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의 작은 마을, 개틀린...
남북전쟁을 아직도 '주들 사이의 전쟁'이나 '북부의 공격으로 벌어진 전쟁'이라고 부를만큼 그 곳은 폐쇄적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예로부터 이어진 전통적인 남부의 가치를 완강히 고수하고 있었다. 변하지 않는 건 비단 생각만이 아니었다. 마을 자체의 모습도 그러했다.
개틀린은 영화에 나오는 작은 마을들과 달랐다. 혹시 50년쯤 전에 만들어진 영화라면 또 몰라도. 우리 마을은 찰스턴에서 너무 멀어서 스타벅스도 맥도널드도 없었다.(...) 도서관에는 여전히 컴퓨터 도서목록 대신 도서카드가 있고, 고등학교에는 여전히 칠판이 있고,(...) 근처 극장인 시네플렉스에 가면새 영화 디브이디가 나올 때쯤 같은 영화를 볼 수 있었다.(...) 개틀린에 깜짝 놀랄 일은 전혀 없었다. 이 마을은 촌구석 중에 촌구석이었다. (P. 12)
개틀린은 그러한 곳이었다. 웅덩이처럼 고여있기만 한 마을. 옹고집처럼 변화를 거부하며 살아온 공간. 그래서 시간마저 내버려두고 비켜나가 버린 것처럼 보이는 곳. 그 곳이 바로 개틀린이었다.
이러한 곳에 갇힌 채, 매일 마을을 떠나기만을 바라던 열 여섯 살 소년 이선 웨이트는 매일 밤 한 소녀의 꿈을 꾼다. 언제나 신비로움으로 가득했던 그 소녀는 낯익은 마을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낯선 매력이었기에 이선은 꿈 속의 소녀와 사랑에 빠져 버린다. 이선이 그녀와 사랑에 빠지게 된 것은 소녀 자체가 마을에서는 단 한 번도 볼 수 없었던 이국적 매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었으므로 그 사랑은 또한 마을을 빠져나가고 싶다는 이선이 가진 열망의 다른 모습이기도 했다. 그런 이선에게 여름날 우연히 떨어진 낙뢰처럼 정말로 낯선 이방인 하나가 찾아온다. 그녀의 이름은 리나.
이선에게 있어 리나는 마치 자신이 늘 꾸었던 꿈 속의 소녀가 현실로 튀어나온 것과 같았다.
처음 이야기를 꺼낸 뒤로, 새로 전학 온 여자아이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어딘가 다른 곳에서 온, 어딘가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 때문에, 어쩌면 우리보다, 나보다 더 넓은 세상을 아는 아이일 수도 있었다.(P. 31)
이선은 곧 리나에게 사랑을 느낀다. 그런데 리나 역시 그런 이선의 관심이 필요했다. 오래도록 변화를 거부하며 살아 온 곳은 이방인들에게 그리 친절하지 않다. 그것도 상서롭지 못한 '레이븐 우드'라는 성을 가진 이방인이라면, 더구나 주로 타고 다니는 차가 '장의차'라면. 당연히 리나는 학교에서 소외 당한다. 그런 리나에게 유일하게 마음을 열었던 친구가 바로 이선이었다.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일 수 없는 개틀린과 레이븐우드 가문을 놓고 보자면 이선과 리나는 거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선에게 있어 마주해야 할 난관은 그게 다가 아니었다. 마을 사람들의 따돌림과 괴롭힘 정도는 사소한 장난으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리나에겐 자신이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비밀이 있었고 거기다 가혹한 운명 역시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그 시련 앞에서 이선과 리나는 자신들의 사랑을 잘 지켜나갈 수 있을 것인가?
미국의 두 여류 작가 카미 가르시아와 마거릿 스톨의 공동으로 쓴 판타지 소설, '뷰티풀 크리처스'는 이렇게 삶에 있어서 우리 역시도 언젠가는 마주할 수 밖에 없는 변화를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다.
오래도록 한결같은 모습을 유지해 온 개틀린과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 신비로운 존재감으로 넘쳐나는 여주인공 리나가 이루는 뚜렷한 대비는 이 주제를 선명히 부각시키고 있다. 따지고 보면 정말로 이 소설의 중심엔 하나의 '전선(FRONT LINE)'이 있는 셈이다. 변화를 거부하고 한 번 결정된 것은 영원히 고수하는 그렇게 운명에 종속된 존재들과 그러기 보다는 오히려 변화에 자신을 열어 한껏 받아들이는 그렇게 운명은 정해진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임을 보여주는 존재들이 서로 대치하고 있는 전선이 말이다. 거기서 빚어지는 갈등과 반목 사이에서 꾸준히 서로를 지켜나가는 이선과 리나의 사랑을 통해 카미 가르시아와 마거릿 스톨은 운명을 비어 있는 페이지라 생각하고 변화에 자신을 여는 것이야 말로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임을 설득력있게 밝히고 있다.
