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스 콜드 리졸리 & 아일스 시리즈 8
테스 게리첸 지음,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RHK에 따르면 지금까지 발간한 스릴러 소설을 통털어 가장 많이 팔린 책이 바로 테스 게리첸의 '외과의사'라 한다. 하와이에서 의사로 근무하다 산후 휴가 중에 작가로 데뷔한 테스 게리첸이 로맨스 소설 작가에서 지금의 스릴러 작가로 변신하는 데 있어 그 시작이 되었던 작품이다. 지금은 그녀의 대표 시리즈가 된 형사 제인 리졸리와 법의관 마우라 아일스 시리즈의 시작이기도 하다. 그만큼이나 인기를 얻었음인지 테스 게리첸의 소설은 우리나라에 꾸준히 소개되었고 이번에 이야기하고자 하는 '아이스 콜드'는 그 시리즈 중 여덟번째 작품이다. 유감스럽게도 난 '아이스 콜드'를 통해 처음 테스 게리첸과 만나므로 이렇게 일반화하기엔 무리가 따르지만 아무래도 이번 작품은 마우라 아일스가 주인공이라고 생각된다.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이 소설은 철저하게 마우라 아일스에게 그 초점이 맞춰진 작품이라고 말이다.

 "미안하지만, 제인 리졸리.이번 작품만큼은 당신이 들러리에요."

 

 마우리 아일스에게 초점을 맞추고 소설을 보면 이 작품은 그야말로 단순 명쾌하다. 그동안 많은 스릴러 작품을 리뷰란답시고 해왔지만 이 작품만큼 그냥 술술 풀리는 건 처음이었다. '아이스 콜드'란 제목 그대로 '얼음처럼 차가운' 것만큼 선명한 감각으로 느껴지는 것도 없는데 이 소설이 그렇다. 그만큼 테스 게리첸이 보여주고자 하는 게 분명히 드러나 있는 것이다. 너무나 이정표가 확실해서 길을 잃기가 불가능할 정도로 말이다. 이 말은 곧 이 작품에 군더더기란 게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이기도 하다. 설명서대로 레고 블럭을 만든 것처럼 모든 조각들은 정확히 있어야 할 곳에 배치되어 있는 작품인 것이다. 시리즈 전체를 본 이들에겐 어떻게 평가될지 모르겠으나 이 작품에 한해서만은 테스 게리첸 그녀는 자신이 작품을 통해 무엇을 말할지 정확히 알고 있는 가운데 이야기를 완전히 장악하면서 쓰고 있다고 생각된다.

 

 그렇다면 '아이스 콜드'는 어떤 이야기일까?

 

 일단 마우라 아일스의 시작을 보자. 그녀의 이야기는 '그들의 관계는 끝나가고 있었다'로 시작된다. 누구와의 관계? 바로 그녀의 애인 대니얼 브로피와의 관계이다. 둘은 사랑하지만 결혼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대니얼 브로피 그는 이미 결혼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인간이 아닌 신과. 그렇다. 그는 신부이다. 마우라 아일스는 그가 자신과 결혼해주기 원하지만 대니얼 브로피는 '지금도 이렇게 당신 곁에 있잖아요'하고 말할 뿐이다. 하지만 마우라는 그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다. 그를 온전히 가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우라는 대니얼이 선택해주길 바란다. 신이 아니라 자신을. 하지만 그는 그러지 못한다. '신부'라는 하나의 제도에 갇힌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만 제도를 떠나지 못한다. 선택은 늘 미뤄지고 그만큼 마우라의 번민도 가중된다. 이제 그녀는 묻는다. 언제까지 이런 상황을 지속해야할까? 아무래도 대니얼은 신부라는 신분을 포기하지 않을 것 같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계속 기다려야 하는 것일까?

 

 마우라는 깨닫는다. 그건 또 하나의 대니얼이 되는 것임을. 대니얼은 이대로 달아나자란 마우라의 말에 지친 한숨을 내뱉으며 이렇게 답한 적이 있었다.

