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중석 스릴러 클럽 32
조힐 지음, 박현주 옮김 / 비채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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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오옷! 굉장하다! 이 책의 초반부터 저는 이미 이런 감탄사를 내뱉고 있었습니다. 사실 조 힐의 작품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그가 그 유명한, 그 누구도 미국 장르 소설계의 거목임을 거부하지 못하는 스티븐 킹의 아들이라는 건 알았지만 솔직히 아버지 덕분에 유명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아예 없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솔직히 이 작품을 시작할 때만 해도 잘 한 선택일까 반신반의 하긴 했었죠. 그런데 왠 걸, 명백히 카프카의 단편 '변신'을 패러디한 것으로 보이는 도입부 부터 어, 이거 참신한데 중얼거리게 만들더니 '변신'에서 주인공 그레고리 잠자가 벌레로 변했듯이 주인공 머리에 정말 악마처럼 뿔이 돋아나고 그 때문에 여자친구가 완전히 직설적으로 자신의 내밀한 속마음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장면에서 이미 저는 오래만에 물건 하나 만났다는 생각으로 빠져들고 있었습니다. 스티븐 킹의 아들이라서 그런지 정말 전성기 때 스티븐 킹 소설을 읽는 듯 하더군요. 악마라는 명백한 허구의 사실을 일상적인 일들로 자연스레 여기게끔 설득력있게 묘사하는 것도 그렇고 과거와 현재를 오고가며 현재 벌어지는 이야기의 갈등이 어떻게 비롯되었는지와 주인공이 알지 못했던 비밀들을 하나 둘 풀어놓아 흥미와 긴장을 끝까지 지속시키는 것도 비슷했습니다. 특히나 가장 많이 생각났던 건, 스티븐 킹의 '캐슬록의 비밀' 이었네요.


 아무튼 이 작품으로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조 힐은 분명 아버지로 부터 우등 유전자를 물려받은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말이죠. 물론 외모가 우등 유전자라는 뜻은 아니죠.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솜씨, 인간이 가진 상식을 살짝 비트는 것만 가지고도 풍부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상상력, 고루한 소재도 새로운 느낌이 날 수 있도록 빚어내는 능력. 그런 것에 있어서 UNCANNY 할 정도로 잘 물려받았다는 것입니다. 조 힐의 이번 작품 '뿔'은 그것을 입증하는 아주 좋은 증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뿔(THE HORNS)'은 어느 날 갑자기 자고 일어났더니 머리에 두 개의 뿔이 나버린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거울을 보면 영락없이 악마 같지만 사실 처음엔 그저 악성 종양이겠거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뿔이 생기자마자 이상한 일들이 일어납니다. 자신의 여자 친구 글레나를 비롯해 만나는 사람마다 그가 아무리 처음 보는 사람이라 해도 자신의 속마음을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는 것입니다. 그것도 평소에는 사람들에게 내보일 수 없는 아주 은밀한 어두운 욕망까지 다 말이죠. 그에겐 그 누구도 거짓말하지 않습니다. 마치 고해성사를 받는 신부 앞에 선 것 처럼 오로지 진실만을 이야기합니다. 그런데 그 모든 욕망이 다 추합니다. 아름다운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모두가 다 남이야 어찌되든 상관없이 자기만 잘되고 편하고 보려는 이기적인 욕망들로 가득합니다. 그래서 주인공 이그나티우스 마틴 페리시는 알게됩니다. 자기가 지금껏 살고 있는 세상이 바로 지옥에 다름 아니었다는 것을... 아니나 다를까 그렇게 이그가 세상의 진실을 알아가는 첫번째 장의 제목 역시도 '지옥'입니다.


