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릅나무 아래 숨긴 천국
이응준 지음 / 시공사 / 201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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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SHOW MUST GO ON....

 

  삶이 비극이라면 그건 어쩌면 머물지 못하고 늘 나아가야 하는데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때문일까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뭐, 이것은 소설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서로 사랑하는 연인들이 비로소 도달한 행복의 절정에서 꼭 듣게 되는 대사가 하나 있습니다. 그 순간, 꼭 연인 중 하나는 마치 속삭이듯 이렇게 되뇌이죠. "이대로 시간이 멈춰지면 좋겠다..."고.

 

  사실 이것은 비단 영화나 드라마 속 인물들만의 대사는 아니죠. 우리도 살면서 한껏 벅차오르는 행복감을 느끼며 삶이 딱 여기서 더 나아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 순간을 영원히 결빙시키고 싶죠. 왜 우리는 이런 말을 되뇌이고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요?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우리는 진실을 이미 알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어요. 다시 삶이 저 시간의 비탈을 굴러가기 시작하면 지금 보이지는 않지만 곳곳에 숨어있는 뾰족한 자갈돌과 진창으로 지금 느끼는 행복감이 이내 썰물처럼 사라져 버릴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렇게 우리는 알고 있죠. 이 삶이란 가파른 비탈 길은 부드러운 잔디밭 보다는 자갈밭과 진창이 훨씬 더 많다는 것을. 그래서 우리가 맛볼 수 있는 행복과 평안이란 것도 정말 잠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때문에 마주한 행복의 순간을 우리는 정말 '비로소' 도달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정말 힘들게 찾은만큼 다시는 누릴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그 순간을 더욱 영원으로 간직하고 싶어하는 것이죠. 말하자면 그런 대사, 그런 생각은 그런 우리의 바람인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우리가 행복한 순간 혹은 기념할만한 순간을 꼭 사진으로 남기는 것도 이러한 결빙의 욕망 때문이 아닐까요.

 

 

  COCOON UTOPIA...

 

 그래서 이런 생각이 들어요. 사실 우리는 자라나는 걸 싫어하는 거라고. 다시 말해 우리가 정말로 바라고 바라는 것은 태초에 내가 있었던 곳, 그 어머니의 자궁 안에서 영원히 머무는 것이라고 말이죠. 내가 태어(胎魚)가 되어 머물던 어머니의 자궁이야 말로 정말은 우리가 바라는 유토피아인 셈이죠. 아니나 다를까 이건 원래 유토피아의 원초적 모습이기도 했습니다. 옛날 고대 그리스인들은 유토피아를 '아르카디아'라고 불렀는데 그저 아무것도 하지 않고 편안히 쉴 수 있는 초원이 그들이 그렸던 유토피아의 모습이었죠. 아무것도 하지 않고 편안히 쉴 수 있는 것이야말로 따지고 보면 본질적으로 태아의 모습이죠. 그런데 이러한 유토피아의 모습은 오늘날까지도 강하게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이런 말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요. 유토피아를 바라는 것은 태아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에 다름아니라고. 

 

 

  FIRST CRACK...

 

  그렇게 인간이 가진 욕망의 본질적 모습은 어쩌면 영원히 삶을 '모라토리엄'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아마 우리가 이러한 욕망을 가지게 된 것은 우리에게 각인된 세상에 나온 그 최초의 기억이 바로 '추방'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우리는 우리의 의지로써 세상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영원히 거기에 머무를 수 있을 줄 알았지만 그러지 못한 것입니다. 뭔가가, 저 내부의 어디에선가로 부터 전해져 오는 힘에 억지로 떠밀렸거나 혹은 갑자기 천장이 열리면서 처음 보는 쏟아져 들어오는 눈부신 빛과 함께 외부의 힘에 의해 강제적으로 격리되어 세상에 나왔죠. 우리의 자발적 의지가 전혀 개입되지 않았으므로 그것은 전적인 추방이었고, 더 이상 양수의 보호를 받지 못한 우리의 연약한 피부가 처음으로 감지했던 건 차디찬 세상의 냉기였기에 또한 고통이었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완전한 유토피아로 부터 삶으로 나왔지만 그 첫 대면의 순간은 그리 좋은 기억은 아니었죠. 그리고 내내 갑작스런 추방으로 인한 두려움, 안에 있었을 때는 전혀 느껴보지 못했던 낯선 감각과 배고픔으로 인한 고통을 감내해야 했습니다. 성장이 삶의 다음 순간으로 발을 내딛는 것이라면 그렇게 우리가 받은 성장에 대한 첫 인상은 절대 좋을 리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울음은 당연했어요. 영원한 상실의 통감이었고 그만큼 사무치는 그리움의 절절한 표현으로써의 울음은...

