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검은 모래 - 2013년 제1회 제주 4.3 평화문학상 수상작
구소은 지음 / 은행나무 / 2013년 11월
평점 :
절판
초등학교 다닐 때였다.
집에 갔는데 낯선 이들이 잔뜩 있었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사람들이었는데 친척이라고 했다. 아버지도 모르는, 오로지 할아버지만 알고 있는 친척들. 알고보니 일제 시대 때 강제 징용으로 사할린으로 끌려가 영영 헤어져 있다가 당시 가족 방문이 허용되자 할아버지의 요청으로 오게 되신 분들이었다. 수십년이나 못 보았으니 쌓인 할 말과 나눠야 할 감정은 당연히 많았고 그 날 우리 집엔 밤 늦도록 술자리가 벌어졌다. 하지만 마지막엔 울음이었다. 무슨 이유로 그랬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내 조그만 머리로 그 수 십년간 쌓인 고생과 설움 그리고 울분을 따라잡기엔 너무도 벅찼으니까. 그냥 눈만 멀뚱하게 뜬 채, 안주만 주워먹다가 느닷없이 할아버지와 방문한 이들의 울음을 보게 된 것이다.
'디아스포라'라는 말을 들으면 언제나 그 날 밤이 떠오른다. 나라를 빼앗기게 되는 바람에 강제로 이리저리 뿔뿔히 흩어진 피붙이들이 수 십년간 받아온 남의 땅에서의 설움과 쌓여온 고향과 사람들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설령 서로 어렵게 만나더라도 끝내 내어놓을 수 있는 건 말이 아니라 그저 울음 밖에는 없었던 그런 밤이. 구소은의 소설 '검은 모래'에 나오는 해금도 그랬으리라. 어릴 때 떠나와 평생 다시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해금이 만일 '우도 동쪽에 자리잡은 조일리란 마을의 검은 모래 해변'에 어떻게 다시 설 수 있게 되었다면 분명 나오는 것은 그저 눈물 뿐이었으리라. 감정은 때로 언어를 넘어서는 법이다. 게다가 그만한 세월 속에 묵혀온 감정이 아니던가. 어떻게 언어라는 작은 그릇에 다 담겨지겠는가?
어쩌면 내가 이 소설을 진짜 읽게 된 것은 4. 3 평화수상작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 날 밤 보게 된 그 눈물들을 이해하고자 함인지도 모른다. 정말로 그들에게 일어났던 일은 무엇이었을까? 어린 시절에 문득 가지게 된 그런 궁금증이 잔모래를 만지는 것과도 같은 감촉을 지닌 이 푸른 표지의 책을 넘겨보게 만들었다고 해야 한다. 더구나 여기의 이야기는 바로 나에게도 아주 익숙한 이야기였다. 할아버지도 강제징용자였다. 오사카의 부두 하역장이 할아버지가 징용되어 주로 일한 곳이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난 할아버지로부터 그 때의 이야기를 자주 들었다. 그렇지 않아도 약주를 하시면 늘 같은 말만 반복하시는 술버릇까지 있으셨는데 취하시면 늘 그 이야기만 하셔서 더욱 반복해서 들어야했다.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힘겨운 고생담이었다. 겨우 한 줌의 밥만 먹으면서 하루종일 엄청난 짐들을 날랐고 그런데도 열심히 일을 안한다고 일본인 감독관으로부터 가해지는 가혹한 매질을 견뎌야 했다. 당신이 살이 오르지 않는 것도 그 때 하도 고생했기 때문이라고 하시면서 나라를 빼앗기면 가장 힘든 것은 우리같은 약한 사람들 뿐이라고 당시를 회상할 때면 늘 입버릇처럼 말씀하시곤 했다. 그렇게 우리 가족에겐 일제가 할퀴고 간 상처가 적지 않다. 누군가는 머나먼 척박한 땅으로 끌려갔고 또 누군가는 한 세월을 오로지 가축처럼 취급받으며 일만 해야했다. 하지만 이것이 우리 가족만의 특별한 이야기일까? 아닐 것이다. 당시에 조선에 살았던 일반 백성이라면 누구에게나 찾아왔을 보편적인 아픔이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보편적 아픔은 자꾸만 누군가만이 당했던 특별한 아픔이 되어가고 있다. 아픔을 직접 경험한 자들이 보상은 커녕 그들의 경험조차 제대로 후세에 새기지 못한 채 빠르게 이 땅에서 사라지고 있는 데다가 강제 수탈을 수출로, 강제징용을 자원한 인력 수출로 왜곡하는 말도 안되는 움직임도 버젓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역사에 분명하게 아로새겨진 거대한 아픔을 그렇게 개간하고 다시 포장 도로를 깔아 그 아래 깃들어 있을 고통과 신음의 뼈들을 얼른 보이지 않게 치워버리려 하는데 어찌 그 아픔을 똑똑히 보아왔고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 통탄하지 않을 수 있을까? 