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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톤전집 1 - 소크라테스의 변론 / 크리톤 / 파이돈 / 향연, 2017년 개정판 ㅣ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플라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7년 4월
평점 :
바야흐로 고전의 시대다. 여기저기서 고전을 읽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으며 이제는 인간 처세의 방법까지 고전을 통해 배우고 있다. 고전의 중요성은 시대를 막론하고 부침이 없었으나 그 요청에 있어서는 시대의 격량을 따라 이리저리 부침해 왔던 게 사실이다. 단순히 말해, 살만할 때 고전은 나른한 귀족을 위한 관현악과도 같다. 너무도 지루해 단지 쉽게 잠들기 위해 필요할 뿐인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존재라는 것이다. 여기저기 가지에 널린 과실을 따느라 바쁜 인부에게 호메로스의 서사시는 귀찮은 소음일 뿐이다. 현실적으로 아무 소용이 없어 보이는 뜬구름 잡는 소리로만 이루어져 있으니까.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진 그는 호메로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여보쇼! 정 내게 도움이 되고 싶다면 그만 닥치고 기다란 막대기나 가져오란 말이오!"
그러므로 사람들이 고전을 찾는다는 것, 그것도 열화와 같이 찾는다는 것은 그만큼 살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다는 반영인지도 모른다. 대부분 사람들은 고전이 어떤 지혜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마치 지도처럼 왜 혹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미로에 빠진 것처럼 의문투성이가 되어버린 삶에서 빠져나갈 출구를 가르쳐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오래 살아 남았는 걸 보면 뭔가 있지 않겠어?' 그런 생각으로 문제집 푸는 아이가 모범 답안을 찾듯 고전을 뒤적인다. 사실 고전 열풍은 그런 믿음들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하다. 사람들은 고전을 읽으라고 부추기는 책들을 통해 고전의 중요성을 새로이 체득하는 게 아니라 익히 자기가 생각하고 있었던 고전의 의미를 다시금 확인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것은 금연을 결심한 사람이 금연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비디오를 보면서 다시금 결의를 다지는 것이나 같은 것이다. 즉 금연을 결심하긴 했는데 잘 실천은 하지 않는 스스로를 채찍질 하기 위하여 비디오를 보듯이 고전에 대한 책들 역시도 같은 이유로 찾는다는 것이다. 물론 그 책들이 더 쉽게 길잡이 역할을 해주고 몰랐던 고전의 의미를 되새겨준다는 걸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근본적인 측면에서 고전 안내서를 찾는 것은 분명 고전을 읽겠다는 다짐을 보다 의지를 가지고 실천할 수 있도록 촉매제로서의 역할을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고전의 인플레이션은 시대의 디플레이션과 분명 관계가 있다.
어쨌거나 상황은 이렇다. 고전 때문에 이런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니 고전을 탓할 수는 없다. 우리에게 남겨진 여지는 그래서 단 하나다.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이것이다. 고전은 어쨌든 먼 과거의 산물이다. 어떤 것은 수천년도 된다. 거대한 역사의 유물도 그 정도 세월이면 풍화되어 사라지는데 하물며 한 권의 책에 담긴 뜻이 그 모습 그대로 있을 리 없다. 그러니 우리가 서 있는 수천년 세월의 끝자락에서 원 뜻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건 그간에 있었던 인류 역사의 변화를 그대로 통째로 무시해버리라는 것과 같다.
