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노래 - 2013년 제44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이승우 지음 / 민음사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승우의 소설은 참 오랜만입니다. 나름 감명깊게 읽었던 그의 초기작들 '생의 이면'이나 '에리직톤의 초상'. 하지만 이제는 그 내용조차 거의 기억나지 않을 정도이니 정말 오래되긴 오래되었나 봅니다. 사실 그 두 작품을 끝으로 내내 이승우의 소설과 인연이 없기도 했지요. 그런데 마침 좋은 인연이 닿아서 최근에 나온 신작 '지상의 노래'를 벗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런 것도 나름 리뷰 블로그 활동을 하면서 얻게 되는 덤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살면서 늘 평행선처럼 지내오던 작가의 작품과 뜻하지 않는 조우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이 작품의 해설을 쓴 평론가 정영훈에 따르면 이승우의 소설에는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이야기가 있고 그건 어디까지나 자신이 직접 겪은 경험을 토대로 쓰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갑작스럽게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사실 '지상의 노래'를 읽으면서 이 작품을 어떻게 이해해야할 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는데 이 말을 듣고 뭔가 힌트 같은 것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경험에 토대를 둔 어쩌면 강박에도 가까운 반복. 이건 일종의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이 보여주는 모습과도 비슷한데요 저는 거기에 대한 어떤 죄의식 같은 것이 있어서 나타난 결과는 아닐까 생각되더군요. 그래서 약력을 살펴봤습니다. 전라남도 장흥 출신. 그걸 보고 이런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습니다. 물론 너무 무리한 억측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습니다만, 이 소설의 주요 무대가 되는 한 때는 왕성했었으나 미스터리하게 사람들이 모조리 사라져버린 '천산 수도원'은 어쩌면 5. 18 광주의 은유는 아닐까 하고 말이죠. 

 사실 작품을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천산 수도원'을 5. 18의 광주로 해석해도 별 무리는 없습니다. 일단 그 천산 수도원의 존재가 '천산 벽서'를 통해 알려진다는 게 그렇습니다. 여기서 '천산 벽서'란 천산 수도원의 폐허 지하에서 발견된 벽마다 빼곡히 누군가가 써 놓은 성경 글귀들을 말합니다. 

 어둡고 습한 그 지하 방에서,(...)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글자들로 가득한 벽을 보았다. 글자들은 가로세로 줄을 따라 반듯하게 늘어서 있었으며 대부분 검은색이었지만 군데군데 빨강과 초록, 노랑이 섞여 있었다.  색을 입히거나 장식을 해서 도드라지게 보이는 글자들도 있었다. 처음에 강상호는 그것이 독특한 디자인의 벽지라고 생각했다. 자세히 보니 벽지가 아니라 흙벽 위에 직접 글씨를 쓴 것이었다.(p. 19) 

 이것이 바로 '천산 벽서'라는 것입니다. 이 존재로 인해 천산 수도원이 관심을 얻게 되고 결국 그 수도원에 얽힌 비극적 비밀이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은 우리가 5. 18의 광주를 알게 되는 과정과 너무도 똑같습니다. 5. 18 당시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신군부는 그들의 허약한 정당성을 굳건히 하기 위해 본보기로 희생양을 하나 고르는데 그것이 바로 광주였죠. 거의 학살이나 다를바 없는 그들의 만행을 숨기기 위해 당시 광주는 절대적으로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깥의 사람들은 누구 하나 그 진실을 알 수가 없었습니다. 방송과 신문들은 광주가 빨갱이에게 점령당했다고만 떠들어대었구요. 오죽 하면 광주 시민들이 광주 MBC에 불을 질렀을까요. 아무튼 아무도 정말 그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그 진실이 나중에 기록이나 문학등의 형태로 글로 만날 수 있게 되기까지는. 그렇게 우리가 5. 18 그 날의 광주를 알 수 있었던 것도 '천산 벽서'와 같은 '글'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시기적으로도 유사합니다. '천산 수도원'에 처참한 비극이 일어났던 때(작품에서 정확한 연도는 표기되지 않습니다만 정황상)와 5. 18 광주가 일어났던 때가 말이죠. 더구나 그 비극이 일어나게 된 이유조차 비슷합니다. 오로지 도래할 주님의 나라만 믿고 세상과 모든 인연을 끊고 은둔자로 살아가던 그들이 새로 정권을 잡은 무리들에게 그런 일을 당해야 했던 것은 정권이 그들에 대해 가진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그건 천산 수도원 소개를 명령한 장군의 입을 통해 직접 증명됩니다. 