카미 가르시아와 마거릿 스톨이 그 주제를 주로 이선과 리나의 사랑을 통해 이야기하는 것은 변화를 받아들임이 바로 타인을 받아들임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즉 변화에 우리 자신을 여는 것은 타인에게 우리 마음을 여는 것과 같다고 그녀들은 말하는 것이다. 그들이 이런 식으로 변화를 이야기 하는 것은 사실 현재 미국의 모습과 관련이 있다. 즉, 2000년에 일어난 9. 11 사태 이후로 미국에서 압도적으로 높아져 버린 이방인들에 대한 배척을 반성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소설 속 개틀린의 모습은 현재 미국의 반영과도 같다. 특히 그건 그 개틀린을 마음껏 주무르고 다니는 링컨 부인을 중심으로 한 DAR(Daughters of the American Revolution, 미국 독립 전쟁 참가자 자손들의 부인 애국 단체를 말함.)에서 드러난다. 그 DAR의 모습은 타자에 대한 배척과 적대가 높아져가는 미국인들의 태도를 빗대고 있기 때문이다. 즉 '뷰티풀 크리처스'에서 이선과 리나를 둘러싼 개틀린에서의 모든 상황은 그대로 작가인 카미 가르시아와 마거릿 스톨이 마주한 미국의 현실인 것이다. 그녀들은 거기서 현실의 미국을 이렇게 정의 내린다. 첫 머리에 나온 남북전쟁에 대한 개틀린의 인식과 일부러 DAR 단체를 소설 속으로 가져온 곳은 바로 그것을 명확히 밝히기 위함이다.
즉 현재의 미국은 흑인을 노예로만 취급했던 남북 전쟁 전의 남부와 별 반 다르지 않다고.
그 남부가 타자에 대한 적대적 태도를 고수하다 파국을 맞았듯이, 현재의 미국도 그런 태도를 고수하다간 파국을 맞을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변화를 야기하는 타인에게 보다 자신을 열고 나와 같은 존재로 받아 들여야 한다. '뷰티풀 크리처스'는 바로 이러한 그녀들의 진심이 담긴 소설인 것이다. 그렇게 이 소설은 비록 판타지의 외양을 취하고 있지만 사실 보다 깊숙한 곳에서는 현재 미국이 가지고 있는 잘못에 대한 성찰을 요구하고 있다. 타자와 변화에 대해 한껏 자신을 열고 깊숙이 받아들이는 이선과 리나의 사랑이야 말로 다름아닌 미국이 지향해야 할 올바른 태도라는 것을 소설을 통해 분명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더하여 이 소설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 또 하나있다. 그것은 주체적이 되라는 것이다. 즉 자신이 스스로 결정하고 절대 남의 손에 결정이나 판단을 맡겨두지 말 것을 요청한다. 자신에게 놓여진 운명을 앞에두고 리나의 태도가 변했던 것처럼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도 그 리나처럼 자신의 머리로 판단하고 자신의 마음으로 결정할 것을 소설은 권한다.
카미 가르시아와 마거릿 스톨의 이러한 제안 역시도 현실 미국의 모습과 관계가 있다. 무엇보다 9. 11 이후 부시 정부가 이라크 침공 때 했던 것들 때문이다. 그 때 부시는 이라크에게 대량의 살상 화학 무기가 있다는 것으로 침공을 정당화했었다. 미국의 모든 언론들은 부시의 이러한 말을 받아썼고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그 말에 휘둘러 전쟁을 지지했다. 하지만 나중에 드러난 진실은 전혀 달랐다. 이라크에 있다고 했던 살상 화학 무기는 없다고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즉 미국의 대중들은 그저 전쟁을 목적으로한 선동에 휘둘린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 말에 휘둘리지 않고 제 머리로 제대로 판단할 수 있었다면 막대하게 희생된 이라크 민간인들과 아직도 전쟁에서 받은 상처로 정신적 후유증을 겪고 있는 많은 참전 군인들의 영혼들을 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마치 그것을 그대로 나타내려는 듯 '뷰티풀 크리처스'에서 리나와 대적하는 주요한 흑의 주술사 리들리와 세라핀은 모두 사람들의 생각을 자기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능력자로 묘사되고 있다. 소설에서는 그 능력을 일컬어 '세이렌'이라고 부르는데 이 능력은 있지도 않은 허위의 사실들을 가지고 대중들의 생각과 판단을 마음대로 주물렀던 부시 정부와 언론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은유한 것과도 같다. 리나는 바로 이런 존재들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난 저 여자나 저 애한테 관심이 없어. 그냥 일반인들의 본질을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야. 일반인들이 얼마나 쉽게 휘둘리는지 얼마나 앙심을 잘 품는지. (P.566)
그러므로 카미 가르시아와 마거릿 스톨이 소설에서 강조하는 것은 더욱 뚜렷해진다. 무엇보다 자신이 스스로 판단하고 결정하라는 것이다.