이걸 그치게 할 수 있는 길은 하나다. 지우려들면 들수록 더욱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이다. 그 어떤 역사적 아픔의 편린 하나도 놓치지 않고 모조리 담아두고 되새기는 것. 그것이 수난의 역사에 자신의 삶과 가족들을 빼앗긴 이들을 위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보상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난 더욱 이 구소은의 '검은모래'가 소중한 것 같다. 이 소설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문학적으로 제대로 조명받지 못했던 일제 시대 제주 해녀들의 삶을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저 역사의 어둠 속 구석진 자리에 있던 것에다 이 소설이 최초로 밝은 빛을 비춘 것과 같다. 문학이 비극적 역사의 반복을 끊을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다시는 되풀이 되지말아야 할 그 역사적 모습을 제대로 재현하여 독자로 하여금 왜 그것의 반복을 막아야 하는지 깊이 성찰하게 만드는데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구소은의 '검은모래'는 그 소임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동안 형상화되지 못했던 '마이너리티'의 역사를 복원하면서도 재현은 생생하고 성찰의 시야까지 폭넓게 가질 수 있도록 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좌표를 잃고 그저 속절없이 부유하고 있는 것만 같은 이 시대에 진정 필요한 이야기는 이런 이야기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보다 확실한 과거에 대한 성찰은 혼란스러운 이 시대에 필요한 것이 진정 무엇인지 깨닫게 만들어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오래된 미래'라는 말도 있듯이.
소설은 '태어나면서부터 나라를 잃은 신세였고, 태어나면서부터 잠녀(p. 14)'였던 구월로부터 시작해서 그녀의 딸 해금을 거쳐 해금의 아들 켄과 켄의 딸 미유까지 세대를 달리하며 일제강점기부터 오늘까지 이르는 한 가족의 역사를 담아낸다. 그 역사는 늘 힘겨운 물질을 해야 하는 구월의 삶 그대로 고난이요 홀로 존재하는 섬처럼 뿔뿔이 헤어짐으로 가득하다. 어느 것 하나 쉬운 것이 없다. 사는 것도 사랑도 다 그렇다. 하루종일 작은 꿈을 이루기 위해 거친 물 속으로 뛰어들지만 돌아오는 것은 늘 빈손이요 뜻하지 않은 이별이다. 그 숱한 시간 동안 그들이 건져내는 건 오로지 고통과 눈물 밖에는 없어보인다. 언젠가 구월은 남편을 찾기 위해 원폭이 떨어진 나가사키로 갔다. 그러나 거기서 보게 된 것은 남편이 아니라 폐허로 변해버린 땅뿐이었다. 구월과 해금의 삶도 그 나가사키의 폐허와 그리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물질을 멈추지 않는다. 그들에게 세계가 가져다 주는 것이 설령 아픔과 이별 뿐이라 하더라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화산섬에 있다고 한들 해금이 텃밭에 박씨를 심듯, 그녀들은 어제도 오늘도 물질을 하고 내일도 물질에 나설 것이었다. 그 지속만이 그들에게 유일한 희망인 것처럼. 이다지도 개인의 삶을 쉽게 짓밟아 버리는 역사로부터 자신을 지켜낼 유일한 테왁(박의 씨 통을 파내고 구멍을 막아서 해녀들이 작업할 때 바다에 가지고 가서 타는 물건)이기나 하다는 듯이 말이다. 해금이 운명하기 전 마지막으로 한 일은 텃밭에다 박씨를 심는 것이었다. 구월의 시어머니도 박씨를 심다가 운명했다. 잠녀들이 박씨를 심는 건 다름아닌 희망을 심는 것이다. 해금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불안한 화산섬에서조차 열심히 내일을 기약하는 박씨를 심는다. 그것은 아직은 끝이 아니며 내일을 계속 이어가리라는 희망을 하나의 신념처럼 심는 것과 같았다. 한 마디로 그건 쇠뜨기였다. 구월이 나가사키 페허에서 본, 가장 먼저 대지의 절망을 뚫고 올라왔던 희망과 재생의 상징이기도 한 쇠뜨기.