 시국이 그렇잖아요. 시국이. 상상력을 발휘해 봐요. 일어나지 않은 일들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어요. 어떤 요인에 의해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알 수 없어요. 변수가 너무 많은 세상이에요. 99퍼센트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가 하면 1퍼센트의 가능성이 일을 성사시키기도 하잖아요? 1퍼센트나 99퍼센트나 뭐가 달라요? 그럴 사람이 아니다. 그걸 어떻게 장담해요? 사람 속을 누가 알아요? 사람은 아무리 거룩해져도 어쩔 수 없이 속물이지. (...) 내 말의 요지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른다. 벌어지지 않은 일에 대해 섣부른 단정을 하지 말자. 그거예요.(P. 208) 

 아마 당시의 광주가 학살을 당했던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을겁니다. 어쩌면 신군부가 광주 학살을 저질렀던 진짜 이유가 이런 형태로 변형되어 작품 속으로 녹아든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무튼 이렇게 천산 수도원이 그 때의 광주를 은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 여지가 참 많은데요. 이렇게 보면 소설 속에 등장하는 모든 등장인물들에게 왜 한결같이 죄의식이 존재하게 되는 것인지 그 이유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들의 죄의식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공통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바로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의식입니다. 천산 수도원의 존재를 처음 세상에 알린 강상호의 동생 강영호는 형이 그렇게 타국에서 비명횡사할 때까지 제대로 형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고 그 뒤에 나오는 소년 '후'는 사촌 누나 연희를 박 중위의 손에서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천산 수도원의 비밀이 본격적으로 드러나게 되는 열쇠인 '장' 노인은 천산 수도원 사람들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가지고 있구요. 이렇게 소설을 이끌어가는 주된 인물들 모두에게 각인되어 있는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은 사실 우리가 5. 18 광주에 대해 가지고 있는 죄의식과 하나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하자면 이 소설에 등장하는 강영호, 후 그리고 장 노인은 5. 18 광주라는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 현실의 바로 우리들 모습이라는 것이죠. 아마도 작가 이승우가 자신의 작품 속에 내내 우려내고 있는 그의 죄의식 역시 분명 거기와 맞닿아 있을 겁니다. 그렇게 좀 무리를 해서 단순하게 이 '지상의 노래'를 정의하자면 한 마디로 다시금 불러내는 광주의 기억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네, 이 소설은 일종의 광주를 위한 '초혼(草魂)'입니다. 지금 우리 세대에서는 거의 희미할 정도로 지워져버린 그 아픈 역사를 다시금 망각의 늪에서 길어 올려 새로이 뇌리에 되새기려는 '소환'입니다. 천산 수도원의 희생자들이 얼룩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던 그야말로 죄로 부터 순결한 영혼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당시의 광주 시민들 또한 그랬습니다. 하지만 남들의 피를 밟고 가진 자들의 무분별한 두려움으로 아무 이유도 없이 희생되고 말았습니다. 그건 정당하지 못한 권력이 힘을 가지게 되면, 그리고 그 힘이 어느 하나로 집중하게 되면 어떤 비극이 우리들에게 닥쳐올런지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습니다. 그러므로 잊어서는 안될, 잊혀서는 안될 기억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광주는 천산 수도원이 아무도 찾지 않는 오지의 폐허가 되어버렸듯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차츰 사라지고 있습니다. 아직 그 때 희생된 자들의 한이 채 풀리지 못했는데도 말이죠. 이것은 소설 속에서 사라진 연희를 통해 표출됩니다. 아직 우리가 광주를 떠나보내서는 안되는 이유가 박 중위로 부터 유린을 당하고 믿었던 삼촌(후의 아버지이기도 한)에게서 배신을 당한 연희가 겪는 고통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죠. 후가 다시 찾은 연희는 여전히 폭력으로 인한 공포와 배신에 대한 상처로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있었습니다. 근데 그녀가 겪었던 그 폭력과 배신은 그대로 당시의 광주 시민들이 겪었던 것이기도 했습니다. 진압군의 인정사정 없는 무자비한 폭력. 그리고 이렇게 철저하게 짓밟히고 있는데도 누구하나 도와주러 오지 않는 같은 대한민국 국민이면서 다른 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배신감. 그 때의 광주 시민들 역시 연희와 똑같은 것을 겪었습니다. 그런데 그 연희는 천산 수도원이 이렇게 폐허로 변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통 받고 있습니다. 광주의 기억은 과거 한 때의 일이 되고 말았을지 모르지만 희생당한 자들의 고통은 지금도 현재형인 것입니다. 그러니 더욱 잊혀서는 안되는 일인 것이죠. 늘 그 때 광주에 누구에 의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똑똑히 기억 속에 새겨두어야 하는 것이죠. 아직도 여전히 그 고통 속에 떨고 있는 무구한 희생자들이 있으니까요. 천산 수도원 지하에 매장되어 있는 그 시신들처럼 말이죠. 