사실은 이렇게 주체적이 되는 것이야 말로 타자와 변화에 한껏 자신을 열어놓는 길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우리가 타자와 변화에 선뜻 자신을 내맡기지 못하는 것은 살면서 알게 모르게 바깥으로 부터 주입된 선입관 때문이니까 말이다. 우리는 미처 직접 경험해보지도 못했으면서 타자들에 대한 생각과 판단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미국인들이라면 아랍인들이 그럴 것이고 우리들이라면 지역주의에 의해 왜곡되었거나 못사는 나라들에 대한 우월감에 삐뚤어진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시선이 그럴 것이다. 그렇게 우리에겐 막상 직접 만나 대하고 보면 어떤 순간 그동안의 생각들이 그저 근거없는 편견에 지나지 않았음을 확인하게 될 때가 많다. 그러면서 그동안 그런 편견을 가졌던 자신을 반성하고 그런 것이 없었더라면 더 빨리 더 많은 좋은 시간을 그 타자와 더불어 가질 수 잇었을텐데 많이 아쉬워하게 된다. 내가 주체적이 되지 못했음에 놓쳐버렸던 타자들이나 희생해버렸던 시간들을 생각해보면 주체적이 되라는 요청은 더욱 절실해 보인다. 주체적이 된다는 것과 타자와 변화에 자신을 열어 놓는 것은 바로 이렇게 연결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녀들은 이선과 리나의 여정에 그 둘을 긴밀하게 엮어놓은 것이다.
'뷰티풀 크리처스'는 이렇게 지금 우리에게 있어 가장 필요한 태도에 대해서 말해주는 책이다. 지금 유럽에서 부흥하고 있는 신우익이나 전세계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이주민들에 대한 배척을 생각해보면 사실은 우리 시대에 절실한 태도이기도 하다. 분명 우리를 나누고 있는 그 많은 경계선들은 알고보면 있지도 않은 것에 기초한 환영이거나 전혀 진실에 기반하지 않은 거짓에 지나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우리의 귀를 홀리려 드는 수많은 세이렌의 노래소리에 우리 자신을 내맡기고 있는 것이다. 그런 자들의 목소리로 부터 우리 자신을 되찾아야 한다. 왜 우리의 운명을 남의 손에 맡겨두어야 하나? '뷰티풀 크리처스'는 따지고 보면 우리가 정말 들어야 할 목소리는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는 소설이다.
이선과 리나가 서로에게 귀를 기울였듯이 말이다. 그런데 그 둘은 서로 연결되어 마음으로도 말을 주고 받을 수 있다. 그건 마치 나의 내부에서 들려오는 소리와도 같다. 어쩌면 소크라테스가 사람이 정말 귀 기울여 들어야 할 유일한 소리라고 말했던 '다이모니온'인지도 모른다. '다이모니온', 그것은 자기 내면, 그러니까 정확히는 바로 양심에서 울려나오는 목소리를 뜻한다. 이선과 리나가 서로 주고 받는 마음의 대화는 그대로 '다이모니온'과 같았다. 그리고 그 귀기울임은 소설의 후반으로 갈수록 더욱 스스로를 온전하게 지켜나가는 데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한다. 말하자면 이렇게 카미 가르시아와 마거릿 스톨은 분명한 메세지를 주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은 온갖 세이렌과 세라핀의 유혹으로 부터 온전한 당신 자신을 구해내기 위한 것이라고...
타인을 제 몸같이 아끼고 사랑하는 당신을 위해...
이 소설은 현재 영화로 제작되어 포스터에 나온 바와 같이 4월 18일 날 개봉된다고 한다.
인용한 스틸 사진은 모두 이 영화에 나오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사진의 저작권 또한 영화사와 배급사에 있음을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