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언 하우스
존 하트 지음, 박산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3월
평점 :
절판


 

 

 

 존 하트의 시작은 정말로 인상 깊었다. 그의 데뷔작 '라이어'는 내게 베르나르 베스톨루치의 영화 '거미의 계략'을 보았을 때와 똑같은 기분을 느끼게 하였다. 거기엔 영웅으로만 여겨왔던 아버지의 죄를 발견한 한 아들이 있었다. 아버지가 구축했고 그가 신뢰했던 세계가 죄의 대가였으며 기만에 불과했다는 걸 깨달은 그 아들은 도스토예프스키와도 같이 자신에게 주어진 원죄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선택은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이대로 묻어버리고 지금껏 해왔던 것처럼 아버지의 질서에 편안히 안주하는 것. 다른 하나는 그 위선과 기만의 베일을 벗겨 버리고 그 모든 죄악을 낱낱이 진실과 정의의 법정에 드러내는 것. 믈론 그랬을 경우 아들의 인생마저 파멸될 것은 불문가지다. '라이어'는 그렇게 선택의 기로에 선 아들의 내면을 그리고 있었다. 존 하트의 '라이어'는 읽으면 '모든 문명은 사실 '살부(殺父)'의 욕망 에서 비롯된 것이다'라는 프로이트의 말이 절로 떠오를 수 밖에 없다. 아버지를 죽이려는 욕망은 기성의 체제에 대한 불신과 관계가 있다. 그러니까 아버지란 바로 기성 체제의 상징과도 같은 것이며 그 아버지를 죽임은 대안적 세상의 새로운 도래를 염원하는 것과 같다. '라이어'는 그랬다. 거기엔 사회가 길들이지 못한 '오디이푸스 컴플렉스'가 강렬히 존재했고 결국 아들은 오디이푸스의 경로를 충실히 따른다. 그렇게 존 하트의 '라이어'는 스스로 고아가 되려는 소설이었던 것이다.

 

 '고아'가 되고픈 욕망. 존 하트의 소설엔 그런 게 존재한다. 그렇게 자기의 혈연을 지우고 뿌리를 지워 독립적 존재가 되려한다. '다운 리버'는 아예 쫓겨난 자식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물론 그것은 누명을 쓴 것이지만 아들은 스스로 죄의 신체가 되어서라도 아버지의 세계로 부터 자유로워지려고 한다.(소설의 표면적 이야기가 아닌 왜 존 하트가 굳이 성경 속 탕아의 이야기를 가져왔는가 하는 그 내밀한 동기를 유추해 본 이야기다.) 그리고 그 경계선 바깥에서 아버지의 세상을 바라보려 한다. 이는 '라이어'에서 한 발 더 나아간 것이다. '라이어'는 그래도 아버지의 질서 안에서 아버지의 죄를 반추했었다. 하지만 이제 아들은 그의 영역을 벗어나 보다 먼 발치에서, 그렇게 더욱 객관적으로 아버지의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다운 리버'에서 왜 존 하트에게 '고아'가 되려는 욕망이 존재하는지는 더욱 분명해진다. 이처럼 고아가 되면 될수록 보다 자신이 처한 현실을 더욱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아버지라는 기표 아래에서 위선과 기만으로 덧칠된 세상의 진실을 알아 낼 확률이 높아지는 것이다. 그 진실에 자신의 구원이 있기에 아들의 아버지로부터의 뒷걸음질은 더욱 거세어질 수 밖에 없고 그렇게 '고아'가 된다는 건 선택이 아니라 필연적 지향이다.

 

 아니나 다를까, 존 하트의 네 번째 작품의 제목 '아이언 하우스'는 주인공 마이클이 있었던 고아원의 이름이다. 이제 아들은 아예 처음부터 고아로 나오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난 아직 '라스트 차일드'를 보지 못했고 그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조금은 무리가 따르지만 그래도 존 하트는 작품이 이어질 때마다 보다 더 다음의 단계로 나아갔다고 말하고 싶어진다. 아버지 질서 속에 있었던 '라이어'에서 그 질서 바깥으로, 그렇게 좀 더 대등하고 객관적인 입장의 '다운 리버'로 나아갔듯이 '아이언 하우스'도 그 전작들로 부터 한 발을 더 멀리 뻗은 것이라고 말이다.