 그런데 안 그래도 이그에게는 세상이 지옥이었습니다. 몇 년 전 이 세상에서 유일한 사랑이었던 여자 친구가 처참하게 살해당했고 그 누명을 자기가 뒤집어썼기 때문입니다. 집안이 그대로 꽤나 잘나가는지라 어떻게든 형벌을 받는 건 피했지만 세상의 시선은 여전히 따갑습니다. 사랑을 그렇게 잃어버린 상처만 해도 스스로에게 버거운데 거기다 세간의 시선마저 의혹 일변도인지라 견디지 못했던 그는 스스로 나락의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는 그래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그가 그녀를 죽이지 않았지만 그녀가 그렇게 죽도록 내버려둔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그의 죄책감이 세상을 지옥으로 여기게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진실은 세상은 깨끗한데 자기만 더러운 죄를 짊어지고 살아간다는 자각에서 느끼는 지옥이었습니다. 그런데 뿔이 돋아난 뒤로 그게 완전 뒤집어 집니다. 세상이 선이고 자기가 악한게 아니라 알고보니 세상 자체가 악이고 오히려 선한 건 자기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뿔'은 그런 '전복(SURVERSION)'의 소설입니다.



 


 

 


 

 그러니까 흔히 씨름판에서 보듯 호쾌한 뒤집기와도 같은 작품입니다. 이 소설엔 그런 전복성들이 넘쳐납니다. 지금 말한 주인공 이그의 세상에 대한 인식의 전복은 그들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다른 또 하나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악마'라는 존재의 전복입니다. 앞서 우리의 상식을 약간 비트는 것만으로도 풍부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상상력이란 얘기를 했었죠. 그것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조 힐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악마의 모습과 특성을 충실하게 재현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이그 앞에 서면 자신의 어두운 욕망을 숨김없이 이야기 하는 것, 그들의 욕망이 통제를 받지 않고 활짝 피어나도록 돕는 것, 그리고 뱀들이 따라오거나 목소리로 유혹하는 것. 이런 건 모두 우리가 익히 잘 알고 있는 악마의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들이 유발하는 효과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전혀 다릅니다. 지금까지 악마가 가진 그러한 특성들은 오로지 대상의 파괴를 위해 쓰였습니다. 롤링스톤즈의 '악마를 위한 동정(SYMPATHY FOR THE DEVIL)'이라는 노래 가사에서도 잘 드러나듯 사람들의 영혼과 믿음을 훔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소설에서 그러한 악마의 특성들은 세상이 감춘 비밀을 드러내고 있는 그대로의 진실된 모습을 드러내게 합니다. 아니 세상 뿐만이 아니라 이그를 파괴시켜버렸던 저 과거의 비극에 숨겨진 진실마저 알게 합니다. 악마의 계교는 어디까지나 거짓에 거짓을 더하는 것이었습니다만 이 소설에서만은 다릅니다. 여기서 악마가 가진 모든 계교는 오로지 진실에 진실을 더하는 것 뿐입니다. 바로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조 힐은 주인공 이그가 점점 악마가 되어가는 과정을 묘하게도 성자가 되어가는 과정과 비슷하게 그립니다. 특히나 이그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따라오는 뱀의 무리가 인상적인데요. 사실 그 뱀들의 존재는 소설에서 정작 사족에 불과합니다. 이그가 보여주는 능력중 그것만이 아무런 맥락도 효과도 가지지 못합니다. 뱀은 그저 이그를 따라올 뿐입니다. 그 뱀들이 모이고 모여서 뭔가 하는 건 없습니다. 다만 이그가 점점 악마로 완성되어간다는 것을 나타내주는 것 말고는 말이죠. 바로 여기서 우리는 조 힐이 왜 아무 의미도 없는 뱀 장면을 구태여 반복적으로 묘사하는 것인가 그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독자인 우리들에게 뱀이 하나의 신도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함이죠. 점점 많은 뱀이 무리지어 이그를 따라오는 것이 그의 악마성이 완성되는 것을 뜻하듯, 예수가 나오는 4복음서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구름처럼 따라다니는 신도의 수가 그의 성인됨을 완성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니까요. 네, 그 뱀은 이그의 그러한 성인됨을 우회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쓰인 것입니다. 그는 악마이지만 조 힐의 소설에서는 성인(SAINT)입니다. 그건 왜 일까요? 이그의 뿔이 적나라하게 드러내었듯이 세상은 오로지 자기만 위하는 이기적 욕망들로 넘쳐나는 지옥인데 오직 악마인 이그만은 자신의 욕망을 억누르고 타자를 위해 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가장 이기적인 존재인 악마가 이 소설에서는 가장 이타적인 존재인 것이죠.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이 소설이 가진 가장 커다란 전복성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그의 애마 그렘린이 불에 탄 채 절벽에서 떨어지고 그로 부터 탈출하는 이그의 이야기는 이그가 악마로써 진정한 각성을 하게 되는 계기인 것 같더군요. 해서 그려봤어요 하하^ ^;