그러니 이런 말이 있는 것이다. 고전은 늘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는 말이 있다. 새 부대에 담아야 하는 게 새 포도주만은 아닌 것이다. 고전의 해석 또한 마찬가지다. 오늘 이 시간에 새로운 해석을 통하여 그들의 말이 살아있지 못하면 고전은 그 평가가 아무리 높고 화려해도 그저 묘비명에 새겨진 좋은 비문일 뿐이며 그 아래 안장된 죽은 말들의 주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더우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고전이 그 생명을 지속시켜나갈 수 있는 것도 동시대에 알맞게 그 의미들이 새로이 채워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그렇지 않았다면 옆구리가 터져버려 나날이 속에 있는 밀짚을 쏟아내고 있는 허수아비처럼 진작에 먼 기억 속의 존재가 되어 산산이 흩어져 버렸을 것이다. 고전이 되지 못한 먼 옛날의 무수한 작품들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다시말해 고전이 고전으로 살아남는 이유는 작품 자체가 원래부터 그럴 정도로 탁월해서라기 보다는 각 시대가 새롭게 해석해서 그 의미를 채울 수 있는 그 여지가 많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즉 고전을 만드는 것은 과거가 아니라 바로 지금의 현대다. 당시의 시대적 요청에 얼마나 적절히 잘 부합할 수 있느냐가 고전의 수명을 장단을 결정하는 척도인 것이다. 그러므로 오래도록 살아남은 고전은 시대에 따라 가지각색으로 자신의 색깔을 바꿔 왔다고 볼 수 있으므로 그야말로 카멜레온이 아닐까 싶다. 얼마나 새로운 해석으로 열 수 있는 수로가 많았기에 시대마다 지역마다 적재적소로 스스로를 변형하면서 그 오랜 세월을 견뎌 오늘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정작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어쩐지 숙연하게 된다. 이번에 나온 천명희 선생님께서 번역하신 '소크라테스 변론/크리톤/파이돈/향연'이 바로 거기에 대한 대표적인 존재가 아닐까 생각된다. 물론 이렇게 말을 하려면 먼저 한 가지를 증명해야 한다. 즉 과연 이 작품들이 지금 시대가 요청하는 의문에 대해 제대로 응답할 수 있는가 말이다.
일단 여기에 실린 내용부터 간단하게나마 소개하고 나아가고 싶다. 앞서 말한대로 여기엔 네 편의 작품이 실려 있다.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이렇게 앞의 세 작품은 소크라테스의가 혹세무민으로 아테나이의 법정에 선 이후부터 독배를 마시고 죽기까지 시간 순으로 이어지는 작품이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소크라테스에 관한 일화들은 여기에 다 나온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소크라테스가 진리를 이끌어내는 방법인 '대화법'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으며 '크리톤'에서는 '너 자신을 알라'는 말과 함께 가장 유명한 소크라테스의 말인 '악법도 법이다'를 과연 어떤 연유로 말한 것인지 그의 육성으로 들을 수 있다. 또한 '파이돈'에서는 기독교에 강한 영향을 끼친 '혼 불멸론'과 배움이란 전생에 알고 있었다는 것을 상기하는 것이라는 '상기론' 그리고 죽음이란 끝이 아니라 새로이 시작되는 고상한 모험이라는 등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그럼 남아있는 나머지 하나인 '향연'에서는 무엇을 들을 수 있을까? 여기에는 소크라테스의 '사랑관'을 들을 수 있다. 우리가 흔히 쓰곤하는 에로스니 플라토닉이니 하는 말은 다 여기서 나왔다. 사랑이 오직 그 육체를 탐하는 에로스일 뿐이라는 사람들의 생각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자신 역시도 그리 생각했지만 예언녀 디오티마를 만나고 나서 바뀌었다며 순수한 정신적 사랑인 플라토닉이야말로 궁극의 사랑이라고 이야기한다.