 

 "우리가 아무리 세상을 잊으려 해도 세상은 늘 그자리에 있어요. 우린 결국 그 세상으로 돌아와야 하고."(P.17)

 

 그렇게 대니얼은 무모하게 변화를 가져오지 말자고 말한다.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에요'라고 마우라는 항변하지만 자신도 그게 옳다는 건 안다. 빌어먹을. 그녀 역시 대니얼만큼이나 책임감이 강하니까. 하지만 그런 자신이 싫다. 그러니 갈등할 수 밖에. 대니얼의 말처럼 이대로 변화를 거부한 채, 상황에 안주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면 과감히 박차고 나가서 나 스스로를 새로운 변화 속으로 던져 넣어야 하는 것인지?

 '아이스 콜드'는 소설의 시작에서 제기된 마우라의 이러한 의문에 대한 해답의 여정이다.

 

 그들이 11월의 아침 공항에서 앞으로의 관계를 두고 말없이 갈등을 겪고 있을 때 한 경찰이 다가와 퉁명스럽게 말한다. 여긴 하차구역이니 당장 차량을 이동하라고. 하지만 마우라는 그 지시를 바로 이행하지 못한다. 대니얼과 연인처럼 헤어지고 싶지만 그가 신부라는 것 때문에 남들의 눈이 무서워 주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자 경찰이 소리친다. "거기! 당장 차량 이동하시죠!"(P. 18)

 

 대단한 장면 연출이다. 단적으로 마우라 아일스가 무엇 때문에 고민하고 있으며 자신을 위해선 무엇과 싸워야 하는지 그 궁극의 존재를 이렇게 선명히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제도다. 대니얼 브로피를 가두고 있는 제도. 인간에게 그 직분에 맞는 모습만을 가질 것을 강요하는 타인의 시선으로 육화된 제도. 바로 그 제도가 가진 인간 모습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편협하고 억압적인 모습이 이렇게 그 제도적 권력의 가장 대표적인 존재라고 할만한 경찰의 명령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테스 게리첸은 앞으로 마우라가 바로 이 획일성을 강요하는 제도와 싸우게 되리라고 예언한다. 아니나 다를까 그 예언은 물론 실현된다. 와이오밍의 잭슨빌, 그 컨퍼런스에서 마우라는 옛 대학 친구 하나를 만나게 된다. 이름은 더그 캄리. 마우라가 가장 먼저 떠올리는 그에 대한 기억은 그가 다리 하나를 다쳐서 절뚝거렸던 것이다. 더그는 왜 그런 일이 있었는지 말해준다. 닌자 복장을 하고 옥상에서 어슬렁거리다가 떨어졌다는 것이다. 완전 무모하고 상식적이지 못한 그의 행동은 그가 소설에서 무엇을 나타내는 존재인지 보여준다. 세상이 규정한 대로는 움직이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그만큼 이성적이지 않은 무모한 존재지만 그건 세상의 입장에서만 그렇고 자신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야말로 변화에 몸을 맡기는 자유로운 존재이다. 마우라가 같이 여행하자는 그의 제안을 덥석 받아들이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세상에 갇혀 자신의 사랑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했던 그녀가 정말 하고 싶었던 것을 더그가 하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여행길에 올라서도 더그는 무모해보이는 선택을 한다. 마우라는 그런 그가 처음 생각했던 것만큼 그리 미덥지 못하다고 여기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런 더그의 행동 때문에 마우라 일행은 결국 '천국'이라는 버려진 마을에 갇히게 된다.