 

 

  생각해보면 우리가 살면서 힘들면 힘들수록, 고통스러우면 고통스러울수록 더욱 막연히 떠올리게 되는 삶의 이상적인 형태는 본질적으로 태아적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아요. 그렇게 그건 사실 우리 욕망이 아니라 우리 그리움의 표현인지도 모르겠어요. 태초에 내가 있었던 그 '코쿤'에 대한 그리움. 우리가 행복 절정의 순간 멈추고 싶어 하는 것도 비로소 그 '코쿤'에 도달했다고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드디어 왔어. 이제 나를 내몰지 말아줘.' 사실은 이런 말이겠지요.

 

  성장이란 우리를 저 사르갓소로 내모는 밀물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뭐라도 붙잡고 머무르고 싶어하지만 삶은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어른이 되게 하고 가족을 가지게 하고 책임이란 짐을 두 어깨에 올려 놓습니다. 정말 바라는 것은 태아로 돌아가는 것이지만 그렇게 내가 편안히 머물 수 있는 곳에 결빙되는 것이지만 이미 그건 잠시의 꿈으로만 맛볼 수 있는 머나먼 존재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리움이 인간에게 본질적인 감정일 수 밖에 없는 까닭이 거기에 있습니다. 애초부터 우리는 그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을 가지고 있으니까요. 한 번 누렸으나 이제 다시는 누려보지 못할 것을 알기에 더욱 사무칠 수 밖에 없는 그리움을...

 

 

  ONCE AGAIN, KNOCKING ON HEAVEN'S DOOR...

 

  이응준의 소설 '느릅나무 아래 숨긴 천국'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바로 위와 같은 문구가 될 것입니다. 네, 이 소설은 저도 모르게 앞에서 주절주절 말해버린 그와 같은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엔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두 가지 중요한 공간이 나옵니다. 하나는 주인공의 과거에 관련된 '장미정원'이고 또 하나는 현재에 관련된 '가합동'입니다. 이야기는 이 두 공간을 중심으로 병행되어 전개됩니다. 그렇게 이응준은 주인공 문하가 어떻게 가합동으로 오게 되었는지를 '장미정원'을 통해 이야기하고 또 어떻게 가합동을 떠나게 되었는지 '가합동'을 통해 이야기 합니다. 이 두 공간엔 공통점이 있습니다. 둘 모두 주인공 문하에게 있어 앞서 말한 '코쿤'과 같은 공간이라는 것입니다. 거긴 태풍의 눈, 회전하는 팽이의 축과도 같은 공간입니다. 일종의 정점. '이대로 죽어도 좋아'를 외칠 수 있는 공간. 문하에게 있어 언제까지나 영원히 머무를 수 있는 곳. 즉 어머니의 자궁인 것입니다. 그렇게 그는 뿌리를 내립니다. 그를 단단히 받쳐줄 지지대가 있기에 더욱 그렇습니다. 장미정원에 있어서는 배다른 형인 인하가, 가합동에 있어서는 박학다식한 거구의 산타페가 존재합니다. 문하는 거기에 기생합니다. 그는 달이 되어 장미정원에서는 인하의 궤도를 돌고 가합동에서는 산타페의 궤도를 돕니다. 그렇게 문하는 세계를 보는 방법과 이해하는 방법을 인하를 통해 배우고 세계와 마주하는 방법을 산타페를 통해 배웁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궤도의 크기와 주기가 똑같은 건 아닙니다. 분명 차이가 있습니다. 그건 자신이 도는 항성 때문이 아니라 문하 자체가 이미 성장했기 때문입니다. 문하가 가합동으로 왔을 때 그는 최초의 균열을 겪은 태아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세상의 중심이었던 인하에 대한 상실감과 배신감으로 장미정원으로 부터 강제적으로 추방당한 것입니다. 그러고보니 창세기의 아담과도 비슷합니다. 그 때 금지된 선악과를 아담이 따먹듯 문하는 금기된 상황을 목격하고는 세상에 대한 인식의 지평이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 확 넓혀져버리니까요. 어쩌면 아담의 이야기 자체가 태아가 세상으로 나오는 과정을 은유한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그렇게 문하는 성장에 따르는 고통을 알아버렸습니다. 그 고통을 피하기 위해 찾아온 곳이 바로 '가합동'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장미정원'이 자연적 코쿤이라면 '가합동'은 인위적 코쿤입니다. 다시 한 번 장미정원을 만들고픈 그의 욕망이 다다르게 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궤도의 크기와 주기가 차이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문하에겐 이미 더 이상 그런 곳이 존재하지 않음을 압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은 하게 됩니다. 그 생각이 구현된 장소 그 곳이 바로 가합동의 '하늘밥도둑'의 공간이며 그 구현된 인물이 '산타페' '물귀신' '미저리' '수인' 입니다.