죽음의 땅에서도 돋아나는 것이 있었다. 검게 녹은 불모의 대지를 헤집고 비 온 뒤 죽순이 솟듯 새싹들이 움튼다. 뱀 대가리처럼 생긴 연한 갈색 포자낭이 서로 키를 재며 쭉쭉 뻗어가는 모습은 그 자체로 신비로운 자연의 경이이며, 그 어떤 모진 환경도 견뎌내는 생명의 숭고함이다.
우악스럽도록 질긴 뿌리가 살아 있는 한, 식물은 홀씨를 퍼뜨리며 제 깜냥대로 생존의 사명을 다할 것이다. 인간의 삶이 어찌 그와 다르겠는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제일 먼저 돋아난 생명이 바로 이 쇠뜨기였다.(p. 126)
구월과 해금. 그리고 그녀들을 비롯한 어두운 역사 속에서도 지지 않고 삶을 지속해나가는 이들 모두가 사실은 쇠뜨기라 할 수 있다. 쇠뜨기가 나가사키에 다시금 생명을 가져왔듯 그런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역사의 주인이었다. 역사는 거대한 나라들이 아니라 오늘의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내일의 희망을 믿고 해야 할 일을 지속해나가는 그들이 만든 것이었다. 그들을 식물에 비유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미유가 켄의 정원에서 본 그대로 소설에서 식물은 아무리 무겁고 짙은 어둠이 몰려와도 다시금 시작할 '회생의 기회가 있음(p.129)'을 뜻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제 켄의 정원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쇠뜨기에서 바로 이어지는 켄의 정원은 그 장의 제목 그대로 '식물의 유혹'을 담고 있지만 그것의 의미는 더이상 해금의 박씨와 같지 않았다. 해금은 박씨에 대해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박이야 내가 없으면 저 혼자 잘 크겠지 뭐. 정성을 다해 키우던 것들은 손을 타야 살지만, 그건 인간의 오지랖이 지나쳐서 그렇게 된 게지. 그냥 두면 알아서 다 살아가게 되어 있더구나.(p. 67)
식물이 쇠뜨기처럼 강렬한 생명력을 지닌 회생의 존재가 된 것은 이러한 인간의 손 때가 전혀 묻지 않은 자연적 자생력에 있었다. 그건 원폭에도 살아남을 정도로 압도적인 것이었다. 해금의 말은 이러한 식물의 힘을 존중하고 있다. 해금이 식물을 키운다는 의미에서 그건 그대로 거대한 역사나 국가가 백성과 가지는 관계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존중은 역사나 국가 또한 한 개인에 대해서 가져야하는 태도였다. 박씨와 쇠뜨기를 비롯한 식물에 대한 이야기는 바로 그것을 말하기 위해 나왔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역사와 국가는 그렇지 못했다. 존중은 커녕 개인을 그저 자기 이익을 위한 도구로만 생각하기에 바빴다. 전쟁은 그것의 극명한 증거가 아니었던가. 켄의 정원도 마찬가지다. 식물에 대한 존중의 태도를 전혀 보여주지 않는다. 물론 켄은 식물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서로의 욕망을 채워주고 서로에게 길들여지는 것이 지속적인 공존의 방법임을 인간보다 식물이 먼저 깨달았다. (p. 144)
하지만 말뿐이다. 그 때의 역사나 국가가 그랬듯이. 켄은 식물에서 보았던 것을 자신의 삶으로 실천하지 못했다. 그는 타인을 믿지 못했고 자신의 안정된 삶은 스스로 만들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걸림돌이라 생각되는 모든 것을 버렸다. 엄마인 해금을 비롯하여 가족을 버렸고 자신의 뿌리인 '한국인'을 버렸다. 그렇게 된 것엔 불신의 힘이 컸다. 과거의 경험과 미래의 불안이 중첩된 불신. 그건 바로 개인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지 않는 일본이라는 국가가 가져다 준 것이었다. 역사와 국가는 모든 개인이 소중하고 그대로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고 말하지만 그건 거짓된 보편화에 불과했다. 