  이건 그냥 헛소리가 아닙니다. 조 힐이 작정하고 그것을 지향했다는 것은 주인공의 이름에서 부터 단적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주인공 이름을 풀 네임으로 다시 한 번 말해볼까요? 그건 '이그나티우스 마틴 페리시' 입니다. 영특하게도 조 힐은 이 이름을 소설의 첫 시작으로 삼아 독자의 관심을 유도합니다. 그건 왜 일까요? 단적으로 바로 이 이름이 이 소설 '뿔'이 말하려는 모든 것이기 때문입니다. 

 


 소설의 시작은 카프카의 '변신'에 대한 패러디였습니다만 그 여정은 초대 교회 한 사도의 여정에 대한 오마쥬입니다. 그 사도의 이름이 바로 '이그나티우스' 입니다. 뭐야! 이름만 같은 거 아냐? 하실수도 있는데 저도 처음엔 그런 줄 알았는데 뒤에 나오는 이 '마틴'이란 이름 때문에 더욱 확증하게 되었습니다.       다름 아니라 이 이그나티우스는 로마로 압송되어 사자 먹이가 되어 순교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것을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로마 황제 트라야누스 시절, 그의 핍박에도 굴하지 않고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지키다가 결국 황제의 명령으로 안디옥에서 로마로 끌려가 순교당하기 까지, 그 기록이 남아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기록의 제목이 바로 이그나티우스의 순교, 즉 'Martydom of Ignatius' 입니다.


 이것으로 확실해지지 않을까요? 주인공 이그의 저 마틴이란 이름이 바로 '순교'를 뜻하는 단어 'MARTYDOM'에서 왔다는 것이 말이죠. 물론 이름의 마지막 부분인 '페리시' 또한 죽음, 특히나 비명횡사를 뜻하는 'Perish'이니 이그나티우스의 비극적 순교를 나타내는 것이나 마찬가지죠. 즉 조 힐은 이 이그의 이야기를 그야말로 '이그나티우스의 순교'를 염두에 두고 거기에 빗대어 써내려 간 것입니다. 악마의 여정이 사실은 가장 죄 없는 자의 순교 여정인 것이죠.(아마 그래서 이그의 힘이 유독 십자가 앞에서는 발휘되지 못하는 것일 겁니다. 이그가 사탄이라서 하나님의 물건 앞에서 무력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십자가 역시도 사실은 아무런 죄 없이 순교나 마찬가지인 죽음을 당했던 이의 물건이었기 때문에 말이죠. 즉 이그나 그 십자가 주인이나 사실은 동류이기 때문에 이그의 힘이 미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는 그 '오두막'에서의 일로 더욱 확실히 증명됩니다.) 이것이 이 소설이 마치 수수께끼처럼 은밀하게 감추어 놓은 가장 커다란 반전입니다. 하면, 그는 왜 이런 반전을 마련해 둔 것일까요?