 

  그렇게 아들은 '탕아'에서 '고아'가 되었다.  하지만 '내쳐진 존재'라는 점에서 이 이야기들은 결국 비슷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렇다면 '아이언 하우스'는 '다운 리버'의 단순한 반복이 아닌가 생각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니다. 그 결정적인 전환의 지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작품이 '라스트 차일드'인데 애석하게도 아직 읽어보지 못한 탓에 정확하게 그 근거를 댈 수는 없다. 하지만 '아이언 하우스'를 통해 거꾸로 유추해 보건데 분명 거기에는 고아가 되려는 욕망이 새로이 발견해 낸 차원, 즉 '책임'이 존재하는 것 같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존 하트가 걸어온 작품 여정을 총 결산하는 것과도 같은 이 '아이언 하우스'에서 그 뻗은 발이 디디는 곳이 바로 '책임의 통감' 이기 때문이다.

 

 

 아들은 아버지로 부터 자유로워지는 것만으로는 안된다. 그의 죄악 때문에 자유로워지려 했다면 더더욱 그렇다. ''살부(殺父)' 정당화 되는 건 오로지 그 자신이 좋은 아버지가 되었을 때 뿐이다. 그 자신이 새로운 구원적 질서를 형성하지 못하면 '살부'라는 또 하나의 죄악을 더 하는 것 밖에는 되지 못한다. 오디이푸스가 왕인 까닭이 바로 그것이다. 오디이푸스 컴플렉스 자체가 기존의 질서와 새로운 질서 사이의 대립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즉 고아는 스스로 좋은 아버지가 되었을 때라야 비로소 진정한 구원을 받는다. 그런 그에게 있어 좋은 아버지가 된다는 것은 책임을 떠 안는 것 밖에는 없다. 왜냐하면 그 자신을 달아나게 만들었던 아버지 죄악의 진정한 정체가 바로 '방기(妨棄)' 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언제 나쁜 아버지가 되는가? 그것은 자식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고 내버려둘 때이다. 아버지는 언제 죄인이 되는가? 그것은 사회에 대한 책임을 다하지 않고 무시해버릴 때이다. 물론 그 내버림과 무시의 이유는 단 하나다. 그건 아버지가 이기적이기 때문이다. 모든 방기는 아버지가 가진 이기적 욕망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그의 질서가 위선과 기만의 베일로 둘러싼 죄악의 세계가 되는 것도 겉으로는 타인을 위하는 척 하지만 사실은 오로지 이기적 욕망만이 전부인 세계이기 때문이다. 아들은 그와 같은 이기적 악취에 질려 달아난 것이다. 자기 자신 밖에 모르는 그 비정함을 혐오해 아예 핏줄을 부정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그가 무엇보다 해야 하는 건 바로 '책임'을 떠 맡는 것 밖에는 없다. 이기적 아버지가 아닌 이타적 아버지가 되는 것. 그렇게 '방기(妨棄)'와 책임은 대립된다.

 