당시의 개인은 그저 국가가 필요하면 동원할 수 있는 존재 이상의 보편적 의미는 가지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구월이 조선 해녀에게 가해지는 불평등을 호소했을 때 일본이 국적을 이유로 무시해버렸던 것처럼. 입으로는 보편을 말하지만 손으로는 인위적인 이유로 온갖 것으로 나누었다. 켄의 정원은 그러한 거짓 보편화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공간이다. 그 어떤 자연적인 자람을 거부한 채 오로지 인위적인 손길만 가해지는데다가 그저 안으로 채집되기만 할 뿐 아무런 바깥으로의 넘나듦이 말끔히 제거되어 있으니까 말이다. 그 한껏 고양된 인위성과 오로지 하나 밖에 존재하지 않는 폐쇄성은 현실 국가의 은유라 할 수 있었다. 거기서 식물은 본래의 자생력을 잃고 어디까지나 켄에 의해 길러지는 껍데기뿐인 식물로 남는다. 개인의 존재와 가치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지 않는 국가에게 개인이 그렇듯이. 미유와 지로의 이야기가 보여주는 것도 그것이다. 미유는 켄과 해금의 언쟁으로 인해 자신이 지금까지 생각했던 대로 4분의 1만 피가 섞인 쿼터가 아니라 반이 섞인 '하프'임을 알게 된다.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일본이 한국에게 지자 한국을 마구 비하하는 지로에게 미유는 화가나 자신이 하프임을 밝히며 사랑한다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긍정해 줄 것을 고백한다. 미유는 지로의 사랑을 믿었으나 지로는 그러지 못했다. 텅빈 케이크 전문점에서 지로는 미유에게 이별을 선언한다. 이또한 서로의 차이를 용인하지 않는 거짓 보편화가 얼마나 허위인 것인가를 잘 보여준다. 구소은 작가가 주로 일본의 모습에서 이러한 거짓 보편화를 가져오는 건 이유가 있다. 바로 일본이 우리나라를 침략할 때 외쳤던 '대동아공영'처럼 거짓 보편화의 대표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범 아시아적인 번영을 위해서 전쟁을 벌인다고 미화했지만 사실은 오로지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 한 일이었다. 켄이 식물에 대한 말과는 달리 타인을 불신하는 것처럼 그리고 자신의 출세를 위해 미유를 버리는 지로처럼 말이다. 거짓 보편화란 이렇게 그저 교언영색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현재 일본의 진실된 모습은 어떠한가? 오로지 가상만 남아버린 일본은 실상 텅 비어있다. 구소은 작가는 지로가 미유에게 이별을 말할 때 텅 비어있는 케이크 전문점과 해금이 사는 미이케우라 섬이 밤에는 텅 비어 있음을 통하여 이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일본이 이렇게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가상에만 만족하고 속을 채우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건 그들이 저지른 죄과에 대한 진실된 속죄와 깊은 뉘우침으로만 가능했는데 번영이라는 가상에만 취한 나머지 그걸 방기하고만 것이다. 그건 미유와 지로가 연애할 때 함께 했던 스쿠버 다이빙에서도 드러난다. 미유와 지로에게 바다란 구월과 해금처럼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걸고 뛰어들어야 하는 치열한 전장이 아니다. 그저 한가롭게 구경할 수 있는 관광 장소일 뿐이다. 그렇게 가상만 취할 수 있을 때 그들은 피를 따지지 않고 사랑에 빠질 수 있었다. 하지만 해금의 삶과 함께 바다가 더이상 가상이길 포기하자 그들은 헤어진다. 이로써 구소은 작가는 해녀의 삶과 현재 일본의 모습이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음을 선명히 한다. 그녀가 이렇게 하는 이유는 일본처럼 속 빈 강정이 되지 않기 위한 대안을 바로 해녀의 삶에서 찾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건 어떤 모습인가? 그건 단적으로 일본과 우리나라의 테왁이 가지는 차이점을 말하는 것에서 나타난다.