 그 이유란 간단합니다. 홀연히 우리를 저 경계 바깥으로 데려가기 위함입니다. 악마가 되기 전의 이그는 지금의 우리들 모습과 같습니다. 세상의 진실을 모르는 우리들은 지금의 모든 어려움과 아픔이 모두 우리 자신에게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하고 그 때의 이그처럼 스스로를 세상의 오점으로 여기고 괴로워하지요. 하지만 그건 우리가 꾸며진 모습을 진짜 모습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경계 안에 있는 우리들은 그 진실된 모습을 알기가 어렵습니다. 이미 우리의 눈이 그것에 의해 규정되어 있기 때문이죠. 자아, 여기서 조 힐이 왜 하필이면 우리를 경계 바깥으로 데리고 가기 위해서 악마라는 소재를 택했는가가 드러납니다. 그건 악마가 주로 하는 일 때문이죠. 네, 바로 사람들의 혼을 빼앗는 것 말입니다. 악마가 이 혼을 빼앗는 일을 주로 하기 때문에 조 힐은 경계 너머로 나아가고자 하는 주제를 위해 특별히 그 소재로 악마를 택했던 것입니다. 쉽게 말해 '혼'이 가진 상징 때문이죠. 그런데 '혼'이란 무엇인가요? 영혼이란 어떤 존재인가요? 왜 악마는 그 영혼을 그토록 가지려고 하는 것일까요? 사실 우리는 거기에 대해 어떤 의문을 품어본 적은 없습니다. 그저 우리 안에 있는 진짜 존재라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하는 정도죠. 하지만 그건 종교적 시각에 불과합니다. 조 힐이 여기서 추구하는, 그리고 오래도록 계속되어온 악의 상징에 따르면 악마가 영혼을 빼앗으려 하는 건 그게 진짜 존재라서가 아니라 전혀 다른 이유 때문입니다.


 거기에 대해선 미셀 푸코가 말해주고 있습니다. '감시와 처벌'에서 푸코는 영혼을 이렇게 정의합니다. 하나의 체제 안에서 '신체를 규범화하고, 신체를 사회적 존재로 물질화 하는 역사적으로 특정된 사변적 관념'이라고 말이죠. 즉 악마가 영혼을 취한다는 것은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 이 푸코의 말처럼 그것이 경계 안에 있는 이들의 몸을 입맛대로 움직일 수 있게끔 강제적으로 주입된 특정된 규범적 관념이라서 그렇습니다. 쉽게 말해 우리가 진실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진실이라고 여기게끔 주입되었을 뿐인 관념말이죠. 악마가 취하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그것을 가져가 홀가분하게 비우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를 억누르고 있던 돌을 치워주는 것과 같은 것이죠. 그러므로 악마는 사실 우리의 영혼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이그에게 돋아난 뿔이 그랬듯이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하여 오히려 우리를 그 거짓의 관념으로 부터 자유롭게 해준다고 보아야 할 것 같네요. 아닌게 아니라 소설에서 후반으로 갈수록 이그가 주로 하는 것도 사실은 이것이죠. 사람들을 멍에로 부터 자유롭게 해 주는 것. 물론 여기서의 악마 개념은 종교적 의미가 모조리 탈색된 개념입니다. 아무튼 조 힐이 그리는 악마는 바로 그러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조 힐은 우리를 저 경계 바깥으로 데려가 세상의 진실을 보게 만들 메신져로 악마만큼 적당한 것도 없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조 힐의 '뿔'은 이런 소설입니다 재미로도 물론 탁월하지만 거기에 담겨진 전복성이 더 놀라운 소설입니다. 사실 그가 이것을 위해 악마를 전혀 다른 모습으로 창조한 것도 아닙니다. 그저 약간 살짝 비틀었을 뿐인데 이토록 커다란 반전을 맛보게 되니 더욱 놀랍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우리 두 눈에 세상이 아무리 굳건하게 보여도 이 정도의 시차 교정만으로도 전혀 다르게 보일만큼 사실은 허약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일까요? 정확히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을 통해 이 사회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든, 보이든 그것을 곧이 곧대로 믿지 말고 늘 경계 저 바깥으로 넘어가 보다 객관적으로 음미해 보아야겠다는 다짐은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이것도 보다 새로운 진실을 위해 경계 안에서 형성된 나를 죽이는 일이니 일종의 순교라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보다 자유로운 우리를 위해 그런 매일의 순교가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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