 

 얼른 보기에 이 갇힘은 더그의 무모함 때문이고 그렇게 변화를 받아들임을 부정하는 듯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여기에는 두 가지 근거가 있다. 하나는 이 갇힘이 바로 마우라가 더그에게 보내는 의심 뒤에 이루어진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마을의 정체 때문이다. 읽으면서 이런 연쇄에 주의해 보면 '천국'에의 갇힘이 더그 때문이 아니라 바로 마우라 자신 때문임을 알게 된다. 즉 그녀가 더그의 태도에 대해 회의적이었기 때문에 마을에 갇히게 되었다는 그런 의미다. 이는 갇히게 된 마을의 정체를 보면 확인되는데 다름아니라 그 마을은 오직 한 명의 종교 지도자가 원하는 대로만 움직이는 '모음교'의 신도들로만 이루어진 곳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확인하게 되듯이, 마을의 이름으로 보나 '모음교'의 성격으로 보나 이는 정확히 대니얼 브로피를 가두고 있는 기독교 자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아니, 너무도 명확해서 어떻게 달리 해석할 수가 없다. 마우라는 바로 거기에 갇힌 것이다. 그녀가 정말 너무나 싫어하는 그 공간에 말이다. 그러니 이를 어떻게 더그의 탓으로 돌릴 수 있을까? 결국 마우라의 의심이, 비록 그것이 일말일 망정, 갇히게 했다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죄인이여, 부족한 건 네 믿음이니라."라고 게리첸에 마우라에게 말하는 것과 같다. 뒤돌아보는 바람에 그대로 소금기둥이 되어버린 룻의 아내. 마우라가 바로 그녀인 것이다.

 

 게다가 그 마을은 지금 차디찬 눈 속에 버려져 있다는 것이다. 생활의 흔적은 보이는데 사람만 보이지 않는다. 분명 모두들 어디론가 급히 떠나가 버린 형국이다. 이는 비록 일말의 미련은 남아있을 망정 마우라가 그토록 벗어나고 싶어하는 오로지 인간에게 획일적인 정체성만 강요하는 제도의 단적인 진실이다. 사람들은 그 제도가 스스로를 지켜주고 대니얼 브로피가 그러듯이 더 높은 곳으로 고양시켜 줄 것이라 믿지만 그 안에 사람은 없는 것이다. 제도는 사람을 고려하지 않는다. 제도는 오로지 제도만 고려할 뿐이다. '모음교'의 교주가 신도들을 위해서 한 일 모두가 결국은 자신을 위한 일이었듯이 제도도 그러한 것이다. 그 종교에서 주로 희생되는 것은 어린 소녀들이다. 제도에 갇힌 소녀들을 교주는 원하는 대로 마음껏 유린하고 남자들마저도 닥치는대로 소녀들을 범한다. 그 소녀들을 보호해주어야 할 엄마라는 여성들은 오히려 교주의 뜻이라며 소녀들을 내어주기 바쁘다. 기계와도 같은 지극한 수동성. 그게 '모음교' 엄마들의 본질이었다. 테스 게리첸은 왜 이토록 여성에 대한 학대와 착취를 보여주는 것일까? 답은 한 가지다. 소녀는 현재 마우라에 대한 은유이며 엄마란 미래 마우라에 대한 은유라는 것. 해서 제도, 거기엔 아무런 구원의 가능성이 없는 것이다. 마우라가 진정 스스로 존재하고자 한다면 오로지 버려야만 하는 곳인 것이다. 그게 설사 죽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해도.

 

 이러한 철저한 희망의 말살. 이는 테스 게리첸이 마우라에게 남아있는 일말의 미련이라도 깡그리 없애기 위하여 일부러 갇히게 했다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다. 그러므로 그 뒤의 장면이 제인 리졸리로 바뀌어 마우라의 죽음이 나오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다. 진정한 변신은 이전 존재의 전적인 죽음에서만 가능하니까. '매트릭스'의 네오가 그랬듯이.

 