대체로 이런 내용이다. 일단 이런 고전을 말했을 경우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의문에 대해 대답하자면 절대 어렵지 않다. 소크라테스가 주로 하는 방법인 개인간의 대화를 통한 '산파술'답게 오로지 대화로만 이루어진('소크라테스의 변론'만은 법정에서 소크라테스가 스스로를 변호하는 말이므로 독백으로 채워져있지만) 이 책은 원전 번역이지만 천병희 선생님이 너무도 대화체를 잘 살려 번역하셔서 마치 내가 그 현장에 있는 듯 생생한 느낌마저 가질 수 있어서 더욱 몰입해서 읽을 수 있다. 언젠가 한 번 이름만 들었던 소크라테스의 진면목을 확인해 보리라 마음먹었던 분들에게는 이 책이야 말로 장본인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제 책 소개는 이 정도로 하고 애초에 내가 던졌던 전제. 그러니까 이 책이 지금 시점에 있어 어떤 동시대적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로 돌아가보자. 즉 지금 시대에 가장 디플레이션 되는 것과 관련하여 그 문제에 대해 과연 이 책이 제대로 된 대답을 들려줄 수 있을까를 보는 것이다. 지금 우리시대에 있어 가장 가치가 떨어지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건 지난 5년간 우리를 가장 스트레스 받게 했던 것을 떠올려보면 바로 답이 나온다. 그건 정치다. '80년대로 회귀하고 있다'라는 말이 널리 회자되었듯이 민주주의의 후퇴. 그것이 가장 사람들을 화나게 만들고 기필코 바꿔야 한다는 생각을 심어주게 된 계기였다. 공기도 없어져봐야 그 소중함을 알듯이 정의나 민주주의도 잃어봐야 그 가치를 안다. 우리가 마이클 센델의 책을 통해 새삼 '정의'라는 가치를 생각했던 건, 불공정이 판을 치고 있을 때였다. 그렇다면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보이는 현상이 질문을 낳는 법이다. 그렇게 민간인 사찰이 이루어지고 언론과 표현의 자유가 말할 수 없이 억압된 상황은 사람들로 하여금 민주주의라는 가치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럴 때 우리는 고전을 찾는다. 동화를 보면 지혜로운 대답을 들려주는 존재는 언제나 아주 오래된 나무나 동물들이다. 그렇게 오래도록 살아남은 것은 왠지 현명해 보인다. 아마도 보편적으로는 인간의 수명을 초월해 존재하는 것이기에 인간이 경험하지 못한 것을 경험한 존재라 보고 그런 권위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현명함이 얼마나 많은 것을 볼 수 있는가 하는 시야의 넓이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인류의 아주 오래된 생각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바로 거기에 제대로 된 해답을 줄 수 있을 때 고전은 죽은 유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육체가 된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은 거기에 좋은 대답을 들려줄 수 있을까?
물론이다. 내가 이 책을 보고 다시금 놀랐던 것은 내용이 아니었다. 그건 소크라테스의 태도였다. '대화법'이라는 말을 많이 듣긴 했으나 그 진면목은 바로 이 책을 통해서야 비로소 느끼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는 대화를 이끌어가는 이 소크라테스의 태도에 오늘의 민주주의에 대해 많은 것들을 생각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와 관련하여 여기서 드러나는 소크라테스의 태도가 보여주는 특징을 말해보자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눈높이를 맞춘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아무리 무지한 청년과 대화를 해도 절대 자신의 기준에 맞추는 법이 없다. 모르면 모르는만큼 그 수준에 맞춰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그 나아감의 보폭을 결정하는 것 역시도 언제나 소크라테스에게 있지 않다. 그는 철저하게 듣는 상대가 나아갈 수 있을만큼 대화를 진행시킨다. 그 청년은 지혜나 언변에 있어 분명 소크라테스의 약자다. 이를테면 진중권 앞에 선 초등학생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결코 얕잡아 보지 않는다. 그러기보다는 자신을 스스로 초등학생으로 맞춰 이야기를 진행시킨다. 이러면서도 그는 설득하지 않는다. 이것이 중요하다. 소크라테스는 그 어떤 진리도 주장하지 않는다. 질문하고 상대방이 먼저 대답함을 통해 언제나 납득 시킨다. 설득과 납득. 비록 한 글자 차이지만 이것이 민주주의적 태도에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단순하게 말하면 설득은 진리는 오직 말하는 자에 있고 듣는자는 오직 굴복시켜야 할 대상으로 만든다. 그는 듣는 귀만 있지 말할 입은 없는 존재로 만드는 게 '설득'이다. 하지만 '납득'은 그렇지 않다. 어디까지나 상대방에 맞춰 그의 헤아림을 기초로 모두의 진리를 만들어 가는 것이다. 듣는 귀뿐만 아니라 말할 입까지 있는 존재로 만드는 것. 그것이 바로 납득인 것이다. 지난 5년을 생각해보자. 미국 쇠고기, 4대강, 인천공항 민영화 그리고 지금의 철도 민영화까지 정부가 내내 해온 것은 설득이었다. 아무리 여론이 반대해도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설득은 포기가 없다. 진리가 오직 자신들에게만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끝까지 상대방이 설득되지 않으면 쉽게 단절이 일어난다. 그렇게 듣는 타자는 버려지고 '강행'만이 남는 것이다. '답답하다'는 것은 설득의 절기요 '오해'는 설득의 절세 신공이다. 우리 역시도 정부로 부터 이해하지 못해서 답답하다 혹은 오해한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들었던가? 그들은 말하려는 입은 있어도 들으려는 귀가 없다. 그들이 대화하는 것은 다른 견해를 듣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들의 생각을, 그들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한 위장된 통로로 대화를 이용하는 것일 뿐이다. 듣는 타자를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 거수기로 만드는 것.다소 과장해서 말하자면 설득의 근본 모습은 이것이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무엇이라 이야기 했던가? 제대로 된 증거자료를 가지고 납득시키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게 소크라테스가 보여주는 대화의 태도에서 무엇보다 '납득'이 민주주의의 기본 태도라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는 것이다.