  사실은 이 대립이 바로 '아이언 하우스'의 핵심이다. 이 소설엔 많은 '아버지의 기표'를 가진 존재들이 나오는데 모두 이 대립선을 중심으로 좋은 아버지와 나쁜 아버지로 나뉘어진다. 다시 말해 주인공 마이클은 자신이 참조 가능한 많은 아버지를 만나는 셈이며 결론적으로 이 작품은 기꺼이 고아가 되어버린 아들이 좋은 아버지가 되어가는 과정의 이야기인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 '아이언 하우스'는 '라이어' 때 부터 '고아가 되려는 욕망'을 주제로 내내 끌어왔던 작품 세계를 일단락 시키는 작품으로 보인다. 그렇게 이 작품은 '라이어'에서 부터 '아이언 하우스'까지 존 하트가 걸어왔던 여정이 모두 집대성되어 있다고 보아도 좋다. 시작은 그야말로 '라이어'다. 뉴욕의 거대 범죄 조직의 보스 아래서 킬러로 일하던 마이클은 우연히 엘레나라는 여인을 만나 사랑에 새로이 눈뜨게 되고 그녀가 아이까지 가지는 바람에 이제 곧 아버지가 될 마이클은 더 이상 아들에게 부끄러운 아버지가 되지 않기 위해 그 때까지 친아버지처럼 모시고 따르던 조직의 보스로 부터 빠져나올 결심을 한다. 그렇게 시작은 '라이어'와 똑같이 편입된 아버지의 질서로 부터 빠져나오려는 이야기인 것이다. 물론 그건 '라이어'만큼이나 쉽지가 않다. 그리고 정작 문제 또한 보스에게 있지 않다. 유일한 아버지인 보스는 그 존재 자체를 버거워하고 있으며 오히려 마이클에게 죽여달라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무기력하고 약한 존재일 뿐이다. 그런데 이 무기력의 아버지는 그대로 '다운 리버'의 아버지와도 같다. 그 역시 자기가 중심인 세계의 방관자이다. 약하고 무기력하다. 그러니 더 이상 세계는 가동되지 않고 스스로 그 하중을 견디지 못해 내부로 부터 허물어진다. 자멸은 무기력한 아버지의 소망이다. 더 이상 다른 걸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이언 하우스'도, '다운 리버'도 그렇다. 모두 똑같다. 그런데 이러한 아버지 세계의 위축은 아들이 진실에 눈뜨고 성장한 탓이기도 하다. 그건 정확히 우리의 성장 경험과도 일치한다. 자랄수록 아버지가 점점 왜소해진다는 것은 자식이라면 누구나 다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니던가. 바로 그런 것이다. 그대로 조용히 내파된다면 그것도 그런대로 괜찮을 것이다. 물론 그렇게 되지 않는다. '트러블 메이커'들이 있다. '고아'가 되지 못한 자들. 아버지의 질서 안에서 편안히 거주해 왔던 자들. 아버지가 가진 죄악의 진실을 보지 못했기에 여전히 아버지와 닮은 존재가 되는 것이 유일한 소망인 아들들. 바로 그 아들들이 '고아'인 마이클을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다. 그 아들들에게 '고아'인 마이클은 스스로 아버지가 되지 못하게 만드는 지울 수 없는 영원한 얼룩이다. 죄악의 진실을 알고 있는 마이클이 그들에게 아버지의 죄를 누누히 상기시키기 때문이다. 마이클이 있는 한 아들들은 제대로 된 아버지가 될 수 없다. 아버지다운 아버지로서 만족하고 있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마이클을 '고아'의 자리에서 '아들'의 자리로 오게끔 유혹한다. 아버지의 질서로 다시금 편입시켜 그 얼룩을 지우려 한다. 그러므로 아들들의 아버지가 되려는 욕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고아'인 마이클이 제거되어야 하는 것은 필연이다. '아이언 하우스'에 담긴 이야기의 한 축에서 벌어지는 갈등의 원형은 바로 이것이다. 여기에 타협의 여지는 없다. 왜냐하면 이건 존재들끼리의 대립이 아니라 오디이푸스 컴플렉스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세계들의 대립이기 때문이다. 책임의 세계와 방기의 세계. 그 대립에 회색지대란 없다. 아들들이 마이클에 대해 가지는 감정이 표면상으로는 분노이지만 사실은 질투인 이유도 그 때문이다. 질투란 감정은 도저히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을 때 들게 되는 감정이다. 그건 우리 절대적 무력함의 고백에 다름아닌 것이다. 즉 질투란 타협의 가능성이 애초에 봉쇄되었을 경우에 비로소 하게 된다. 그러므로 아들들이 마이클을 질투하는 건 당연한 것이다. 상호 타협 가능한 중간 지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있으면 어떻게 되는가? 더 나아가 스스로 억지로 만들려고 한다면? 그럼 정신분열증이 된다. 다중 인격의 존재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스포일러가 되기에 그 정체에 대해선 침묵하지만 '아이언 하우스'에서 그렇게 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그러므로 이 축은 마이클에게 오로지 원심력으로만 작용한다. 갈등이 깊어지면 깊어진만큼 그는 더욱 기존의 아버지 질서에서 멀리 달아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달아남 자체로 되는 것은 없다. 앞서 말한 대로 그가 정말 바라는 구원을 얻으려면 진정한 책임을 지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때문에 존 하트는 마이클에게 동생을 선사하는 것이다. '아이언 하우스'에 같이 있었지만 지금은 헤어진 동생 줄리앙은 마이클에게 그 '달아남'이 진정한 구원적 상태에 이르도록 만드는 사다리와도 같은 존재인 것이다. 소설은 그렇게 내내 방기와 책임의 대립 이쪽 저쪽을 왔다갔다 한다. 여기엔 다양한 인물들이 나오지만 모두 그 한쪽 자리를 하나씩 차지하고 있다. 동생이 있는 아비게일의 이웃에 사는 카라벨 고트로는 딸을 방기한다. 딸은 자기 엄마로부터 가해지는 고통을 참을 수 없어 집을 뛰쳐 나와 '마이클'처럼 스스로 고아가 되려 한다. 이렇게 소설엔 방기하는 부모와 거기에 대항해 스스로 고아가 되려는 존재들이 군집을 이룬다. 이로써 존 하트는 마이클뿐 아니라 그 다른 존재들을 통하여 보다 분명히 보여준다. 책임을 떠 맡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대안이요 구원이라는 것을 말이다. 존 하트는 아예 마이클로 하여금 동생 줄리앙이 당했던 학대를 방기하여 동생을 더욱 큰 고통에 빠뜨렸던 인물마저 누군가를 책임지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용서하게 함으로써 이것을 더욱 확증한다. 소설 내내 한 존재를 지키는 이야기가 지속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책임을 맡는 것. 하나의 존재에 대해 진정한 책임을 느끼고 거기에 충실하는 것. 그 외에 다른 것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이 소설 '아이언 하우스'에서는 진정한 책임 끝에 나오는 방어야 말로 동시에 구원의 '구축'인 셈이다. 새로운 아버지의 구축인 것이요 그가 중심이 된 진정한 대안적 세계의 구축인 셈이다. 이 소설의 결말은 바로 이 말을 문자 그대로 형상화한 것과 같다.