 

 

   HAUNTED...

 

  이응준은 '하늘밥도둑'을 꿈결처럼 모호한 그래서 다소 비현실적은 공간으로 묘사합니다. 거기는 내내 음악이 흐르는데 그 소리의 간섭으로 인해 공간이 가진 물리력이 자주 지워집니다. 더구나 손님도 거의 없고 도대체 산타페가 어떻게 생계를 이어가는지 정확한 설명도 없습니다. 산타페는 별 이유도 없이 문하를 아끼고 문하 역시 그 애정을 그리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가합동에서 모든 설정과 인물들은 마치 유령의 느닷없는 출몰처럼 툭툭 던져집니다. 갑자기 어디선가 '미저리'를 만나게 되고 '물귀신'을 조우하게 되며 '수인'과 밥을 먹게 됩니다. '산타페'와의 첫 대면도 별 다를 게 없습니다. 모든 게 우연입니다. 이 상황을 이응준도 분명히 인지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소설에서 운명과 우연이 뭐가 다르겠느냐고 말하죠. 가합동은 그런 공간입니다. 모든 우연이 허용되는 꿈같은 공간. 분위기는 흡사 붉은 노을이 드리워진 적막한 공동 묘지를 보는 듯 합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나오는 모든 존재들이 주인공 문하를 비롯하여 다들 유령같기 때문입니다. 따지고 보면 '미저리' '물귀신' '수인'은 툭 던져진 우연만큼이나 작위적인 존재들이라 더욱 그러합니다. 이들은 마치 햄릿 앞에 나타난 아버지 유령과도 같습니다. 문하에게 뭔가 메시지를 전할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나타난다는 거지요. 그들은 때로 침묵하고 때로 수다스럽지만 사실은 이렇게 쓰인 푯말을 목에 걸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여길 떠나라. 또 하나의 장미정원은 더 이상 없으니....

 

  그러니까 이런 말이 가능합니다. 그들 모두는 하나같이 문하의 분신들이었으며 사실은 더 이상 장미정원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안 문하의 무의식이 자신에게 그것을 알리기 위해 불러낸 유령들이라는 것을 말이죠. 때문에 '가합동'의 공간이, 특히 그 '하늘밥도둑'이 비현실성으로 넘쳐났던 것도 이해가 갑니다. 그 곳이 모두 마치 영화 '매트릭스'와 같은 문하 의식 속에나 존재하는 가상의 공간이었기 때문이죠. 그는 거기에 정말 영원히 머무르려 했습니다. 그건 가합동에서 매일 같이 지내게 되는 인물이 가진 '산타페'라는 이름 자체에서 드러납니다. '산타페'는 번역하면, HOLY FAITH. 즉 성스러운 믿음이란 뜻입니다. 산타페란 이름은 문하가 가진 욕망의 투영이었습니다. 그는 그 정도로 다시 한번 그 장미정원이 가능할 것이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습니다. 한 번 세상 밖으로 나온 태아가 다시 어머니 자궁 속으로 돌아갈 수 없듯이, 그렇게 삶이란 비탈을 굴려내려간 이상 다시 그 자리로 거슬러 올라가는 건 공과도 같은 존재인 우리들에게 불가능하니까요. 아담도 에덴으로 영원히 돌아가지 못했듯이 말이죠.