또 하나가 있다. 그건 '합의의 중시' 이다. 먼저 합의된 사항을 존중하고 언제나 그것을 바탕으로 대화를 이어간다는 게 또 하나의 소크라테스 대화의 원칙이다. 이 책에서 가장 많이 반복되는 말이 바로 '우리가 합의한 대로'라는 말이다. 그렇게 소크라테스는 상호가 인정한 사항을 중심으로 그 안에서 상호 납득 가능한 진리를 찾아간다. 솔직히 놀라웠다. 소크라테스는 상대방이 오류를 저질렀을 때조차 요즘 '100분 토론'에서 흔히 보듯이 '에이~ 그게 아니죠.'하는 식으로 통박하지 않았다. 그러기 보다는 언제나 '당신과 내가 합의한 것에 따르면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아니지 않나?'하는 식으로 상대방에게 먼저 자신이 시인한 사실을 상기시키는 것으로 스스로 그 오류를 발견하도록 도왔다. 사실 '납득' 역시도 바로 그와 같은 과정으로 일어나는 것이었다. 소크라테스의 철저한 '우리가 합의한 바에 따르자면'은 상대방으로 하여금 그 자신이 옳다고 여긴 것을 떠올리게 하였으며 스스로 '생각해 보니 그걸 시인했다면 지금 이 말도 시인할 수 밖에 없겠군' 하는 생각으로 소크라테스의 견해를 납득했던 것이다. 이러한 '합의의 중시'가 기본적인 민주적 태도라는 걸 굳이 '설득과 납득'처럼 지난 5년의 경험을 들어 달리 설명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그저 지금 우리 현실에서 '합의'나 '약속'이라는 단어가 얼마나 공허해졌는가만 떠올려도(대통령조차 선거 공약은 홍보의 일환일 뿐이라고 말하는 세상이 아니던가?) 거기에 대한 설명은 다 되지 않을까 싶다.
이상으로 내가 내세웠던 고전의 전제, 즉 지금 현실의 시대적 요청에 제대로 응답할 수 있어야 진정한 고전이라 할 수 있다에 대해 나름 응답을 해 보았는데 제대로 대답이 된 것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래도 이 소크라테스의 변론을 비롯한 네 작품이 고전의 가치를 충분히 가지고 있음은 설명되지 않았나 싶다. 어떤 이가 내게 말하길 고전은 운명적으로 결정되는 것이라 한다. 그냥 세상에 툭 내던져지는 고전은 없다는 것이다. 운명의 시계가 딱 맞아 떨어져서 시대가 자신을 요구할 때 나와야 고전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이야말로 운명의 시계가 딱 맞아 떨어졌을 때 나오지 않았는가 싶다. 점점 후퇴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우려로 진정한 민주주의적 가치를 그 어느 때보다 많이 생각해보게 되는 이 때, 이 책은 그 가장 기본적인 민주적 태도의 모습을 너무도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으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