 변화에는 조력자가 필요하다. 네오에겐 모피어스가 필요했고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겐 토끼가 필요했으며 단테에겐 베르길리우스가 필요했듯이. 이제 걸어야 할 길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길이기에 아무래도 앞에서 등불을 들고 길잡이가 되어 줄 이가 필요한 것이다. '아이스 콜드'에서는 줄리언 퍼킨스란 소년이 그 역할을 맡는다. 그가 마우라에게 말하는 자신의 이름은 '생쥐'다. 생쥐란 제도의 바깥에서 그것이 구획해 놓은 것을 넘나드는 존재다. 생쥐는 모든 곳에 있을 수 있고 모든 곳을 다닐 수 있다. 정확히 줄리언 퍼킨스가 그렇다. 테스 게리첸은 그 제도로 부터 달아난 자였다는 걸 강조한다. 그는 한 부모에게서 양육되지도 못했고 정규 교육조차 제대로 받은 적이 없다. 그는 마을이 아니라 산 속에서 홀로 산다. 테스 게리첸은 줄리언의 할아버지도 그런 존재였음을 밝혀 이 성격을 더욱 강조한다. 중요한 것은 그가 자립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는 마을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도 할아버지로 부터 배운 야생에서 살아남는 법을 통해 얼마든지 살 수 있다. 그 뿐 아니라 마우라까지 챙겨줄 정도다. 한 마디로 전적인 외부의 존재인 것이다. 단적으로 사람들이 이름을 물을 때마다 줄리언이 사회가 부여한 이름이 아닌 자기 스스로 정한 이름을 말하는 것에서 드러난다. 줄리언은 끝까지 자신의 이름을 생쥐라 말한다. 이러한 줄리언의 의미는 경찰에게서 마우라를 구해줄 때 더욱 확고해진다. 앞서 공항에서의 경찰 모습으로 대표되듯이 소설에서 경찰이란 기독교와 더불어 제도의 굳건한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존재이다. 그런데 그 경찰과 겨루는 것이 바로 줄리언인 것이다. 그러니 이런 줄리언이 길잡이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바로 나타난다고 하겠다. 즉 제도로부터 완전히 결별하고 스스로 홀로 서는 것만이 이제 마우라가 걸어야 하는 길이라는 것이 말이다.

 

 이게 '아이스 콜드'의 핵심이다. 차가운 얼음을 뺨에 댄 것과도 같이 선명히 전해져오는 테스 게리첸의 진심인 것이다. 꾸준히 시리즈를 읽어왔었다면 보다 분명히 확신을 가지고 말했을 터인데 그러지 못해서 이렇게 말하는 것마저 조심스럽긴 하지만 마우라 아일스는 행여 제도가 강요하는 획일성에 저항해 스스로의 다양성을 추구해가는 존재를 나타내는 게 아닐까 싶다. 그렇게 이 시리즈의 한 쪽 축엔 제도와의 싸움이 있는 게 아닐까 싶어진다. 마지막에 나오는 마우라의 독백이 그래서 더욱 결연하게 들린다. 이건 어쩌면 테스 게리첸의 각오인지도 모른다.

 

 '눈 때문에 차단된 골짜기. 나는 나만의 골짜기에 갇힌 거야. 나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나 밖에 없어.'(P. 447)

 

 그 진상은 이제 전작들을 읽어봐야 확실히 알 수 있을테지만 아무튼 '아이스 콜드'만은 차디찬 눈처럼 편견에 사로잡혀 있고 냉혹한 제도를 마지막 장면의 폭발과도 같이 산산히 날려버리는 소설이었다. 마우라의 말처럼 누구나 자신만의 골짜기에 갇혀 있다. 하지만 비극은 그러한 갇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남들 손에 구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에 있지 않을까 싶다. 그렇게 내 존재의 구원을 자꾸 남에게 의탁하느라 '모음교'와 같은 독재의 종교도 생기고 편협하고 획일적인 제도가 더욱 강성해지는 것이 아닐까 싶다. 구해지길 바란다면, 진정한 나라는 주체로 서고 싶다면, 무조건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밖에 없다. 그건 그대로 제도에 의존했던 시각에서 벗어나 나의 눈으로 이제 타자와 세계를 바라봄을 뜻한다. 변화란 바로 그런 것이다. 시각의 바꿈. 나만의 고유한 시선으로 다른 이들을 담는 것. 변화란 이토록 주체화와 연결되어 있다. 마우라가 줄리언이라는 타자를 받아들임으로써 더욱 고유한 자신이 될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이스 콜드'는 그 둘의 단단한 매듭이다. 어쩌면 이전의 마우라와 같은 우리들마저 끌어올려 줄 지 모른다. 분명 여기에는 그만한 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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