 

 인하의 무의식은 알고 있었습니다. 다시는 인하형을 되찾을 수 없다는 것을. 있는 것은 다만 작별뿐이라는 것을. 가합동의 공간과 인물은 모두 그것을 설득시키기 위해 태어난 것들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는 죽음으로, 하나는 미스터리한 영상으로 또 하나는 고백으로 문하가 왜 그 곳을 떠나야 하는지 알려주고 사라집니다. 마치 사무엘 베케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 같이 말이죠.

 

 

  LIKE GIRL IN THE RED SHOES...

  BUT, TRY TO HOLD ON...

 

  두 번의 추방, 두 번의 실패를 보여주는 이 소설은 결국 영원한 상실을 받아들이는 이야기입니다. 그저 사무치는 그리움을 안고 우리는 한 발 한 발 억지로라도 앞으로 나갈 수 밖에 없다고, 억울하지만 그럴 수 밖에 없다고 하는 이야기인 것이죠. 어쩐지 긍정이라기 보다는 체념에 가깝다구요? 네, 맞습니다. 솔직히 제가 느낀 것도 체념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어쩌겠어요. 이것이 우리의 본질인 것을. 한 번 비탈길에 들어선 이상 한없이 굴러갈 수 밖에 없는 공과 같은 존재인 것을. 삶이 우리의 선택사항은 아니잖아요. 그러니까 삶은 비극이고 고통인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저 동화 속에 나오는 분홍신을 신은 존재와 같아요. 그 이야기가 그토록 슬펐던 이유도 바로 그녀가 우리 삶의 본질적인 모습을 나타내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음악이 들리면 무조건 춤을 출 수 밖에 없는 그녀처럼 우리도 한 번 어머니의 자궁 바깥으로 나온 이상 영원히 그 잃어버린 낙원을 그리워하며 상실감과 외로움 속에서 삶이란 'SHOW'를 계속 할 수 밖에 없는 것이죠. 더구나 음악을 가릴 수 없는 그녀처럼 스스로 장르를 선택할 수도 없는 'SHOW'를 말이죠.

 

  제가 이 소설을 좋게 생각한다면 이 소설이 아무런 섣부른 희망을 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배신의 충치를 낳게 만드는 달콤한 속삭임을 들려주지 않는다는 것이죠. 이 소설은 우리 삶의 본질을 정직하게 대면하게 합니다. 우리가 체념 속에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진실 말이죠. 그저 견딤이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이라는 걸 정직하게 말해주는 소설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그게 제목인 '느릅나무 아래 숨은 천국'의 의미이지 않을까 싶기도 해요. 생각해보면 느릅나무는 땅 가까이 내려오는 가지들로 인해 왠지 축 저친 어깨를 연상시키고 그래서 얼른 하늘을 힘겹게 이고 있는 모습으로도 보이는 나무입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느낌이지만 그렇게 모습 자체로 견딤을 보여주는 존재가 바로 느릅나무가 아닐까 싶어요. 이응준은 바로 그 아래 천국이 숨어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어쩌면 이 소설을 읽고난 뒤 어쩔 수 없이 당신의 입가에 머금게 될 한숨에 대한 위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그 견딤 자체만으로도 삶은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소설에서 산타페가 문하를 위로하고 격려했듯 그렇게 우리의 어깨를 토닥이고자 함이겠죠. 작가 후기에 스스로도 이 작품을 앞으로의 문학 생애에 있어 벼리로 삼고 있는 걸 보면 그저 저만의 망상은 아닌 것 같네요. 그런 소설입니다. 어떤 이에게는 문득 자신에게 신겨있는 분홍신을 보게 만들고 또 어떤 이에게는 그 신으로 인해 아픈 발을 어루만져주고 있는 손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당신이 과연 어떤 걸 보게될지는 모르겠지만 영원한 상실과 그만큼 사무치는 그리움을 같이 안고 살아가는 동지로서 왠지 이 말만은 해드리고 싶네요.

 

 "당신의 모든 걸음에 건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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