 바랍니다. 하지만 아쿨리나 할머니에겐 오직 그 '헌신' 자체, 그렇게 그 '과정'만이 중요했습니다. 결국 구원을 얻는 것은 누구인가요? 바로 할머니입니다. 이 단편엔 할머니의 시신을 묘지로 운반하는 후일담이 있는데 바로 거기서 밝혀집니다. 할머니의 삶이 무엇을 남겼는가 하는 것이 말이죠. 후지이 이츠키랑 비슷합니다. 마지막 단편에 나오는 이르제길 노파의 단코 이야기도 마찬가지죠. 그 단코 역시 사람들을 위해 자신의 심장을 불태우지만 아무런 보상도 요구하지 않은 채 죽습니다. 남은 건 그 기억, 이야기 뿐입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가 들은 자의 가슴에 낙인처럼 새겨지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새겨진 이야기가 자기 삶을 살아가는데 하나의 횃불이 되어줍니다. 모두가 욕망에 눈멀어 이기심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온갖 어지러운 타산으로 거미줄처럼 얽혀져 그저 삶이 어두운 정글 같기만 하고 나홀로 거기에 외따로 버려져 있다고 느껴질 때, 단단히 중심을 잡고 옳다고 생각되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주는 횃불말이죠. 그렇게 이야기를 남기고, 결국은 사람을 남기는 것. 그것이야 말로 삶의 진짜 의미라고 고리키는 이 단편을 통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또한 이것은 그대로 앞서 나왔던 '환영'과 '종'의 최종 해답이기도 하며 삶이 결국 이야기를 남기는 것이라는 건 마지막 단편인 '이르제길 노파'에서 다시 한 번 강조되고 있기도 합니다. 

 이처럼 유독 고리키가 이토록 삶의 의미에 대해 천착했던 이유가 있습니다.
 삶이 어린 나무와도 같았던 시절, 잇다른 비극을 그가 맛보았기 때문이죠. 그의 나이 네살 때, 아버지가 콜레라로 죽었습니다. 어머니는 고리키를 외할아버지에게 맡기고 재혼해버렸습니다. 엄마가, 가족의 따스한 보호가 가장 필요할 시기에 그는 혼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비극은 계속되었습니다 11살 때는 외할아버지가 파산했습니다. 바로 다음 해엔 재혼한 어머니마저 폐결핵으로 죽었습니다. 이제 그는 고아에다 가난뱅이였습니다. 사회 밑바닥의 삶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다 대학생들을 만나고 마르크시즘에도 눈을 떴지만 여전히 계속되는 현실의 고통과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그는 권총 자살까지 감행합니다. 하지만 실패했고 남은 건 만성 폐결핵 환자라는 사실 뿐입니다. 고리키의 문학은 그런 삶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수없이 겪어온 비극과 고통 그리고 불안. 거기서 끊임없이 되물었던 삶의 의미가 결국 문학이란 형태로 빚어진 것입니다. 우물도 가장 밑바닥의 것이 가장 달듯이, 바로 그 밑바닥까지 내려가 본 자가 길어낸 해답인지라 더욱 공감을 자아내는 것 같습니다. 그런 경험과 그 속에서의 성찰이 빚어낸 단편들이 모여있기에 저는 감히 어느 단편 하나도 버릴 게 없다고 말씀드리는 것이죠.

 저처럼, '어머니'의 여운을 간직하고 계신 분들이라면 분명 이 단편집도 흡족하게 읽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물론 이건 이 단편집을 통해 고리키를 처음 만나는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더하여, '마부'나 '환영' 그리고 '종'의 주인공들처럼 도대체 이 삶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 고민하고 계셨다면, 그와 똑같이 많은 고민을 한 이 고리키의 단편집이 좋은 벗이 되어줄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르제길 노파가 말하듯, 삶에 마구 천둥 번개가 몰아칠 때, 미리 나타나 가야 할 길을 알려주는 스텝의 푸른 불꽃이 되어줄지도 모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