 

  이러한 구원의 분명한 제시는 이 소설이 지금까지 존 하트가 해왔던 것의 완결이라는 것을 더욱 암시한다. 말하자면 이 작품은 지금까지 그가 천착해 온 물음에 대한 일종의 최종 해답인 셈이다.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스스로 기꺼이 '고아'가 되려고 했던 아들은 여기에 이르러 그 진정한 해답을 찾은 것이다. 그건 바로 타인의 존재를 떠안는 것, 절대로 내 이기적 욕망으로 타인을 나몰라라 하거나 버려두지 않는 것, 그렇게 바로 책임이다. 그런데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에 따르면 이 책임이야 말로 자유의 진정한 모습이다. 책임은 무엇보다 그 원인을 묻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교환 관계가 아니다. 있는 것은 오로지 전적인 내어줌 밖에 없다. 그래서 책임은 오로지 당위적 차원에서만 존재한다. 그건 내가 그러한 존재이기 때문에 무조건 해야만 하는 그런 것이다. 아버지이기 때문에 무조건 자식을 책임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떤 원인에서 비롯된, 또는 어떤 이유로 떠 맡은 책임이 아니다. 진정한 책임이란 그런 것이다. 따라서 거기에 있는 건, 오로지 책임을 떠안을 것인가 아니면 그냥 방기할 것인가를 두고 선택할 결단 밖에는 없다. 그런데 방기는 오로지 나의 이기적 욕망을 따른 결과로 결국 거기엔 내 동물적 욕구든 혹은 이해타산이든 아무튼 원인이나 이해가 개입되게 되니, 난 그것에 종속되어 선택한 것일뿐 온전히 자유로 행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그 어떠한 원인이나 이유도 개입되지 않은, 순수한 당위로서의 책임을 떠안는 것이야 말로 자유인 것이다. 그것은 온전히 내 순수 의지로 결단하고 떠 맡은 것이기 때문이다. 전적인 나의 자발적 의지의 결과인 것이다.  그래서 칸트는 책임이야 말로 진정한 자유의 모습이며 그로인해 개인은 더욱 진정한 주체가 된다고 말했다. 결국 존 하트의 '아이언 하우스'는 이러한 칸트의 말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가 왜 책임을 맡는다는 것이 진정한 아버지로 거듭나는 길이라 했는 지, 그 명확한 이유에 대해서는 칸트에게서도 똑같이 들을 수 있으니 존 하트가 찾았고 그리고 여기서 내어놓는 해답이 어불성설인 것이 결코 아님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리고 존 하트에게 있어 또 하나의 탁월한 성취라 할 수 있는 이 작품을 우리가 읽어야 할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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