다른 것이 있다면 부표로 만든 테왁의 소재와 모양인데, 여기서는 박속을 파내고 잘 말려서 만든 테왁을 쓰지 않고 나무로 만든 북 모양의 일본식 테왁인 탐포를 사용했다. (...) 해녀들은 자신의 몸집과 힘에 맞춰 테왁을 만들었는데, 일률적인 일본식 탐포는 익숙해지기까지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p. 96)
과연 거짓 보편화의 일본답게 일본의 테왁은 개인의 개성은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획일적이지만 조선의 테왁은 각 개인의 개성을 고려하고 보존하려는 모습을 보여준다. 바로 이것이 작가가 구월과 해금의 삶을 하나의 대안으로 가져오는 이유이다. 거짓 보편화가 하듯이 한 개인이 가진 고유한 존재 가치와 시간을 함부로 없애지 않으며 제 가치를 온전히 보존할 수 있도록 존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켄의 정원과 구월과 해금이 하는 대표적인 행위의 차이에서도 드러난다. 켄은 식물을 기르지만 구월과 해금은 바다에서 캐낸다. 기르는 것은 개체를 보편이란 토양에다 억지로 끼워 맞추는 행위라 할 수 있다. 반면 캐내는 것은 개체가 가진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가져오는 것이다. 여기엔 아무런 인위적 조작이 없다. 이러한 캐내는 것이 가진 개체 보존의 투명성. 구소은 작가는 해녀들이 하는 행위의 대표적인 모습을 통해 거짓 보편화에 맞서는 대안이 바로 개체들의 투명한 보존과 복원에 있음을 보다 분명히 드러내는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검은 모래'에서 구소은 작가가 하는 것이야말로 자신이 추구하는 대안으로써의 해녀 모습 그대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았던 망각이라는 바다 깊숙이 가라앉아 있었던 일제 강점기 해녀들의 삶을 마치 해녀가 바다에서 캐내듯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고 있으니까 말이다. 바로 그 모습에 담긴 뜻이 또한 오늘의 시대가 텅 빈 모습이 되지 않으려면 어찌 해야 되는 지에 대한 대안이기도 하여 더욱 예사로이 보아 넘기지 못하도록 만든다.
늘 일본에게 올바른 역사 청산을 이야기 할 때마다 위정자들에게서 자주 듣게 되는 말이 있다. '과거 보다는 미래가 소중하다. 이제 더이상 서로 안 좋은 과거에는 집착하지 말고 협력해서 앞만 보고 나아가자'는 말이 그것이다. 한 마디로 과거의 일본이 외쳤던 구호와 조금도 다를 바 없는 거짓된 보편화다. 역사에 실존했던 개인의 고통과 눈물을 현실적 이익이라는 이유로 쉽사리 제거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결국 그러한 제거는 과거의 잘못에 대한 어떠한 반성도 없게 만들어 그 반성이 가져올 보다 나은 오늘에 대한 성찰을 조금도 매개하지 못하고 그렇지 않았다면 피할 수 있었을 잘못된 과거의 반복을 결국엔 거듭하도록 만든다. 꾸며낸 영업적인 미소가 거래의 신뢰를 조금도 보장하지 못하듯, 진실된 반성과 사죄가 뒷받침되지 못한 그저 '좋은 게 좋다'는 식의 억지 화합은 관계의 공허함만 가져다 줄 뿐이다. 아마도 종국엔 관계에 내실을 가져다 주는 진정한 가치는 모조리 사라지고 그저 겉모습만 존재하는 텅 빈 관계가 되고말 확률이 높다. 그렇기에 구소은의 '검은모래'가 지금 던져주는 주제가 소중하지 않을 수 없다. 역사가 희생한 개체의 존재와 삶에 대한 온전한 보존과 최대한의 존중이 먼저 이루어져야만 진정한 화해 역시 이루어질 수 있음을 작품 전체로 웅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릴 적, 사할린에서 온 친척들과 할아버지가 울 수 밖에 없었던 것은, 해금 역시 다시 고향의 검은 모래 해변에 서게 되더라도 그저 울 수 밖에 없는 것은 오늘의 사회가 거기에 대해 그 어떤 존중과 사죄도 하지 않고 그저 지우려고만 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진정 그들이 고향의 검은 모래 위에 섰을 때 그나마 밝은 얼굴을 하도록 만들 수 있는 건 오로지 우리가 그들의 눈물을, 아픔을 내 것처럼 소중히 할 때 뿐이리라. 그것을 위해 우리가 우선 해야 할 것이 바로 그 삶을 발굴하고 기억하는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소은 작가의 '검은 모래'는 실족하지 않도록 만드는 단단한 첫 걸음이 되어주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