 그럼, 그들의 넋은 언제 제대로 위로를 받게 되는 걸까요? 그건 아주 작은 자 하나라도 그의 처지를 고려하고 배려하게 될 때입니다. 우리 앞의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될 때입니다. 천산 수도원에서 내려와 후가 겪게 되는 일들이 바로 그것을 보여줍니다. 더우기 이것은 천산 수도원의 비극을 초래한 까닭으로 더욱 강조되기도 합니다. 그 때 천산 수도원이 고립되고 결국 학살되었던 것은 모두 타인을 믿지 못하는 두려움이 원인이었습니다. 반면에 천산 수도원 사람들은 누가 오든지 그를 있는 그대로 다 받아줍니다. 박 중위를 찌르고 달아났던 후를 아무 이유없이 받아주었고 박정희의 최측근으로 정권 안정을 위해 온갖 못할 짓을 도맡아하던 한정효가 아내의 죽음을 통해 그런 더러운 일에 환멸을 느끼고 물러나려 하자 정권이 그 입이 두려워 천산 수도원에 유폐시켰을 때에도 천산 수도원은 두말없이 받아주었습니다. 그 누가 어떤 일로 오든지 천산 수도원에선 모두 동등한 '형제'였습니다. 

 '지상의 노래'는 바로 이것이 그들의 원한을 제대로 씻겨줄 수 있는 길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까지도 모두 우리의 형제로 대하는 것 말이죠. 두려움은 언제나 '나만' 생각하고 위할 때 나타납니다. 우리가 가진 아픈 광주의 역사 또한 궁극적으로 그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다시 그 비극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는 우리 모두를 더불어 같이 살아가야할 '형제'로 바라보는 것 밖에는 없습니다. 내 두려움을 씻기 위해 유린해야 할 타인들이 아닌 배려와 존중이 마땅히 의무가 되어야 할 형제 말이죠. '천산 벽서'는 바로 그런 지상의 노래였습니다. 모두가 형제가 될 수 있는 세상을 향한 그리움과 염원이 담긴 노래였습니다. 소설의 마지막에서 후는 세상에서의 모든 여정을 끝내고 돌아와 한정효가 미처 끝내지 못한 벽서를 완성합니다.  그는 그 벽서를 쓰면서 이런 것을 느낍니다. 

  마지막 순간에 형제가 '형제'라고 하지 않고 '형제들'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후는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였다. 그를 부르지 않은 것이 아니라 그만 부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형제는 형제가 아니라 형제들을 불렀다. 형제로서 그는 형제들과 같이 있었다. 형제로서 그는 형제들과 같이 있어야 했다. 형제들이 그 때문에 그를 그곳으로 불렀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었다.(P. 342) 

 이승우의 '지상의 노래' 역시도 그러합니다. 다시는 5. 18의 광주와 같은 그런 비극을 재현하지 않기 위해서 모두가 동등한 그리고 하나된 형제가 되기 위한 그 '참여' 속으로 당신을 부르는 이야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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